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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체찰사 한효순과 북로·남왜의 방어, 병졸 훈련·기계 수리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

묘시(卯時)에 상이 체찰사 한효순(韓孝純)을 인견하였다. 상이 효순에게 이르기를,

"경은 전부터 오랫동안 외임(外任)으로 수고하였는데, 지금 또 다시 체찰의 임무를 맡기니 사뭇 미안하다. 그러나 국사가 이와 같으니 더욱 힘써서 아는 것이 있으면 모두 말하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성취하라."

하니, 효순이 아뢰기를,

"신이 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를 맡아 밤낮 걱정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맡은 책무에 실수라도 있으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도(諸道)를 호령하는 것이라 체면이 몹시 중하니, 반드시 대신이 총괄하여야만 원만히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닌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경은 어떻게 조처하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묘당(廟堂)의 구획(區畫)도 이미 극진하고 북도(北道)의 방비도 이미 완전한데, 다만 북방에서 오는 사람을 통해 듣건대 직첩(職帖)으로 기미책을 쓴 후로는 민심이 해이해졌다고 하니 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신(告身)을 주는 그 한 가지 일을 믿고 방어를 게을리한다면 매우 불가하다. 제도(諸道)의 문부가 이미 경에게 도착하였는가?"

하니, 아뢰기를,

"아직 도착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어에 관한 일은 그 조치가 얼마나 되었는가. 반드시 얼음이 얼기 전에 속히 해야 할 것이다. 얼음이 얼게 되면 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경이 체찰사가 되었으니 문부가 의당 도착하여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도착하지 않고 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처음 들어올 때 조카 한준겸(韓浚謙)이 바야흐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행공(行公)하지 못하다가 준겸이 체차된 뒤에 비로소 제도에 행문(行文)하였으므로 미처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멀어서 그럴 것이다."

하니, 효순이 아뢰기를,

"이 오랑캐에게 이미 고신을 주어 기미책을 썼으니 아마도 명년 사이에는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깊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에 대적(大賊)이 나왔을 때 그 형세가 하늘에 치닿았었는데 한 번 교전(交戰)도 해보지 못하고 군사가 모두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당시 흩어져 도망친 군사들을 처벌하자면 모두 다 처벌할 수 없었으므로 인심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여 군율(軍律)을 쓰지 않았는데, 그후 전례가 되어 불러서 오지 않는 자도 처벌하지 않고 도주한 자도 처벌하지 않고 무너져 흩어진 자도 처벌하지 않아 이것이 점차 나태한 습성을 이루어 끝내는 한 차례의 전공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군사를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하고 훌륭한 장수를 얻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어찌 한 차례도 싸우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군율이 해이하여 용감하게 목숨을 바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먼저 무너진 것입니다. 대개 근본적인 것은 호령과 기강에 달려 있는 것인데 지금은 기율의 해이가 너무도 심하니, 혹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지난날과 같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졸이 많고 병기가 완비되었다 하더라도 기율이 없으면 반드시 패망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은 유사(有司)가 스스로 감당해 낼 수 있겠으나 이 한 가지 일은 반드시 조정의 각별한 신칙을 요합니다. 군사로서 무너져 흩어지거나 도주하는 자는 반드시 중률(重律)을 적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옛 습성을 고치고 스스로 분발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 연후에야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일의 계사(啓辭)에 이미 진달하였으나 반드시 면전에서 여쭙고자 한 것은 특별히 사목(事目)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범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나아가면 죽음만 있고 물러나도 벌칙을 가하지 않으니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습니까. 군졸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장수가 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수도 없고 군사도 없으면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 의논하는 자들은 군량이 고갈된 것으로 걱정을 하나 오늘날의 사세로 보면 축적한 군량이 많다 하더라도 기율이 확립되지 않으면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유년에 신이 체찰 부사(體察副使)로 되었었는데, 왜적이 호남(湖南)으로부터 호서(湖西)로 넘어왔습니다. 이시언(李時言)은 충청 병사(忠淸兵使)로서 도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은(報恩) 지역에 주둔하고 내포(內浦)의 군사도 모두 그를 따랐습니다. 이때 신은 내포에 있었는데 종군하는 군사가 모두 집에 편지를 부쳐 함께 도피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 안 되어 과연 모두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그때 군관(軍官)들이 말하기를 ‘출신자(出身者)들이 모두 본가로 돌아갔다.’고 하기에, 신이 곧 사람을 시켜 부르기를 ‘오지 않으면 참(斬)하겠다.’ 하고, 또 조정에서 중률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어떤 여인이 신에게 정소(呈訴)하기를 ‘내 아들도 도망친 군졸에 속하는데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무너져 흩어진 군졸을 모두 처벌한다 하니, 내 아들도 의당 법에 의해 처형될 것이다. 미태(米太) 5백 석을 관에 바치고 속죄할 것을 원한다.’고 하기에, 신이 곧 허락하고 위에 아뢴 다음 성첩(成貼)하여 주었습니다. 8일 후에 그는 다시 장계(狀啓)를 가지고와서 호소하기를 ‘서울에 올라가 들어보니 무너져 흩어진 군졸은 2석의 쌀로 속죄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2석으로 속죄하는데 나만이 유독 5백 석으로 속죄하는 것이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 이로 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찾아왔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군대는 사지(死地)인 것입니다. 만약 2석의 쌀로 사명(死命)을 바꿀 수 있다면 누가 군율을 두려워하여 사지로 나가려 하겠습니까. 기율이 없으면 한두 사람이라도 다스릴 수 없는데 더구나 천만 명의 군사를 어떻게 말로만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제일 상책은 기강을 확립하고 호령을 엄히 하는 데 있고 다른 일은 모두 그 다음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다 옳다. 또 말할 것이 있는가?"

