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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7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으로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역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뉘우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042) 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043) 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으로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는데 끝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左監司) 김성일(金誠一)진주(晋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晋)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양사준과 변응성은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본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晉州)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044) 이나 1여(旅)045) 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박성(朴惺)·곽율(郭𧺝)·조종도(趙宗道)·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무슨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25면
  •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국왕(國王)

  • [註 042]
    이성(李晟) :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
  • [註 043]
    장소(張所)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
  • [註 044]
    1성(成) : 사방 10리의 땅.
  • [註 045]
    1여(旅) : 5백 명의 단위.

○倡義使金千鎰等遣儒生郭玄梁山璹, 從海路入關西, 奏事行朝。 山璹又上疏獻策, 上數引見慰諭, 拜工曹佐郞。 令李好閔製敎書二通, 付山璹以送。 一諭湖南, 略云:

自聞李洸之師潰於龍仁, 無復有南望待救之念, 玆聞高敬命金千鎰等, 糾義旅數千, 與節度使崔遠, 進住水原云, 予之不德, 何以得人死力至此哉? 今遣山璹等還報, 惟爾多士, 諒予告意。 予雖仁不及民, 政多失措, 乃素心, 未常不以愛民恤物爲意。 第見近來邊徼多釁, 軍政廢弛, 申飭中外, 嚴加隄備, 實不料城益高而國勢日卑; 池益濬而民怨益深。 加以宮闈不密, 而網民細利, 刑獄失中, 而怨氣傷和, 王子占利, 小民失業, 民宜咎予, 予有何辭? 玆令有司, 悉加罷還。 凡此之類, 亦豈予所盡知者哉? 予之不知, 亦予之咎。 思之至此, 雖悔曷追? 惟爾士民, 庶幾許予改過, 圖理維新

又曰:

龍灣一隅, 天步艱難, 地維已盡, 予將何歸? 人情已窮, 理宜思復。 秋涼乍動, 邊地早寒。 瞻彼長江, 亦流于東。 思歸一念, 如水滔滔。

又曰:

天生李晟, 復城闕之有期, 日望張所, 報園陵之無缺。 亟副雲霓之望, 免予霜露之苦。

一諭嶺南士民如湖南, 末云:

頃聞, 右監司金睟退北龍仁, 左監司金誠一晋州募勇, 左兵使李珏被斬, 以朴晋爲忠勇而代之, 右兵使曺大坤衰老, 以梁士俊代之, 邊應星爲左道水使。 未知諸員各歸本道, 有宣力經營等事耶。 【梁與邊皆不赴任。】 本道則寧海一帶, 右道則晋州若干邑, 尙得保存, 此不猶愈於一成一旅乎? 本道人民信厚, 素多忠義。 爾多士苟相奮勵, 則未必不爲恢復之根柢也。 聞, 鄭仁弘金沔朴惺郭再趙宗道郭再祐等, 倡合義旅, 得衆已多, 本道忠義, 在今日猶未艾也。 況再祐布置異常, 殺賊尤多, 而不以功自達, 予尤奇之, 恨予聞名之晩也。 湖南亦有前府使高敬命金千鎰糾合義兵數千, 與本道節度使崔遠等, 進屯水原, 方謀恢復京畿, 令其徒梁山璹等, 水陸間關馳奏行在。 予見奏, 泫然一慰而悲也。 山璹等還, 憑付此書, 使之委曲傳到, 其諒予告意。 卽者淸秋戒節, 太白方高, 軍容所在, 殺氣以順。 忠義所向, 何敵不摧? 爾士衆宜相與控扼要害, 分勦寇賊, 亦宜沿途設伏, 左右掎角, 使賊不得信馬以行。 淸定一方, 召集老弱, 然後竝力京城, 來迎乘輿, 則爾士衆, 生享美名, 澤流子孫, 顧不偉歟? 今除鄭仁弘濟用監正, 金沔 陜川郡守, 朴惺工曹佐郞, 郭再祐 幽谷察訪, 以表奬之。

【敎書以路梗, 閱數月乃到, 士民聽宣讀, 無不感泣。】


  •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25면
  •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