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폐정의 혁신을 진달한 병조 판서 이이의 상소문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예전 역사를 읽다가 장구령(張九齡)과 성충(成忠)006) 의 이야기에 대해서 매양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어둡고 용렬한 것이야 본래 말할 것도 없지만 당나라 현종(玄宗)처럼 명철한 지혜로서도 선견지명에는 어두웠으니,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데 대해 후회한 것이나 현종이 곡강공(曲江公)007) 에게 제사를 지내준 것이 난망(亂亡)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어지러워져 망하게 되는 나라는 혹은 음란하고 포학한 탓으로 천명을 함부로 끊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오랜 기간 쇠퇴함으로 말미암아 시들어 진작되지 못하기도 하는데, 장(牆)·곡(穀)은 비록 다르나 그 양(羊)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008) 그러나 음란하고 잔학한 병폐는 일시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므로 현명한 임금이 그를 대신하게 된다면 옛것을 고찰하여 쉽게 부흥시킬 수가 있으나 오래도록 쇠퇴한 증세는 여러 대를 두고 빚어진 것이므로 아무리 명철한 임금이 그를 이어받아 그 노력을 배나 기울인다 하더라도 떨치고 일어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 나라는 인덕(仁德)을 오래 쌓아서 뿌리가 굳고 깊었으나, 1백여 년 이래로 준걸들이 그 재능을 펴지 못한 채 혼란한 정사만이 날로 백성에게 더해지고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이 전형(典刑)을 전복시킨 뒤로부터 이를 다스려 바로잡는 사람이 없어서 조정과 백성이 서로 잊어버린 지가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근심에 쌓인 백성들이 항상 도탄 속에 빠져 아무리 호소해도 위에는 알려지지 않으니, 외적의 침입이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이미 위태로운 형편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북쪽 오랑캐와 틈이 벌어져 병화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데 구원하자니 나라의 병력이 모자라고 군량을 대자니 창고에 쌓아둔 저축이 없으며, 늦추어주면 해이해져 단결되지 않고 다그치면 흩어져서 도둑이 됩니다. 이렇게 난망의 조짐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과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태롭습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어찌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 두고서 속수 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천하의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한 듯하나 성과가 있고, 말단만을 일삼는 것은 절실한 것같으면서도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치는 것이 근본이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말단도 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더욱 먼저 해야 할 것은 근본입니다.
옛날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싸울 적에 추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의 관원이 죽는 것을 흘겨보기만 하고 구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추나라 목공(穆公)이 맹자에게 대책을 묻자, 맹자는 군령을 엄숙하게 하는 것으로 말해 주지 않고 인정(仁政)을 행하라고 권했습니다.009) 그런데 인정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군대가 진을 치고 서로 대치하여 화살과 돌이 오가는 상황에서 인정을 행하려고 한들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그 누가 오활하고 막연한 것이라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교양의 본 바탕이 없는데 갑자기 백성을 버리는 형벌을 가한다면, 결과적으로 반드시 패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물러나서 정사를 닦아 후일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니, 근본을 따라야 한다는 맹자의 논의를 어찌 오활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세(事勢)가 실상 이와 같은데, 전하께서는 또한 근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정치를 잘하는 임금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부터 먼저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이 일단 바르게 되어 사류(士類)가 화합된 다음에 용모와 기운이 화평해져 천지의 화평이 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고 재변이 거듭 이른 것에 대해서는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전하께서 정심(正心)·성의(誠意)하는 학문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고 인재를 등용하고 버림에 합당하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신에게 돌이켜 살피셔서 가깝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마시고 반드시 성왕(聖王)을 따르는 것으로 뜻을 삼으소서. 이것은 성상께서 학문에 종사하고 힘써 실천하는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지금 감히 많은 말로 아뢰지는 않겠습니다.
오늘날의 조정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東)·서(西)로 분류된 뒤로 당파의 색목이 이미 형성되고 나서는 왕왕 당류가 같고 다름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게 됨을 면치 못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일을 꾸며내는 자가 서로 얽어가며 끝없이 모함하고 있습니다. 여론을 주도하는 벼슬아치들 대부분이 동인(東人)으로서 그들의 견해에 편벽됨이 없지 않은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폐단은 어질고 어리석음 재주가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오직 동·서의 당류를 따지는 것만을 힘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동인이 아닌 사람은 억제하고 서인(西人)을 배척하는 사람을 찬양하여 그것으로써 시론(時論)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 처음 진출하여 빨리 출신하기를 바라는 사류가 서인을 공격하면 출세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는 다투어 일어나 부회하며 인재를 중상하고 선비의 풍습을 무너뜨리고 있는데도 이를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동·서란 두 글자는 본래 민간의 속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웃었었는데, 어찌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렇게 엄청난 근심거리가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은 다만 간사함과 정직함을 분간하는 것뿐인데, 어찌 동과 서를 구분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과 같은 경우도 애초에 사류에 죄를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양쪽 사이를 조화시켜 나라 일을 함께 해 나가려고 했을 뿐인데, 그 의도를 알지 못하는 사류들은 오해하고서 서인을 옹호하고 동인을 억제한다고 지목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번 점이 찍히고 난 뒤로는 점점 의혹을 품고 저지하여 온갖 비방이 따라 일어나게 되었는데, 마침내는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까지도 혹 저를 업신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분수와 의리를 생각한다면 진실로 사퇴를 청하고 두문불출하며 허물을 반성해야 마땅할 것이나, 은총을 탐내고 연연해하면서 아직까지 결단을 내려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건대 진정 사류의 실수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 식견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지 꼭 사심을 품고 일을 그르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깨닫게 되면 그 중에 진실로 쓸 만한 인재도 있고, 또 그 가운데 한두 사람은 신의 본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애써 머뭇거리고 있으면서 반드시 그들과 함께 공경하고 서로 협력하는 지경에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 새나 짐승과는 함께 무리지어 살 수가 없는 것인데 신이 사류를 버리고 장차 누구와 일을 이루어 나가겠습니까. 신은 마음쓰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 정상을 생각하면 신세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신이 지금 할 말을 다하는 것이 진실로 시론에 더욱 거슬리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것을 이렇게 다 말씀드리는 것은 전하께서 겉으로 드러난 형상만을 대강 보시고 실상을 규명하지 못하실까 하는 점 때문입니다. 