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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10권, 선조 40년 4월 7일 기해 3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

예조가 종묘 제도를 아뢰고 대신과 논의하여 재결하도록 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홍문관 차자에 대해 전교하시기를 ‘이 차자는 예조가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는 당초에 예가(禮家)들의 상의에 의해 강정(講定)한 예(禮)가 아니고 단지 한 명제(漢明帝)의 임종시 유조(遺詔)에서 나온 것으로, 지나치게 깍아내려 그것이 비례(非禮)에 빠진 줄을 자신도 몰랐고 또한 이로 인하여 이것이 마침내 종묘(宗廟)의 정제(定制)로 되리라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의 신하 주희(朱熹)는 ‘태조의 신위를 낮추어 자손과 동일하게 하고 다시 한쪽 귀퉁이에 외지게 두었으니 이미 칠묘(七廟)의 존엄함을 볼 수 없다. 여러 묘(廟)의 신위도 위로 조고(祖考)에게 압존되어 그 존엄함을 잃었다.’고 하였고, 심지어 한 명제의 난명(亂命)이라고 배척하면서 그때의 신하들이 구차하게 따른 죄에 대해 누구도 그 잘못을 바로잡은 이가 없었던 것이 한스럽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단절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하였으니 어찌 엄하고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성교(聖敎)에 ‘옛 제도를 모방하여 동방(東方)의 잘못됨을 바로잡음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세대는 달라도 주희의 의사와 부합한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 어찌 선조를 받들어 효도를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러한 논의를 제기한 이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고(前古)에 없었던 왕의 말씀이 한 번 나오니 소문이 들리는 곳에 누군들 감격하여 경복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천재 일우의 기회를 만났으니, 아, 훌륭합니다.