하니, 아뢰기를,

"병가(兵家)에 의하면 반드시 먼저 가르친 후에 썼고 가르치지 않고도 잘 쓴 자는 있지 않습니다. 근자에 우리 나라가 《기효신서(紀效新書)》로 사졸을 훈련시키고 있으나 또한 실효(實效)가 없었습니다. 이른바 속오군(束伍軍)은 그 제도가 자못 다르고 기타 잡군(雜軍)에 이르러는 속오군보다도 더욱 형편없습니다. 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은 왜적을 방어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으니, 반드시 오랑캐를 방어하는 방법으로 규정을 고쳐 가르친 후에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정미로움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정미롭다는 것이 어찌 연소하고 용맹한 자를 말하겠습니까. 이는 곧 훈련된 군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랑캐를 방어하는 계책은 성을 지키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성을 지키는 군졸 또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를 훈련시키면 성을 지켜도 견고하고 들에서 싸워도 승첩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훈련시키지 않은 군사야 어디에 간들 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군사는 반드시 훈련시킨 후에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 역시 옳다. 대개 이 오랑캐의 형세가 경이 보기에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랑캐의 걱정이 이에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서 노추(老酋)가 일어나 여러 부락을 노략하자 회령(會寧) 서쪽의 번호(藩胡)들이 모두 그의 제압을 받은 바가 되어 혹은 근지(近地)로 옮기기도 하고 혹은 휘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드디어 강성해졌는데 지금 홀온(忽溫)이 또한 노추의 일을 답습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근래 호로(胡虜)가 할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그 흉모를 보면 장차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를 병합하여 모두 휘하에 넣은 후에야 그만두려고 합니다. 군사가 많으면 세력이 자연 강해지는 것이고 세력이 강해지면 끝내 우리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금년이나 명년에 대거 나올 지는 기필할 수 없으나 훗날의 걱정은 이루 형언하지 못할 점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쪽 오랑캐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하기를 항상 적이 이른 듯이 함이 좋을 것이다. 일시에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일진(一鎭)이 함락되면 그 형세가 위급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오랑캐의 형세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용병(用兵)은 잘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동관(潼關) 싸움에 승세를 타고 전진하여 인근의 잔약한 진보(鎭堡)를 함락하였다면 일이 몹시 수월하였을 것인데 동관만 함락시키고 급급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으며, 또 건퇴(件退)의 싸움에서도 민심이 저상되었을 때를 틈타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납치되어 들어간 자가 있으니 우리의 허실을 알 수 있고 7∼8월 사이에는 군사를 보충하지 못하여 방어 또한 허술하다. 적이 이 틈을 타서 군사를 몰고 나오면 지혜로운 자도 미처 꾀를 내지 못하고 용맹한 자도 미처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병갑(兵甲)을 거둔 채 끝내 나오지 않으니, 나의 짐작에는 아마도 호걸스러운 자가 아닌 것 같다. 진실로 힘을 합쳐 급히 공격하여 일진(一陣)을 함락하고 용성(龍城) 등지에 진을 친 다음 요새를 장악하면 육진(六鎭)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도 믿을 곳이 없게 될 것인데, 오랑캐가 이렇게 거사하지 않으니 그 지모가 천단(淺短)하다."

하니, 아뢰기를,

"그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알 수 없으나 우리를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대거 출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명년 봄 농사를 지을 때 군사를 나누어 출몰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면 몇해가 못 되어 육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또 그들이 기계(奇計)를 내어 삼수(三水)갑산(甲山)을 거쳐 곧바로 함흥(咸興)으로 나오면 민심이 무너져 사세가 몹시 어려울 것인데, 오랑캐가 무슨 계책을 쓸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아뢰기를,