근일 의견을 말씀드린 자 중에는 혹 조정의 관료들이 편당한다고 공척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통촉하지 못하시고 마침내 신료들을 의심하여 다 붕당으로 여기신다면 아마도 사림의 무궁한 폐단이 될 듯싶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분명하게 분변하여 다 말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을 말씀드린 다음에야 사림이 편안해지고 공론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소인들은 본래 붕당이 있어 왔지만 군자들도 동류끼리 모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간사함과 올바름을 따지지 않고 당(黨)이라고 하여 미워하기만 한다면 마음과 덕을 같이하는 선비들까지 조정에 용납받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로부터 붕당의 폐단은 단지 벼슬아치들의 병폐에 불과했지만 붕당을 미워하여 제거하려고 했던 자는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동경(東京)의 당고(黨錮)의 변010) 과 백마역(白馬驛)의 청류(淸流)의 화011) 를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벼슬아치들 중에 어찌 한두 사람 편당하는 풍습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렇다고 해서 여러 신하들을 다 의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 위 아래가 서로 믿지 못해 벼슬아치가 화목하지 못하고 국시가 정해지지 않으므로써 뜬 의논만 마구 퍼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난을 진정시키고 치안을 이룩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성상께서 위에 계실 때에는 사림의 화가 없다손치더라도 뒷날 예측할 수 없는 변고의 씨앗이 실제로 오늘날 싹트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남곤(南袞)·심정(沈貞)012) 같은 자가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금 사류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진실로 옳지 않지만, 사류를 그르다고 하여 공격을 한다면 이는 더욱 옳지 못한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신과 대시(臺侍)들을 널리 불러 탑전(榻前)에서 사대(賜對)하여 성상의 뜻을 분명하게 유시하소서. 그리하여 동인·서인을 구분하는 습관을 고치게 하여 선인을 등용하고 악인을 벌하여 한결같이 공도(公道)를 따르게 하는 한편 불신과 의혹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진정시켜 조화되도록 하소서. 만약 고집을 부리며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억제하시고, 사심을 품고서 억지 변명을 하는 자가 있으면 멀리 배척하소서. 이렇게 해서 반드시 인심이 공감하는 공시(公是)와 공비(公非)가 한 시대의 공론이 되게 한다면, 사림에 더할 수 없는 다행이 되겠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서이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마음 속으로 결단을 내리고 묘당에 자문하신 뒤 신의 말이 옳으면 곧 명하여 시행하시고 옳지 못하면 즉시 물리치시어 국시가 귀일되고 시비가 모호해지는 잘못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그 다행스러움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를 미루어 아랫사람을 접하고 간언을 받아들여 허물을 고치소서. 그리하여 성상의 마음이 이미 바르게 되고 조정이 화목해지면 인재를 얻어서 폐단을 고치는 일에 대해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인재를 얻는 데 대해서는 진실로 노유(老儒)들이 늘상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의 일로써 헤아려 보면 다시 별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한 것이 어찌 우리를 속인 말이겠습니까. 하지만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올 수 없는 것이고 현 시대의 인물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어도 우나라가 망하였고013) 자사(子思)가 노(魯)나라에 있었어도 노나라가 침탈을 당했습니다.014) 현인이 있어도 쓰지 않는다면 현인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요즈음 의논하는 이들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것을 핑계하여 매양 변통의 논의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옛날 성현과 같은 인재를 얻어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그런 성현을 얻지 못할 경우엔 차라리 위태롭거나 망하거나 그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인재를 얻어야 한다는 말이 도리어 고질병이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잃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소하(蕭何)015) 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위징(魏徵)016) 과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조보(趙普)017) 같은 이가 어찌 이윤(伊尹)018) ·부열(傅說)019) ·여상(呂尙)020) ·제갈양(諸葛亮)021) 같은 인물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시대의 특출했던 자들을 얻은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이 세 임금이 그 사람을 버려두고 쓰지 않고서 반드시 이윤·부열·여상·제갈양 같은 이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면, 이윤·부열·여상·제갈양 같은 이를 마침내 얻을 수가 없어 한나라 4백 년의 기업과 정관(貞觀)의 치세(治世)022) 와 천하의 평정을 함께 시작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물은 한·당에 비하여도 훨씬 뒤떨어지는데 더구나 삼대(三代) 때와 같은 인재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한 시대의 특출한 자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전하께서 위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대왕은 동방의 성주이십니다.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고 법을 만들어 치세(治世)를 도모하며 후손에게 복을 물려 주어 큰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인물을 쓴 규모를 보건대 현인과 재능 있는 자라면 그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으며, 임용을 직접 전담하셨으므로 참소와 이간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門蔭) 출신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삼공(三公)에 제수되었고, 김종서(金宗瑞)는 탄핵을 드러나게 받았으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여 육진을 개척하였습니다. 초천(超遷)023) 이 빠른 사람은 으레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를 것으로 생각되지만 재능이 그 자리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고, 여러 해 동안 구임(久任)된 사람은 벼슬이 거기에 그칠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지만 하루아침에 승진 발탁시키는 데 있어서 계급에 구애받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현인을 임용하고 재능이 있는 이를 부리는 규모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세종 대왕만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조종(祖宗)께서도 대부분 성헌(成憲)024) 에 따라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인재들도 경상(卿相)에 이른 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에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후세에서도 아름다운 일로 일컬었으니, 문음 출신의 벼슬길을 막아 관직을 제한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음 출신도 벼슬길을 막을 수 없는데, 더구나 도를 지키며 뜻을 숭상하는 선비로서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일 경우 어떻게 과거에 합격한 선비보다 푸대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해에 전하께서 조종조 때에 사람 쓰던 법을 되살리도록 명하시어 과거 출신이 아닌 자도 헌관(憲官)에 임용될 수 있게 하는 한편, 선발할 때 반드시 당시 인망이 있는 이를 취하게 하여 풍채가 볼 만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청의(淸議)가 매우 흡족하게 여겼는데, 세속의 견해는 그것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뜻밖에도 도리어 세속을 따르라는 명을 내리시어 조종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이 이미 시행되다가 도리어 폐지되게 하셨으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조종의 훌륭한 법을 가볍게 고치시고 도리어 세속의 견해를 따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류(士類)가 실망하고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될 것이니, 이를 말함에 있어 어찌 탄식만 나올 뿐이겠습니까.
