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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 8권, 선조 7년 1월 1일 정축 3번째기사 1574년 명 만력(萬曆) 2년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총명 영의하시고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매,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는 일이 없고 밖으로는 말달리고 사냥을 좋아하는 일이 없으시니, 옛날 군주들이 자신의 마음과 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노성(老成)한 신하를 믿어 의지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쓰며, 뛰어나고 어진이를 특별히 불러 쓰시어 벼슬길이 차츰 밝아지며,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공론이 잘 시행되므로 조야가 부푼 가슴을 안고 지치(至治)를 고대하고 있으니, 기강이 엄숙해지고 민생이 생업을 즐겨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강으로 말하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를 등지는 것이 예전 그대로이고 호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그대로이고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그대로이며, 그 민생으로 말하면 집에 항산(恒産)이 없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찬가지이고, 궤도를 벗어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삼가 그 까닭을 깊이 찾아내어 한번 전하께 진달하려고 하면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엊그제 삼가 전하께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대신에게 하유하신 전교를 보니, 전하께서도 크게 의아해 하시고 깊이 탄식하시어 이 재변을 구제할 계책을 들어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지사(志士)가 할 말을 다할 기회인데, 애석하게도 대신은 지나치게 황공하고 불안해 한 나머지 할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재이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심원하여 참으로 측량하기 어려우나 역시 임금을 인애(仁愛)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옛날 명철하고 의로운 군주가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데도 정사가 혹시 닦여지지 않으면 하늘은 반드시 견책을 내 보여 경동(警動)시켰으며, 하늘과 관계를 끊은 자포 자기한 군주에 있어서는 도리어 재이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재이가 없는 재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재이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의 명철하고 성스러우신 자질로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지위에 계시고 또 그러한 때를 만났는데도 기강이 이와 같고 민생이 또 이와 같으니, 하늘이 부여한 것에 대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설사 경성(景星)001) 이 날로 나타나고 경운(慶雲)이 날로 일어나더라도 전하께서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삼가고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재변이 거듭 나타나 무사히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이는 곧 하늘이 전하를 극도로 인애(仁愛)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시의를 모르고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치적은 끝내 요원할 것이니, 민생을 어떻게 보전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어떻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제 약간 알고 있는 것을 다 토로하여 먼저 고질화된 폐단을 아뢰고 다음으로 그것을 구제할 계책을 거론하겠습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심기(心氣)를 가라앉히셔서 잡다한 글을 싫어하시거나 뜻에 거슬린다고 노여워하지 마시고 살펴주소서.

대체로 시의(時宜)라고 하는 것은 수시로 변통하여 법을 마련해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자(程子)《주역》을 논하기를, ‘때를 알고 형세를 아는 것이야말로 《주역》을 배우는 큰 법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시로 변혁하는 것이 곧 상도(常道)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법은 시대 상황에 따라 만드는 것으로서 대가 변하면 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순(舜)요(堯)의 뒤를 이었으니 의당 다른 것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12주를 고쳐 9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인이 변혁하기를 좋아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시대를 따라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가 서로 뒤를 이었으나 그 문장과 기상은 역시 조금씩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이후 그 사이에 일어난 작은 변화를 낱낱이 예시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 중에 큰 것만 들어 말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라 사람은 충(忠)을 숭상하였으나 나중에 충폐(忠弊)가 생겼기 때문에 질(質)로써 구제하였고, 질폐가 생겼기 때문에 문(文)으로써 구제하였으며, 문폐를 구제하지 못하게 되자 그 뒤에 천하의 법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져 강한 진(秦)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진나라는 포악한 정사로 시서(詩書)를 불태우고서 망하였고,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는 그 폐단을 거울삼아 너그러운 덕을 숭상하고 경술(經術)을 존숭하였으나, 급기야 폐단이 생겨서는 허문(虛文)을 숭상하고 실절(實節)이 없어져 권세가 외척에게 돌아가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세조(世祖)002) 가 일어나 절의를 포숭(褒崇)하니 이에 선비들이 명절(名節)을 힘썼으나, 그것이 폐단이 생겼을 때는 예(禮)로써 절제할 줄을 몰라 죽음을 매우 하찮게 보는 등 고절(苦節)이 되어 중도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그것을 싫어하였으나 당시에 어느 현주(賢主)가 나와서 구제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고절이 위(魏)·진(晋)의 광탕(曠蕩)함으로 변하여 허무를 숭상하고 예법이 없어졌습니다. 예법이 없어진 뒤에는 이적(夷狄)과 다름이 없이 되었으므로 오호(五胡)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혀 중원(中原)이 쑥밭이 되었습니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려지는 법이기 때문에 정관(貞觀)003) 의 치적이 나오기는 했으나, 폐단을 구제함에 있어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이적의 풍조가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강(三綱)이 바르지 못하여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못하니, 번진(藩鎭)은 빈공(賓貢)하지 않고 권신(權臣)은 강포(强暴)하는 등 나라는 여전히 쇠미하여 오대(五代)의 혼란기가 있게 되었습니다. 송(宋)나라가 일어나서는 번진의 걱정을 경계하여 병권(兵權)을 풀어버리고 위세를 거두어 잡았으나, 진종(眞宗) 이후로 태평 시대에 젖은 나머지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무략(武略)은 부진하였으며, 인종(仁宗) 때 재정은 비록 극도로 풍족하였으나 쇠퇴한 기상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당시 대현(大賢)들은 모두가 변통할 계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곧바로 신종(神宗)에 이르러 변통할 기회를 만나 큰 사업을 할 뜻을 갖게 되었으나, 신임하였던 자는 왕안석(王安石)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의(仁義)를 뒤로 하고 공리(功利)를 앞세우며 천인(天人)의 뜻을 어기고 난망(亂亡)을 재촉하였으므로, 도리어 변통하지 않은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하였습니다. 결국 큰 재앙을 초래하여 중화가 이적으로 변하였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상하 수천 년 동안 역대 치란의 자취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시대에 따라 잘 구제한 경우는 삼대(三代)에만 보일 뿐, 삼대 이후로는 구제한 경우도 본래 적은데다 그 역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시대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것은 법제인 반면, 고금을 막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은 왕도(王道)요, 인정(仁政)이요, 삼강이요, 오상(五常)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는 도술(道術)이 밝지 못하여 변경할 수 없는 것을 고치는 때도 있고 변경할 수 있는 것을 굳게 지키는 때도 있었으니, 이것이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은 항상 많았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기자(箕子) 팔조목(八條目)은 문헌에 그 증거가 없고, 삼국(三國)은 혼란하여 정교(政敎)가 있었다는 말이 없으며, 전조(前朝)004) 5백 년은 온통 비바람 속에 암울하였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 태조(太祖)께서 국운을 여시고 세종(世宗)이 그 제도를 계승하여 지키면서 비로소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썼고, 그 성묘(成廟) 때에 이르러 《대전(大典)》을 간행하였는데, 그 뒤 수시로 법을 세워 이를 《속록(續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대체로 성군으로서 성군의 뒤를 이었으므로 서로 다른 것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도 어느 때는 《대전》을 쓰고 나중에는 《속록》으로 추가했으니, 이는 시의를 따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건백(建白)하여 제도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법이 막힘이 없이 시행되어 백성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산(燕山) 때에 이르러 황란(荒亂)하여 용도가 너무도 사치스러웠으므로, 조종(祖宗)의 공법(貢法)을 고쳐 날로 아래에서 덜어 위에다 보태는 것으로 일삼았습니다. 따라서 중종 반정(中宗反正) 때 진정 그전대로 환원했어야 할 것인데, 초년의 당국자는 그저 무식한 공신들뿐이었습니다. 그뒤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조금 큰 사업을 해보려고 하였으나 참소로 참화를 입어 혈육이 가루가 되었고, 그 뒤에는 기묘 사화보다도 참혹한 을사의 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은 숨을 죽이고 눈치나 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감히 국사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권간(權奸)의 무리가 마음놓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구법(舊法)이라 하여 준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신법(新法)이라 하여 혁파하였으니, 그 결과는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손상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했겠습니까. 이제 다행히도 성명(聖明)의 시대를 만나 학문에 마음을 두고 민생을 생각하시어 시대에 맞춰 법을 마련, 한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위에서는 한단 학보(邯鄲學步)를 우려하여 경장(更張)할 생각이 적으시고, 신하된 자들은 남에 대하여 논할 적에는 왕안석(王安石) 같은 환란이 생길까 염려하고, 제 몸을 아끼는 입장에서는 기묘년과 같은 패배가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감히 경장하자고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정치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공법(貢法)은 연산군 때에 백성을 학대하던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고, 관리의 임용은 권간(權奸)이 청탁을 앞세우던 습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문예(文藝)를 앞세우고 덕행을 뒤로하여 행실이 높은 이는 끝내 작은 벼슬에 머물게 되고, 문벌을 중시하고 어진 인재를 경시하여 문벌이 빈약한 자들은 그 능력을 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승지가 어전에 들어가 아뢰지 못하기 때문에 근신(近臣)은 소원해지고 환관(宦官)과 친근하게 되며, 시종(侍從)이 정의(廷議)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신(儒臣)은 경시되고 속론(俗論)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한 관직에 오래 있지 않고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직무를 나누어 맡지 않고 조사(曹司)에 전담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폐습과 그릇된 규칙들은 낱낱이 아뢰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는 기묘 사화 때 비롯된 것이 아니면 필시 을사 사화 때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논자(論者)들은 이를 조종(祖宗)의 법도로 여기어 감히 경장하자는 논의를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시의(時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성왕(聖王)이 만든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적절히 변통하는 현명한 자손이 없으면, 마침내는 반드시 폐단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대 성인으로서 노(魯)나라를 다스렸지만 뒷날 쇠퇴해질 형세를 떨치게 해 놓을 수는 없었고, 태공(太公)은 대 현인으로서 제(齊)나라를 다스렸지만 뒷날 왕위를 찬탈하게 될 조짐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현명한 자손이 나와서 조종이 남긴 뜻을 잘 따르며 법에만 구애받지 않았던들, 어찌 쇠란(衰亂)의 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 나라 조종들께서도 입법(立法)하신 당초에는 그렇게 빈틈이 없었으나, 2백 년이 지나오는 동안 시대도 바뀌고 일도 변화하여 폐단이 없지 않다면, 또한 변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후일에 잘못 제정된 법의 경우이겠습니까. 마땅히 서둘러 개혁하여 불에 타는 자를 구하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듯 백성을 구제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주역》에 이르기를, ‘궁(窮)함이 극도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해진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변통할 것을 생각하소서.

이른바 실공(實功)이란 것은 일을 하는 데에 성의가 있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정성이 없으면 어느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하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에는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실공이 있다면 어찌 실효가 없겠습니까. 오늘날 치평(治平)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공이 없기 때문인데, 걱정되는 일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와 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는 것이 첫째이고,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는 것이 둘째이고, 경연(經筵)에서 성취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셋째이고, 현명한 사람을 초치(招致)하여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는 것이 넷째이고, 재변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다섯째이고, 여러 가지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여섯째이고, 인심이 선(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 일곱째입니다.

‘위와 아래가 서로 믿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임금과 신하의 교제는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주역》 구괘(姤卦)의 단사(彖辭)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니 만물이 모두 빛난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의 전(傳)에 해설하기를,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만물이 생기지 못하고, 임금과 신하가 만나지 못하면 정치가 일어나지 못하고, 성인과 현인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도덕이 형통하지 못하고, 사물(事物)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공용(功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서로 만나 마음이 서로 통해서 부자(父子)와 같이 친밀하고 부신(符信)과 같이 마음이 맞게 되어,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를 이간시키지 못하고, 쇠를 녹이는 참소라도 그 사이에 용납됨이 없게 된 뒤에야 말이 시행되고 계책이 쓰여져 여러 가지 업적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삼대(三代)005) 의 성왕(聖王)들도 모두 이 도를 따랐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깊이 믿지 아니하고는 제대로 치적을 이룩한 경우는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명철하심은 부족함이 없으나 지니신 덕은 넓지 못하고, 선(善)을 좋아하심은 대단하시나 깊은 의심을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 중에 건백(建白)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주제넘다고 의심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자를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여러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면 당파가 있다고 의심하고, 잘못된 자를 공격하면 모함한다고 의심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명을 내리실 때는 말씀 속에 감정이 들어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이 일정치 않으십니다. 심지어 며칠 전 하교에는 ‘대언(大言)을 다투어 아뢰고 전에 없던 일은 행하기 좋아하니 당연히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이 하교가 한번 나오자 뭇사람의 의혹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렵다.’ 하고, 소옹(邵雍)은 말하기를, ‘잘 다스려진 세상에서는 덕을 숭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숭상한다.’고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대언을 다투어 아뢴다고 해서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되게 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대언을 옳다고 여기십니까,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언이란 것은 다만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道)를 행하게 하고 기필코 지치(至治)에 이르게 하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마땅히 그 의견을 서둘러 채택하셔야 하고, 다투어 아뢴다는 말씀으로 기롱하거나 풍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좋은 말을 올렸더라도 그것을 채용하지 않으면 그 말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신하가 되었어도 노 목공(魯穆公)의 영토는 즐어들었고, 맹자가 경(卿)이 되었어도 제 선왕(齊宣王)의 왕업(王業)은 흥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진언하는 자는 자사맹자와 같은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그 말을 위에서 채택한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시사(時事)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뭐가 이상하겠습니까.