"이 오랑캐는 토지를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이런 계교는 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짐작도 그러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계책이 있으니 소추(小酋)는 곧 저 오랑캐의 처부(妻父)인데 합세하여 동과 서로 상응하면서 평안도의 강변 일대를 침범하면 우리 나라의 병력이 반드시 분열될 것이다. 평안도에 귀화한 호인(胡人)을 일체 금단시켜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이 역시 경의 소관 지방의 일이기 때문에 이르는 것이다.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소를 잃은 후에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으니, 이것이 항상 소를 잃는 걱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하교하신 계책에 대해서는 이 오랑캐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세가 바야흐로 강성하고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철기(鐵騎)로 성 한둘을 함락하고 명천(明川)과 길주(吉州) 사이로 진군하여 오면 사세로 보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로 이를 막아 내는 자가 없으면 반드시 깊이 침입하는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서울에까지는 이르니 못한다 하더라도 함흥(咸興) 등지에 침입하여 인민과 가축을 약탈하여 돌아간다면 국가의 치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적의 진퇴를 예측할 수 없으니 오직 방비를 갖출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일로 보면 군졸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재(將材) 또한 모자랍니다. 무사(武士) 가운데 문벌이 있는 자제로서 조금이라도 사진(仕進)할 수 있는 형세가 있는 자면 분경(奔競)만을 힘쓰고 병법(兵法)이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무리 중에서 구하니 어떻게 양장(良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군졸이란 모두 농민인데 간혹 습진(習陣)을 시킨다면 이는 밭고랑 사이에서 몰아내다가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을 훈련이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옳다. 병법의 설을 어찌 위료자(尉繚子)만이 말하였겠는가. 대개 장수가 된 자는 반드시 엄해야 한다. 만약 엄하지 않다면 인지(仁智)가 있다 하더라도 장수가 아니다. 또 군졸로 하여금 나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면 잘 하는 것이다. 만약 나를 두려워 아니하면 어찌 무릅쓰고 사지로 달려갈 리가 있겠는가. 옛날 일은 고사하고라도 최영(崔瑩)의 일로 말하건대, 그는 일보를 퇴진하는 자도 반드시 참하였기 때문에 싸움에 임할 때마다 모두 승첩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왜노(倭奴)들의 말이 ‘고려에는 두려운 자가 없는데 오직 백발의 최 만호(崔萬戶)가 오면 제군(諸軍)이 돌격하여 오니 이것이 두렵다.’고 하였다. 마속(馬謖) 역시 제갈양(諸葛亮)이 아끼는 장수였는데, 참수에 임하여 구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제갈양은 눈물을 흘리면서 참하였다. 마속이 군령은 어기기는 하였으나 그 장재(將材)로 말한다면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이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참하고 말았으니 옛사람들의 용법(用法)이 이와 같이 엄하였다. 도망한 군사에게 쌀을 바치게 한 일은 나 또한 알고 있다. 당시 도망한 자가 많아 베려 하여도 다 베일 수 없었고 또 중국군이 때마침 군량이 고갈되었다고 하여 경솔히 쌀을 바치는 일로 처리하였다. 무너져 흩어진 군사가 쌀만 마련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태연히 ‘내가 도망쳐 왔으나 쌀 섬이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고 하니, 이것이 국세가 어려워 한 일이지만 요는 우리 나라의 군령이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내가 일렀거니와 임진년의 왜적을 박홍(朴泓)이 능히 감당할 수 없었으나 박홍이 임소에 있었다면 성취한 일이 있었을 것인데 감히 평양(平壤)으로 달아났고 비변사(備邊司)는 그를 대동강의 수장(守將)으로 삼았다. 나는 이때 박홍의 죄는 반드시 베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끝내 참하지 않았으니, 비변사의 공사(公事)는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아도 기타를 모두 알 수가 있다. 지금 사책(史冊)에 쓸지라도 어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를 대동강 수사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하니, 아뢰기를,

"왜국 역시 8도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국은 8도라고 하더라도 66주(州)일 뿐이니 우리 나라 3백의 주군(州郡)에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천하를 놓고 볼 때 우리 나라는 점 하나와 같다. 육진(六鎭)의 형세가 이미 무너지고 서쪽 지방 또한 보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으니 서북도의 일은 극히 염려된다. 금년에는 육진의 농사가 부실하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약간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다행한 일이다. 평안도는 대풍이라 하던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청천강(淸川江) 서쪽은 농사가 매우 풍년이나 남쪽은 그리 풍년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간 고을은 풍년이 들지 않은 것 같으나 해변 고을은 모두 대풍이라 한다. 함경도는 육진은 좀 여물었으나 남도는 흉년이라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아뢰기를,

"남도 역시 큰 흉년은 아니라 합니다."