근일 기대정(奇大鼎)의 말이 성상의 마음을 격동시켜 곤혹스럽게 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대체로 정신(廷臣)들이 일찍이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조(太祖)의 사당[廟]에 합부(合祔)해야 한다는 말025) 로 전하에게 아뢴 지가 오래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코 성상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 난 다음에, 제각(祭閣)을 세우고 제관(祭官)을 두자는 말로 바꾼 것이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지 그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이미 그러한 이상 어찌 한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지금까지 해 오던 주장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기대정(奇大鼎)이 만약 자기의 의견이 대중의 의논을 돌이킬 수 없고 또 대중의 의견에 자기의 의사를 굽히고 싶지 않았다면 애당초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음으로써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감히 툭 튀어나와 독단을 내리고서 온 조정이 자기를 따르게끔 하려 하였으니, 그 또한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함께 조정을 물러난 다음에는 이미 독계(獨啓)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 다시 도모할 수 없게 된 이상 병으로 사퇴하는 길 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었으니, 이는 형편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억세고 고집스럽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그를 간교하다고 지목한다면, 이는 사실 그의 본정이 아닙니다.
옥당의 해명도 명백하지 못한 듯합니다만 전하께서 지나치게 의심하시는 것도 깊이 통촉하시지 못한 듯합니다. 어찌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성급하게 버려두고 쓰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 시대의 인재를 다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목이 메인다고 해서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없고 발꿈치 자르는 것을 보고 신발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고금의 공통된 경계인데, 전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셨습니까.
아, 세태를 관망하면서 진출하려고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며 쓰이기를 구하되 그 되고 안 되는 것을 시관(試官) 한 사람의 결단에 의지함으로써 녹봉을 구하는 자료로 삼는 자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세상에 나서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며 능력이 있으면서도 때를 기다리면서 작록(爵祿)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그 의리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천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약 이윤·부열·여상·제갈양 같은 이가 오늘날 다시 나오게 된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앞에 일컬은 자 중에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뒤에 일컬은 자 중에서 나오겠습니까? 죽은 말을 사들이니 천리마를 얻게 되었고 곽외(郭隗)를 스승으로 삼으니 국사(國士)가 모여들게 되었는데,026) 선(善)을 좋아하는 효과는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른 것입니다.
현재 나라의 형세가 결딴이 나서 기상이 참담해졌으니 세상에 보기 드문 훌륭한 인재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부지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그만 옛 관습만 지키는 구태의연한 신하들과 관례대로 강론할 뿐, 한 가지 폐단도 고치지 못하고 한 가지 기발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한 시대의 선비들을 경시하여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변방의 근심이 진정되고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뒷걸음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근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거의 견해를 속히 돌리시고 다시 옛법을 따르셔서 해와 달처럼 밝은 예지가 다시 회복된 것을 우러러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리를 비워놓고 어진 이를 구하며 정성과 예를 다하여 이르지 않은 이는 반드시 이르게 하고 이미 이른 이는 반드시 쓰임이 있도록 한다면, 국가에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오늘날 위 아래가 모두 경원(慶源)의 문제로 근심하면서 반드시 적임자를 얻으려고 여러 차례나 선택을 하였으니 그 계책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온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이 경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데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원대한 염려를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의 대관(大官)과 대시(臺侍)의 직책을 신중하게 여기지 않아 인원 수나 채우고 결원이나 메꾸고 있으므로 아침에 제수하고 저녁에 다시 임명하여 앉았던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이 바뀌며, 그저 노닥거리며 세월만 보내기 때문에 온갖 법도가 모두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어찌 경원이 온 나라보다 중하며 변장이 육경과 대시보다 더 중하겠습니까. 어찌 경원을 근심하는 것처럼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십니까.
순(舜)의 제왕 정치는 구관(九官)의 임명에 불과하였고 진(晋)나라 도공(悼公)의 패도 정치는 육경(六卿)의 선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구관이 자주 바뀌고 육경이 자주 갈린다면 아무리 순 같은 성제(聖帝)와 진나라 도공 같은 현군이라도 끝내 그들과 함께 공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신들과 대간(臺諫)을 구임시킬 대책을 강구하시는 한편, 사람에게 관직을 임명할 적에도 반드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물어서 사람의 자격과 직무가 서로 걸맞도록 힘쓰고 완전히 위임하여 성공을 책임지우며 의심도 말고 흠도 잡지 말아서 기어이 공을 이루도록 하소서. 그러면 더욱 큰 다행이겠습니다.
폐정(弊政)을 혁신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이 전부터 간청한 바는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는 4조항이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착수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경장(更張)한다는 헛 소문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가 없고 나라의 쓰임이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변방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우선 시급한 것은 군사인데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부세를 더 징수하게 되면 백성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國庫)가 반드시 바닥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禁軍)을 더 설치하는 등의 일 모두가 불가피한 것으로서 경비 이외에 조달할 곳이 매우 많은데, 어떤 특별한 계책을 내어 경비의 용도를 보충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현 병합 계획은 본래 성상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서 시행하기도 어렵지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연혁(沿革)이라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십니다만, 옛날부터 연혁해 온 것도 꼭 대단하게 변통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록에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소읍(小邑)의 쇠잔한 백성이 많은 역사(役事)에 시달리고 있는데, 만약 하루아침에 몇 고을을 병합하여 하나로 만들 경우 그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혁파하자 관리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일도 판관을 혁파할 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가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번 혜택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으십니까.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전일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서둘러야 할 것은 병영(兵營)을 큰 고을에 설치하여 병사(兵使)로 하여금 수령을 겸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군졸을 되살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계책입니다. 그러나 먼저 감사를 구임시킨 뒤에야 병사에게 가족을 데리고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간절한 소망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니, 어찌 그것이 신의 한 몸을 위한 계책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은 변방을 방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오늘은 여러 고을의 간사한 관리를 적발하고 이튿날은 두 도(道)의 승군(僧軍)을 조발하는가 하면, 호족(豪族)을 초록(抄錄)하게 하고 금군(禁軍)을 모집하여 증가시키고 무사(武士)를 널리 뽑기도 하는데 이런 일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지 근본적인 계책은 아닙니다.
