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관이 종묘 제도에 관해 올린 상차
홍문관이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역대 종묘의 제도는 자주 바뀌어 일정치 않으나 그 대략을 말씀드린다면 소(昭)와 목(穆)을 순서로 하면서 각기 한 묘(廟)씩 차지하게 한 것이 고제(古制)인데, 같은 당(堂)에 실(室)만 달리하면서 서쪽을 위로 삼은 것은 한 명제(漢明帝)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대개 명제는 유조(遺詔)를 통해 ‘침묘(寢廟)를 짓지 말고 다만 신주를 세조(世祖)의 묘(廟)에 넣으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선왕(先王)의 종묘의 예가 폐지되기 시작했고, 역대로 내려오면서 그대로 답습만 한 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아조(我朝)의 종묘 제도 역시 이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고 미처 재량하여 바로잡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송유(宋儒) 주희(朱熹)는 말하기를 ‘명제는 예의의 올바름을 모르고 억제하여 줄이는 것이 좋다는 개인적인 견해에만 집착했다. 그리하여 그 폐단이 심지어는 태조(太祖)의 신위를 아래로 자손과 함께 한 구석에 두게 하는 결과를 빚게 하였고 뭇 사당의 신주(神主)가 위에 조고(祖考)를 누르고 있는데도 하나의 사당도 따로 만들지 못하도록 되었다. 따라서 그 태조를 받드는 것이 이미 무엄하게 되고 어버이 사당을 모시는 데 존엄성이 없어졌으니, 모두가 돌아가신 분을 살아계신 것처럼 섬기는 도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제도에 있어서는 소묘(昭廟)에 신위를 부(祔)하여도 목묘(穆廟)의 신위는 변동되지 않았고 목묘에 부하여도 소묘의 신위는 변동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일실(一室)에 신위를 부하면 뭇 실(室)의 신위를 모두 옮겨야 한다. 또 옛날의 협제(祫祭)는 모두 실내에서 지냈는데, 지금은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당 위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모두 예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한(東漢) 이래의 같은 당에 실을 달리하는 제도는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법이 아닌 것으로 실로 천 년 동안 잘못 거행해 왔던 것임이 선유(先儒)의 말씀으로 확연히 드러났다 하겠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고자 하는 임금과 경전(經傳)에 의거하여 예를 지키려는 신하가 이를 변혁하여 옛날 제도를 따르려고 했던 경우가 돌이켜보면 또한 적지 않은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대로 이끌려서 모두 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옛날 제도를 대략 모방한 적도 있긴 하였으나 시행하자마자 바로 폐지되어 다시 옛날 제도처럼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국운(國運)을 다시 빛나게 하시면서 먼저 종묘를 세우시고 개연(慨然)히 옛날 제도대로 준수하려는 뜻을 갖고 계시니 매우 훌륭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 등은 모두 형편없는 자질로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예를 잘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망령되이 논의하겠습니까. 그러나 옛날에 이미 행하였던 예와 선유가 이미 정해 놓은 의논들을 반복해서 참작하고 논의하여 재정(裁正)을 품달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부응할까 하니, 이 또한 신 등의 구구한 지원(至願)이라 하겠습니다. 신 등이 삼가 왕제(王制)를 살펴 보건대, 천자는 7묘이니 3소(昭) 3목(穆)에 태조의 묘를 합쳐 7묘이고, 제후는 5묘이니 2소(昭) 2목(穆)에 태조의 묘를 합쳐 5묘가 됩니다. 그 제도를 보면 밖에 도궁(都宮)을 짓고 안에는 각각 묘가 있는데, 태조의 묘는 북쪽에 있으면서 중앙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소묘(昭廟)는 동쪽, 목묘(穆廟)는 서쪽에 위치하여 서열대로 늘어서 있는데, 묘는 모두 남향이고 문과 당(堂)과 실(室)과 침(寢)과 그리고 협실(夾室)이 있으며, 담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태조의 신위는 백세토록 불천(不遷)하며 소묘와 목묘는 한 세대마다 한 위씩 옮기는데, 소의 신위는 항상 소가 되고 목의 신위는 항상 목이 되어 밖으로는 그 차례를 잃지 않고 안으로는 그 존엄성을 각기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예경(禮經)》에 명백히 기록된 것으로 삼대에 똑같이 행하였던 것입니다.