하고, 효순이 또 아뢰기를,

"왜구는 천하의 강적이라서 당해 낼 수 없으나 군병을 잘 다스린다면 이 오랑캐야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중원의 연병(練兵) 정책 또한 우리 나라처럼 허술하지 않기 때문에 동서로 정벌하여 모두 승첩을 고합니다. 지금 노추(老酋)가 강성하게 일어났고 홀적(忽賊)이 이어 일어나 군병을 다스려 자강할 줄 아는데, 우리 나라만이 유독 군병을 다스리지 않아 모욕을 당하니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비록 군병을 많이 뽑을 수는 없으나 3만 인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한강(漢江) 이남은 2만 명을 뽑아 훈련시키고 한강 이서는 1만 명을 뽑아 훈련시켜 극히 정예로운 군사를 만들어서 남쪽에 경보가 있으면 남쪽을 방어하고 북쪽에 경보가 있으면 북쪽을 방어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경성을 수호하고 또 그 나머지로 잡군(雜軍)를 만들면 위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3만 명의 군병을 쉽게 얻지 못하면 2만 명의 군병이라도 가합니다. 만약 군병을 훈련시킨다면 어찌 패망하는 모욕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급선무는 군병을 다스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장수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무인(武人)들은 대부분 글을 알지 못하니 어찌 《육도(六韜)》·《삼략(三略)》에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 군사를 훈련시킬 때 그 공궤(供饋)하는 것을 폐단으로 삼는데, 그 도(道)로 하여금 각각 그 도의 군병을 배양하도록 하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아군은 위축되어 있고 적로(賊虜)는 강성한데 변방의 방비가 탕패하여 하나도 믿을 곳이 없으니, 적중(賊中)에 호걸스런 자라도 있으면 화가 필시 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오랑캐는 호걸스럽지 못하지만 이 오랑캐의 족속과 자손 가운데 호걸스런 자가 생겼는지를 알 수 없다. 자고로 중국이 불행하면 이적(夷狄)에 반드시 호걸스런 자가 나서 큰 걱정이 되어왔다. 또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내가 알지 못하는데 조종조 때에도 서북도의 오랑캐 가운데 이와 같이 호걸스럽고 강포한 자가 있었던가?"

하니, 아뢰기를,

"실록청 당상을 겸임한 조신(朝臣)이 혹 말하기는 합니다만, 신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이런 호로(胡虜)가 있었는지 신은 실로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고사를 모르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옛날에 없던 것이 오늘날 처음 나왔단 말인가? 근래의 재변은 몹시 놀라운데 만약 어느 일에 대한 보응이라고 지적하면 이는 고집스런 생각일 뿐 아니라 또한 매우 무리하다. 그러나 앞날의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니, 아뢰기를,

"신이 전에 평안도에 있을 때 잠깐 들었는데 노추가 스스로 ‘조선에 대해 정성을 다하였는데도 조선은 우리를 대함에 있어 몹시 박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적을 대하는 도리는 공연히 충격을 주어 변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비록 중국과 밀접한 관계이므로 저들과 서로 사귀기는 불가하나 접대할 즈음에 약간의 후의를 보이는 것이 가합니다. 또 신이 평양(平壤)에 있을 때 통사(通事) 이해룡(李海龍)노추(老酋)를 개유(開諭)하여 홀적(忽賊)에게 전유(轉諭)한 일로 자문(咨文)을 가지고 군문(軍門)으로 갔는데,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노추의 마음에, 조선은 왜 직접 개유하지 않고 중국을 빌어 압력을 가하는가 할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흔단이 없는 데 그들의 노여움을 일으키는 것이 됩니다. 이미 권도를 써서 이 일을 행한 적이 있었으니, 이제부터 우리 나라에서 직접 통하되 혹은 감사나 변장으로 하여금 글을 만들어 개유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병가(兵家)의 일은 하나만을 고집하여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도 하고 혹 우리의 덕의에 감동하게도 하여 흉추(凶醜)로 하여금 변을 내지 못하게 함이 제일의 상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오랑캐의 풍속은 저희들끼리 서로 싸우면서도 반드시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아질이(阿叱耳) 역시 그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아뢰기를,

"호인이 진고(進告)하는 말은 대체로 진실치 못하여 허언이 십에 팔구는 되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묻는 의도는 오랑캐의 풍속이 과연 이와 같으냐는 것이다. 그 말의 허실을 실로 알 수 없다."

하니, 아뢰기를,

"신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홀온(忽溫)이 나올 때 여허(如許)·몽고(蒙古)의 군사와 합병하여 왔으니 그들의 세력이 강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신과 병사·수사 이하 드러나게 이름난 자 외에 경만이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병서(兵書)는 모릅니다만 어찌 무사(武士)의 무리만이야 못하겠습니까. 원컨대 약간의 무신을 얻어 그들과 병서를 강론하여 그들로 하여금 약간이라도 용병(用兵)의 도를 알게 한 연후에 해관(該管)의 도에 나누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군졸을 훈련시키게 한 다음 훈련된 군사를 자신이 거느리고 공효를 이루게 한다면 일이 필시 두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재를 뽑는 데 있어 외모로만 할 수 없는 것이어서신이 항상 지성으로 널리 구하였으나 아직 얻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기율을 엄히 하는 것, 장수를 가르치는 것, 사졸을 훈련하는 것, 기계를 수리하는 것, 이 네 가지를 구비하면 어찌 실패할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일은 피폐가 너무도 극심하여 장수된 자가 해결해 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특별히 전교하시어 분발시키소서. 그리하면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전교가 교서(敎書)에 있다. 감사·병사 이하가 모두 경의 손아귀에 있으니, 4도(道)의 장졸(將卒)을 경이 스스로 재량할 수 있다. 다만 이른바 조정에서 먼저 정비해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니, 아뢰기를,