만약 대언(大言)이 그른 것이라면 그들이야말로 말을 지어내고 사단을 일으키는 무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마땅히 부화하고 경박한 것을 억누르고 돈독하고 착실한 것을 힘쓰시어 조정을 편안히 하고 인심을 진정시키셔야지, 대언을 아름다운 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곧은 말을 가지고 상께서 다투어 아뢴다고 탓한다면 사기가 손상되고 부정한 길이 열리게 될 것이며, 부화하고 경박한 것을 대언이라고 찬미한다면 허위가 자라나고 실질적인 덕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이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실 것인데, 혹시 전하께서 실상 깊은 뜻은 없이 우연히 실언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뭇 신하들에 대해 깊이 신임하시는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들도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여, 성상의 교지가 내릴 때마다 한 마디 말씀만 이상하면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지고 두려워하여 항상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을 대하는 듯합니다. 어저께 대신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도 모두 황공해 할 뿐, 천심(天心)을 돌리고 세도(世道)를 구할 수 있는 계책을 아뢴 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 대신들이 전혀 식견이 없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전하께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는 한 낭관(郞官)을 차출하여 한 잔읍(殘邑)을 맡긴 경우에 있어서도 성상께서 백성을 걱정해서 그러신 것이지, 반드시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니, 또한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선비로서 훌륭한 명성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 불안해 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는 어찌 전하의 정성이 평소에 신임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마음을 쓰는 것이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공명 정대하여 만물이 모두 보았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인다 해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들을 이롭게 해준다 해도 은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까지도 성상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날 중묘(中廟)조광조(趙光祖)의 관계는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이라고 말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음흉하고 사악한 것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마치 밝은 거울이 먼지와 때로 가려진 것같이 되었으니, 낮에는 어전에서 응대를 하다가도 밤에는 천 길 골짜기로 떨어져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사림은 사화를 겪은 지 오래되지 않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신은 항상 천견(淺見)으로 논하기를, ‘중묘께서는 진정 성군이시나 지나치게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군자의 말도 들어가기 쉬웠지만 소인의 참소도 들어가기 쉬웠다. 지금 성상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시어 남의 말을 반드시 자세히 살피고 소홀히 듣지 아니하시므로 군자가 아무리 안타까와해도 계합(契合)되기 어려우나, 소인도 역시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속이지 못한다. 성상의 시대에는 사림의 화는 분명히 없을 것이나, 다만 백성이 궁해지고 나라가 피폐해지는데도 변통할 방책이 없어서 마침내는 토붕 와해의 형세가 되고 말 것이 두렵다.’ 하였는데, 지금 사류 중에서 신의 말을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울림에 있어 정성과 신의가 부합되지 못하면서도 제대로 치평(治平)을 보전했다는 말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첫째입니다.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려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에서는 벼슬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 놓아 각기 모두 맡은 일이 있게 하였습니다. 삼공(三公)은 모든 기무(機務)를 총괄하고 육경(六卿)은 여러 가지 업무를 나누어 다스리며, 시종(侍從)은 따지고 생각하는 책임이 있고 대간(臺諫)은 일을 살피고 듣는 임무가 주어져 있으며, 아래와 여러 관아의 작은 벼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기 그 책임이 있습니다. 감사(監事)는 지방에 교화를 펴고, 절도사(節度使)는 변방을 맡아 감독하고, 수령은 감사의 걱정을 나누어 맡고, 진장(鎭將)은 국경 수비를 감독하는 등 각기 그 직책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삼공은 진정 인망이 두터운 자들이기는 하나, 또한 감히 새로운 정책을 건백하여 시행하지 못한 채 부질없이 공손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꺼리고만 있을 뿐,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잘 살게 함으로써 세도(世道)를 만회할 가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또 무엇을 책망하겠습니까. 대관(大官)은 위에서 유유히 지내며 오직 앞뒤 눈치보기에 힘쓸 따름이고, 소관(小官)은 밑에서 빈둥빈둥 지내며 오직 기회를 엿보아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나 일삼고 있습니다.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대간에게 전담시키고 있는데, 한두 명 간사한 조무라기들만 잡아냄으로써 책임이나 면하는 것에 불과하고, 관리의 전형과 선임(選任)은 오로지 청탁으로 이루어져 한두 명사(名士)만을 벼슬자리에 안배함으로써 공정하다는 구실로 삼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관아의 벼슬아치들까지도 자신이 관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날이 쌓이고 달이 감으로써 승진을 추구하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대소 관원 중에 어찌 봉공 멸사(奉公滅私)하는 사람이 한두 명쯤이야 없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여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감사는 돌아다니며 스스로 즐기면서 대접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 문서를 잘 만들고 못만드는 것을 가지고 수령의 성적을 매기고 있으니, 그 처벌과 승진시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절도사는 엄한 형벌로써 자신의 위세나 드러내고 약탈을 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추구하면서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그 두 가지 일에 다 실책을 범하고 있으니, 곤외(閫外)의 책임을 욕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수령은 오직 가렴 주구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취하고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명예나 추구할 뿐,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데 제대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드뭅니다. 진장(鎭將)은 우선 군졸 숫자나 따지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면포(綿布)가 얼마나 될지 계산할 뿐, 나라의 방비를 걱정하는 자는 행여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서리배(胥吏輩)들만이 기회를 틈타 중요한 일의 처리를 장악하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혈은 서리배의 손에 거의 말라버린 형편입니다.

심지어는 군사를 뽑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뇌물이 요로에 횡행하고 가짜 문서가 진짜 기록을 혼란시키고 있는데, 촌민(村民)들이 소를 내주려고 해도 색리(色吏)들은 반드시 면포를 요구하여 소를 가지고 베를 바꾸게 되니 소 값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는 경외(京外)가 다 그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들끊고 있으니 하물며 다른 일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조식(曺植)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서리 때문에 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지나치기는 하나 또한 일리가 있으니, 이는 뭇 신하들이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관원이 제각기 맡은바 직책을 다한다면 어찌 서리 때문에 나라가 망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책임을 진 관원이 적절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를 바꾸고자 하더라도 한 때의 인물들이 모두 이 정도에 불과하므로 현명한 인재를 갑자기 마련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형벌과 법이 엄하지 않다 하여 그것을 엄중하게 하려고 할 경우, 법이 엄중해지면 간사한 자들이 더욱 불어나게 됨과 동시에 법을 엄중하게 하는 것 또한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온갖 폐단이 날로 늘어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날로 그릇되어 민생은 나날이 곤궁해지고 혼란과 쇠망이 반드시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둘째입니다.

‘경연에서 아무 것도 성취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삼공(三公)의 관직을 두었으니, 사(師)는 임금에게 교훈으로 인도하여 주었고 부(傳)는 덕의(德義)를 가르쳐 주었으며 보(保)는 신체를 잘 보전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법도가 폐지된 뒤로는 사·부·보의 책임이 오로지 경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임금의 덕의 성취는 그 책임이 경연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경연을 설치한 것은 다만 글을 강독하여 장구(章句)의 뜻이나 놓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혹을 풀어 도를 밝히고 교훈을 통해 덕을 진취시키고 정사를 논하여 올바른 다스림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조에서는 경연관을 예로써 대우하고 은덕으로써 친근히 하여, 친족이나 부자간처럼 정의(情意)가 서로 잘 통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신(侍臣)들은 학문이 많이 부족하고 성의도 대부분 결핍되어, 입시(入侍)하기를 꺼려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경연직을 기피하는 자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정성과 깊은 생각을 품고서 성상을 가까이 모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요즘에는 경연이 자주 열리지 않아 접견하는 일도 드물거니와, 예모(禮貌)가 엄숙하여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말을 주고받는 일이 매우 드물어 강문(講問)도 자세하지 못하며 정사의 요체와 시폐에 대하여도 물어보시는 일이 없습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일이 있더라도 역시 범연히 들어넘기기만 할 뿐, 몸소 시험하고 실천해 보시려는 실상이 전혀 없습니다. 경연이 파한 뒤에는 대내(大內)가 깊으므로 시신들은 그리는 마음만 간절할 뿐, 전하의 좌우에는 오직 내시와 궁녀들만이 있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시고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그것을 알 수 없는 형편인데 더구나 밖의 신하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맹자는 아성(亞聖)이시고 제(齊)나라 임금이 존경하는 것 또한 지극하였는데도, ‘하룻 동안 볕을 쪼이고 열흘 동안 차게 하면 되겠는가.’ 하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시신들은 자질이 옛 사람에 비하여 매우 부족한데다 그처럼 소외까지 당하고 있으니,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걱정할 일의 셋째입니다.

‘현인을 초치하여 거두어 쓰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의 제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현인을 구하면서 오직 힘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혹은 꿈 속에서 감응되기도 하고 혹은 낚시질하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006) 그들을 현인으로 대우하여 포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맡겨주신 직위를 그들과 함께 누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녹을 먹게 하여 만백성에게 은택이 베풀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하여 여론을 묻고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그를 살피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가지고 그를 시험하고 나서 과연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 그를 가까이하고 그의 계책을 채용하여 그의 도를 행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을 두고 임금이 현인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비를 사랑하고 현인을 구하시는 것이 옛날의 군주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숨어 있는 곧은 이와 덕 있는 이를 거의 모두 찾아내셨으니, 그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은 근고(近古)에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사가 천거할 때에 형식적으로 아무개는 쓸 만하다고 말할 따름이고, 상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진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유사가 이미 적합하게 천거하지 못한 위에 성상께서도 또한 친히 그 사람을 보시고 그의 현부(賢否)를 살펴보시는 일이 없이 그저 관례에 따라 벼슬을 줄 따름입니다. 몸을 닦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초야에 어찌 작록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선비의 거취는 본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낮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현인을 불러들임에 있어서는 벼슬만 내려줄 뿐, 만나보거나 살피고 시험하여 뽑아 씀으로써 도를 실천하게 하는 실상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거되어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모를 위하여 굴복하였다는 사람도 있고, 가난 때문에 벼슬한다는 사람도 있고, 다만 성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람도 있으니, 도를 실천하기 위하여 나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현인을 구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인데도 결국 헛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되고마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넷째입니다.

‘재변을 당하여도 하늘의 뜻에 대응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늘과 임금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노여움이 일어나 말과 얼굴에 나타낸다면, 자식으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반드시 한층 더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뜻을 받들고 따라 부모가 기뻐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잘못이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이 경우에는 더욱 허물을 자책하며 애절히 사죄하고, 마음을 고치고 행동을 바꾸어 공경과 효성을 다하여 반드시 부모가 기뻐하는 안색을 지니도록 하여야만 될 것이며, 두려운 마음만 품고서 문을 닫고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왕으로서 천변(天變)을 당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며 스스로 반성하고 정사를 잘못한 것은 없는가 두루 살펴서 자신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고 정사에 결함이 없더라도 마땅히 더욱 닦고 힘쓰며 공경해 마지않아야 할 것이고, 잘못이 없다 하여 스스로 용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더구나 자신에게 허물이 있고 정사에 결함이 있는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많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여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현인을 등용하여 부족한 능력을 메우고, 백성들을 돌보아 부지런히 무마해 주고, 폐단을 개혁하여 정사가 잘 다스려지게 함으로써 반드시 전일의 잘못을 보정(補正)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놓을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할 것이니, 허둥지둥 아무런 방책도 없이 마치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 문을 닫고 가만히 들어앉아 부모의 노여움이 저절로 가라앉기만 바라고 있듯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예사로 여기고 두려운 줄을 모르게 되었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고가 극히 참담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놀라시어 공경하고 두려워하심을 더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혼란을 돌려 치평을 마련할 조짐이 바로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회를 만나고서도 별로 닦고 다스리는 조치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는 것은 재난을 두려워하는 형식이고 말단이며, 덕을 쌓고 정사를 닦는 것이야말로 재난을 두려워하는 실상이며 근본입니다. 형식과 말단도 물론 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상과 근본이 지금 어떻게 조치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다섯째입니다.

‘여러 가지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법령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그 피해는 백성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정책을 마련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성교(聖敎)에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것이니, 여러 가지 벼슬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가지 직책을 나누어 놓은 것은 오로지 민생을 위한 것이다. 백성이 피폐해지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여러 번 거듭 읽어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위대하십니다, 임금의 말씀이시여. 한결같으십니다, 임금의 마음이시여.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백성을 편안케 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려놓을 일대 전기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임금과 신하들의 직책이 오로지 민생을 위하는 것임을 알았던 임금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착한 마음만 있고 법도가 없으면 그 마음을 펴나가지 못하고, 법도만 있고 착한 마음이 없으면 그 법도를 행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본디 이와 같은데도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아직도 제대로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뭇 신하들이 정책을 건의하는 것은 오직 그 말단적인 것만을 바로 잡으려 하고 근본적인 것은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듣기에는 아름다운 것 같으나 행해보면 아무 내용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한 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 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 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 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邊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조정에 진출하고 신하가 의논을 내더라도 민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어 다만 어떤 사람은 벼슬이 높아 출세하였으니 부러운 일이라고나 할 뿐, 어떤 사람이 등용된 덕분에 그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훌륭한 말이 이와 같이 아무런 성과도 없다면, 비록 한(漢)나라의 주운(朱雲)급암(汲黯)같이 곧은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고 바른 말이 빗발치더라도, 백성들이 궁하여지고 재물이 바닥나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게 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와는 반대로 아뢰는 말이 한번 잘못되기만 하면 그 피해가 지체없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아, 괴이하게도 이는 고금을 통하여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비유하건대 이는 마치 만 칸이나 되는 큰 집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크게는 들보에서부터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는데, 서로 떠받치며 지탱하여 근근히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있지만 동쪽을 수리하려 하면 서쪽이 기울고 남쪽을 수리하려 하면 북족이 기울어 무너져버릴 형편이라서, 여러 목수들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형편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대로 방치하고 수리하지 않는다면 날로 더욱 썩고 기울어져 장차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니, 오늘날의 형세가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여섯째입니다.

‘인심이 선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교화가 밝지 못하여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된 결과 선한 성품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너무나 심히 흐려지고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처음 등극하셨을 때는 인심이 희망에 차서 그런 대로 선을 지향하려는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때에 성덕(聖德)이 날로 진취되고 치화(治化)가 날로 향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직 초년(初年)에 대신들의 보필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를 천근(淺近)한 법규로 그르치게 하고 민생을 비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대신들이 간혹 공명(公明)한 마음으로 공론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청론(淸論)은 약하고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체면 때문에 흠모하는 자도 있고,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 꺼리는 자도 있고,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그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적고 허위가 성행하게 되었으니, 감옥에 갇혔다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구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꼭 죄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수령으로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은 자라고 해서 꼭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천(館薦)은 본디 학행이 뛰어난 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술자리를 베풀어 많은 선비들을 유혹하는 자도 간혹 있고, 이선(里選)은 본디 단정하고 훌륭한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었는데 바른 행실을 버리고 염치에 어두운 자들도 가끔 끼어들고 있습니다. 만약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사람까지 또 사람을 제대로 따라 가리지 않게 한다면 청탁(淸濁)이 뒤섞이고 현우(賢愚)가 엇섞여서 그 폐단을 구제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하여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 형제 간이라도 서로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강상(綱常)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정(刑政)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의 길을 따르며 지금의 습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성현이 윗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교화를 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습성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또한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이것이 걱정되는 일의 일곱째입니다.