선유가 말하기를 ‘삼대의 제도에 대해 지금 상세히 상고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주례(周禮)에 대해서만은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는 찬란한 문물이 주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기 때문이니 만일 옛날 제도를 회복하려면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는 것보다 올바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나라는 태조묘를 북쪽에 두어 영구히 옮기지 않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세실(世室)을 만들어 역시 영원토록 옮기지 않았는데, 동북쪽에 있는 세실을 소세실(昭世室)이라 하여 무왕의 신위를 모셨고, 서북쪽에 있는 세실을 목세실(穆世室)이라 하여 문왕의 신위를 두었습니다. 세실의 남쪽으로는 왼편에 3소를 두고 오른편에 3목을 두었는데, 성왕(成王)·소왕(昭王) 이하 임금의 신위는 목묘에 번갈아 두고, 강왕(康王)·목왕(穆王) 이하 임금의 신위를 번갈아 소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묘의 신주가 친진(親盡)이 되면 무세실(武世室)의 서편 협실에 안치하고 목묘의 신주가 친진이 되면 문세실(文世室)의 서편 협실에 안치하였습니다. 주가(周家)의 제도는 그 대략이 이러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기(禮記)》에는 ‘노공(魯公)의 묘는 문세실로 하고 무공(武公)의 묘는 무세실로 한다.’ 하였으니 이는 노(魯)나라 역시 주나라 제도를 모방했던 것으로 노공과 무공처럼 공덕(功德)이 있는 분은 천묘(遷廟)하지 않도록 하면서 주나라의 문·무세실에 비했던 것입니다. 대개 천자와 제후의 종묘가 그 등급에 있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위치와 옮기는 순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주나라는 3소와 3목 이외에 문왕·무왕이 묘가 있었고, 노나라는 2서와 2목 이외에 노공·무공의 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훌륭한 공덕이 있었던 임금이라면 문과 무를 이어 종(宗)이 될 수 있는 것이니, 미리 그 사이에 수를 정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희 역시 주나라 종묘의 도식을 만들어 송나라의 예를 정하면서 그 설을 도식에 붙이기를 ‘본조(本朝)도 이와 같이 종묘를 세워야 마땅하다. 인종(仁宗)은 별도로 태종(太宗)묘의 동편에 세실을 세우고, 고종(高宗)은 별도로 인종묘의 동편에 세실을 세워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새로 세실을 세우게 될 때에는 이전 세실의 곁에 세워야 하는데, 소실은 차례대로 동쪽에, 목실은 차례대로 서쪽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세실은 종(宗)을 공경하기 위한 것인데 종은 정해진 수가 없으며, 소실과 목실은 친(親)을 받들기 위한 것인데 세대가 내려오면서 친의 분수가 감해집니다. 우리 나라 종묘는 모두 10실인데, 다만 고례(古禮)의 5묘에 대한 조문만 거론하고 세실의 제도는 논하지 않는다면 절차가 어긋나게 되어 옛날 제도를 회복하려는 의논이 끝내 수습되기 어려운 것이니, 반드시 먼저 이 점을 강론해야만 종묘를 만들면서 《예경(禮經)》의 뜻에 배치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형과 아우가 서로 계승할 때는 1세(一世)가 된다는 설은 이미 선유의 정론이 있는데, 《통전(通典)》을 상고해 보면 ‘현재의 묘에 감실(坎室)만 더 설치한다.’는 조문이 있으니, 같은 묘에 실만 달리한다는 뜻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주나라 제도와 주자의 의논을 따라 일단 태조묘를 세워 기업을 일으킨 분의 신위를 봉안하고 또 세실을 만들어 불천(不遷)하는 신위를 봉안하는 한편, 2소와 2목이 항상 4친(四親)이 되게 하고 형제가 계승했을 경우 한 묘에 있게 한다면, 세실은 2소·2목의 수와 관계없으니 태조묘에 2소·2목을 합할 때 5세(世)가 된다는 조문과 합치된다 하겠습니다. 