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송언신 등이 종묘 제도에 대해 올린 상차
대사헌 송언신(宋言愼), 집의 조탁(曺倬), 지평 송석조(宋碩祚)·최홍재(崔弘載) 등이 상차하기를,
"천자와 제후의 예(禮)는 종묘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종묘의 예는 주(周)나라를 따르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진(秦)나라를 거쳐온 이래로는 제왕의 건국이 전쟁에 의한 경우가 많아서 한 시대에 예악(禮樂)을 제정하는 신하가 반드시 모두 경서(經書)와 예경(禮經)에 통달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아쉬운 대로 그럭저럭 넘기면서 유유히 천 년 세월을 지내왔으니 누가 올바른 예법을 따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하므로 선유(先儒)들의 의논이 큰 난을 회복한 뒤를 기다리려 하였으니 그 뜻이 안타까왔습니다.
지금은 중흥하여 다시 창건하는 때인데 성상(聖上)의 생각이 여기에 미쳐 역대의 제도를 상고하라고 명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이러한 연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신(儒臣)이 널리 상고하여 정례(正禮)를 취했고 선유의 정론(正論)에 의거한 것으로 사사로운 견해는 참작하지 않은 채 단지 성인의 제작만을 진술한 것인데, 위에서 좌우의 의논을 수렴하게 하신 것은 취사의 합당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로 가까운 것을 살피고 문의하기를 좋아하여 감히 스스로 천단하지 않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신의 의논도 일체 정례를 따르려는 뜻이 없지 않으니, 해조의 입장에서는 단지 품신(稟申)하여 재가를 얻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먼저 별도의 자기 견해를 내어 감히 묻지 아니한 일을 들추어서 천재 일우의 성대한 일을 문란케 하였습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게 하는 것[責難]을 제일의 일로 여겨야 하고 성취하지 못한 다음에도 오히려 저것이 이것보다 낫다고 진달하는 것은 또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위에서 훌륭한 거조가 있어 삼대(三代)의 정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려 하니, 대단히 구애되는 폐단이 없다면 어찌 감히 후세의 제도를 근거로 대사를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신하들 중에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힌 공이 성명(聖明)만한 이가 누구이며, 옛것을 좋아하고 올바름을 따르는 덕이 성명만한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으신 마음으로 결단하여 다시 해조와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에게 성주(成周)의 훌륭한 제도를 분명히 상고하고 선유의 지극한 의논을 참작한 다음 땅의 형세를 헤아려 간가(間架)를 정하여 대례(大禮)를 이루어 전열(前烈)을 빛나게 하는 한편, 힘써 성인의 제도에 부합시킴으로써 성상께서 평소 강명(講明)하신 의리의 올바름을 마무리지으신다면 선조(先祖)를 받드는 올바른 도리에 흡족하게 될 것은 물론 만세의 칭찬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의 큰 강령을 바로잡고 나면 그 사이의 의문(儀文)·도수(度數)·절목(節目)의 형식은 일일이 옛것을 따르지 못함이 있더라도 크게 해될 것이 없습니다. 삼대(三代)의 예악도 모두 손익(損益)이 있어왔습니다. 어찌 이것 때문에 큰 것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일에 대한 의견이 아래에서 나왔더라도 시행되지 못하면 오히려 유감스러운 것인데 더구나 이 일은 성상에게서 발단되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마침내 제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함으로써 뜻있는 이들로 하여금 천고에 한이 되게 한다면, 신들도 성조(聖朝)의 큰 치화 속에 끼어 있으면서 말하지 아니한 책망이 있게 되어 천고의 죄인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우견을 진달하여 성상의 채택을 바라는 것입니다. 신들은 못내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29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
伏以, 天子、諸侯之禮, 莫大於宗廟; 宗廟之禮, 莫重於從周。 更秦以來, 帝王建國, 多出於戰爭之餘, 一時制禮作樂之臣, 未必皆通經、達禮之人。 因襲謬擧, 姑息因循, 悠悠千載, 孰能從正? 是以, 先儒之論, 欲待大亂恢復之後, 其意戚矣。 今者中興改創之時, 聖慮及此, 命考歷代之制, 是必有見於此。 儒臣博考, 取先王之正禮; 依先儒之正論, 非有參錯私見, 只陳聖人制作, 自上使之收議左右者, 非不知去就之當, 實出於察邇好問, 不敢自專之盛意也。 大臣之論, 亦不無一從正禮之意, 則爲該曹者, 只當申稟取裁而已。 先自別出己見, 敢擧非所問之事, 以亂千載一時之盛事。 人臣責難於君, 當以第一件事, 而至不得成, 然後猶陳之以彼善於此者, 亦出於不得已也。 況今上有盛擧, 欲出於三代之正, 而無大端物礙之弊, 則何敢據後世之制, 以沮大事乎? 今之諸臣, 講學、明理之功, 孰有如聖明; 好古、從正之德, 孰爲如聖明哉? 伏乞聖明, 斷自淵衷, 更令該曹及都監諸臣, 明考成周盛制; 參酌先儒至論, 量度地勢, 開定間架, 闡成大禮, 用光前烈, 而務合聖人之制, 以終聖上平生講明義理之正, 則克愜於奉先之正理, 而萬世有辭矣。 禮之大綱, 旣得其正, 則其間雖有儀文、度數、節目之式, 不能一一從古, 而三代禮樂, 亦皆有損益, 非大害也。 豈可以此, 廢其大者乎。 天下之事, 出於下焉, 而不得行, 猶有所憾, 況此事發端於聖上, 而竟不能將順奉行, 終爲有志者, 千古之恨, 則臣等亦廁於聖朝洪造之中, 而有責不言, 難逃爲千古之罪人。 玆敢陳達瞽見, 冀備聖採。 臣等不勝悚息屛營之至。 取進止。
答曰: "廟制隨時不同, 不必拘泥。 改制太廟, 豈易事? 當初亦有論議不同, 則不必强爲之敎矣。 何必無事而做一場煩辨?"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29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