대체로 이상 일곱 가지 걱정은 지금 세상의 깊은 고질로써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경에 빠진 것은 오로지 이것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걱정을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비록 성상께서 위에서 수고로우시고 청론이 아래에서 성행한다 하더라도, 역시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임금이 덕망을 잃어 스스로 패망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은 이치상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니, 하등 유감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명께서 무슨 실덕이 있으시기에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태롭게 되었단 말입니까. 신은 비록 병이 많고 재주는 적어 성상을 보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나, 구구한 혈성은 어느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입궐하여 전하를 배알하면 영명한 모습이 통철하시고 슬기로운 의논이 명쾌하신데, 밖에 나와서 사방을 돌아보면 백성들은 신음하고 괴로와하며 위축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형편이니, 매우 이상하여 긴 한숨을 쉬고 애타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 병이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신의(神醫)라면 그래도 고칠 수 있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명철한 임금이라면 그래도 부흥시킬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조정은 그래도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권간들도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경(四境)은 아직까지 완전하여 외란(外亂)이 일지 않고 있으니, 지금이라면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나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기회를 놓쳐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국가가 한가하면 이 때를 이용하여 나라의 정형(政刑)을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나라를 떨쳐 일으킬 방법을 생각하소서.

이제 몸을 닦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요체를 진언하여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방법으로 삼고자 합니다. 몸을 닦는 데에는 그 요강이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성상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三代)의 흥성했던 시대로 되돌려놓기를 기약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학(聖學)을 힘써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를 다하는 것이고, 셋째는 편벽된 사사로움을 버려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는 것이고, 넷째는 어진 선비를 친근히 하여 깨우치고 보필해 주는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상의 뜻을 분발하여 삼대의 흥성했던 시대로 되돌려놓기를 기약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옛날에 제(齊)나라 대부(大夫) 성간(成覵)제 경공(齊景公)에게 말하기를,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인데 내가 어찌 그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여기서 ‘그’란 성현을 뜻합니다. 대체로 경공과 같은 보잘것 없는 자질을 가지고도 분발하고 힘씀으로써 스스로 강하게 한다면 충분히 성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성간이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맹자양 혜왕(梁惠王)이나 제 선왕(齊宣王)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왕도(王道)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인정(仁政)이 아니면 권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양 혜왕(梁惠王)이나 제 선왕과 같은 자질을 가지고도 참으로 왕도를 실행하고 인정을 실시하기만 한다면 역시 삼왕(三王)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맹자가 그와 같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 분들이 어찌 큰 소리치기나 좋아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자질이 매우 아름다우시어 인자하심은 백성을 보호하기에 충분하고, 총명은 간사함을 분별하기에 충분하고, 용맹은 어떠한 결단을 내리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다만 성왕(聖王)이 되어보겠다는 뜻이 서 있지 아니하고 치평을 추구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아니하며, 아예 선왕(先王)같은 임금은 기약할 수 없다고 여긴 나머지,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작게 평가하심으로써 전혀 떨치고 분발하려는 생각이 없으십니다. 전하께서 무슨 소견으로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뜻은 크나 재능이 모자라 일에 실패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 일에는 힘쓰지 아니하고 실행하기 어려운 정책을 함부로 추진하며, 강약을 따져보지 않고 대적하기 어려운 적에게 함부로 도전하는 따위를 말합니다. 만약 몸을 닦는 일에 참다운 공부가 있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참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진 사람을 구하여 함께 다스릴 수가 있고 폐단을 개혁하여 시국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뜻이 커서 일에 실패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려서 국운을 영원히 하는 데에 이르고, 몸을 보양해서 장생하는 데에 이르고, 학문은 성인에 이르게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분명히 인간의 힘으로 조화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하지 않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예로부터 실질적인 공력을 쌓고서도 그 실효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힘써 선을 행하지 않고 그저 마음과 뜻이 외물(外物)에 따라다닐 뿐인데, 이는 정교(政敎)와 풍속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교화가 밝지 않을 경우엔 사람의 욕망이 끝이 없어 부귀에 뜻을 두고 기욕(嗜慾)에 뜻을 두고 환난을 피하는 데에 뜻을 두는 법입니다. 그런데 학문을 하면 도(道)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부귀에 뜻을 둔 자는 멀리 피하고, 학문을 하면 사욕을 멀리하고 욕망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기욕에 뜻을 둔 자는 움츠려 물러서고, 학문을 하면 비방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는 데에 뜻을 둔 자는 학문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어찌 정교와 풍속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나 도에 뜻을 두는 것이 어찌 오래도록 부귀를 지키는 방법이 되지 않겠으며, 기욕은 반드시 담담하실 것이니 욕망이 어찌 사직을 편안히 하고 나라의 명맥을 오래가게 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겠으며, 환란을 걱정할 일이기는 하나 환란을 막는 길이 어찌 한몸을 닦고 만민을 편안히 해주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뜻이 있는 사람은 꼭 성공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낡은 견해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소서. 이러한 뜻이 확립된 뒤에 대신들을 힘써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관을 감독하고 다스려서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어 자기 직책에 힘쓰게 한다면, 그 누가 감히 낡은 습성을 그대로 따라 일에 성실하지 않는 죄를 짓겠습니까. 이와 같이만 한다면 시사(時事)를 구제할 수가 있고 세상의 도를 회복시킬 수가 있으며 하늘의 재변도 그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성학을 힘써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효를 다하도록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큰 뜻이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학문으로 그것을 충실하게 한 다음에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어울리게 되어 이미 세운 뜻을 어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의 방법은 성인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데, 그 요체는 세 가지로서 곧 궁리(窮理)와 거경(居敬)과 역행(力行)일 뿐입니다.

궁리 또한 한 가지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으로는 내 몸 속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 각기 그 규범이 있고, 밖으로는 만물에 있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인데 초목 금수에도 각기 합당한 법칙이 있습니다. 가정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내를 올바로 거느리며 은혜를 두터이하고 인륜을 올바로 하는 이치를 잘 살펴야 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 사악함과 올바름, 순수함과 혼탁함, 정교함과 졸렬함의 구별을 잘 분별하여야 하며, 일을 처리함에는 옳고 그름, 잘되고 잘못됨, 편안함과 위태로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의 기미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는 반드시 책을 읽어서 밝히고 옛일을 상고하여 증명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궁리의 요체입니다.

거경(居敬)은 움직일 때나 조용히 있을 때나 모두 통용됩니다. 조용히 있을 때에는 잡념을 가지지 말고 맑고 고요한 가운데 정신이 또렷해야 하며, 움직일 때에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두세 가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한 가지에만 전념하여 조금도 잘못이 없어야 하며, 몸가짐은 반드시 정제하고 엄숙해야 하며, 마음가짐은 반드시 신중하고 두려워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거경의 요체입니다.

역행(力行)이란 자신을 극복하여 기질의 병폐를 다스리는 데에 있습니다. 부드러운 자는 교정하여 강해지도록 하고, 나약한 자는 교정하여 꿋꿋해지도록 하고, 사나운 자는 조화함으로써 조절하고, 성급한 자는 너그러움으로써 조절하고, 욕심이 많으면 깨끗하게 하여 반드시 청정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 편사(偏私)가 많으면 바로잡아 반드시 공정해지도록 하면서 쉬지 않고 스스로 힘써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행의 요체입니다.

궁리는 바로 격물 치지(格物致知)이고, 거경과 역행은 바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아울러 닦고 동시에 발전시켜 나가면 이치에 밝아져서 접촉하는 곳마다 막힘이 없게 되고, 속이 곧아져서 의로움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며, 자신을 극복하여 원초적인 성품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의와 정심의 공력이 그의 몸에 쌓이게 되어 윤택하고 화락한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나고, 집안에 모범을 세워 형제들이 본받을 만하게 되고, 그것이 온 집 온 나라에 파급되어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의 정심·성의의 공력이 몸에 쌓이고 밖에 드러나 널리 두루 미쳤기 때문에 남쪽 나라의 사람들이 문왕의 교화에 감복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주자가 상상하고 억측해서 한 말이겠습니까. 성의와 정심의 공효가 나라에 두루 파급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작은 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늘 평소에도 학문을 중단하지 마시어 사서 오경(四書五經)과 선현들의 격언 및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같은 책을 번갈아가며 읽으시고 그 뜻을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성현의 뜻이 아니면 감히 마음에 두지 마시고 성현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 마소서. 《예기(禮記)》 옥조(玉藻) 편의 구용(九容)007) 을 자세히 체득하시고, 어떤 생각이 나실 때에는 그것이 천리(天理)인가 인욕(人慾)인가를 잘 살피소서. 만약에 그것이 인욕이라면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끊어 없앨 것이며 그것이 천리라면 계속 밀고 나가 확충시키소서. 방심(放心)은 반드시 수습하시고, 사심도 반드시 극복하시고, 의관은 반드시 바르게 하시고, 바라보심은 반드시 높게 하시고, 기뻐하고 노여워함은 반드시 신중히 하시고, 말씀과 명령을 반드시 부드럽게 하심으로써 성의와 정심의 공효를 다하소서.

이른바 ‘편벽된 사심을 버리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넓힌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병폐를 시정하는 방법에 대해 대략 앞에서 아뢰었습니다만, 편벽된 사심이라는 한 가지야말로 고금을 두고 겪어 온 병폐이기 때문에 특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편벽된 사심을 털끝만큼이라도 떼어버리지 못하면 요순(堯舜)의 도에는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자질이 청명하시어 병폐가 본디 적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하고 계시니, 아마도 천지처럼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지는 못하신 듯합니다.

지난번 내관(內官)이 수본(手本)을 올린 일에 대해서는 신이 밖에서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새로 탄생하신 왕자를 중전(中殿) 아래에 두시겠다는 뜻이었는데, 정원이 그것을 고쳐 쓰게 한 것으로 들은 듯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명칭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며, 글자 몇 자를 고쳐 쓴다는 것 역시 지극히 쉬운 일인데 환관(宦官)이 어째서 따르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뒤에 전교를 보니 상께서 고치지 말고 정원으로 곧장 내려보내라고 명하신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은 어리석어 사체를 모르겠습니다마는 정원이 이미 후설(喉舌)이라고 이름지어진 이상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그곳을 거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전(內殿)과 외전(外殿)에 어찌 두 가지 체제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상의 명으로 특별히 나온 것이라면 아무리 미세한 일일지라도 그것은 곧 전교이니, 어찌 수본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일단 내관의 수본이었다면 더욱 정원을 거치지 않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공평한 마음으로 그 일을 살펴보신다면 그러한 이치는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정원에서야 상의 뜻에서 특별히 나온 것인 줄 어떻게 알아서 내관을 탓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공평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시고 목소리와 얼굴빛을 매우 엄하게 하셨는데, 이는 후설의 신하를 멀리하고 환관을 친근히 함으로써 조신(朝臣)을 경멸하는 경향을 조장하게 하신 일입니다.

상께서 하교하시기를, ‘시국의 일이 그릇되는 것이 많은 것은 임금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아, 형을 받은 하찮은 환관들이 감히 후설의 신하들에게 대항하고, 관계가 소원한 내시가 감히 분수에 어긋나는 은총을 바라며, 귀척(貴戚)은 말을 타고 가다가 교서(敎書)를 마주쳐도 피하지 않으니, 전하의 정사는 엄하지 않다고 말할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혹시 이 때문에 자책하신 것입니까? 한 문제(漢文帝) 때에 태자(太子)가 사마문(司馬門)을 지나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공거령(公車令)이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008) 등통(鄧通)이 총신(寵臣)으로서 무례하자 승상은 불러 목을 베려고 하였습니다.009) 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태자를 공경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임금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으며, 충신의 목을 베려고 한 것은 곧 위세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문제는 임금으로서의 위엄이 실추되지 않았고 세상을 잘 다스린 효과 또한 오늘날과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근신(近臣)보다 더 가까운 신하가 없는데도 환관으로 사사로운 신하를 삼고 계시며, 만백성보다 더 많은 백성은 없는데도 내시들로 사사로운 백성을 삼고 계십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지 않는다면 시국의 일을 바로잡을 길이 없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엄해질수록 시국의 일이 더욱 그르쳐질까 염려스럽습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관(冠)을 쓰지 않고 있다가 급암(汲黯)을 보고서는 장막 속으로 피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매[鷂]를 팔뚝 위에 올려놓고 있다가 위징(魏徵)을 보자 품안에 감추었습니다. 이 두 임금은, 정치의 도는 순수하지 않았지만 정령(政令)이 엄하고 밝아 잘하는 자에게는 적절한 상을 주고 죄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었기 때문에, 귀척이나 내시들도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으니, 역시 오늘날에 있어서는 미칠 수가 없는 임금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으로서 신하를 두려워했으면서도 엄하지 않은듯이 보인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그것은 신하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의를 두려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엄하기만 하고 의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는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스스로를 돌아볼 때 의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요즘 헌부가 다투고 있는 일에 대하여 신은 비록 그 전말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헌부가 사실의 확인을 자세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 이유는 전하께서 아무리 사심이 있으시더라도 절대로 불문 곡직하고 한 노비(奴婢)를 놓고 필부와 다투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신(群臣)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지혜가 밝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하께서 이미 마땅히 내사(內司)에 속해야 함을 아셨더라도 병급(並給)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면 더욱 성상의 도량이 넓으심을 흠모하기에 충분하셨을텐데, 여러날 동안 고집을 굽히지 않고 계시니, 어찌 신민들로서는 전하의 사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이란 엄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공정하지 못할까 걱정하여야 합니다. 공정하면 밝아지게 되는데, 밝아지고 보면 엄한 것은 자연 그 속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법을 시행하심에 있어 귀척과 근신으로부터 시작하시고, 인(仁)을 미루어 나가 백성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소서. 그리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어 환관이 임금을 가까이 모심을 믿고 조정의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게 하지 말 것이며, 만백성을 한결같이 보시어 내노(內奴)가 임금을 사사로이 모심을 믿고 엿보아서는 안 될 일을 엿보게 하지 마소서. 왕실의 재물을 유사에게 맡기시어 사물(私物)처럼 여기지 마시고, 한편에만 치우치는 생각을 마음 속에서 끊으시어 공평한 도량으로 모든 것을 감싸고 널리 덮어주도록 하소서. 그와 같이 하신다면 나라의 창고가 모두 재물인데 어찌 쓸 것이 없을까 걱정될 것이며, 온나라 사람이 모두 신하인데 어찌 노비가 없을까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른바 ‘현사를 친근히 하여 깨우쳐 주고 보필해 주는 이익이 되게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임금의 학문으로는 올바른 선비를 친근히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보는 것이 모두가 바른 일이고 듣는 것이 모두가 바른 말이라면 임금이 아무리 바르게 되지 않으려고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올바른 사람을 친근히 하지 아니하고 오직 환관이나 궁녀만 가까이한다면 보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니고 듣는 것도 올바른 말이 아닐 것이니, 임금이 아무리 바르게 되려고 하더라도 되겠습니까.