"소신이 밖에 있으면서 성명(聖命)을 받들 때 사람들에게 ‘내가 상경하면 반드시 계달(啓達)하여 먼저 기율을 엄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감사·병사는 감히 가벼이 처치할 수 없겠으나 그 이하는 반드시 선참 후문(先斬後聞)083) 하여 장사들로 하여금 듣고 두려워하게 해야 합니다. 《위료자(尉繚子)》에 ‘용병(用兵)을 잘하는 사람은 사졸의 반을 죽인다.’고 하였으니, 이는 1천 명 가운데 5백 명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 나머지 5백 인이 어찌 정병(精兵)이 되지 않겠습니까. 《위료자》에 또 ‘그 다음은 10분의 3을 죽이고 또 그 다음은 10분의 1를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최하의 율(律)을 쓴다 하더라도 율을 범한 군사는 그들의 부모 처자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교서에 비록 운운 하였으나 교서에 의하여 시행하지 못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사람들이 모두 심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 면대하여 진달하고자 한 것은 오로지 이 일을 위해서입니다. 요즈음 외신(外臣)들의 의논을 들으면 모두들 용병(用兵)을 그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신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말이 다 좋다. 재상은 의당 재상의 체통이 있어야 한다. 경이 이미 원수(元帥)가 되었으니 원수의 체통 또한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군대의 일은 엄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의 말이 옳다."

하니, 아뢰기를,

"장졸을 훈련시키고 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이른바 기계는 궁시(弓矢)를 이름이 아니라 오로지 화기(火器)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화기를 조치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노력하여 조치하면 사용할 때 군핍한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계가 있고 사졸이 있고 장수가 있고 나서 기율이 엄하면 어찌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는 치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6책 19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123면
  • 【분류】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外交)

  • [註 083]
    선참 후문(先斬後聞) : 먼저 치죄하고 나중에 보고함.

