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제도에 대해 대신들이 의논드리다
예조가 아뢰기를,
"홍문관의 차자에 대한 회계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전교하였으므로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나는 본디 배우지 못하였고 예문(禮文)에는 더욱 어둡다. 종묘 제도의 중한 예법을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의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옛 제도도 세대마다 각기 동일하지 않았으니 우리 나라의 전래된 제도를 굳이 고칠 것은 없을 것 같다. 만약 협착한 것이 걱정이라면 전번 제도에 의거하되 조금 넓히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으니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고,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과단성이 부족하여 정승이 되어서도 건백한 것이 없었다. 】 , 판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은 ‘삼가 유신(儒臣)의 계사를 보건대 우리들도 이의가 없다. 옛 제도는 갑자기 회복하기가 어렵겠지만 이번 기회에 이미 그것이 예법에 어긋난 것인 줄 알았다면 알맞게 참작하여 고치는 것도 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평시 종묘의 제도가 이미 동당(同堂)으로 되어 있더라도 조종(祖宗)의 각 감실(龕室)이 뒤를 등지고 동향(東向)하고 있으니 심히 구차스럽다. 이것이 더욱 논의하여 고쳐야 할 큰 일인 것이다. 주(周)나라는 후직(后稷)을 선조로 삼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세실(世室)이 되었으므로 여러 왕들이 여기에 의거하여 종묘에 들어간다. 지금 영녕전(永寧殿)을 별묘(別廟)로 만들고 종묘도 전일의 제도를 고친다면 지세(地勢)를 반드시 크게 넓혀야 증축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강구하여 예를 정하여 헤아려 조처함이 합당하니 삼가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우스개소리 하기를 좋아하였다. 】 은 ‘태묘의 제도는 해관의 의논에 갖추어졌다. 하조(下條)의 부의(附議)에 시대에 맞추어 적의하게 하자는 뜻까지 겸하여 있으니, 비록 우리가 헤아린다 하여도 어찌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거기에서 말한 바 열성(列聖)의 좌차(坐次)는 내가 평소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누차 사람들과 논의하였던 것이었다. 만일 그 당시 예를 논하던 신하가 별다른 견문이 없고 단지 옛날 종묘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신주는 모두 동쪽을 향한다는 설에 빠져 견강부회하여 이처럼 위배되는 일을 하였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으로 더욱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제도를 논의함에 있어서는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연히 주(周)나라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저번 제도를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는 뜻을 이미 다 진달하였다. 대체로 옛 종묘의 본의는 태조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목의 질서를 중시한 것인데, 지금 제대로 옛법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단지 전각 하나만 전선(前墠)의 아래에 더 설치한다면 이미 옛 제도에 어긋남은 물론 헛되이 일거리만 많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저번 제도대로 두고 좌향(坐向)만 바로잡으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묘우(廟宇)마다 각기 문당(門堂)과 침실(寢室)을 갖추고 담장을 둘러쌓았기 때문에 옛날 주희(朱熹)도 「옛날의 이른바 묘(廟)는 모양이 매우 커서 지금 사람의 묘우와 같지 않았다. 」고 하였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의 세실(世室)은 이미 옛것보다 증가되었다. 