선현의 말씀에 ‘하늘이 한 세상 사람을 내놓았을 때는 그들로써 한 세상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게 한 것이니, 다른 시대에서 인재를 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진정 현인다운 현인을 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세상의 인물을 철저히 선발하되 출신(出身) 여부를 따지지 않고 조야(朝野)의 인물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어찌 임금을 보필할 만한 한두 명의 인물이야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널리 물으시고 정밀하게 고르시어 꼭 합당한 사람을 얻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출신한 자는 옥당(玉堂)에 모아 다른 자리에 옮겨가지 못하게 하고, 출신하지 못한 자는 한직(閑職)을 주어 경연의 직명을 띠도록 하며, 당상관으로 오른 자도 그 직책에 따라 반드시 경연관을 겸하게 하소서. 그런 뒤 이 선발에 참여된 자는 교대로 날짜를 바꾸어 입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전개하게 하시고, 상께서도 겸허한 마음과 온화한 얼굴로 그들의 충성스런 도움을 받아들이소서. 학문을 강론할 때는 반드시 의리를 추구해야 하고 정사를 논할 때는 반드시 실효를 추구해야 합니다. 비록 진강하는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꾸준히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이되 오직 사관(史官)만 함께 들어오게 하고 의심나는 점을 질문하시어 성상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소서.

승지 같은 사람은 의례적으로 맡은바 공사(公事)를 가지고 하루에 한 번씩 각기 직접 성지(聖旨)를 받들도록 할 것이며, 대신이나 대간의 말에 있어서는 날짜와 때를 구애하지 말고 반드시 들어와 직접 아뢰게 함으로써 조종조의 규범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상하 관계가 날로 밀접해져서 서로의 뜻이 간격이 없게 될 것이며, 성리(性理)에 관한 이론이 날로 진취하여 성학(聖學)이 완성됨으로써 서로 즐겁게 어울림이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되고 사악하고 더러운 것이 하늘과 해와 같으신 성상의 덕을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목으로서 그 대강이 이상과 같은데, 더 상세한 사항은 전하께서 유의하여 알고 행하시는 데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이른바 ‘성심을 열어 군하(群下)의 충정을 얻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성스러운 제왕이나 명철하신 임금은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결같이 지성으로써 합니다. 상대가 군자라는 것을 알면 곧 그를 임용함에 딴 마음을 갖지 않으며, 상대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면 곧 그를 내침에 의심을 갖지 않습니다. 의심이 나면 임용하지 않고 임용을 하면 의심하지 아니하며, 허심 탄회한 자세로 신하를 거느려 넓고 평탄하기만 합니다. 신하된 사람으로 임금을 부모처럼 존경하고 계절이 돌아가는 것처럼 믿게 되어 진출시켜 등용하면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더욱 그의 충성을 다하고, 물리치면 스스로 죄과가 있음을 알고 오직 자신만을 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끓는 물이나 불 속에라도 들어가고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고, 어린 유복자(遺腹子)를 왕위에 앉히고 선왕(先王)의 옷을 모시고서 조회를 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라가 어지러워지지 않게 되어, 오직 임금이 계시다는 것만을 알뿐, 그 자신이 있다는 것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임금의 지성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성의는 부족한 채 오직 지혜와 권력으로만 신하를 부린 나머지 벼슬에 임용할 때에는 꼭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자기에게 영합하는 자를 취하고, 축출할 때에도 꼭 현명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다른 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비록 자기에게 영합한다 하더라도 그의 속마음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임용하고도 의심이 없을 수가 없는데, 그를 의심하면서도 임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이 나랏일을 맡아 직책을 다하면 뭇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그에게로 기울어질 것인데, 어찌 그가 권력을 홀로 잡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간관이 어전에서 꿋꿋하게 간쟁하면 조야가 반드시 주목할 것이니, 어찌 그가 직언(直言)을 팔아 명예를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군자든 소인이든 간에 같은 무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 그 누가 붕당을 이루는지 어찌 알 것이며, 선책(善策)과 사론(邪論)이 뒤섞여 나올 것인데 어느 것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인가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하여 사정(邪正)을 분별하기 어렵고 시비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어, 전례대로 행하자니 더욱 무너지고 타락할까 고민하고, 개혁을 하자니 소요가 일어날까 꺼리게 됩니다. 이렇듯 임금의 마음이 뒤흔들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대간(大奸)이 나타나 틈을 엿보면서 임금의 마음을 따라 행동하다가 점차 계교를 부려 물이 스며들듯 침투해 들어오고, 뜻을 영합하여 기쁘게 해주며 공갈을 늘어놓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은 점차 그를 믿어 그의 술책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량한 사람들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고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니, 이 또한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임금의 정성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다만 군신(群臣)이 재덕이 부족하여 믿고 의지할 만한 인물이 적기 때문에 일을 맡기실 뜻이 없는 듯한데, 심지어는 말씀을 하실 적에도 믿지 못하는 마음과 경멸하는 표현이 드러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신들이 사실 자초한 것입니다마는 성명께서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써 지성으로 아랫사람들을 대하시어 마음에 옳다고 생각되면 말씀으로도 옳다고 하시고, 마음에 그르다고 생각되면 말씀으로도 그르다고 하소서. 진용(進用)할 때는 반드시 그 현명함에 대하여 상주고 물리칠 때는 반드시 그 죄과를 따짐으로써 성상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시어, 군신으로 하여금 누구나 우러러 보고 조그만 장애도 없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군신들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힘써 충정을 다 바치게 될 것이니, 군자는 충성을 다하려는 소원을 지니고 소인은 간계를 부리려는 생각을 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010) 신유년011) 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 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 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 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 년 전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 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 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오늘날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 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뽐내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 한 상을 차리는 비용이 굶주린 자의 몇 개월 양식이 될 만하고, 한 벌의 비용이 헐벗은 자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 해도 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으며, 열 사람이 베를 짠다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마련하기가 어려운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으니, 어찌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피해는 천재(天災)보다도 더하다.’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상께서 먼저 절약과 검소함을 힘써서 이 병폐를 고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호령이 자주 내린다 하더라도 수고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고로(古老)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성종(成宗)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 대신이 문안드리려고 들어가 보니, 침실에서 덮고 계신 다갈색(茶褐色) 명주 이불이 다 해어져가고 있는데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자는 지금까지도 흠모하여 마지않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공봉 규례(供奉規例)를 상고하도록 명하시어, 궁중의 용도를 일체 조종의 옛날 검약하던 제도를 따르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내외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스런 풍조를 고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심으로써, 하늘이 내려준 재물을 아끼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도록 하소서.

이른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선상의 본 뜻은 면포(綿布)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관청의 노복(奴僕)만 가지고는 역(役)을 세우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밖에 있는 공천들로 하여금 번갈아 가며 경역(京役)을 서게 하고 이를 ‘선상’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공천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막심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비로소 면포로 부역에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오직 베만을 거두어들일 뿐 한 사람도 와서 부역을 치르는 자는 없게 되었습니다. 민생은 날로 곤궁해지고 호구(戶口)는 날로 줄어들고 있는데 공천도 백성이거늘 어찌 그들만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한 번 선상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집안이 망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2년은 공물을 바치고 1년은 선상에 걸려 대체로 3년이 되면 반드시 한 번은 집안을 망치게 되니, 공천들의 고통은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해조의 색리들이 나누어 배정하는 것이 고르지 못합니다. 비록 노비의 수효가 많은 고을이라도 뇌물이 있으면 적게 배정하고 겨우 몇 가구만 있는 고을이라도 뇌물이 없으면 많이 배정하는데, 지탱할 능력이 없고 보면 그 침해가 일족(一族)에게 미치게 되어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일단 곤경에 빠뜨린 뒤에는 비록 공정하게 균등히 배정한다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이니, 미리 변통하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신역(身役)을 고쳐 대신 면포를 받는 것은 이미 《대전(大典)》의 법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선상 제도를 폐지하고 신공(身貢)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관(該官)에 명하시어 노비 장부를 자세히 조사하여 현존하는 숫자에 의거, 매년 바치는 노복의 공납 면포 두 필과 여비(女婢)의 공납 면포 한 필 반을 그 총계가 얼마인지를 계산하여, 그 중 5분의 2는 사섬시(司贍寺)에 비축하여 나라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5분의 3은 각사에 나누어 주어 선상의 역에 충당하게 하되, 면포가 부족할 경우에는 적절히 요량하여 역을 세우는 숫자를 줄이게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공천에게는 일정한 공물이 정해져 있어 미리 준비를 할 수가 있으니, 갑자기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공물을 거두어 들이는 데에도 일정한 장부가 있어 빼고 고치고 하는 일이 없게 되어 간리(奸吏)의 술책이 없어질 것이며, 호령이 번거롭지 않고 백성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늘의 재변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사실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지적할 수가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옛날 역사를 가지고 증험해 보건대,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것은 대부분 전란의 상징이었습니다. 현재 군정(軍政)은 무너지고 전 국경은 무방비 상태인데, 만약 급박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록 장양(張良)·진평(陳平) 같은 이가 지혜를 짜내고 오기(吳起)·한신(韓信) 같은 이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더라도 거느릴 병졸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홀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이 떨리고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시국의 폐단에 관해서는 앞에 이미 아뢰었으나 군정에 대해서는 상세히 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먼저 그 폐단을 아뢴 다음 대책을 세워볼까 합니다.

우리 나라 법제에는 결함이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단지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만 설치해 놓고 먹고 살 녹봉은 주지 않아 사졸들에 의하여 해결하고 있으니, 변장(邊將)들이 사졸을 침해하는 폐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국법이 날이 갈수록 해이해져 탐욕과 포악한 짓이 더욱 성해졌는데, 게다가 인재의 등용이 공정하지 않아 채수(債帥)012) 가 연달아 생겨 공공연히 ‘아무 진(鎭)의 장수는 그 값이 얼마이고 아무 보(堡)의 벼슬은 그 값이 얼마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은 오직 군졸을 착취하여 발신(發身)할 줄만 알고 있으니, 다른 일이야 또 어떻게 걱정하겠습니까. 사졸들이 유방(留防)하는 것을 괴롭게 여긴 나머지 면포를 바치고 군역(軍役)을 면제받으려 하면 반드시 기뻐하며 그것을 허락하고, 진(鎭)에 유방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강요하고 하기 어려운 부담을 책임지워 마치 기름에 콩 볶듯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석(木石)이 아니니 그 누가 자신을 아끼지 않겠습니까. 수자리를 면제 받은 자들이 그의 집에 편히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모두가 부러워하며 그들도 그런 것을 본받으려 하게 됩니다. 만약 수자리 사는 군역을 많은 사람들이 면제받아 진열이 있을 때에 거짓 이름으로 대신 점호(點呼)를 받게 합니다. 그런데 지역을 돌면서 검열하는 관리는 그저 그 숫자만을 세어볼 뿐이니, 그 누가 진짜와 가짜를 따지겠습니까. 수자리를 면제받는 것이 편하기야 하지만 베를 마련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몇 번 수자리에 걸리기만 하면 집안 살림이 결딴나 지탱할 수가 없어서, 도망치는 자들이 잇따라 생겨 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해에 장부의 수효대로 수자리를 독촉하면 본 고을에서는 반드시 그 일족(一族)으로 군역에 응하도록 하고, 그 일족이 또 도망가면 그 일족의 일족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환란이 만연되어 끝이 없는 지경이니, 장차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남는 자가 없게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 이른바 채수(債帥)들은 그래도 의기 양양하여 짐을 바리로 싣고 집에 돌아와 그의 처첩(妻妾)에게 뽐내고 있으니 가난했던 자도 그로 인하여 부자가 되고, 권세가에게 뇌물을 써서 진급을 꾀함으로써 천했던 자도 그로 인하여 귀한 신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이런 폐단을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부질없이 군졸의 수효를 채우지 못하는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설사 군졸의 수효를 다 채운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오직 변장이 얻는 면포만 더 보태줄 뿐 나라를 방비하는 데에야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첫째 폐단입니다.

수륙(水陸)의 군사들에 대하여 반드시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유방(留防)하게 하지 아니하고, 혹은 며칠이 걸리는 거리로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 리 밖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그 고장 풍토에 익숙치 않아 병에 걸리는 자가 많습니다. 이미 장수의 학대에 떨고 있는데다가 또 그 지방 군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는 등, 객지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남쪽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 수자리사는 자들의 경우가 더욱 심합니다.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은 사색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만약 적의 기병(騎兵)을 만난다면 비록 도망치려 한다 해도 도망칠 기력이 없어 앉아서 어육을 당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활을 쏘며 적을 막아내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황해도 기병으로서 평안도에 가서 수자리를 살게 되는 사람의 경우, 그들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반드시 면포 30∼40필에 밑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30∼40필이라면 곧 시골 백성이 여러 가구에서 생산해 내는 양으로서 한 명이 가면 반드시 여러 가구가 파산하게 되니, 어찌 궁해져서 도둑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둘째 폐단입니다.

6년마다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법이 폐지되어 행해지지 않다가 계축년013) 에 와서야 오래도록 폐지한 끝에 수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을 받든 신하가 신속히 처리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으므로, 주현(州縣)에서도 그런 기풍을 받들어 그저 미치지 못할세라 서둘러 긁어모으면서 혹시라도 빠뜨릴까만 염려했을 뿐, 구차히 수효를 채움으로써 환란을 끼치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거지들까지도 모두 넣어 수효를 채우고 닭이나 개 이름까지도 장부에 수록하여 한두 해가 채 지나지 않아 태반이 빈 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20여년 만에 다시 군적 정리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군졸의 수효가 부족한 것은 계축년보다도 심하고 남아 있는 장정의 수효 또한 계축년보다 훨씬 적으니, 아무리 교묘하게 수괄한다 하더라도 어찌 가루 없는 국수를 만들어낼 수야 있겠습니까. 이제 수괄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아니면 거지이고 거지가 아니면 사족(士族)일 테니 건실한 장정이야 몇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군적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금방 또 빈 장부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해조는 이런 사실을 듣고 보지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이제 또 애써 반드시 정원수를 채우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매우 사리를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 폐단입니다.

내외의 양역(良役)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소위 조례(皂隷)·나장(羅將) 등 원역(員役)이 가장 고달프다 하겠습니다. 역시 면포로 대역(代役)의 값을 치르고 있을 뿐인데, 그가 소속된 관아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시켜놓고는 불시에 저리(邸吏)014) 를 독촉하여 대역의 댓가를 갚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리는 이자를 따져서 바친 뒤에 거기에 든 기타 비용까지 통산하여 당사자에게 그 세 배를 받아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제나 세 사람의 부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으레 일족에게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넷째 폐단입니다.