○己亥/卯時, 上引見體察使韓孝純。 上謂孝純曰: "卿自疇昔, 久勞于外, 今又授體察之任, 殊爲未安。 然國事如此, 更加勉力, 知無不言; 事無不爲。" 孝純對曰: "臣當此不敢當之任, 日夜憂懼, 罔知所措。 若任事有失, 則雖悔, 曷追? 號令諸道, 體面甚重, 必須大臣摠之, 可以有濟矣。" 上曰: "雖非大臣, 何妨? 凡事, 卿何以措置耶?" 對曰: "廟堂區畫已盡, 北道防備已完, 而但因北來人聞之, 則職帖羈縻之後, 人心解弛, 極可慮也。" 上曰: "若以給告身一事恃之, 而緩於防禦, 則甚不可也。 諸道文簿, 已來于卿處乎?" 對曰: "當時未及到矣。" 上曰: "防禦之事, 措置幾何? 須趁於未合氷前, 急速爲之, 而若至氷合, 則事必甚難矣。 卿旣爲體察使, 則文簿似爲當來, 而何故不來?" 對曰: "臣之始入來也, 姪子韓浚謙, 方爲都元帥, 故臣未敢行公, 及浚謙遞差, 始乃行文于諸道。 以此, 未及來耳。" 上曰: "道遠而然耳。" 孝純曰: "此虜已給告身, 而羈縻之。 或者明年間, 可保無虞, 而亦何可深恃也? 壬辰年大賊出來, 其勢滔天。 一未交鋒, 軍皆潰散, 其時以爲誅之, 則不可勝誅, 務欲鎭定人心, 不用軍律。 其後仍爲前規, 徵而不至者無罰、逃走者無罰、潰散者無罰, 漸成偸惰之習, 終無一戰之功。 雖兵不得敎、將不得人, 豈不能一戰哉? 只以軍律解弛, 人無敢死之心, 故未戰而先潰也。 大槪根本, 在號令、紀綱, 而今之紀律, 解弛已甚, 倘有緩急, 則必如曩日無疑矣。 士卒雖衆、器仗雖備, 無紀律則必敗之道也。 他事則有司自當爲之, 此一事, 必須朝廷各別申明。 凡軍之潰散逃走者, 必寘之重律, 使人皆懷革舊自振之心然後, 庶可爲矣。 前日啓辭, 已爲陳列, 而必欲面達者, 別爲事目, 使民知不可犯也。 進則有死, 退則笞亦不施, 軍之潰散, 何足怪哉? 不徒軍卒如此, 爲將者(不)〔亦〕 然。 無將無兵, 何以濟事? 近來議者, 以糧餉匱竭爲憂, 而以今之事勢觀之, 蓄積雖多, 無紀律則不能戰矣。 丁酉年臣爲體察副使, 倭賊自湖南, 踰入湖西。 李時言忠淸兵使, 率道內兵, 陣于報恩之境, 內浦之軍, 亦皆從之。 臣在內浦, 聞從軍之士, 皆寄家書, 要與同避, 未幾果皆逃來矣。 其時軍官輩言: ‘出身等皆還其家。’ 臣卽使人招之曰: ‘不來當斬。’ 且諭朝廷繩以重律之意。 不久有女人, 呈訴于臣曰: ‘吾子亦在潰軍之中。 今聞, 朝廷將盡誅潰卒, 吾子亦法當誅矣。 願以米太五百石, 納官贖罪。’ 臣乃許, 啓稟成貼以付則後八日, 還持狀啓而來訴曰: ‘上京聞之, 則潰卒只以二石米, 贖罪云。 他人以二石, 而我獨五百石, 而豈不冤哉? 以此, 冒死還來矣。’ 夫兵, 死地也。 若以二石米, 換得死命, 則人孰肯畏軍律, 而赴死地也哉? 無紀律則雖一二人不可用, 況千萬之軍, 其可以言語誘之乎? 當今第一上策, 在於立紀綱、嚴號令, 而他事皆其次也。" 上曰: "卿言皆是也。 又有可言之事乎?" 對曰: "觀於兵家, 必先敎訓而後用之, 未有不敎而能用者也。 近者我國, 以《紀效新書》, 敎訓士卒, 而亦無實効。 所謂束伍軍者, 其規頗異, 至於他雜軍, 則比之束伍, 尤爲無形矣。 防與防有異, 必須以防之法改規, 而敎之然後, 可以致用矣。 古人言: ‘務精, 不務多。’ 所謂精者, 豈年少勇健之謂哉? 其指敎訓之兵也。 防之策, 莫如守城, 而守城之卒, 亦不可以不敎也。 兵旣敎則以之守城而固; 以之野戰而捷矣。 不敎之兵, 安往而不敗哉? 故兵必敎, 而後用之矣。" 上曰: "此言亦是矣。 大槪此形勢, 卿之所見如何?" 對曰: "臣何能知之? 第之爲患, 恐不止於此也。 向者老酋崛起, 脅掠諸部, 會寧以西藩胡, 盡爲所制, 或移於近地、或以爲麾下。 由此遂强, 而今玆忽溫, 亦踵老酋之事, 此皆近日胡虜所未能之事也。 觀其凶謀, 將欲合倂六鎭藩胡, 盡入於麾下 而後已。 軍多則其勢自强; 勢强則終爲我國之患矣。 今明年, 大擧出來, 雖未可必, 而後日之患, 將有不可勝言者矣。" 上曰: "北難保其不來, 朝夕待變, 常若賊至可也。 雖不爲一時大擧, 若陷一鎭, 則其勢危急矣。 但此虜形勢, 未知如何, 而用兵則似不善矣。 潼關之役, 乘勝而前, 又陷傍近殘弱鎭堡, 則事甚易也。 而只陷潼關, 急急收兵而還。 又於件退之戰, 當人心沮喪之時, 不爲來寇, 是, 未可料也。 且我國之人, 有被擄入往者, 我之虛實, 亦可知也。 七八月之間, 兵未添防, 守禦亦踈。 賊若長驅而來, 則智者不及謀; 勇者不及戰, 而斂兵韜甲, 終不出來, 予之斟酌, 則似非豪傑者矣。 誠若倂力急擊, 攻陷一陣, 進陣於龍城等處, 而控扼險要, 則六鎭在其掌內矣。 