세대마다 옮기는 절차에 대해서는 건립할 묘의 숫자나 현재의 방식을 옛날과 비교해 볼 때 그다지 구애되거나 통용되기 어려운 우려는 없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더 살피시어 만일 신 등의 말이 오활하고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시거든 속히 예관에게 명하여 자세히 참작하게 함으로써 모두 전례(典禮)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그렇게 되면 장차 천재(千載) 동안 거행되지 않았던 전례가 전하로 말미암아 다시 행해지게 되고 만세(萬世)의 좋은 법이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행해지게 되어 종묘의 신령을 편케 해드려 국가의 복을 영구히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동방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하니, 이 차자(箚子)에 대해 예조는 의논하여 아뢰라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3책 20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15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왕실-종사(宗社)
○弘文館〔箚曰〕 :
伏以, 歷代廟制, 紛更非一, 而其大略, 則序以昭穆, 各專一廟者, 古之制也。 同堂異室, 以西爲上者, 漢 明帝所由始也, 蓋明帝遺詔, 勿起寢廟, 但藏其主於世祖廟。 先王宗廟之禮, 自此始廢, 而歷代因之, 終莫能改。 我朝廟制, 亦或沿襲于此, 有所未及裁正也耶? 宋儒朱熹以爲: "明帝不知禮義之正, 務爲抑損之私。 其弊至使太祖之位, 下同子孫, 而僻處一隅; 群廟之神, 上厭祖考, 而不爲一廟。 其所以尊太祖者旣褻; 事親廟者不尊, 是皆無以盡其事生事存之道。 且如古制則(附)〔祔〕 昭而穆主不動; 祔穆而昭主不動, 今則附一室, 而群室皆遷。 古之祫祭, 皆於室中, 今以迫狹, 祫於堂上, 皆非禮也。" 然則東漢以來, 異室同堂之制, 殊非三代之美法, 而實是千載之謬擧, 先儒之說較然明甚。 自古及今, 奉先思孝之君; 据經守禮之臣, 欲有所變革, 以從古制者, 顧亦不小, 而依違牽制, 皆所未遑。 其間雖或有略倣舊制, 而旋立旋廢, 不復如古。 今我殿下, 重熙邦運, 首建宗廟, 慨然以遵倣古制, 爲意甚盛擧也。 臣等俱以無狀, 待罪經幄, 不能知禮, 何敢妄議? 然, 請以前古已行之禮; 先儒已定之論, 反覆推議而稟裁, 正以將順聖美於萬分之一。 此亦臣等區區之至願也。 臣等謹按《王制》, 天子七廟, 三昭三穆, 與太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 與太祖之廟, 而爲其制則外爲都宮, 內各有廟, 太祖之廟在北而居中, 群昭在東; 群穆在西, 列序以次, 廟皆南向, 有門有堂; 有室有寢, 且有夾室, 而墻宇四周。 太祖則世不祧, 昭穆則一世一遷, 昭常爲昭, 穆常爲穆, 外有以不失其序; 內有以各專其尊。 此, 禮經之明文, 三代之所共由者。 先儒曰: "三代制度之詳, 今不可考。 獨於周禮, 猶有可言。" 蓋郁郁之文, 至周始備。 如欲復古, 則孰如從周之爲正乎? 周以太祖居北, 而百世不遷。 文王、武王爲世室, 而亦百世不遷。 世室之在東北者, 謂之昭世室, 武王居之; 在西北者, 謂之穆世室, 文王居之。 世室之南, 左爲三昭; 右爲三穆, 成王、昭王以下之主, 迭居于穆廟; 康王、穆王以下之主, 迭居于昭廟。 昭廟之主親盡, 則藏于武世室之西夾室; 穆廟之主親盡, 則藏于文世室之西夾室。 周家之制, 其大略不過如此。 記曰: "魯公之廟, 文世室也; 武公之廟, 武世室也。" 魯亦倣於周制, 以魯公、武公爲功德不毁之廟, 而比周之文、武世室也。 夫天子、諸侯之廟, 雖降殺以兩, 而位置遷次, 無甚異者。 周於三昭三穆之外, 有文王、武王之廟; 魯於二昭二穆之外, 有魯公、武公之廟。 苟有功德茂盛之君, 則可以繼文、武而爲宗, 不可預爲設數於其間也。 朱熹亦爲周廟之圖, 擬定宋朝之禮, 以附其說于圖曰: "本朝當以此立廟。 仁宗別立世室於太宗之東; 高宗別立世室於仁宗之東。" 然則凡新立世室者, 當在於前世室之傍, 昭則以次而東; 穆則以次而西也。 大槪世室, 所以敬宗, 而宗無定數; 昭穆, 所以尊親, 而親親有殺。 我國宗廟, 通爲十室, 而只擧古禮五廟之文, 不論世室之制, 則節次牴牾, 復古之論, 終難收殺, 必須先講于此, 方可爲廟, 而不背於禮經之意也。 況兄弟相繼, 名爲一世, 先儒已有定論。 考諸通典, 有可就見 ‘廟直增坎室, 之文, 其爲同廟室異之意, 蓋可見矣。 若依周家之制、朱子之議, 旣立太祖之廟, 以安基業之主; 又爲世室, 以奉不遷之位, 二昭二穆, 常爲四親, 兄弟相繼, 共爲一廟, 則世室不與於二昭二穆之數, 太祖之廟與二昭二穆, 正合五世之文。 其立廟多少之數、世代遷次之節, 由今準古, 似無拘礙難通之患也。 伏願聖明, 更加睿裁, 倘不以臣等之言, 爲迂闊而無稽, 則亟命禮官, 使之詳酌, 悉依典禮。 將見千載曠典, 由殿下而更擧; 萬世良法, 自今日而始行, 庶安宗廟之靈, 以永家邦之福, 豈非東方一大幸也? 伏願聖明, 留神焉。
傳曰: "此箚子, 禮曹議啓。"
- 【태백산사고본】 113책 20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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