아, 재해(災害)가 날로 겹쳐 일어나고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 저녁 사이도 보장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시행하고 조처하는 것을 보면,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화근의 싹을 사라지게 하고 민심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는 일은 전혀 없고 다만 중외(中外)가 시끄럽게 되어 유언 비어만 사방에서 들끓게 하고 있습니다. 신이 성의를 다하여 번거롭게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전하께서는 새로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지금까지 의아심을 가지고 미루어 오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의 힘이 더욱 쇠잔해지고, 나라의 계책이 더욱 고갈되고, 변방의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될 터이니 고난을 견딜 수 없는 백성들이 일어나 도둑이 되어 사방에 퍼지게 되면 아무리 왕좌(王佐)의 재능을 갖춘 인물이 나온다 하더라도 널리 구제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 비로소 신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뉘우쳐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형세를 비유하건대 오랫동안 병에 걸린 사람이 원기(元氣)가 다 없어져서 걸핏하면 병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냉(冷)을 다스리면 열(熱)이 일어나고 열을 다스리면 냉이 발생하니 외부의 사기(邪氣)도 막아야 하겠지만 우선 원기를 보양(補養)해야 하는 것이니, 원기가 회복되어 근본이 튼튼해진 다음이라야 사기를 다스리는 약이 효과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원기는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약제(藥劑)만 복용하게 되면 오래지 아니하여 목숨이 다할 것입니다. 지금 신이 반드시 변통해야 한다고 청하는 것은 원기를 보양하는 약제이고, 군사의 조련과 식량의 운반을 청하면서 변통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공격만을 일삼는 약제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소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근심하여 변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을 고치고 군적을 고치고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뿐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백성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양전(量田)027) 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약간의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의 개정은 반드시 양전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양전한다고 해서 전결의 증감이 어찌 크게 차이가 나기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안부터 먼저 고치고나서 뒤따라 양전한다 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결에 면적이 차고 모자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어찌 오늘날의 공안처럼 전결의 다과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
대체로 세속의 인정은 그대로 두기를 좋아하고 새로 고치기를 꺼리기 때문에 자신이 의사와 지혜가 없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하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태로운 상태를 보고서도 부지시킬 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을 소요로 여기면서 무모(無謀)함을 진정시키는 방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약을 먹지 못하도록 하여 병을 지닌 채 죽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은 진실로 구신(具臣)028) 들의 일상적인 태도이니 깊이 책망할 것도 못됩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전하께서 명철하신 식견을 가지시고도 분발하지 않고 앉아서 망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새로운 대책을 세우지 않는 점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다 써서 변치 않고 굳게 지키며 3년 동안 시행한 다음에도, 백성의 생활이 불안하고 나라의 용도가 부족하며 병력 양성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어떠한 형벌을 가하더라도 신은 진실로 마음 속으로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이 변변치 않다고 하여 그 말까지 폐기하지 마시고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이른바 ‘군사와 양식을 조도(調度)하여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이 말단에 속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를 미루어놓고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동원하여 군사로 삼고 둔전을 실시하여 곡식을 축적하는 것은 묘당의 계책이 이미 시행되고 있으니 그 일의 성사여부와 이해에 관해서는 미리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경원(慶源)의 하찮은 오랑캐들이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른 진영의 번호들까지 기회를 틈타 부추김을 받고 난을 일으킨다면 함경도의 병력만으로는 결코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구원병을 보내자니 훈련도 안 된 백성을 몰아넣기가 어려운 형편이고 식량을 실어보내자니 2천 리의 먼 길에 양식을 모으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러한 때에 일상적인 규정에만 얽매인다면 잠깐 사이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신의 계책은 전에 이미 발의되었다가 다시 중지되었는데, 지금 와서도 더욱 별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의 말을 쓰신다면 서얼(庶孽)과 공천(公賤)·사천(私賤) 중에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해서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에 들어가 방수하게 하되, 북도는 1년, 남도는 2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응모자가 많도록 하는 한편 병조에서 시재(試才)한 뒤 보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서얼은 벼슬길을 허통하고 천례(賤隷)는 면천(免賤)하여 양인(良人)이 되게 하며, 사천인 경우에는 반드시 본주인이 병조에 단자를 올린 다음에 시재(試才)를 허락하여 주인을 배반하는 종이 없게 하고, 그 댓가는 자원(自願)에 따라 골라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만약 무재가 없는 경우에는 남·북도에 곡식을 바치게 하되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그 많고 적은 수를 정하고, 벼슬길을 허통하고 양인이 되게 하는 것도 무사(武士)와 같게 하소서. 그러면 군사와 양식이 조금은 방어에 대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029) 때에, 군기(軍器)를 운반한 천인(賤人)은 모두 양인이 되게 하였고 종군한 서얼들은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세조 대왕께서 권도로써 이미 시행하신 규정입니다. 신은 진실로 이 계책이 반드시 사람들의 논의에 부합되지 않을 줄 알고 있습니다만 그 방법 외에는 다른 좋은 대책이 없으므로 다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익히 계획하시어 단행하소서.
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고 승패와 안위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담소하며 서서히 옛 규정이나 상고할 뿐인데, 게다가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면 변방의 성은 이미 함락 되고 말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형편없고 어리석은 신이 성명(聖明)을 만나 은총을 믿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망령된 말을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계책이 소루하여 열에 하나도 시행되지 않으니, 외로운 처지에서 심정만 쓸쓸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머리털이 하얗게 되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지경인데도 수고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030) 라고 하였으니, 의리상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간담을 헤치고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보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것을 환히 보면서 감히 제몸만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게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우연히 연전에 경이 올린 상소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올린 경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다. 전후에 걸쳐 정성스런 상소를 보건대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나라 일은 훌륭한 대신들에게 맡겨야 마땅하다. 남행(南行)을 대간(臺諫)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이미 충분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이야 잘못할 수 있겠는가. 공안에 관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감히 다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설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군적에 관한 일은 본조에서 이미 명을 받았으니, 경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주현을 병합하는 문제는 과연 나의 밝지 못하고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폐단을 끼치게 될까 하여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는데, 경이 지극히 청하여 마지 않으니 한 번 시험해 봐야 하겠다.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은 새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나, 그것도 경의 계책을 따라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공천·사천을 허통해 주는 일은, 처음 사변이 일어났을 적에 경의 헌책(獻策)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언관(言官)이 논박하고 있으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속에서 문·무과를 거치지 않고 입사(入仕)한 자를 남행(南行)이라고 한다. 이이(李珥) 등이 미출신인(未出身人)으로서 대간(臺諫)을 삼기로 청한 한수(韓修)·유몽학(柳夢鶴) 등이 이것이다. 성혼(成渾) 등은 일민(逸民)으로서 추천된 자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1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군사(軍事)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농업-양전(量田) / 신분(身分) / 행정(行政)
- [註 006]성충(成忠) :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의자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막으려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죽을 때에 왕에게 글을 올려 앞으로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말하고 대비책을 건의하고 죽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당(唐)나라 군사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자 그때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후회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 의자왕(義慈王) 18년·20년조.