在我一無所恃, 而虜之擧事, 不出於此, 其謀淺短矣。" 對曰: "其不出來者, 未可知也, 抑將操縱我乎?" 上曰: "將來之事, 未可知也。 雖不大擧, 而明春農作之時, 分兵出沒, 使不得耕耨, 則不出數年, 六鎭澌盡矣。 且若出奇計, 由三水甲山之路, 直出咸興, 則人心內潰, 事勢甚難。 未知此虜, 出於何計也。" 對曰: "此虜非爭土地者, 必不能出此計也。" 上曰: "予之斟酌, 如此而已。 又有一計, 小酋乃彼虜之妻父, 若作一心, 東西相應, 侵軼於平安道江邊一帶, 則我國兵力必分矣。 平安道向化胡人, 一切禁斷, 使不得出入云, 其意叵測。 此亦卿所管地方之事, 故言之耳。 諺曰: ‘失馬修廐。’ 我國則失馬之後, 亦不修廐。 此, 所以長有失馬之患也。 予言如何?" 對曰: "下敎之計, 似非此虜所能知也。 但賊勢方張, 知我之弱, 若以鐵騎, 攻陷一二城, 進兵之間, 則勢難當矣。 苟無捍禦之者, 則必有深入之患。 縱不傅于國都, 若入咸興等地, 擄掠人畜而還, 則其於國家之辱, 爲如何哉? 然賊之進退, 不可預料, 唯當自治而已。 今以在我之事見之, 非徒軍卒不敎, 將材亦乏矣。 武士中, 有若門閥子弟, 稍有仕進之勢者, 則惟務奔競, 而不知兵法之爲何事也。 求之於此輩之中, 安能得其良將哉? 所謂軍卒, 皆是農民。 時或習陣, 則驅之於畎畝之間, 責之以坐作之方。 若是而謂之敎訓, 可乎?" 上曰: "卿言皆是也。 兵法之說, 豈獨尉繚子言之? 大凡爲將者, 必須嚴矣。 若不嚴則雖有仁智, 非將也。 且使軍卒, 畏我而不畏敵, 則善矣, 如不畏我, 則安有冒入死地之理乎? 不須遠引, 以崔瑩之事言之, 退一步者必斬之, 故所向皆捷。 其時倭奴言: ‘高麗、無可畏者, 唯白髮崔萬戶來, 則諸軍衝突而至, 是可畏也。’ 馬謖諸葛亮所愛之將, 臨斬有人救之, 而垂泣斬之。 雖違令, 其爲將, 豈易得哉? 然而必斬之, 則古人之用法, 如是其嚴矣。 逃軍納米事, 予亦知之矣。 其時以爲誅之, 則不可勝誅, 而且天兵, 時托言糧乏, 而輕易處之耳。 潰散之卒, 若措米石, 則高枕而臥, 恬然自謂曰: ‘我雖逃來, 有此米石, 吾無患矣。’ 是雖勢難所爲, 蓋由我國, 軍令不行之故也。 曩予言之。 壬辰倭賊, 雖非朴泓所能當, 然當在於任所, 某條爲之, 而乃敢走來平壤, 備邊司以爲大同江守將。 予謂之罪必殺, 而終不誅之, 備邊司之公事, 據此觀之, 其他可知矣。 今雖書之史策, 豈有慶尙道水使, 爲大同江水使之理乎? 予嘗默視當今之事, 我國武略不競, 以祖宗朝事言之, 未嘗有一番征伐, 而能全勝者也。 大槪我國武略, 不及高麗遠焉。 未知以文治所致而然耶? 雖以文章言之, 我國二百年來, 未能及代之文章。 以此觀之, 文章、武略, 俱不若也。 至於將帥, 亦不及焉。 當紅巾賊之亂, 鄭世雲以二十萬兵, 結陣於天壽門前, 圍而攻之, 乃能大捷。 我國, 何處得兵二十萬哉? 此非人數不足於前朝, 公私之賤, 日以繁; 軍卒之額, 日以縮, 是, 號令、軍政, 亦不及於前朝矣。 予嘗以私意, 潛思臆度, 則酷似宋朝矣。 自古國勢如此, 則必受夷狄之禍。 我國之事, 誠可慮也。 非徒武略不競, 宰執之中, 亦無知兵之人, 以至新進文士, 懜然不知武事。 此非予輕忽朝臣, 而發此言也。 是, 未知時勢之使然耶? 抑自然而然耶? 武臣則固不足數, 必須讀書然後, 可以知古今成敗之理。 識得十件事, 而行一件事者亦罕。 況全然不知古書乎? 非徒古史, 知兵家書者, 亦絶無之耳。" 對曰: "果如上敎。 臣嘗與之論兵, 而材堪爲將之人, 未能見也。" 上曰: "武將則引弓、馳馬之外, 無他能也; 文臣則惟務銳做詩句而已。 予非有一毫輕易之意, 只爲卿盡言不諱, 勿以辭害義可也。 且倭賊則雖以之盛, 亦難當也。 至於北賊, 一良將足矣, 而如是難之, 誠可痛也。 蓋蓄積、多而後, 可以有爲。 古人云: ‘富國强兵。’ 雖不可主於富强, 必有蓄積然後, 事可成矣。 天下安有如此貧國? 恰似閭閻窮乏之家, 營一鎭堡, 亦甚不易。 予觀前朝, 甚爲富足, 未知我國, 緣何而若是耶。 我國地方數千里, 而山川居多, 亦無所産, 山只有樹、水只有石而已。 比中原, 不及一道, 中原之一道, 極爲富盛, 我國物力, 安能及之? 倭國亦不似我國之貧矣。 未知倭國, 分爲幾道也。" 對曰: "倭國分道亦八云矣。" 上曰: "倭國, 雖云八道, 只六十六州而已。 以我國三百州郡之多, 豈能比及哉? 以天下觀之, 我國正如黑子矣。 六鎭之勢, 已爲潰裂, 西方亦有難保之憂, 西北之事, 極可慮也。 似聞今年六鎭農事, 不失云, 信乎?" 對曰: "稍稔云矣。" 上曰: "是則幸矣。 平安道則極豐云, 信乎?" 