지금 태묘의 옛터에 허다한 실옥(室屋)을 용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앞서의 논의에서 먼저 예관(禮官)에게 도형(圖形)을 고찰하여 규격을 정하고 위치의 형세를 살피게 한 다음에 그 가부를 논의하자고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종묘의 제도에 대해서는 선유의 논설이 매우 많으나 주희는 유독 유흠(劉歆)의 논설을 취하여 백대 제왕의 대경(大經)으로 삼은 데에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찌 새로운 의론을 창출하여 선사(先師)의 성헌(成憲)을 요동시킬 수 있겠는가. 삼가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유속(流俗)에 화합하였다. 】 은 ‘종묘의 제도를 개정하는 것은 사체가 극히 중하여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니, 조정의 의논을 널리 거두어 적의한 것을 시행함이 합당하다.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 【권도에 능하였다. 】 은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묘우를 세운다는 것은 진실로 천재 일우의 좋은 기회이나 다만 지세가 협착하여 그 제도대로 만들 수 없다면 저번 제도에다 약간 넓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행 지중추부사 심희수(沈喜壽)는 ‘삼가 유신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예경(禮經)의 본의에 의거했고 선유의 정론(定論)을 지켰으며 성명(聖明)의 아름다움을 만분의 일이나마 받들어 따르려 하였으니 보고 듣는 이가 모두 칭찬하고 있다. 이는 실로 천재 일우의 기회이고 얻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회인데 누가 감히 고금의 제도가 다르고 변방과 중국이 다르다는 누설(陋說)로 그 사이에 용훼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난을 겪어 판탕된 나머지 이러한 영건(營建)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목전의 사력(事力)을 헤아려보고 옛터의 지세를 참고한다면 오묘(五廟)와 도궁(都宮)의 제도는 쉽사리 성취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세실(世室)의 설치도 구애되어 온편치 못한 점이 있을 것 같다. 이것이 해조에서 복계(覆啓)한 가장 하단의 한 조항의 설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아, 애석하다. 전전(前殿)과 후침(後寢)의 규정도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잘못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조를 높이고 소·목을 차례있게 하는 것은 자못 옛 뜻과 부합되니 태조를 외진 한쪽에 두어 제실(諸室)의 등 뒤에 있게 한 것과 비한다면 오히려 이것이 훌륭하다. 더구나 시왕(時王)의 제도를 마땅히 따라 받들어 통행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다만 생각건대 중국의 제도도 논의가 자못 여러 가닥이고 연혁(沿革)도 일정하지 않아서 역시 하나로 주장하여 따르기는 어렵다. 이른바 침전(寢殿)의 뒤에 또 조침(祧寢)이라는 것이 있어서 덕조(德祖)·의조(懿祖)·희조(熙祖)·인조(仁祖) 등 4조(祖)의 신주를 비치하였다는 것은 마치 우리 나라에 영녕전(永寧殿)이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태묘의 제도를 저번 것에서 약간 고친다면 영녕전의 제도인들 유독 고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넓히고 사방 둘레를 증축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완전하게 수선할 도리가 없을 것이니 어찌 매우 난처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전일 진달한 주(周)나라 제도를 따를 수 없다면 차라리 저번 제도대로 두자고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는 병이 있어서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도가 이와 같으니 위에서 재탁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이 우리 나라의 의논과 다른 것 같다. 이렇게 한다면 뒤에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 새로 만든 제도를 좋아하겠는가. 이 일은 아마도 이루기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의 대사는 종묘에 있는데 이것이 올바르게 되지 못한다면 3백의 예(禮)와 3천의 의(儀)도 별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공자가 ‘노(魯)나라에서 교체(郊禘)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주공(周公)의 덕이 쇠미하여졌다.’ 