- [註 007]
곡강공(曲江公) : 장구령(張九齡)의 별칭.- [註 008]
장(牆)·곡(穀)은 비록 다르나 그 양(羊)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 원인은 다르나 결과가 같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장(牆)과 곡(縠)이라는 두 사람의 하인이 양(羊)을 먹이다가 둘 다 양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장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렸고, 곡은 도박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장자(莊子)》.- [註 009]
맹자는 군령을 엄숙하게 하는 것으로 말해 주지 않고 인정(仁政)을 행하라고 권했습니다. : 이 말은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에서 인용한 것인데, 맹자는 그러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여 인심을 얻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니, 근본 대책은 인정(仁政)을 행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註 010]
동경(東京)의 당고(黨錮)의 변 : 동경(東京)은 동한(東漢)의 서울 낙양(洛陽)으로서 서한(西漢)의 서울인 장안(長安)에서 보면 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동한의 별칭으로 쓰인다. 동한 말엽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환제(桓帝) 때에 진번(陳蕃)·이응(李膺) 등이 이를 미워하여 공박했는데, 환관들은 도리어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였다. 이를 당고(黨錮)의 변이라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7 당고열전(黨錮列傅).- [註 011]
백마역(白馬驛)의 청류(淸流)의 화 : 당(唐)나라 애제(哀帝) 때에 권신(權臣) 주전충(朱全忠)이 배추(裵樞) 등 조사(朝士) 30여 명을 백마역에 집결시켜 하루 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 당초 주전충의 좌리(佐吏)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進士試)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조사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 조사들은 늘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넣어서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 하니, 전충이 그 말을 따랐다. 청류는 덕행이 고결한 선비를 뜻한 것인데, 황하는 흐리므로 탁류라 한 것이다.《당서(唐書)》 권240 배추전(裵樞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48 당기(唐紀) 소선제(昭宣帝).- [註 012]
남곤(南袞)·심정(沈貞) : 이 두 사람은 조선조 중종 때 홍경주와 함께 기묘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 사화로 조광조 등의 사류들이 사사되고 유배되었다.- [註 013]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어도 우나라가 망하였고 : 백리해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룬 인물이다. 처음 우(虞)나라의 대부(大夫)로 있을 적에, 진(晋)나라가 우나라의 길을 빌어 괵(虢)을 치려고 할 적에, 궁지기(宮之奇)는 길을 빌려줄 수 없다고 간(諫)하였으나 백리해는 간해 봐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간하지 않았다. 결국 우나라가 진나라에게 망하게 되자 진나라 목공이 초빙하여 패업(霸業)을 이루었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상.- [註 014]
자사(子思)가 노(魯)나라에 있었어도 노나라가 침탈을 당했습니다. : 전국 시대(戰國時代) 때 순우곤(淳于髡)이란 변사(辯士)가 맹자(孟子)에게 "노(魯)나라 목공(穆公) 때, 공의자(公儀子)가 정치를 하고 자유(子柳)·자사(子思)가 신하로 있었으나 노나라가 침탈당함이 더욱 심하였으니, 현자가 나라에 무슨 도움이 있단 말인가." 하니, 맹자가 ‘우나라는 백리해를 쓰지 않아 망하였고, 진 목공은 그를 써서 패업을 이루었다. 현자를 쓰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니, 어찌 침탈만 당할 뿐이겠는가." 하였다.《맹자(孟子)》 만장(萬章) 상.- [註 015]
소하(蕭何) :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고,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만든 명재상이다. 《한서(漢書)》 권39.- [註 016]
위징(魏徵) :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 재상으로서 직간(直柬)으로 유명하였으며 태평 정치를 이룬 정치가이다. 《당서(唐書)》 권97 위징전(魏徵傳).- [註 017]
조보(趙普) : 송 태조(宋太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고, 태종(太宗) 때에도 다시 정승이 된 명 재상이다. 《송사(宋史)》 권256.- [註 018]