이상 네 가지 폐단을 지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몇 년 뒤에는 비록 유능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소서.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 및 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 장부에 계상된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장(邊將)의 양식으로 충분히 주도록 하되, 그 고을의 곡식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이웃 고을의 곡식도 거두어서 반드시 변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을 지탱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법제를 엄하고 분명히 하여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쌀이라도 군졸들로부터 거두어들이지 못하게 하고, 오직 기계를 잘 정비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교습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병사·수사 및 순찰사는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검열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반드시 그들의 무기를 검열하고 말타기 활쏘기 등 무예를 시험해 봄으로써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우열을 가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약 전처럼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군졸을 놓아보내다가 발각되면 장률(贓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관원을 지방의 남북이나 거리의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군직에 소속시켜 그 처자들로 하여금 녹봉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처음 제수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 사람을 뽑도록 하고, 일단 제수한 뒤에는 다섯 번 고사(考査)하여 다섯 번 상(上)을 받으면 곧 권관에서 만호로, 만호에서 첨사로, 첨사에서 동반(東班) 6품의 직으로 올려 제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사하여 중간 성적을 얻은 사람은 다른 진의 같은 등급의 자리로 옮겨주고 승진할 수 없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지난 세월을 아깝게 느껴 부지런히 힘쓰도록 해야 합니다.

유방(留防)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고을의 군사들을 거느리게 하되 그 고을의 군사가 부족한 뒤에야 옆 고을에 배정토록 해야 합니다. 유방하고 있는 곳은 각색(各色)의 양역(良役)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유방의 군역만 있게 하여 먼 곳에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번(番)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여야 합니다. 진(鎭)에 있을 때에는 또한 조금이라도 노력이 허비되거나 재물을 손해보는 일이 없게 해야 하며, 진장(鎭將)의 사령(使令)에 응하는 것은 땔감을 나르거나 물을 길어오는 일만 하게 하고 기타 다른 일은 하는 일이 없게 하여, 활을 다루고 활쏘기를 익히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황해도의 기병(騎兵)을 북방에 수자리사는 군역에 종사하도록 하는 일은 혁파하여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이 된다면 연변(沿邊)의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도록 하되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실시하여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고, 다섯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군졸의 경우에는 군관(軍官)으로 특진시키고, 그 중에서 지식이 여러 사람을 거느릴 만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조에 그 이름을 아뢰어 권관(權管)에 보직시킴으로써 쓸 만한 지의 여부를 시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가 공사천(公私賤)일 경우에는 그 이름을 아뢰어 면천(免賤)을 특별히 허락하되, 사천은 본 주인에게 그 댓가를 충분히 주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면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하는 자는 매우 드물 것이나 변경의 백성은 모두가 정병(精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혹시 적이 변경을 침입할 경우라도 사람들은 제각기 스스로를 방위하려고 할 것인데, 그 누구라서 힘써 싸우지 않겠습니까. 상번(上番)한 군사에 대해서도 유사(有司)가 또한 수시로 그들의 무예를 시험하여 그중 가장 우수한 자는 계달하여 논상하고, 다섯 번 일등을 한 자는 그가 사는 지역의 진(鎭)·보(堡)의 군관으로 특별히 보직함으로써 군무(軍務)에 힘쓸 뜻을 지니도록 하소서.

군적을 정리하는 일을 실질적인 군적 관리가 되도록 힘써야지 정원수를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15세가 채 안 된 소년에 대해서는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그들의 나이가 찰 때에 군적에 넣도록 해야 합니다. 날품팔이나 거지는 모두 삭제하여야 합니다. 열읍(列邑)의 군부(軍簿)는 옛 기록을 그대로 두되 다만 몇 명이 모자란다는 것만은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그들을 부지런히 휴양시키고 위무하게 하였다가 장정이 생기는 대로 군적에 보충시키되, 일정한 기한을 정하지 말고 기필코 정원수를 채우도록 해야 합니다. 또 6년마다 한 번씩 반드시 군적을 정리함으로써 갑자기 정리하는 데 따른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군졸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상번 군사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무방한 곳의 군사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한 때는 남쪽 지방의 겨울철 유방군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병역 대신 가포(價布)를 바치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유방 군사의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게 해야 합니다. 유방 군사가 진장(鎭將)의 침해를 당하는 일이 없게 되면 보병들 역시 이리나 호랑이를 피하듯 군역을 싫어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조례(皂隷)나 나장(羅將) 등 원역의 경우는 각기 일정한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명목을 모두 폐지하여 보병으로 다 편입시킨 뒤 가포를 병조에 바치도록 하고 병조는 각사에서 원역을 세우는 수를 헤아려 가포를 배정한다면, 저리(邸吏)는 불시에 독촉받는 것을 면하게 되고, 민간에서는 세 배나 되는 가혹한 양의 베를 내게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군정(軍政)에 관한 좋은 계책으로서는 이것이 그 대략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는 백성을 편안히 할 수 있는 요목으로서 그 대강이 이와 같은데, 그에 대한 자세한 것은 전하께서 널리 의논하시어 계책을 세우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시사(時事)는 날로 그릇되어가고 백성의 기력은 날로 소진되어가고 있는데, 권간이 세도를 부리던 때보다 더 심한 듯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권간이 날뛰던 시절에는 그래도 조종들의 남기신 은택이 어느 정도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정치가 혼란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그런 대로 지탱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경우는 조종들이 남기신 은택은 이미 다하고 권간이 남겨 놓은 해독이 바야흐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청론이 비록 행해진다 하더라도 민력은 이미 바닥이 나버린 상태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창 젊을 때 주색에 빠져 여러 가지로 몸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하더라도 혈기가 왕성한 때라서 몸이 상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그 해독이 틈만 있으면 불현듯 나타나 아무리 근신하며 몸을 보양해도 원기가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시사가 실로 이와 같으니 앞으로 10년이 채 안 되어 화란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 칸의 집과 백 마지기의 전답을 자손에게 물려주면 자손은 또 그것을 잘지켜 선조를 욕되지 않게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조 백 년의 사직과 천 리의 강토를 물려받으셨고 게다가 환란이 곧 닥칠 것 같은 상황에 처해있음이겠습니까.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해결책을 구한다면 꼭 잘 된다는 보장은 없어도 적어도 아주 엉뚱한 결과가 생기지는 않는 것이며,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스스로 구제할 수는 있는 것인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권세의 중추를 관장하시고 사리에 밝으시어 시대를 구제할 능력이 있음이겠습니까.

소신(小臣)은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아 백 번 죽는다 해도 보답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참으로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에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 언로를 넓게 열어놓고 의견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겠다고 간절히 수교(手敎)하셨음이겠습니까. 신이 만약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전하를 배반하는 것이 되겠기에 충정에 격동되어 극진하게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병을 치르고 난 끝이라서 정신은 흐리고 손은 떨리며 글은 비속하고 중복되었는가 하면 자획도 겨우 이루었으므로 볼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뢴 그 뜻이 요원한 듯해도 실은 가까운 것이고 계책이 오활한 듯해도 실은 절실한 것이니, 비록 삼대(三代)의 제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실로 왕정(王政)의 근본으로서 그대로 시행만 하면 효과가 드러나 왕정(王政)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 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37면
  • 【분류】
    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사(人事)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농업(農業) / 풍속(風俗) / 신분(身分)

  • [註 001]
    경성(景星) : 상서로운 별.
  • [註 002]
    세조(世祖)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 [註 003]
    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 [註 004]
    전조(前朝) : 고려를 말함.
  • [註 005]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006]
    꿈 속에서 감응되기도 하고 혹은 낚시질하고 있는 자를 만나기도 하였는데 : 은 고종(殷高宗)이 어진 신하를 구하던 끝에 꿈에서 그 사람을 보고 그 초상을 그린 뒤 온 세상에서 그와 같은 자를 찾아 내게 하여 결국 부암(傅巖)의 들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던 부열(傅說)을 찾아내 재상으로 삼은 일과, 주 문왕(周文王)이 위수(渭水) 바닷가에서 낚시질로 소일하던 여상(呂尙)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에 크게 기뻐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모신 일을 말한다. 《상서(尙書)》 열명(說命), 《사기(史記)》 권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2.
  • [註 007]
    구용(九容) : 군자가 몸을 닦고 처세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곧 걸음거리는 무거워야 하고[足容重], 손가짐은 공손해야 하고[手容恭], 눈가짐은 단정해야 하고[目容端], 말할 때는 진중해야 하고[口容止], 음성은 온화해야 하고[聲容靜], 머리는 곧아야 하고[頭容直], 기세는 엄숙해야 하고[氣容肅], 서 있는 자세는 덕스러워야 하고[立容德], 얼굴빛은 장중해야 한다[色容莊]는 것임.
  • [註 008]
    한 문제(漢文帝) 때에 태자(太子)가 사마문(司馬門)을 지나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공거령(公車令)이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 사마문은 황궁(皇宮)의 외문(外門)으로서 궁위(宮衛)의 법에 그 문을 통과할 때는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리게 되어 있는데, 문제의 태자와 양왕(梁王)이 함께 수레를 타고 입조(入朝)하면서 그냥 지나가자 당시 문을 지키는 공거령 장석지(張釋之)가 뒤쫓아가 전문(殿門)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공문(公門)에서 내리지 않자 불경하다는 것으로 탄핵소를 올렸다. 《사기(史記)》 권102 장석지전(張釋之傳).
  • [註 009]
    등통(鄧通)이 총신(寵臣)으로서 무례하자 승상은 불러 목을 베려고 하였습니다. : 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 대부(太中大夫) 등통이 조회 때 천자의 곁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자 승상 신도가(申屠嘉)가 등통을 승상부(丞相府)로 불러 꾸짖기를, "조정은 곧 고황제(高皇帝)의 조정인데 소신(小臣) 등통이 전상(殿上)에서 장난을 하다니 매우 불경(不敬)하다. 참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심하게 곤욕을 준 뒤에 문제의 부탁으로 돌려 보냈다. 《한서(漢書)》 권42 신도가전(申屠嘉傳).
  • [註 010]
    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 [註 011]
    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 [註 012]
    채수(債帥) : 뇌물을 주고 장수가 된 자.
  • [註 013]
    계축년 : 1553 명종 8년.
  • [註 014]
    저리(邸吏) :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

○右副承旨李珥上萬言疏, 極陳時弊及弭災、進德之說。 其疏曰:

臣伏以, 政貴知時; 事要務實。 爲政而不知時宜; 當事而不務實功, 雖聖賢相遇, 治效不成矣。 恭惟, 殿下聰明英毅, 好士愛民, 內無音樂、酒色之娛; 外絶馳騁、弋獵之好, 古之人君, 所以蠱心害德者, 皆非殿下之所屑也。 倚仗老成, 擢用人望, 旁招俊乂, 仕路漸淸, 優容直言, 公議盛行, 朝野顒顒, 佇見至治, 宜乎紀綱振肅, 民生樂業。 而以言其紀綱, 則徇私滅公, 猶昔也; 號令不行, 猶昔也; 百僚怠官, 猶昔也。 以言其民生, 則家無恒産, 依舊也; 流轉失所, 依舊也; 放僻爲惡, 依舊也。 臣嘗慨歎, 竊欲深究其故, 一達冕旒, 而未得其會。 昨者伏覩, 殿下因天災, 諭大臣之敎, 則殿下亦大疑而深歎, 願聞振救之策。 此誠志士盡言之秋也, 惜乎! 大臣過於惶惑, 辭不盡意也。 夫災異之作, 天意深遠, 固難窺測, 亦不過仁愛人君而已。 歷觀古昔明王誼辟, 可以有爲, 而政或不修, 則天必示譴而警動之。 至於暴棄之君, 與天相忘則反無災異。 是故, 無災之災, 天下之至災也。 今以殿下之明聖, 居可爲之位; 値可爲之時, 而紀綱如是; 民生如是, 則皇天之付畀者, 未塞其責矣。 設使今者, 景星日現; 慶雲日興, 殿下之危懼, 尤無所自容矣。 衆災疊現, 日無虛度者, 乃皇天仁愛之至也。 殿下之矜惕脩省, 其可少緩乎? 雖然, 不知時宜; 不務實功, 則危懼雖切, 治效終邈, 民生豈可保; 天怒豈可弭乎? 臣今罄竭一得, 先陳沈痼之弊, 後及振救之策。 伏願殿下, 虛心易氣, 勿厭其煩文; 勿怒其觸忤, 以垂睿察焉。 夫所謂時宜者, 隨時變通, 設法救民之謂也。 程子《易》曰: "知時識勢, 學《易》之大方也," 又曰: "隨時變易, 乃常道也。"蓋法因時制, 時變則法不同。 夫以, 宜無所不同, 而分九州爲十二; 以, 宜無所不同, 而革十二爲九州, 此豈聖人好爲變易哉? 不過因時而已。 是故, 程子曰: "之相繼, 其文章、氣象, 亦自少異也。" 降自, 其間小變, 不可枚擧, 而以言其大者則夏人尙忠, 忠弊, 故救之以質; 質弊, 故救之以文; 文弊不救然後, 天下壞亂, 入于强以暴虐, 焚《詩》 《書》而亡; 興, 監其弊, 尙寬德, 崇經術。 及其弊也, 崇虛文、無實節, 權移外戚, 諛侫成風。 世祖之興, 褒崇節義, 於是, 士務名節, 而其弊也, 不知節之以禮, 視死如歸, 苦節不中。 人皆厭之, 而時無賢主出而救之, 故苦節變爲之曠蕩, 尙浮虛、亡禮法。 禮法旣亡, 與夷狄無異, 故五亂華, 中原糜爛。 亂極當治, 故有貞觀之治, 而救弊未盡其道, 猶有夷狄之風。 三綱不正, 君不君、臣不臣, 藩鎭不賓, 權臣跋扈, 陵夷有五代之亂。 興, 懲藩鎭之患, 釋去兵權, 收攬威柄, 而眞宗以後, 狃於昇平, 紀綱漸弛, 武略不競。 仁宗雖極富庶, 而頹靡之象, 已著, 當時大賢, 皆思變通之策。 直至神宗, 値可變之會, 奮有爲之志, 而所信任者, 王安石也。 後仁義而先功利; 違天人而促亂亡, 反不如不變之爲愈也。 馴致大禍, 變夏爲夷, 他尙何說哉? 上下數千年間, 歷代治亂之跡, 大槪如此。 隨時善救者, 只見於三代而已, 三代以後, 救者固鮮, 而亦未盡道焉。 大抵隨時可變者, 法制也; 亘古今而不可變者, 王道也, 仁政也, 三綱也, 五常也。 後世道術不明, 不可變者, 有時而遷改; 可變者, 有時而膠守, 此所以治日常少; 亂日常多者也。 且以我東方言之, 箕子八條, 文獻無徵; 鼎峙擾攘, 政敎蔑聞; 前朝五百, 風雨晦冥。 至于我朝, 太祖啓運; 世宗守成, 始用《經濟六典》, 至于成廟, 刊行《大典》, 厥後隨時立法, 名以《續錄》。 夫以聖承聖, 宜無所不同, 而或用《經濟六典》; 或用《大典》, 添之以《續錄》者, 不過因時而已。