하였고, 또 ‘체제(禘祭)는 강신(降神)한 이후부터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성인이 이렇게 노나라 제사가 비례(非禮)임을 거듭 탄식하였으니, 아, 한스럽다. 묘우를 중건하는 때를 당하여 위에서 동방의 잘못된 점을 일체 바로잡으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공성(孔聖)의 남긴 뜻이 아니겠는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잘못된 점을 고쳐 올바르게 되돌린다면 천 년의 잘못된 제도가 하루아침에 새로워졌을 것이다. 묘당(廟堂)의 논의가 분분하여 귀일되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시대에 맞춘다는 논의가 또 뒤따라 일어나 저해시킴으로써 마침내 선왕(先王)의 예를 밝아지려다가 다시 어두워지게 하였으니 어찌 만세에 수치스럽고 한스러움이 되지 않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24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禮曹啓曰: "弘文館箚子回啓, 議大臣事, 傳敎矣。 議于大臣則完平府院君 李元翼以爲: ‘臣本不學, 於禮文尤懜然。 廟制重禮, 豈與敢論? 但念(者)〔古〕 制, 亦代各不同, 我朝流來之制, 恐不必變改。 若患其狹窄, 則因舊制而稍廣之, 亦無不可。 伏惟上裁。’ 領中樞府事李德馨 【剛果不足, 爲相無所建白。】 、行判中樞府事尹承勳以爲: ‘伏見儒臣啓辭, 臣等亦無異議焉。 古制雖難卒復, 而當此機會, 旣知其謬於禮, 則酌宜變革, 誠不可已。 平時廟制, 旣爲同堂, 而祖宗於各龕室, 背後東向, 甚爲苟簡。 此尤議改之大者。 第周則以后稷爲祖, 而文、武爲世室, 故諸王以此入廟。 今永寧殿爲別廟, 而宗廟又改前制, 則地勢必大加恢拓增築, 乃可議也。 講究定禮, 審度而處之宜當。 伏惟上裁。’ 鰲城府院君 李恒福 【喜爲滑稽。】 以爲: ‘太廟之制, 該官之論備矣。 至下條附議, 兼有權時合宜之意, 雖臣等商度, 亦何所加焉? 其所言列聖坐次, 則臣於平日, 嘗所未曉, 而屢與人商確者也。 若其時議禮之臣, 無他見聞, 而只泥於古者, 廟皆南向, 主皆東向之說, 牽强附會, 乃爲此違背之擧, 則陋謬甚矣, 尤當先正者也。 至論制度, 則臣之前議所云, 當以從周爲正, 不然則寧因舊貫者, 意已盡矣。 蓋古廟本意, 非以尊太祖, 敍昭穆爲重, 則今不能復古, 而只加一殿於前墠之下, 已失古制, 而徒多事耳。 臣故曰, 寧仍舊貫, 而正其坐向。 第慮每廟各具門堂、寢室, 繚以周垣, 故朱熹亦曰: 「古所謂廟, 體面甚大, 非如今人之廟。」 況我朝世室, 已加於古則今不知太廟舊址, 可能容得許多室屋與否也。 故臣之前議所云, 先令禮官, 按圖定式, 相度面勢然後, 議其可否者, 蓋以此也。 宗廟之制, 先儒之論甚多, 而朱熹獨取劉歆之說, 以定百王之大經者, 有以此也。 今豈可創出新議, 以撓先師成憲也。 伏惟上裁。’ 領議政柳永慶、左議政許頊、右議政韓應寅 【和於流俗。】 以爲: ‘改定廟制, 事體極重, 不可輕易爲之。 廣收廷議, 得宜施行爲當。 伏惟上裁。’ 行判中樞府事奇自獻 【權量有餘。】 以爲: ‘據古禮而立廟, 誠千載不可得之機會也。 但地勢狹窄, 若不得以成其制, 則仍舊而略加恢拓, 似不得已。 伏惟上裁。’ 行知中樞府事沈喜壽以爲: ‘伏見儒臣上箚, 據禮經之本意; 守先儒之定論, 欲有以將順聖美之萬一, 凡在聽聞, 莫不稱賞。 此實千載一時, 不可得之嘉會也。 誰敢以古今殊制, 藩、夏異宜之陋說, 而有所容議於其間哉? 但經亂板蕩之餘, 有此營建不容已之擧, 揆之目前事力; 參以舊基面勢, 則五廟、都宮之制, 恐不能容易成就, 世室之設, 亦似有拘礙難便。此, 該曹覆啓最下一款之說, 所由起也, 吁亦戚矣! 前殿、後寢之規, 亦未免同堂異室之謬, 而尊太祖、序昭穆, 頗有古意, 其視太祖僻處一隅, 乃在諸室之背後者, 則猶爲彼善於此。 況時王之制, 固宜遵奉, 而通行者乎。 第念, 中朝廟制, 論議頗多端, 沿革靡常, 亦難得以適從也。 所謂寢殿後, 又有所謂祧寢, 藏德、懿、僖、一〔仁〕 四祖主云者, 猶我國之有永寧殿也。 今我太廟之制, 稍改其舊, 則獨不改永寧之制乎? 若不大加恢拓, 增築四圍, 則似無繕完之理, 亦豈非難處之甚者也? 臣等前日所陳, 不得從周, 則寧仍舊貫者, 凡以此也。 伏惟上裁。’ 鵝城府院君 李山海病不收議。 大臣之意如此, 上裁施行。" 傳曰: "議論似異我國之議。 如此則後必有人言, 而人豈喜新創之制乎? 此事恐難成矣。"
【史臣曰: "國之大事, 在乎宗廟, 於此而不得其正, 則雖三百之禮; 三千之儀, 無足以觀焉。 孔子曰: ‘魯之郊禘, 非禮也。 周公其衰矣。’ 又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 諸聖人之反覆傷嘆於魯祭之非禮, 吁可恨矣。 當廟宇重新之日, 自上有 ‘一正東方之謬’ 之敎, 蓋非孔聖之遺意歟。 將順聖旨, 革非歸正, 則千載謬制, 一朝鼎新, 而廟堂之議, 紛然不一, 權時之論, 又從而沮撓之, 遂使先王之禮, 將顯而復晦, 豈不爲萬世之羞恨也?"】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3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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