이윤(伊尹) : 은나라 시조인 탕왕을 도와 포악한 걸왕을 물리치고 왕도 정치를 이룩한 현재상(賢宰相)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상.- [註 019]
부열(傅說) : 은나라 고종(高宗)을 도와 치세(治世)를 부흥시켜 만세의 교훈을 남긴 현재상(賢宰相)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註 020]
여상(呂尙) : 주 무왕(周武王)을 도와 은(殷)의 폭군의 주(紂)를 멸망시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여 인정(仁政)을 베풀게 한 현재상이다. 강태공(姜太公)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제세가(齊世家).- [註 021]
제갈양(諸葛亮) : 삼국(三國) 시대에, 실추된 한(漢)나라의 운명을 회복시키려는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워 위(魏)·오(吳)와 정립(鼎立)할 수 있게 한 현상이다. 《삼국지(三國志)》 권35.- [註 022]
정관(貞觀)의 치세(治世) :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서 그의 치세를 말한다.- [註 023]
초천(超遷) : 승진의 등급 순서를 뛰어 넘음.- [註 024]
성헌(成憲) : 선왕이 정해 놓은 법.- [註 025]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조(太祖)의 사당[廟]에 합부(合祔)해야 한다는 말 : 신덕 왕후는 조선조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강씨(康氏)로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에 태조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지 못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와서, 신덕 왕후는 태조의 정비(正妃)이니 태묘(太廟)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몇 년 동안 제기되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봉식(封植)만 하게 되었다. 그뒤 선조 16년에 장령 기대정이, 양사가 부묘(祔廟)를 청해야 하는데도 각(閣)만 세우고 제사 지내기만을 청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이를 지지하는 홍문관(弘文館)과 양사 사이에 알력이 생겨 모두 사직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 권17 16년 3월 정미(丁未).- [註 026]
죽은 말을 사들이니 천리마를 얻게 되었고 곽외(郭隗)를 스승으로 삼으니 국사(國士)가 모여들게 되었는데, : 중국 전국 시대에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난리를 겪고나서 정치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곽외(郭隗)에게 인재 추천을 부탁하니, 그가 말하기를 "옛날 어떤 임금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사자(使者)에게 천금(千金)을 주었는데, 죽은 천리마의 뼈를 5백 금을 주고 사오니 임금이 노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말하기를 ‘죽은 말도 사오는데 더구나 산 말이겠는가. 천리마가 곧 오게 될 것이다.’했는데, 과연 1년이 못되어 천리마가 세 마리나 이르렀습니다. 지금 왕께서도 어진 인재를 오게 하려면 이 곽외로부터 먼저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저보다 나은 이가 어찌 천 리 길을 멀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섬겼더니, 과연 어진 인재가 모여들어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다는 고사. 《사기(史記)》 권34 연세가(燕世家).- [註 027]
양전(量田) : 농지 측량.- [註 028]
구신(具臣) : 제대로 하는 것도 없이 관원의 수만 채운 신하.- [註 029]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 세조(世祖) 13년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낸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가 조정의 시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나중에 남이(南怡) 등과 대치하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註 030]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 : 이 말은 공자(孔子)가 옛날 주임(周任)의 말을 인용하여 염구(冉求)의 실책을 꾸짖은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兵曹判書李珥上疏, 極陳時事, 其疏曰:
伏以, 興亡有漸; 治亂有幾。 先事而言, 則多不見信; 事至而言, 則欲捄無及。 臣讀前史, 每於張九齡、成忠之說, 未嘗不掩卷深吁, 不能爲懷也。 嗚呼! 義慈之昏庸, 固不足道, 玄宗之明智, 亦昧先見, 不用之悔; 曲江之祭, 何補於亂亡也哉? 自古亂亡之國, 或以淫虐, 暴絶天命; 或以積衰, 委靡不振。 臧、糓雖殊, 其亡羊則一也。 然淫虐之病, 猝發於一時, 若賢君代之則可以按古, 而易於復興; 積衰之證, 醞釀於累葉, 雖哲王受之, 倍用其功, 而難於振起。 我國家積德累仁, 根本固深, 而百有年來, 俊乂不售其才, 疵政日加於民。 自燕山顚覆典刑之後, 無人釐正, 朝廷與百姓相忘者, 厥惟久矣。 嗷嗷赤子, 常在水火之中, 籲呼無聞, 雖無外寇, 其勢固已岌岌矣。 況今北胡啓釁, 兵連禍結, 欲援則國少控弦; 欲餉則倉無宿儲; 緩之則慢弛不集; 急之則潰散爲盜。 亂亡之象, 昭在目前, 此非先事之言也, 無乃近於欲捄無及者乎? 嗚呼, 殆哉! 嗚呼, 殆哉! 雖然, 豈可付之無可奈何, 而束手待亡乎? 竊惟, 天下之事, 有本有末。 先治其本者, 似迂而有成, 只事其末者, 似切而反害。 以今日之事言之, 和朝廷而革弊政者, 其本也; 調兵食而固防備者, 其末也。 末固可擧而本當尤先。 昔者鄒、魯之鬨, 鄒民疾視長上之死而不捄。 穆公問於孟子, 孟子不告以嚴肅軍令, 而乃勸行仁。 夫仁政, 非一朝所可猝辦也。 兩陣相當, 矢石方交, 雖欲行仁, 勢無及已。 以常情言之, 孰不笑其迂且遠哉? 然旣無敎養之素, 而遽加棄民之刑, 則必敗之道也。 寧退而修政, 以爲後圖, 孟子循本之論, 豈云迂哉? 今之事勢, 實類於此, 殿下其亦反本而思之乎! 所謂和朝廷、革弊政者, 何謂也? 自古爲治之君, 必先正心, 以正朝廷。 朝廷旣正, 士類協和然後, 形和氣和, 而天地之和應之矣。 今者朝廷之不和、災沴之荐臻, 誰任其咎? 無乃殿下正心、誠意之學, 有所未至, 而用捨、擧錯之令, 未得其當歟? 伏願, 反躬省念, 無拘近小, 必以追踵聖王爲志焉。 此在聖明典學、力行之如何, 今不敢喋喋累陳焉。 若今朝廷則殿下以爲何如耶? 自東西分類之後, 形色旣立, 往往未免以同異爲好惡, 而造言生事者, 交構不已。 縉紳之主論者, 多是東人, 所見不能無偏, 而其流之弊, 或至於不問賢愚、才否, 而唯以分辨東西爲務。 非東者抑之; 斥西者揚之, 以此定爲時論。 於是, 士類之初進輕銳者, 知發身之路, 在於攻西, 故爭起附會, 傷人才、壞士習, 而莫之禁遏。 嗚呼! 東西二字, 本出於閭巷之俚語, 臣嘗笑其無稽, 豈意式至今日, 爲患滋甚乎? 觀人之道, 只分邪、正而已, 何東西之足辨乎? 如臣初非得罪於士類者也。 只欲調劑兩間, 共爲國事, 而士類之不知者, 誤指爲扶西抑東。 一被指點, 漸成疑阻, 百謗隨起, 終至於館學之儒, 亦或輕侮。 揆臣分義, 固當乞退, 杜門省愆, 而貪戀恩寵, 迄未決去。 且念, 士類固過, 而多出於識見之差, 非必挾私誤事也。 一朝覺悟, 則其間儘有可用之才, 而間有一二人, 知臣本心。 故黽勉遲回, 必欲偕之同寅協恭之域。 嗟呼! 鳥獸不可與同群, 臣舍士類, 將誰與集事乎? 臣之用意甚艱, 而情理可悲矣。 臣今竭言, 固知益忤於時論, 而展盡底蘊如此者, 殿下略見形象, 未究實狀。 而近日獻言者, 或有斥朝紳以偏黨者。 若殿下未能洞燭, 遂疑臣隣盡爲朋黨則恐爲士林無窮之累。 必須明辨而極言之, 且陳捄弊之策然後, 士林得安, 而公論得行矣。 自古小人固有朋黨, 而君子亦引同類。 若不問邪正, 而惟黨是惡, 則無乃同心、同德之士, 亦不得見容於朝耶? 是故, 自古朋黨之弊, 只爲縉紳之疵, 而惡朋黨, 而欲去之者, 未有不至於亡人之國者也。 東京黨錮之變; 白馬淸流之禍, 可不深戒乎? 今之縉紳, 豈無一二偏黨之習? 不可因此, 而擧疑群臣也。 嗚呼! 上下未孚、縉紳不睦、國是靡定、浮議橫流。 如此而欲望戡亂制治者, 未之前聞。 聖明在上, 雖無士林之禍, 安知後日不測之變, 實萌於今日乎? 南袞、沈貞, 寧有種乎? 今者一任士流之所爲, 固不可也; 若以士流爲非, 而攻之則尤不可也。 伏望殿下, 廣召大臣、臺侍, 賜對榻前, 明論聖旨, 俾改分辨東西之習, 陟罰臧否, 一循公道, 消融蕩滌, 鎭定調和。 而如有執迷不悟者, 則裁抑之; 懷私强辨者, 斥遠之。 必使人心所同然之公是、公非, 得爲一時之公論, 士林幸甚。 臣發此言, 豈敢自以爲是哉? 惟殿下裁自宸衷, 詢及廟堂, 臣言若是則卽命施行; 如以爲非則卽加罷斥, 使國是歸一, 而無是非糢糊之失, 則其幸尤大矣。 如是而推誠接下, 從諫改過。 聖心旣正、朝廷旣和, 則可議得人而革弊矣。
夫得人之說, 固是老儒常談, 而揆以實事, 更無他策。 孔子所謂, 爲政在人者, 豈欺我哉? 雖然, 才不借於異代, 在於任用之如何耳。 百里奚居虞而虞亡; 子思居魯而魯削。 有賢而不用, 則與無賢何異哉? 今之議者, 托於得人之難, 每遏變通之論。 若必得人如古昔聖賢然後, 乃可保邦, 而不得聖賢, 寧任危亡云爾, 則得人之說, 反爲痼病, 天下之不喪其邦者, 幾希矣。 漢 高之蕭何、唐宗之魏徵、宋祖之趙普, 此豈伊、傅、呂、葛之徒乎? 不過取其一時之尤者耳。 如使三帝, 置三人而不用, 必待伊、傅、呂、葛然後, 始欲爲國則伊、傅、呂、葛, 卒不可得, 而四百之業、貞觀之治、天下之定, 無與共創者矣。 今之人物, 視漢、唐, 猶且眇然, 況求三代之士乎? 如欲取一時之尤者, 則代豈乏人乎? 在殿下委任與否耳。 洪惟我世宗大王, 是東方聖主也。 用人由己, 立法圖治, 垂裕後昆, 永建鴻基, 而其用人之規, 則惟賢惟才, 不問其類, 任用旣專, 讒間罔入。 南智出自門蔭, 而以黑頭拜三公; 金宗瑞顯被物論, 而以獨見開六鎭。 超薦不日者, 意謂當至卿相, 而位稱其才, 則終身不改。 久任累年者, 意謂官止於此, 而一朝陞擢, 則不限階級, 此眞古昔聖帝明王, 任賢使能之一揆也。 豈特世廟爲然哉? 祖宗率由成憲, 雖設科擧, 而人才之不由科擧者, 多致卿相。 當時不以爲怪, 後世稱爲美事, 未聞錮門蔭, 以限職者也。 門蔭尙不可錮, 況守道尙志之士, 不屑科擧者, 寧可後於決科之士乎? 頃年, 殿下命復祖宗用人之法, 使未出身者, 得爲憲官, 其選必取時望。 故風采多有可觀者, 淸議甚愜, 而俗見疑之。 殿下不意還下循俗之命, 使祖宗良法、美意, 旣行而還廢, 未知殿下何爲而輕變祖宗之法, 反循流俗之見耶。 士類失望、人才不進, 自此伊始, 言之豈但太息而已哉? 近日奇大鼎之說, 有以激惱聖衷而然耶? 夫廷臣, 曾以神德當祔之說, 仰叫丹陛者, 不爲不久。 自度決不能回天然後, 遷就於建閣、設官之說, 出於事勢之不得已耳, 非其本心也。 廷議旣然, 則安得以一人之言, 輒變前說乎? 大鼎若不能以己見回衆論, 又不肯以衆見, 屈己意則當初宜引疾不出, 使無紛擾之弊, 而乃敢挺身獨斷, 欲使擧朝從己, 其亦不自量己。 及其竝出之後, 旣不許獨啓, 又不能改圖, 則謝病之外, 更無他計, 此則事勢之當然者也。 謂之木强執滯則可也, 若指爲詭譎則實非其情。 玉堂之分疏, 似不明瑩, 而殿下之過疑, 亦未深燭也。 豈可因此一事, 遽置而不用; 亦豈可因此一人, 盡廢一時之人才乎? 因噎廢食; 見刖廢屨, 古今之通戒, 殿下其未之思乎? 嗚呼! 希世規進, 衒玉求售, 決得失於一夫之目, 以爲干祿之資者, 殿下之所貴也; 恬靜自守, 韞櫝待價, 不以祿位爲榮, 而必欲不失其義者, 殿下之所賤也。 如使伊尹、傅說、呂尙、諸葛亮之徒, 復作於今日, 則未知出於前所稱者乎? 出於後所稱者乎? 死馬見買, 而得千里之駒; 郭隗爲師, 而致國士之趨, 好善之效, 捷於影響。 方今國勢板蕩, 氣象愁慘, 雖得曠世之賢才, 亦恐不能扶持。 而殿下乃與恬常守故之臣, 循例講論, 不革一弊、不出一奇, 而輕視一時之士, 使之望望而去。 如是而欲望坐靖邊塵、撫安民生, 無乃近於却步而圖前乎? 伏望殿下, 亟回前見, 復遵舊憲, 使日月之明, 仰見旋復。 而側席求賢, 致誠盡禮, 未至者期於必致; 已至者期於必用, 國家幸甚。 今日上下, 皆以慶源爲憂, 必欲得人, 再三掄擇, 其計至矣。 若一國之危, 無異慶源, 則未聞深思遠慮。 而朝廷大官及臺侍之職, 則不見難愼, 塞員塡闕, 朝除暮拜, 席不暇暖, 玩愒度日, 百度皆弛。 豈慶源重於一國, 而邊將重於六卿、臺侍乎? 何不以憂慶源者, 憂國家乎? 虞舜之帝也, 不過命九官而已; 晋 悼之覇也, 不過選六卿而已。 若使九官數易; 六卿頻遷則雖以虞舜之聖、晋 悼之賢, 終罔與成厥功矣。 伏望殿下, 與大臣講求久任臺諫之策, 而至於官人之際, 亦必疇咨熙載, 務使人器相稱, 委任責成, 勿貳勿間, 期於底績, 此尤幸之大者矣。