當其時也, 建白創制, 人不爲怪, 而法行不滯, 民得蘇息。 燕山荒亂, 用度侈繁, 變祖宗貢法, 日以損下益上爲事。 中廟反正, 政當由舊, 而初年當國者, 只是功臣之無識者而已。 厥後己卯諸賢, 稍欲有爲, 而讒鋒所觸, 血肉糜粉, 繼以乙巳之禍, 慘於己卯。 自是士林狼顧脅息, 以苟活爲幸, 不敢以國事爲言。 而惟是權奸之輩, 放心肆意, 利於己者, 以爲舊法而遵守; 妨於私者, 以爲新法而革罷, 要其所歸, 不過剝民自肥而已。 至於國勢之日蹙; 邦本之日斲, 孰有一毫動念者哉? 幸値聖明存心學問, 垂念民生, 可以因時設法, 匡濟一世。 而自上虞邯鄲之步, 少更張之慮, 而爲臣者論人, 則恐有安石之患; 自愛則恐有己卯之敗, 莫敢以更張爲說。 試言今日之政, 則貢案守燕山虐民之法; 銓選遵權奸請托之規。 先文藝、後德行, 而行尊者, 終屈於小官; 重門閥、薄賢才, 而族寒者, 不展其器能。 承旨不入稟于御內, 近臣疎, 而宦官親, 侍從不參預於廷議, 儒臣輕, 而俗論重。 不久一官, 以歷敭淸顯爲榮; 不分職事, 以專委曹司爲務。 弊習、謬規, 難以縷陳, 而不始于己卯, 必成于乙巳。 而今之議者, 擬以祖宗之法, 不敢開更張之論, 此所謂不知時宜者也。 大抵雖聖王立法, 若無賢孫有以變通, 則終必有弊。 故周公, 大聖也, 治而不能振後日寢微之勢; 太公, 大賢也, 治而不能遏後日簒弑之萠。 若使賢孫, 善遵遺意, 不拘於法, 則寧有衰亂之禍哉? 我國祖宗立法之初, 固極周詳, 而年垂二百, 時變事易, 不無弊端, 猶可變通, 況後日謬規, 汲汲改革, 當如救焚拯溺者乎? 《傳》曰: "窮則變, 變則通。" 伏願殿下, 留念思所以變通焉。 所謂實功者, 作事有誠, 不務空言之謂也。 子思子曰: "不誠, 無物" 孟子曰: "至誠, 未有不動者也。" 苟有實功, 豈無實效哉? 今之治效靡臻, 由無實功, 而所可憂者有七。 上下無交孚之實, 一可憂也; 臣隣無任事之實, 二可憂也; 經筵無成就之實, 三可憂也; 招賢無收用之實; 四可憂也; 遇災無應天之實, 五可憂也; 群策無救民之實, 六可憂也; 人心無向善之實, 七可憂也。 上下無交孚之實者, 何謂也? 君臣交際, 猶天地之相遇也。 在《易》 《姤》之彖曰: "天地相遇, 品物咸章也。" 程子之傳曰: "天地不相遇, 則萬物不生; 君臣不相遇, 則政治不興; 聖賢不相遇, 則道德不亨; 事物不相遇, 則功用不成。" 是故, 明良相遇, 肝膽相通, 密如父子; 合如符契, 骨肉之親, 不能間; 鑠金之口, 無所容, 然後言行策用, 庶績以成。 三代聖王, 皆由是道, 未有君臣不相深信, 而能成治效者也。 竊伏惟念, 殿下明睿有餘, 而執德不弘; 好善非淺, 而多疑未祛。 是故, 群臣務建白者, 疑其過越; 尙氣節者, 疑其矯激, 得衆譽則疑其有黨; 斥罪過則疑其傾陷。 加以發號之際, 辭氣抑揚, 好惡靡定。 至於頃日之敎有曰: "大言競進, 喜行無前之事, 宜乎風淳政擧," 斯敎一出, 群惑彌增。 古人有言曰: "言善非難, 行善爲難。" 邵雍曰: "治世尙德, 亂世尙言。" 古今天下, 安有大言競進, 而能使風淳政擧者乎? 且殿下以大言爲是耶? 爲非耶? 如其是耶, 則其所謂大言者, 不過引君當道, 期臻至治而已。 殿下當採用之不暇, 不當以競進爲譏諷也。 有言而不用, 則雖美, 而無益。 故子思爲臣, 而魯繆之削弱滋甚; 孟子爲卿, 而齊宣之王業不興。 況今進言者, 旣非思孟, 而採用之實, 蔑聞者乎? 何怪乎時事之不治哉? 如其非也, 則此乃造言生事之流也。 殿下當抑浮躁、務敦實, 以安朝廷; 以鎭人心, 不當以大言爲美事也。 嗚呼! 以讜論尤其競進, 則士氣沮, 而邪徑開; 以浮躁美其大言, 則虛僞長, 而實德喪。 殿下必居一於此矣, 抑未知殿下實無深意, 而言辭偶失者乎。 殿下於群臣, 深信有所不足。 故群臣亦不知聖意之所在, 每於聖敎之下, 一言異常, 則莫不駭目怵心, 常若臨不測之淵。 昨者大臣之承召也, 只是一味惶恐而已, 無一策可以回天心、救世道者。

若使大臣全無識見, 則已矣, 如有所見, 則豈非預憂殿下之不傾四聰也哉? 至於出一郞官; 補一殘邑, 聖心憂民, 未必有他, 亦非異事。 而朝士之有善名者, 咸懷不自安之心, 豈非殿下之誠, 未能素孚而然乎? 古之聖王, 處心行事, 如靑天白日, 萬物咸覩, 至於蚩蚩下民, 亦莫不洞知上意。 故殺之而不怨; 利之而不庸。 今者近密之臣, 尙未曉聖心, 況他人乎? 昔者中廟之於趙光祖也, 可謂 ‘聖賢相遇’ 矣, 而陰邪忽入左腹, 如明鏡蔽于塵垢, 晝而唯諾於一榻之前; 夜而墜落於千仞之壑。 今之士林, 傷弓甫耳, 餘惴尙存。 小臣常以淺見爲說曰: "中廟固是聖主, 而過於虛受, 君子之言雖易進, 而小人之讒亦易入矣。 今上則不然, 察言必詳, 傾聽不苟, 君子雖悶悶難契, 小人亦不敢罔以非道矣。 聖明之代, 必無士林之禍, 但恐民窮國蹙, 變通無策, 終有土崩之勢耳。" 今之士類, 能信臣言者, 有幾人乎? 君臣交際, 誠信未孚, 而能保治平者, 自古及今, 未之聞也。 此其可憂者一也。 臣隣無任事之實者, 何謂也? 設官分職, 各有所司, 三公摠統機宜; 六卿分理庶務; 侍從有論思之責; 臺諫受耳目之寄, 下至庶司小官, 莫不各有其任。 監司宣化于外; 節帥領督于邊, 守令分憂; 鎭將監戍, 亦莫不各有其職。 今者三公, 固是人望所屬, 而亦不敢建白施設, 徒能恭愼畏忌而已, 殊無經濟邦國, 挽回世道之望, 他又何責焉? 大官悠悠於上, 惟瞻前顧後是務; 小官泛泛於下, 惟相時射利爲事。 紀綱專委之臺閣, 而不過摘抉一二奸細以塞責; 銓選專出於請托, 而不過安排一二名士以托公, 以至庶司之官, 漫不知所掌何事, 惟知積日累朔以求遷。 大小之官, 豈無一二奉公忘私者哉? 只是形單勢弱, 不能有所裨益。 監司巡遊自娛, 以廚傳豐約; 文書工拙爲殿最, 能明黜陟者, 有幾人乎? 節帥嚴刑以自威, 剝割以自奉, 撫綏、精練, 兩失其榮, 能不辱閫外之寄者, 有幾人乎? 守令只知斂民以自利; 行媚以干譽, 能以字牧爲心者, 屈指甚鮮。 鎭將先問軍卒之幾何, 以計綿布之多少而已, 能以防備爲虞者, 絶無幸有。 惟是胥吏之輩, 投間抵隙, 執其機要, 生民膏血, 殆盡於胥吏之手矣。 至於籍兵, 最是大事, 而賄賂交於路, 僞券亂其眞, 村民欲餽以牛, 色吏必求緜布, 以牛易布, 牛價頓賤。 京外皆然, 衆口沸騰, 況於他事乎? 曺植嘗曰: "我國以胥吏而亡。" 此言雖過, 亦有理焉。 此由群臣不任事之過也。 官各稱職, 則安有以胥吏亡國者乎? 今若以爲, 所任非人, 而欲易之則一時人物不過如此, 賢才難以猝辦, 以爲刑法不嚴, 而欲重之則法重而奸益滋, 且嚴法, 非救弊之策也。 以爲無可奈何, 而置之則百弊日增; 庶績日敗; 民生日困, 而亂亡必隨。 此其可憂者二也。 經筵無成就之實者, 何謂也? 古者, 設三公之官, 師, 道之敎訓; 傅, 傅之德義; 保, 保其身體。 此法旣廢, 師、傅、保之責, 專在於經筵。 故程子曰: "君德成就, 責經筵。" 經筵之設, 非爲臨文講讀, 不失章句而已, 將以解惑而明道也; 將以納誨而進德也; 將以論政而制治也。 故祖宗於經筵官, 待之有禮; 親之有恩, 如家人父子, 情意洞澈焉。

今之侍臣, 學問多缺, 誠懇多之, 或難於入侍, 至有規避者矣。 雖然, 豈無懷誠抱懇, 願親聖明者哉? 近者經筵不頻, 接見固疎, 而禮貌嚴肅, 辭氣罔舒, 酬答甚罕, 講問不詳, 政要時弊, 未嘗咨詢。 間有一二講官, 勸勉聖學, 則亦泛然俯聽而已, 殊無體驗踐履之實。 罷筵之後, 大內深邃, 瞻仰徒勤, 而殿下左右, 只有宦寺、宮妾而已, 未知殿下燕居之時, 所覽者何書; 所做者何事; 所聞者何語耶。 近臣尙不能知, 況外臣乎? 孟子, 亞聖也。 齊王之尊敬, 亦至矣, 尙有一曝十寒之歎。 況今侍臣, 有愧古人, 而疎外若是者乎? 此其可憂者三也。 招賢無收用之實者, 何謂也? 古之帝王至誠求賢, 如恐不及, 或感於夢寐; 或遇於漁釣者, 非特賢其人, 示其褒奬而已, 將與之共天位, 使之食天祿, 俾施澤於蒼生。 故詢之以輿議; 察之以接言; 試之以行事, 果知其爲賢, 則近其人, 而用其計, 使行其道焉。 夫是之謂, 王公之尊賢者也。 今殿下愛士求賢, 視古無愧, 幽貞隱德, 揚仄殆盡, 盛美之典, 近古所罕。 第以論薦之際, 泛言某人可用而已, 行跡之詳, 未嘗陳達。 有司旣失其宜矣, 自上亦不曾親見其人, 察其賢否, 但依例爵之而已。 夫修身篤行, 非以有求也, 山林之間, 豈無不屑爵祿者哉? 士之出處, 固非一端, 有不卑小官者; 有韞櫝不售者。 殿下之招賢, 只命以爵祿而已, 殊無接見、察試、擢用, 行道之實, 故今日以薦擧就職者, 或有爲親而屈者; 或有爲貧而仕者; 或有只爲謝恩而來者, 未嘗聞一人爲行道而出者也。 求賢最是美事, 而其歸不過虛文, 則治道何由可成? 此其可憂者四也。 遇災無應天之實者, 何謂也? 皇天之於人君, 若父母之於子也。 父母怒其子, 發諸辭色則子雖無過, 必倍加齊慄, 承顔順旨, 必得父母之底豫, 乃安於心, 況有過者? 尤當引咎哀謝, 革心改行, 起敬起孝, 必得父母愉悅之色可也, 不當但懷危懼, 拱手閉戶而已也。 帝王之遭天變, 亦如是焉, 反躬自省, 周察疵政, 身無愆矣; 政無闕矣, 亦當益加修勉, 欽若不已, 未嘗以無過自恕也, 況於身有愆, 而政有闕者乎? 必也求言, 以廣知見; 進賢, 以助不逮, 省民以勤撫摩; 革弊以興政治, 必務所以補前過、回天怒可也, 不當遑遑無策, 若有過之子, 拱手閉戶, 以俟父母之怒自息也。 頃年以來, 尋常有災, 人皆狃習, 不知可懼, 只緣白虹貫日之變, 極是陰慘, 故睿念驚惕, 倍加祇畏, 無乃回亂做治之幾, 闖發於今日乎? 因此幾會, 別無修治之擧者何耶? 夫避殿減膳, 畏災之文也, 末也; 進德修政, 畏災之實也, 本也。 文與末, 固不可廢也, 實與本, 今何事耶? 此其可憂者五也。 群策無救民之實者, 何謂也? 法久弊生, 害歸於民, 設策矯弊, 所以利民也。 聖敎有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設百官, 分庶職, 只爲民生而已。 民旣擾蕩, 則國將何賴焉?" 臣伏讀再三, 不覺感激流涕。 大哉, 王言! 一哉, 王心! 此眞安庶民、回天怒之一大機也。 三代以後, 能知君臣之職, 只爲民生者, 有幾君乎? 但徒善非法, 不推; 徒法非善, 不行。 殿下愛民之心固是如此, 而愛民之政, 猶有未擧。 群下之獻策者, 只齊其末, 不揣其本, 故聽之若美, 行之無實。 今日進一計, 請除無名之稅, 而列邑之科斂自若; 明日建一議, 請均田戶之役, 而豪右之逭賦猶舊。 減選上, 將以蘇復公賤, 而偏受其苦者, 流離如昔; 禁防納, 將以不費民財, 而誅求其賂者, 刁蹬愈甚。 劾罷貪吏, 則繼之者, 未必愈於前人, 徒貽迎送之弊; 請擇邊將, 則望重者, 未必愈於新進, 反無忌憚之念。 其他良號之下; 美令之頒, 非一非再, 而州縣只傳數行書札而已, 村民不知其爲某事也。

