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12권, 선조 11년 8월 1일 경진 3/6 기사 /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영의정 권철의 졸기
국역
영의정 권철(權轍)이 졸하였다. 권철은 작은 벼슬자리에 있을 때부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직무를 수행해 왔으므로 이미 재상의 물망이 있었다. 중년에 진복창(陳復昌)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진로가 막혔었는데 복창이 패망하자 다시 등용되어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승으로 들어오자 이준경(李浚慶)·홍섬(洪暹)·박순(朴淳)·노수신(盧守愼) 등과 마음을 같이하여 보좌하였다. 어떤 때는 체직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복직되기도 한 것이 무릇 13년이었다. 당시에 중앙과 지방이 무사하였고 조정이 다스려졌다고 일컬어졌었다. 비록 건의하여 밝힌 것은 없었지만 신중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의 흠을 논하지 않았고 복 있는 정승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율(慄)도 명신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78면
원문
선조수정실록12권, 선조 11년 8월 1일 경진 3/6 기사 /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영의정 권철의 졸기
국역
영의정 권철(權轍)이 졸하였다. 권철은 작은 벼슬자리에 있을 때부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직무를 수행해 왔으므로 이미 재상의 물망이 있었다. 중년에 진복창(陳復昌)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해 동안 진로가 막혔었는데 복창이 패망하자 다시 등용되어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승으로 들어오자 이준경(李浚慶)·홍섬(洪暹)·박순(朴淳)·노수신(盧守愼) 등과 마음을 같이하여 보좌하였다. 어떤 때는 체직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복직되기도 한 것이 무릇 13년이었다. 당시에 중앙과 지방이 무사하였고 조정이 다스려졌다고 일컬어졌었다. 비록 건의하여 밝힌 것은 없었지만 신중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의 흠을 논하지 않았고 복 있는 정승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아들 율(慄)도 명신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