若革弊政則愚臣從前所懇, 在於改貢案、改軍籍、幷省州縣、久任監司四條耳。 改軍籍, 雖蒙允許, 而臣不敢始事者, 臣之初意, 軍卒之設, 本爲防禦。 故欲減軍卒進貢之役, 移于田結, 使得閑居養力, 專意訓鍊, 以備緩急。 而旣命不改貢案, 則雖改軍籍, 養兵之策, 必不見效。 古語有之, 利不什則不改舊。 若只有更張之虛名, 而不獲變通之實利, 則寧仍舊而已。 嗚呼! 不改貢案則民力終不可紓; 國用終不可裕。 目今邊患漸棘, 寧息無期, 所急者兵; 所乏者食。 加賦則民困尤甚, 不加則國儲必竭, 況別造軍器、加設禁軍等事, 皆出於不得已, 而經費之外, 調度甚廣, 未知出何異策, 而可補經用乎。 至於幷省州縣則本出於睿思, 而施行不難, 利害較然。 殿下每以沿革爲重事, 古之沿革, 非必大段變通也。 或分或合, 代不絶書, 此豈重難之擧乎? 小邑殘民, 困於繁役, 若一朝幷數邑爲一, 則斯民之懽忻, 如解倒懸矣。 今以一事, 可見其驗。 黃州判官之革也, 吏民蹈舞相賀, 二邑爲一, 亦與革判官一也, 不難知矣。 斯民憔悴, 汔可小康, 殿下何不一施惠澤乎? 若久任監司則臣於前日, 已盡仰達, 而尤所汲汲者, 兵營之設於巨邑, 使兵使兼宰者, 最爲今日蘇復軍卒之良策。 而先須久任監司然後, 始令兵使率眷。 故臣之切望在此, 豈是愚臣一身之計哉? 當今之策, 歸重於備邊。 故今日糾摘列邑之奸吏; 明日調發二道之僧軍, 命抄豪右矣、募加禁軍矣、廣取武士矣, 此皆枝葉之謀, 非根本之計也。 嗚呼! 災害竝至, 式日斯興, 人情驚懼, 罔保朝夕。 而朝廷之所施措, 了無一事可以仰答天譴; 消弭禍萌, 慰悅民心, 鞏固邦本者, 徒使中外囂然, 訛言四騰。 臣雖竭誠仰瀆, 非一非再, 而殿下難於更化, 至今遲疑。 馴致民力益盡、國計益罄、邊釁益深, 而不堪塗炭之民, 起爲盜賊, 遍於四境, 則雖有王佐之才, 亦無弘濟之術矣。 至此而始悔不用臣言, 何嗟及矣? 今之時勢, 譬如久病之人, 元氣澌敗, 動輒生病。 治冷則熱作; 治熱則冷發, 雖曰外邪可防, 先須補養元氣。 元氣旣復, 根本旣固然後, 治邪之藥, 可以有效。 若不顧元氣, 只服攻擊之劑, 則不久而命盡矣。 今臣之必請變通者, 是補元氣之劑也。 其請調兵運糧, 而不顧變通者, 是只事攻擊之劑也。 議者或以騷擾爲憂, 而不欲變通, 此, 大不然。 改貢案、改軍籍、省州縣等事, 皆自朝廷商確勘定而已, 民無升米、尺布之費, 何與於民, 而有騷擾之患哉? 若量田則不能無小撓於民, 故必待豐年, 乃可擧行。 貢案之改, 必後於量田云者, 此亦不然。 貢案, 固當以田結多寡均定矣。 量田之後, 田結增減, 豈至於大相懸絶乎? 先改貢案, 隨後量田, 亦何害哉? 田結雖有盈縮之小差, 豈如今之貢案, 不問田結多寡, 而率意誤定者乎? 大抵俗情樂因循, 而憚改作, 自無意智, 度人皆然。 故雖見危亡之象, 罔念扶持之術, 反以有爲爲騷擾, 無謀爲鎭靜, 有如禁人服藥, 藏痾待死, 此固具臣之常態, 不足深責。 只恨殿下之明聖, 難於奮庸, 坐視必亡, 而莫之改圖耳。 若殿下悉用臣策, 堅持不變, 旣行三年, 而民生不安、國用不足、養兵不如意, 則雖加臣以斧鉞之誅, 臣實甘心矣。 伏願殿下, 勿以人廢言, 更加熟慮焉。 所謂調兵食而固防備者, 雖是事爲之末, 而亦不可弛緩不擧也。 發民爲兵, 屯田積穀, 廟謨已施, 其成敗利鈍, 不可預料。 倘使慶源小醜, 終不悔禍, 而他鎭藩胡, 乘時扇亂, 則咸鏡一道之力, 決不能支撑矣。 今欲發送援兵, 則不敎之民, 勢難驅迫; 輸運饋餉, 則二千之程, 勢難聚糧。 於此拘守常規, 則僨事在於俄頃矣。 臣之愚計, 前者旣發而復止, 到今尤無它策。 若用臣言, 募庶孽及公私賤有武才者, 使自備餱糧, 入防于南北道, 北道則以一期爲限; 南道則以二十朔爲限, 使應募者衆, 而兵曹試才而遣之。 庶孽則許通仕路; 賤隷則得免爲良; 私賤則必本主呈單子于兵曹然後, 乃許試才, 使無叛主之奴, 其代則從自願擇給。 如無武才則使之納粟于南北道, 以遠近定其多寡之數。 而許通、從良, 亦如武士焉則兵食稍可以備禦矣。 昔者李施愛之亂, 賤人輸運軍器者, 皆得從良; 庶孽從軍者, 得赴科擧, 此是世祖大王權時已行之規也。 臣固知此策必不合於時議, 而此外更無良籌, 故不得不更瀆也。 伏望殿下, 深思熟計, 斷而行之也。 噫! 匪茹之亂, 作於無備; 勝敗安危, 決於呼吸, 而議者猶欲從容談笑, 徐考前規, 加之以衆論紛興, 折衷無期。 若待廷議之定, 則邊城已破矣。 謀夫孔多, 是用不集者, 此之謂也。 嗚呼! 無狀愚臣, 遭遇聖明, 仰恃恩眷, 無少隱諱, 狂言妄語, 前後累陳, 踈謀謬策, 十不一施, 孤蹤隻影, 踽踽栖栖。 主憂臣辱, 晝嗟夜唏, 髮白心爛, 徒勞無益。 "陳力就列, 不能者止。" 義當奉身, 退守愚分, 而披肝瀝血, 至今悲號, 而不知自止者, 誠以受國厚恩, 糜粉難酬。 明觀積薪之燃, 敢懷顧身之念? 臣不更言, 臣有厥咎。 伏望聖明, 憐察採納焉。
答曰: "予偶閱卿年前上疏, 而今卿疏適來。 前後惓惓, 深嘉卿不忘庸君之孤忠也。 國事, 賢大臣自當任之。 南行爲臺諫, 旣往之悔, 猶不可追。 一之已甚, 寧忍再誤? 貢案事, 議于朝廷, 其論不一, 故不敢更改。 設使改定, 當此多事之時, 似難幷擧。 軍籍事, 本曹已承命, 惟在卿施設之如何耳。 省州縣事, 果出於寡昧輕淺之意, 而恐貽他弊, 不敢自是變更, 卿勸請不已, 當試之。 久任監司, 難於創設, 遲疑到今, 此亦當從卿策, 先以兩南試之。 庶賤許通事, 事變之初, 因卿獻策, 卽命施行, 而言者論之, 當更問于備邊司, 商議擧行。 【俗謂非文武入仕者, 爲南行。 李珥等請以未出身人爲臺諫, 韓脩、柳夢鶴等是也。 若成渾等以逸民被徵者, 又不在此限】
-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5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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