夫是之故, 君子之進、議論之正, 與夫民生邈不相關, 但曰, 某人官高顯榮, 可羨而已, 未嘗聞某人被用, 其澤及民云爾。 善言之無效, 果如是則雖使滿朝, 讜論盈耳, 何補於民窮財盡, 而四境渙散者哉? 惟是議論一失, 則乃能害及生民, 無所遲滯焉, 嗚呼, 怪哉! 古今所未聞也。 譬如萬間大廈, 久不修理, 大而樑棟; 小而椽桷, 莫不腐朽, 支撑牽補, 僅僅度日, 欲修其東, 則西掣而傾; 欲改其南, 則北撓而壞, 衆工環視, 無所措手。 置而不修, 則腐朽日甚, 將至顚覆, 今日之勢, 何以異此? 此其可憂者六也。 人心無向善之實者, 何謂也? 敎化不明, 民散久矣。 秉彝雖存, 晦蝕殆甚。 聖明臨御之初, 人心聳然, 頗有向善之念。 若於此時, 聖德日進, 治化日昇, 則今日之人心, 豈止於此哉? 第緣初年大臣, 輔導失宜, 誤殿下以淺近之規; 納民生於卑汚之域。 間以本明之心, 發爲公論, 而淸議尙弱, 俗見猶痼, 其聞善言、見善人也, 或有爲人而歆羨者; 或有外悅而中忌者; 或有顯指而非笑者, 中心好之者絶鮮矣。 是故, 良實少而虛僞盛, 在縲絏而被衆救者, 未必無罪; 爲守令而獲衆譽者, 未必有績。 館薦, 本求學行, 而設酒饌而誘多士者; 或有之; 里選, 本求端良, 而棄行檢而昧廉恥者, 或與焉。 若使秉銓之人, 又從而不擇焉, 則淸獨混淆、賢愚雜糅, 弊將難救。 乃若下民飢寒切身, 本心都喪, 父子兄弟, 尙如路人, 他又何說? 綱常不能維持; 刑政不能檢制, 由今之道, 無變今之習, 雖聖賢在上, 施敎無地。 廣擧鄕約, 雖是美事, 臣愚竊恐以今之習, 徑行鄕約, 亦無成俗之效焉。 此其可憂者七也。 凡此七憂, 爲今世之沈痼, 紀綱之頹、民生之困, 職此之由。 七憂未除, 則雖聖心勞瘁於上; 淸議馳騁於下, 亦無保國安民之效矣。 自古以來, 人君失德, 自取敗亡者, 理勢然也, 無足恨者。 今日聖明, 有何失德, 而國勢如此其岌岌乎? 臣雖多病才疎, 自知無補, 而區區血誠, 不後恒人。 入瞻重瞳, 英姿洞澈, 睿議明斷, 而出顧四方, 殿屎愁苦, 蹙蹙靡騁, 未嘗不深怪永歎, 焦心隕涕也。 嗚呼! 病至膏肓, 神醫尙可救; 國至垂亡, 明王尙可興。 當今朝廷尙靖, 權孽屛跡, 四封尙完, 外釁不作, 及今猶可有爲也, 稍緩則後時而無及矣。 孟子曰: "國家閑暇, 及是時, 修其政刑。" 伏願 殿下, 留念, 思所以振起焉。

今進修己、安民之要, 爲祈天永命之術。 修己爲綱者, 其目有四。 一曰、奮聖志, 期回三代之盛; 二曰、勉聖學, 克盡誠正之功; 三曰、去偏私, 以恢至公之量; 四曰、親賢士, 以資啓沃之益。 安民爲綱者, 其目有五, 一曰、開誠心, 以得群下之情; 二曰、改貢案, 以除暴斂之害; 三曰、崇節儉, 以革奢侈之風; 四曰、變選上, 以救公賤之苦; 五曰、改軍政, 以固內外之防。 所謂奮聖志, 期回三代之盛者, 昔者成覵 景公曰: "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彼謂聖賢也。 夫以景公之資, 奮勵自强, 則可與聖賢同歸, 故成覵云然。 孟子梁惠齊宣, 非王道不言; 非仁政不勸。 夫以梁惠齊宣之質, 苟能實行王道, 實施仁政, 則亦可與三王比肩, 故孟子云然。 此豈好爲大言, 不度實效者哉? 伏覩, 殿下資質甚美, 仁足以保民; 明足以辨奸; 武足以斷制。 而惟是作聖之志不立; 求治之誠不篤, 以先王爲不可企及, 而退托自小, 迄無振發之念, 未知殿下, 何所見而然歟? 夫所謂志大才疎, 以敗事績者, 不務修己, 妄擧難行之政; 不度强弱, 妄挑難禦之敵之謂也。 若其修己有實功; 安民有實心, 則可以求賢而共治; 可以革弊而救時, 此豈志大敗事者乎? 程子嘗曰: "爲國而至於祈天永命; 養形而至於長生; 學而至於聖人。" 此三事, 分明人力可以勝造化, 自是人不爲耳。" 信乎斯言。 自古未聞實用其功, 而不見實效者也。 今世之人, 不彊於爲善者, 只是心志爲他物所移耳, 政敎風俗, 有以使之也。 敎化不明, 人欲無窮, 志乎富貴; 志乎嗜慾; 志乎避患。 爲學則道與時乖, 故志富貴者, 遠避焉; 爲學則閑邪窒慾, 故志嗜慾者, 退縮焉; 爲學則毁謗必興, 故志避患者, 求免焉, 此豈非政敎、風俗, 有以使之乎? 殿下則不然, 富貴已極而志道者, 豈非所以長守富貴者乎? 嗜慾必淡而所欲, 豈不在於安社稷、壽國脈乎? 禍患可虞而防患, 豈不在於修一身、靖萬民乎? 殿下何憚而志不立乎? 古語曰: "有志者, 事竟成。" 伏願殿下, 濯去舊見, 以來新意, 奮發大志, 期興至治。 此志旣立然後, 勖勵大臣, 使之糾率百官, 改心易慮, 勉稱其職, 則孰敢因循舊習, 以取不恪之罪哉? 夫如是則時事庶可救; 世道庶可回; 天變庶可弭矣。 所謂勉聖學, 克盡誠正之功者, 大志雖立, 必以學問實之然後, 言行一致; 表裏相資, 無負乎志矣。 學問之實, 布在謨訓, 大要有三, 曰窮理也、居敬也、力行也, 如斯而已。 窮理亦非一端, 內而窮在身之理, 視聽、言動, 各有其則; 外而窮在物之理, 草木、鳥獸, 各有攸宜。 居家則孝親、刑妻、篤恩、正倫之理, 在所當察; 接人則賢愚、邪正、醇疵、巧拙之別, 在所當辨; 處事則是非、得失、安危、治亂之幾, 在所當審。 必讀書以明之; 稽古以驗之, 此是窮理之要也。 居敬, 通乎動靜。 靜時, 不起雜念, 湛然虛寂, 而惺惺不昧; 動時, 臨事專一, 不二不三, 而無少過差。 持身, 必整齊嚴肅; 秉心, 必戒愼恐懼, 此是居敬之要也。 力行, 在於克己。 以治氣質之病, 柔者矯之, 以至於强; 懦者矯之, 以至於立。 厲者濟之以和; 急者濟之以寬, 多欲則澄之, 必至於淸淨; 多私則正之, 必至於大公, 乾乾自勖, 日夕不懈, 此是力行之要也。 窮理, 乃格物致知也; 居敬、力行, 乃誠意; 正心, 修身也。 三者俱修竝進, 則理明而觸處無礙, 內直而義形於外; 己克而復其性初。 誠意、正心之功, 蘊乎身而睟面盎背; 刑于家而兄弟足法, 達于國而化行俗美矣。 朱子曰: "文王正心、誠意之功, 薰蒸透徹, 融液周遍, 南國之人, 服文王之化。" 此豈朱子想像揣摩, 而有是說哉? 的知誠正之功, 必能周遍於國, 故云爾。

伏願殿下, 勿以高遠爲難行; 勿以細微爲可忽。 常於燕居, 不輟學問, 四書、五經及先賢格言、《心經》《近思錄》等書, 循環披讀, 深究其義, 非聖賢之心, 不敢存; 非聖賢之書, 不敢觀。 《玉藻》九容, 仔細體認, 念頭之發, 必審天理、人欲之幾。 如人欲也, 遏絶於未形; 如天理也, 善推而充廣。 放心必求, 己私必克, 衣冠必正, 瞻視必尊, 喜怒必愼, 辭令必順, 以盡誠正之功焉。 所謂去偏私, 以恢至公之量者, 矯治病痛之說, 略陳於前矣。 惟是偏私一事, 古今之通患, 故表而論之。 若偏私之念, 一毫未除, 則難入於之道矣。 今殿下淸明在躬, 病痛固寡, 而偏私一念, 猶未盡克, 恐不能與天地同其大也。 至如頃日內官呈手本之事, 臣在外休告, 未得其詳, 似聞以新生王子, 繫於中殿之下, 政院使改書云。 若然則名稱不可混也, 改書數字, 易於反掌, 宦官何爲不從乎? 後日伏覩傳敎則自上命勿改, 而直下政院云。 臣愚不識事體, 但政院, 旣名喉舌, 則大小之事, 莫不經由。 內殿、外廷, 豈有二體? 若是特出於上命, 則雖微細之事, 是乃傳敎, 何名手本? 旣是內官手本, 則不當不由政院, 而入也。 平心察之, 則其理自明。 政院安知特出聖意, 而不尤內官乎? 殿下不能平心, 大厲聲色, 是疎喉舌, 而親宦官, 使長輕蔑朝臣之漸也。 聖敎曰: "時事多誤, 君上不嚴之故也。" 嗚呼! 刑餘小竪, 敢抗喉舌之臣; 遐遠內奴, 敢希非分之恩; 貴戚乘馬, 遇敎書而不避, 殿下之政, 可謂不嚴矣。 殿下其亦以此自咎耶? 文帝時, 太子過司馬門不下車, 而公車令得以劾奏; 鄧通以寵臣無禮, 而丞相檄召將斬。 若以常情論之, 不敬太子, 無乃輕君上耶? 欲斬寵臣, 無乃擅威權耶? 然而文帝不失人君之威, 而治平之效, 固非今日所可比擬也。 今殿下莫親於近臣, 而乃以宦官爲私臣; 莫衆於庶民, 而乃以內奴爲私民, 此病未除則時事無由可正。 臣恐殿下愈嚴, 而時事愈誤也。 武帝不冠見汲黯, 而避帳中; 太宗臂鷂見魏徵, 而匿懷中。 斯二君者, 道雖不粹, 而政令嚴明, 信賞必罰, 貴戚、閹寺, 莫敢犯法, 亦今世之所不能及也。 然而以君畏臣, 有若不嚴何耶? 此非畏臣也, 乃畏義也。 徒嚴而不畏義者, 未有不敗者也。 殿下其亦自反而思義乎? 且近日憲府所爭之事, 臣雖未知首尾, 固疑憲府契勘不詳也。 何則? 殿下雖未免有私, 必不至毋問曲直, 而與匹夫爭一臧獲也。 群臣計未及此, 可謂智不明矣。 雖然, 殿下旣知其當屬內司, 而猶許竝給, 則尤足以欽仰聖度之宏廣矣。 累日堅執, 無乃臣民疑殿下私吝未消乎? 人君不患不嚴, 而患不公。 公則明, 明則嚴在其中矣。 伏願殿下, 行法始於貴近; 推仁達於衆庶。 宮府一體, 而毋使宦官, 恃近而輕朝紳, 兆民一視, 而毋使內奴恃私, 而窺非望。 內帑付之有司, 不以爲私物, 偏係之念, 絶於方寸; 公平之量, 包涵遍覆。 夫如是則府庫皆財, 何患無用; 率土皆臣, 何患無奴哉? 所謂親賢士, 以資啓沃之益者, 人君之學, 莫善於親近正士。 所見皆正事; 所聞皆正言, 君雖欲不正, 得乎? 若正人不親, 而唯宦官、宮妾是近, 則所見非正事; 所聞非正言, 君雖欲正, 得乎? 先賢之言曰: "天生一世人, 自足了一世事, 非借才於異代。" 今之賢者, 固難其人。 雖然, 極一世之選, 不論出身與否; 不分在朝在野, 則豈無一二可以補袞者乎? 伏願殿下, 博詢精擇, 必得其人。 出身者萃于玉堂, 不移他職; 未出身者, 授之閑局, 帶以經筵職名; 陞堂上者, 亦隨其職, 必兼經筵之官。 參於是選者, 輪日入侍, 使之展布所蘊, 而自上虛己和顔, 受其忠益。 講學則必窮義理; 論治則必求實效。 雖非進講之日, 源源召對于便座, 只令史官俱入, 質問所疑, 宣示淵衷。 至如承旨則例以所掌公事, 一日一度, 各得親稟聖旨; 如大臣及臺諫之言, 則不拘時日, 必入親達, 以復祖宗之規。 夫如是則上下之契日密, 而情意無間; 性理之說日進, 而聖學將就, 交歡有同於魚水; 邪穢罔干於天日矣。 凡此四者, 修己之目也。 大槪如斯, 其詳在殿下加意知行而已。 若夫所謂開誠心, 以得群下之情者, 聖帝明王, 待人處事, 一以至誠, 知其爲君子, 則任之勿貳; 知其爲小人, 則斥之勿疑。 疑則不任; 任則不疑, 坦懷率下, 平平蕩蕩。 爲臣者亦仰之如父母; 信之如四時, 進之則懼不克任, 而益盡其忠; 斥之則自知罪戾, 而只責其身。