더구나 지금의 묘우 제도는 실(室)마다 오른쪽 벽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모두 동편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만, 옛날의 소(昭)와 목(穆)은 각기 하나의 묘우를 전용함으로써 소는 목을 보지 않고 목은 소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각기 동편으로 향하는 존귀함을 온전히 하였고 서로 압존되는 혐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비록 실(室)을 달리한다 하나 이미 같은 당(堂) 안에 있으면서 단지 벽 하나를 사이로 존엄함을 등지고 앉아 있는데 태조의 신위가 여럿이 등진 가장 뒤쪽에 있습니다. 귀신의 도리로 헤아려본다면 어찌 인간의 정리와 거리가 멀겠습니까. 인간의 정리에 있어 차마 할 수 없는 것으로 선대를 받드는 예(禮)를 삼고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당초 예를 논의한 신하가 어떠한 소견이 있어 그렇게 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정리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외지게 한편 귀퉁이에 있는 것도 오히려 태조의 존귀함을 잃는 것이 되는데 지금은 태조의 존귀함으로 다시 제실(諸室)의 배후에 있으니, 가령 주희가 본다면 또한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이러한 유가 모두 성상의 분부에서 이른바 동방의 잘못이라는 것 중 큰 것이니, 결코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고 비례(非禮)를 편히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는 고증이 정밀하고도 해박하며 의논이 간략하고 적당하며 모두 선유가 이미 강정한 논의이고 전대(前代)에 이미 시행했던 예(禮)로 명확한 근거가 있어 실로 빈말이 아닌 것이니,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지만 하려면 굳이 별도로 다른 학설을 강론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대를 받드는 도리는 선조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선조를 높이는 예는 별묘(別廟)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별묘가 이미 정하여졌다면 대체가 바루어진 것이니, 그 사이의 한두 가지 절목(節目)과 도수(度數)가 시의(時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역시 시대에 따라 손익(損益)을 말하여야 할 것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이 논한 바에 의거하여 먼저 대체를 바로잡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일설(一說)이 있는데, 어떤 이가 ‘옛날에는 문당(門堂)과 침실(寢室)이 모두 평소 사람이 거처하던 가옥이었으므로 그것을 묘우로 삼는 것이 제도였고, 승강하고 수작하는 것이 모두 평일에 행하던 예수(禮數)였으므로 그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또한 예이었다. 그래서 산 이를 섬기고 죽은 이를 섬기는 도리가 둘로 나뉘어지지 않고 통행하여도 폐단이 없었던 것이다. 후세에는 평소에 거처하며 생활하는 것이 옛날과 아주 다른데 오직 묘우의 예만은 굳이 옛 제도를 지키고 있으니 역시 시대에 맞추어 사리를 안다는 논의가 못되는 것이다. 대체만 어긋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명(明)나라의 태묘 제도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산(聖算)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뛰어난 것이어서 정녕 만세의 법이 된다. 그 제도는, 뒤에는 침실이고 앞에는 전당(殿堂)인데, 침실에는 태조가 중앙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昭)의 신주는 좌편에, 목(穆)의 신주는 우편에서 차례로 횡으로 나열하였고, 좌향(坐向)은 모두 남쪽을 향하며 중앙을 위로 삼고 있다. 전당에 나와서는 태조만이 남쪽을 향하는 존엄한 자리에 처하여 있고, 소와 목은 동서로 서로 향하여 순차적으로 남쪽으로 배열되었다. 따라서 밖으로는 앞은 전당이고 뒤는 침실로 한다는 의의에 부합되고, 안으로는 태조를 존경하고 소목을 질서있게 한다는 의의를 살린 것이어서, 옛날 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예의의 뜻에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인정에도 편안하고 사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비록 동당 이실(同堂異室)을 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뜻은 절로 구별이 있고 또 시왕(時王)의 제도이므로 지금 사방 만국에서 우러러 법으로 삼으니 번국(藩國)으로서는 준행하는 것이 예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일고의 가치가 없지 않으나 속론(俗論)에 가까워 경서(經書)에 의거하여 예법을 지키는 선비는 거론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도모하는 도리에 있어 보잘것 없는 미세한 것이라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므로 감히 채택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논의하는 큰 일은 해조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신과 논의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결정해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2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禮曹啓曰: "弘文館箚子, 傳曰: ‘此箚子, 禮曹議啓。’ 事, 傳敎矣。 同堂異室之制, 初非禮家商度講定之禮, 特出於 明帝臨崩之遺詔, 過於抑損, 而不自知其陷於非禮, 亦不料其仍此, 而遂爲宗廟之定制也。 故, 朱熹有曰: ‘使太祖之位, 下同子孫, 而更僻處於一隅, 旣無以見其爲七廟之尊。 群廟之神, 上壓於祖考, 而失其尊。’ 乃至斥爲 之亂命, 而其臣子苟從之罪, 無能正其非者爲恨。 其所以深惡, 而痛絶之者, 蓋不遺餘力, 豈不嚴且懼哉? 頃日聖敎曰: ‘遵倣古制, 以正東方之謬, 不亦宜乎?’ 是與朱熹之意, 異世而同符。 三代以後, 豈不有奉先思孝之時, 未聞有發此議者, 王言一出, 夐掩前古, 聽聞所及, 孰不感激而欽服? 誠千載一時之際會, 猗歟盛哉。 況今廟制, 每室右壁作龕室, 竝東向, 古者昭穆, 各專一廟, 昭不見穆; 穆不見昭。 故, 各專其東向之尊, 而無相壓之嫌。 今則不然, 雖曰異室, 旣在同堂之內, 只隔一壁, 背尊而坐, 太祖最在群背之後。 揆之神道, 豈遠人情? 以人情所不忍者, 定爲奉先之禮, 而不知非。 當初議禮之臣, 不知有何所見, 而違情悖禮, 莫此爲甚。 僻在一隅, 猶以爲失太祖之尊, 今以太祖之尊, 更在群室之背後, 設令朱熹見之, 未知又當如何說也。 凡此之類, 皆聖敎所謂, 東方之謬之大者, 決不可因循謬誤, 而安於非禮者也。 至於玉堂所箚, 考據精博, 議論簡當, 皆先儒已定之論; 前代已行之禮, 灼有可據, 實非空言, 不爲則已, 爲則不必別講他說。 然而奉先之道, 莫大於尊祖; 尊祖之禮, 莫重於別廟。 別廟旣定, 則大體斯正, 其間一二節目, 度數之不合於時宜者, 亦不無因時損益之可言者。 然, 依儒臣所論, 先正其大體, 似不可已。 第又有一說焉, 或者以爲: ‘古者門堂、寢室, 皆平人所居之室屋, 故以之爲廟, 則只是此制; 登降、酬酢, 皆平日所行之禮數, 故以之爲祭, 而亦是此禮。 所以事存、事亡, 道無二致, 而通行無弊者。 後世則平時起居日用, 與古昔絶異, 獨於廟禮, 膠守古制, 亦非權時識務之論。 大體不悖, 則斯可矣。 皇太廟制度, 實出於太祖高皇帝聖算, 高出庶物, 定爲萬世之法者。 其制後寢前殿, 而在寢則太祖居中南向, 昭主在左; 穆主在右, 以次橫列, 坐皆向南, 以中爲上。 出殿則太祖獨居南向之尊, 昭穆東西相向, 以次而南。 外有以合於前堂後寢之義; 內有以寓其尊太祖、序昭穆之意, 不泥古而無失於禮意; 便人情而不乖於事理。 雖不免同堂異室, 而其義則自別, 且時王之制, 當今四方萬國之所仰法者, 藩國遵而行之, 於禮爲宜。’ 云。 是亦不無一蠡之測, 而近於俗論, 據經守禮之士, 所羞言者。 然, 謀國之道, 菅蒯之微, 亦所不遺, 敢以備採擇焉。 然, 議禮大事, 有非該曹之獨擅, 更議大臣, 稟旨定奪, 施行何如?" 傳曰: "允。"


  • 【태백산사고본】 113책 21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2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