對曰: "淸川以西, 則農事極豐, 而以南則不至於極豊矣。" 上曰: "山郡雖似不豐, 而海邊等郡則皆極豐云矣。 咸鏡道則六鎭稍稔, 而南道頗歉云, 信乎?" 對曰: "南道亦不至失稔云矣。" 孝純又曰: "倭賊, 天下强寇, 雖不能當之, 若能治兵, 則此虜, 豈足畏哉? 中原鍊兵之政, 亦不如我國之疏。 故東征西伐, 皆能奏捷矣。 今者老酋崛强, 忽賊繼起, 皆知治兵自强。 而我國獨不治兵, 以致凌侮, 誠可痛也。 雖不能多抄軍兵, 猶可得三萬人。 漢江以南則抄二萬而治之; 以西則抄一萬而治之, 以成極精之兵, 南有警則防南; 北有警則防北, 而無事則守衛京城, 又以其餘爲雜軍, 則可以爲緩急之用矣。 然而, 三萬兵若未易得, 則二萬兵亦可爲也。 若能治兵, 則豈有敗衂之辱哉? 今之急務, 非徒治兵, 必先敎將。 而但武人, 多不解文, 豈能留意於《韜》《略》也? 且訓兵之時, 以供饋爲弊, 令其道, 各養其道之軍, 可以無弊矣。 今我軍畏㤼, 而賊虜方張, 邊備蕩然, 無一足恃。 萬一賊中有豪傑, 則禍必大矣。" 上曰: "此虜雖非豪傑, 此虜之族屬及子孫中, 豪傑之生, 未可知也。 自古中國不幸, 則夷狄中, 必生豪傑爲大患矣。 且祖宗朝故事, 予未之知也, 其在 祖宗朝, 西北胡中, 亦有如此桀驁者乎?" 對曰: "朝臣之兼帶實錄廳堂上者, 時或言之, 而臣則未之聞也。 古之有此等胡虜, 臣實不能知也。" 上曰: "予不知故事, 故問之耳。 古所無者, 今而始出乎? 近來災變, 甚爲駭異, 若指爲某事之應, 則非徒固滯, 亦甚無理。 第未知將來之事, 爲何如也。" 對曰: "臣前在平安道乍聞, 老酋自謂: ‘致誠於朝鮮, 而朝鮮之待我者甚薄。’ 云。 臣之意以爲, 待夷狄之道, 不可激之生變也。 雖與上國密邇, 不可與相交, 然待之之際, 稍示厚意可也。 且臣在平壤時, 通事李海龍以開諭老酋, 轉諭忽 賊之事, 齎咨文往軍門。 臣之妄料, 老酋之心以爲: ‘朝鮮何不直諭, 而藉上國以壓之乎?’ 若然, 則無釁而挑彼之怒也。 業已用權道, 爲此擧則今自我國通之, 或令監司、邊將, 爲書直諭可也。 兵家之事, 不可執一而行之, 或使解彼之怒; 或使感我之德, 務使兇醜, 不爲生變, 策之上也。" 上曰: "然。 胡俗自中相攻, 必爲殺牛祭天, 而阿叱耳亦如是爲之, 何也?" 對曰: "胡人進告之說, 例爲不實, 虛言十常八九, 不足信也。" 上曰: "予所問者, 欲知胡俗, 果如是否也? 其言之虛實, 固不可知也。 對曰: "臣未能詳知也。" 忽溫出來時, 必請如許蒙古合兵而來, 其勢似不强盛矣。" 上曰: "武臣、兵。 水使以下, 表著知名者外, 卿有所知者乎?" 對曰: "臣雖不知兵, 豈不愈於武士輩? 願得武臣若干人, 與之講論兵書, 使稍知用兵之道然後, 分送于該管之道, 以之敎訓軍卒, 仍以所訓之兵, 俾令自領, 以責其効, 則事必有緖矣。 然, 取人不可以形貌, 臣常至誠旁求, 而尙未得矣。 大槪嚴紀律、敎將帥、訓士卒、修器械, 玆四者旣備, 則豈有僨敗之患也? 第念今日之事, 廢壞已極, 非爲元戎者所能卒辦也。 伏願, 自上別爲傳敎, 以聳動之則庶可爲矣。" 上曰: "予之傳敎, 在敎書中。 監、兵使以下, 皆在卿掌握中, 四道將卒, 卿可自斷矣。 但所謂, 自朝廷先爲整肅之言, 則是矣。" 對曰: "小臣在外承命, 常語人曰: ‘我若上京, 必當啓達, 先嚴紀律。’ 監、兵使則雖不敢輕處, 而其以下, 必將先斬後聞, 俾使將士, 聞而畏之耳。 尉繚子言: ‘善用兵者, 殺士卒之半。’ 謂一千人之中, 殺五百人也。 如此則其餘五百, 豈不爲精兵乎? 又言: ‘其次殺十分之三, 又其次殺十分之一。’ 今者雖用最次律, 犯律之軍, 必流放其父母、妻子於絶遠之地可也。 敎書雖云云, 而不能依敎書行之者已久, 人皆視爲尋常。 今日欲面達者, 專爲此事也。 近見, 外臣之議皆云: ‘用法不當如是。’ 而臣則不以爲然矣。" 上曰: "兩言皆好矣。 宰相則當得宰相之體。 卿則旣爲元帥, 元帥之體, 亦當如是耳。 然戎事不可不嚴, 卿言是也。" 對曰: "訓將卒、治器械等事, 臣請當之。 所謂器械, 非弓矢之謂也, 專指火器而言也。 措置火器, 亦非甚難之事, 着力措備, 則可免臨時窘乏之患矣。 有器械、有士卒、有將帥, 而紀律嚴, 則安有每戰必敗之辱哉?"


  • 【태백산사고본】 106책 19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1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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