故其得人心也, 可以赴湯火; 可以蹈白刃; 可以植遺腹, 朝委裘而不亂, 只知有君上, 而不知有其身。 無他, 至誠所感也。 後之人君, 誠意不足, 只以智力馭下, 所任未必賢, 取其合於己也; 所黜未必不賢, 惡其異於己也。 雖合於己, 而其中未可信, 故任之而不能無疑; 疑之而不能不任。 大臣當國盡職, 則衆情必歸重焉, 安能不疑其專權而擅政乎? 諫官面折廷爭, 則朝野必屬目焉, 安能不疑其賣直而沽名乎? 君子、小人, 以類相從, 安知其孰爲朋黨乎; 善策、邪論, 雜然幷進, 安知其孰爲誤國乎? 於是邪正難分, 是非難辨, 因循則悶其頹墮; 改革則嫌其騷擾。 君心波蕩, 恍然不樂之際, 必有大奸, 潛伺間隙, 隨君心有所左右, 而漸施其巧, 浸潤以入之; 逢迎以悅之; 恐動以惑之, 君心漸信, 陷于術中則良善必殲, 而邦國必喪。 此亦無他, 不誠所致也。 今殿下好善愛士, 固出於誠, 而只緣群臣才德不足, 少可倚信, 故似無委任之意。 至於發言之際, 未免有不信之心, 輕侮之辭, 群臣固所自取也, 聖明亦不可不自反也。 伏望殿下, 務以至誠待下, 心是則言亦稱是; 心非則言亦斥非。 進之則必賞其賢; 退之則必數其過, 聖心如門洞開, 使群下咸得仰見, 無少隔礙。 夫如是則群臣亦無疑畏之念, 務盡其情, 君子有輸忠之願; 小人絶售奸之謀矣。 所謂改貢案, 以除暴斂之害者, 祖宗朝用度甚約, 取民甚廉, 燕山中年, 用度侈張, 常貢不足以供其需, 於是, 加定以充其欲。 臣於曩日, 聞諸故老, 未敢深信。 前在政院, 取戶曹貢案觀之, 則諸般貢物, 皆是弘治辛酉所加定, 而至今遵用, 考其時則乃燕山朝也。 臣不覺掩卷太息曰: "有是哉? 弘治辛酉, 於今爲七十四年, 聖君非不臨御; 賢士非不立朝, 此法何爲而不革耶?" 究厥所由, 則七十年之間, 皆有權奸當國, 二三君子, 雖或立朝, 志不及展, 奇禍必隨, 何暇議及於此哉? 其必有待於今日乎! 且物産隨時或變; 民物田結, 隨時增減, 而貢物分定, 乃在國初, 燕山朝只就而加定耳, 亦非量宜變通之也。 今則列邑所貢, 多非所産, 有如緣木求魚、乘船捕獸, 未免轉貿他邑, 或市于京, 民費百倍, 公用不裕。 加以民戶漸縮, 田野漸荒, 往年百人之所納, 前年責辦於十人; 前年十人之所納, 今年責辦於一人, 其勢必至於一人亦盡, 然後乃已也。 今者語及改正貢案, 則議者必諉以祖宗之法不可輕改。 雖 祖宗之法, 民窮至此, 不可不變, 況燕山之法乎? 伏望殿下, 必擇有智慮可以曉事; 有心計可以推算; 有才能可以幹辦者, 俾之專掌其事, 以大臣領之, 悉除燕山所加定, 以復祖宗之故。 因考列邑之物産有無、田結多少、民戶殘盛, 推移量定, 均平如一, 必以本色, 納于各司則防納不禁自罷, 民生如解倒懸矣。 今日急務, 無大於此矣。 所謂崇節儉, 以革奢侈之風者, 民窮財盡, 今日已極。 貢物不可不減, 而若用度不法祖宗, 則不能量入爲出, 方底圓蓋, 理所不合。 加以風俗之奢靡, 莫甚於今日。 食不爲充腹, 盈案以相誇; 衣不爲蔽體, 華美以相競, 一卓之費, 可爲飢者數月之糧; 一襲之費, 可爲寒者十人之衣。 十人耕田, 不足以食一人, 而耕者少, 食者多; 十人織布, 不足以衣一人, 而織者少, 衣者多, 奈之何民不飢且寒哉? 古人曰: "奢侈之害, 甚於天災。" 豈不信哉? 若非自上先務節儉, 以救此患, 則刑法雖嚴、號令雖勤, 徒勞而無益。 臣嘗記故老之言, 曰: "成廟寢疾, 大臣入問, 則臥內所覆茶褐紬衾, 將弊而不改矣。" 聞者, 至今欽想不已。 伏願殿下, 命考祖宗 朝供奉規例, 宮中用度, 一依祖宗之舊儉約之制, 垂範中外, 以革民間之侈習, 使人羞陳盛饌、羞被美服, 以惜天財、以紓民力焉。 所謂變選上, 以救公賤之苦者, 選上本意, 非欲辦出綿布也。 在京典僕, 不足於立役, 故以在外公賤, 輪立京役, 名之曰選上。 貧殘公賤, 裹糧羈留, 侵苦多端, 有所不堪, 始以綿布償役, 今則只徵綿布而已, 無一人來役者矣。 民生日困, 戶口日耗, 公賤亦民也, 豈能獨完? 展轉流亡, 不能生息, 而一償選上之役, 則其免敗家者鮮矣。 二年納貢, 一年選上, 大率三年, 必一敗家, 而公賤之苦極矣。 加之以該曹色吏, 分定不均, 雖奴婢衆多之邑, 有賂則少定; 雖僅存數口之邑, 無賂則多定, 力不能支, 則侵及一族, 齊民亦被其苦矣。 旣困之後, 雖公明均定, 亦不能救矣, 若不變通, 後患無窮。 臣愚以爲: "改身役而受綿布, 已非《大典》之法, 則今亦可廢選上, 而加身貢也。" 伏望殿下, 命該官詳考奴婢之案, 據其現存之數, 每年奴貢納緜布二匹, 婢貢納一匹半, 都計幾何, 以其五分之二, 儲于司贍爲國用, 以其五分之三, 分給各司, 以準選上之役, 緜布不足則量宜減立役之數。 夫如是則公賤有定貢, 可以預備, 無猝辦之患; 收貢有定簿, 無所刪改, 絶奸吏之術, 號令不煩, 而民受實惠矣。

所謂改軍政, 以固內外之防者, 天變難測, 固不可指爲某事之應, 然以古史驗之, 白虹貫日, 多是兵象。 目今軍政廢壞, 四徼無備, 脫有緩急, 雖以運智; 統制, 無兵可將, 安能獨戰? 念及於此, 心寒膽慄。 時弊旣陳於前, 而軍政則未之詳也, 今請先陳其弊, 後設其策可乎。 我國法制, 多所欠闕。 只設兵使、水使、僉使、萬戶、權管等官, 而無廩養之具, 使之取辦於士卒, 邊將侵漁之弊, 濫觴於此矣。 法制漸弛, 貪暴轉盛, 加以銓選不公, 債帥接武公言曰: "某鎭之將, 其直若干; 某堡之官, 其價若干。" 彼輩徒知割剝軍卒, 以發其身而已, 他又何慮哉? 士卒苦於留防, 願納緜布, 以免戍役者, 必悅而從之, 其留鎭者, 則必督以難堪之役; 責以難辦之需, 使煎熬於膏火之中。 人非木石, 孰不愛身? 見免戍之人, 偃臥其家, 莫不歆羨, 亦效其爲。 若戍役多免, 鎭堡將空, 則必誘近處居民, 使於擲奸之時, 假名代點。 巡按之官, 只閱其數而已, 孰問眞贗? 免戍雖便, 緜布難備, 故數度留防, 家已懸磬, 不能支保, 逋亡相繼。 明年按簿督戍, 則本邑必以一族應役, 一族又逃, 則侵及一族之一族, 禍患蔓延, 無有紀極, 將至於民無孑遺。 而彼所謂債帥者, 方且志滿氣得, 稛載還家, 驕其妻妾, 而貧者以富, 行賂權門, 又圖陞授, 而賤者以貴焉。 今之議者, 不思矯革此弊, 而徒以軍額未充爲憂。 臣愚以爲: "假使軍額悉充, 此弊未革, 則不過添邊將所得綿布而已, 於防備何與哉?" 此, 一弊也。 水陸之軍, 不必留防於所居之地, 或赴於數日之程; 或赴於千里之外, 至有不習水土, 多發疾病者。 旣怵於將帥之侵虐, 又困於土兵之陵暴, 覉旅寒苦、飢飽失時, 南軍之戍北邊者尤甚, 羸瘁顚頓, 面無人色。 此等若遇虜騎, 雖欲逃避, 亦不可得, 坐受魚肉, 況可望控絃而禦敵乎? 臣聞, 黃海騎兵之戍平安者, 一行之費, 必不下三四十疋綿布。 夫三四十疋, 乃村民數家之産也。 一往, 必破數家之産, 安得不窮且盜也? 此, 二弊也。 六年成籍之法, 廢而不行, 癸丑年搜括於久廢之餘。 奉使之臣, 以嚴急幹辦爲能, 州縣承風, 猶恐不及, 只念搜括之或遺, 不計苟充之貽患。 丐乞之人, 無不備數, 鷄犬之名, 亦得載錄, 不出一二年, 太半爲虛簿。 于今二十餘年, 又擧大事, 軍額之闕, 甚於癸丑, 閑丁之鮮, 亦甚於癸丑, 搜括雖巧, 豈能造無麪之不托哉? 今之所刷出者, 非童稚則乞人; 非乞人則士族也, 閑丁之實者, 有幾人乎? 今雖籍軍不日又成, 空簿矣。 該曹非不聞見, 而方且硏硏然以必充爲說, 其不度理勢, 甚矣。 此三弊也。 內外良役, 名目甚衆, 不可枚數, 而其中所謂皂隷、羅將、諸員者, 最其苦役也。 此亦以綿布償役而已, 其所屬之司, 旣以他人代立, 而不時侵督邸吏, 使償役債。 邸吏出息以納, 而歷算所費, 徵其三倍於當身, 故一人每應三人之役, 有所不支, 例徵一族。 此, 四弊也。 凡此四弊, 及今不救, 數年之後,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伏望殿下, 更張舊制, 創立新規。 凡兵、水營及鎭、堡所在處, 必以其邑簿外之穀, 量宜優給邊將之糧, 其邑之穀不足, 則收傍邑之穀, 必使邊將, 有以自奉所需無闕。 而嚴明法制, 尺布斗粟, 使不得斂於軍卒, 只使精鍊器械, 敎習騎射。 兵、水使及巡按之行, 不徒呼名點閱, 必閱其器械, 試其騎射, 視其訓鍊能否, 以爲殿最。 若如前斂債、放卒而發覺, 則治以贓律。 僉使、萬戶、權管等官, 不論南北遠近, 皆付軍職, 使妻子受祿以資生。 初授之時, 必擇其人, 而旣授之後, 五考五上, 則由權管而陞萬戶; 由萬戶而陞僉使; 由僉使而授東班六品之職。 五考之內, 若居中者, 則平遷他鎭, 不得陞授, 使之自惜前程, 有所勸勉。 若其留防則必領其邑之卒, 其邑之卒不足, 然後乃定于傍邑, 而留防所在處, 則諸色良役皆廢, 只存留防之役, 使無遠赴之勞, 而分番迭休。 其在鎭之時, 亦無一毫費力傷財之事, 其應鎭將之使令也, 不過搬柴、運水而已, 他無所與, 使得專意於操弓習射焉。 若黃海騎兵北戍之役則命罷勿爲, 若虞邊備之疎, 則命沿邊守令, 敎民習射, 三月一試, 矢數多者, 厚其賞給, 二度居魁者, 復其家口之役, 若五度居魁者, 軍卒則特補軍官, 擇其中有知識可堪領衆者, 啓其名于該曹, 使補權管, 以試其可用與否。 若公、私賤則啓其名, 特許免賤, 私賤則優給其價于本主。 夫如是則五度居魁者, 其出甚罕, 而邊氓盡化爲精兵矣。 脫有邊警則人各自救, 孰不力戰乎? 上番之軍, 有司亦時試其武才, 其中最優者, 啓達論賞。 五度居魁則特補所居近處鎭堡軍官, 使有鍊業之志。 至如籍兵, 務得實軍, 不爲苟充。 閑丁未滿十五歲者, 但錄其名字、年歲于別簿, 使之待年入籍, 傭食、丐乞人則一切刊落。 列邑軍簿, 姑存舊額, 但錄幾名未充, 而命守令, 休養生息, 勞來不怠, 而隨得隨補, 不限年月, 期以悉充。 且於六年, 例必改籍, 俾無倉卒騷擾之患。

若虞軍卒不足, 不能應諸處之役, 則上番之軍, 量減其數, 猶不足則防歇之處量減其數, 猶不足則南方冬月之留防, 量減其數, 猶不足則步兵之納價布者, 除其半, 以補留防之闕。 留防旣無侵暴之害, 則步兵亦不至如避豺虎矣。 若所謂皂隷、羅將、諸員等則不必各有所屬, 悉廢其名, 皆變爲步兵, 納價布于兵曹。 兵曹量各司立役之數, 以給價布, 則邸吏免不時之侵督, 民間無三倍之暴斂矣。 軍政之善策, 此其大略也。 凡此五者, 安民之目也。 大槪如斯, 其詳在殿下博咨規畫而已。 竊觀, 今之時事, 日就謬誤, 生民氣力, 日就消盡, 殆甚於權奸用事之時。 其故何哉? 權奸之時, 祖宗遺澤, 尙有未盡, 故朝政雖亂, 民力尙支。 今日則祖宗遺澤已盡; 權奸遺毒方發, 故淸議雖行, 民力已竭。 譬如有人少壯之時, 縱酒荒色, 戕害多端, 而血氣方强, 未見所傷, 及其晩年, 戕害之毒, 乘時暴發, 雖謹愼調保, 元氣已敗, 不可支持。 今日之事, 實同於此, 不出十年, 禍亂必興。 匹夫以十間之屋、百畝之田, 傳於子孫, 子孫猶思善守, 以無忝所生, 況今殿下受祖宗百年社稷、千里封疆, 而禍亂將至者乎? 心誠求之, 不中不遠, 力雖不足, 猶可自救。 況今殿下總攬權綱, 明燭事理, 力能救時者乎? 小臣受國厚恩, 百死難報, 苟利於國, 鼎鑊斧鉞, 亦且不避。 況今殿下, 廓開言路, 容受不諱, 手敎之下, 詞旨懇惻。 臣若不言, 實負殿下, 衷情所激, 極言竭論, 而疾病之餘, 神惛手戰, 辭俚語複, 字畫僅成, 無足可觀。 雖然, 其意似遠而實近; 其策似迂而實切, 雖非三代之制, 實是王政之本, 行之有效, 王政可復。 伏望殿下, 詳觀熟閱, 徐究深思, 取舍旣定于聖衷然後, 廣咨廷臣, 議其可否而進退之, 幸甚。 殿下用臣之策, 付之能手, 行之以誠篤; 守之以堅確, 毋爲流俗守常之見所移奪; 毋爲醜正讒間之舌所搖惑。 如是者三年, 而國不振、民不寧、兵不精, 則請治臣以欺罔之罪, 以爲妖言者之戒。

上答曰: "省觀疏辭, 可見君民之志。 善哉, 論也! 古之人無以加焉。 有臣如此, 何憂不治? 深嘉乃忠, 敢不書紳? 第緣事多更張, 不可猝然盡變。" 此疏示諸大臣議處, 且命謄疏以進。 是時人心危疑, 及見疏批答, 衆情大安。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437면
  • 【분류】
    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사(人事)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농업(農業) / 풍속(風俗)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