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유생 안명남 등이 올린 상소
경상도 유생 안명남(安命男)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삼가 살피건대, 억울하게 죽은 유신(儒臣) 채유희(蔡有喜)는 본조의 훈신(勳臣) 채수(蔡壽)의 증손이며 판서 채소권(蔡紹權)이 바로 그의 조부인데, 가정에는 시례(詩禮)가 전해오고 행실에는 기율이 있었으므로 동류들의 추허(推許)를 받았습니다. 지난 임진난 초에 의병을 수창(首倡)하였는데 그의 외삼촌 이봉(李逢)을 장수로 추대하여 토적(討賊)에 힘을 다하였으니, 2백 명 가까이 참살한 것도 대부분 채유희가 규획한 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봉이 괴산 군수(槐山郡守)가 되자 채유희도 그곳에 따라갔는데 다시 이웃 고을 선비들과 함께 의곡(義穀) 1천여 석을 모아 조정에 계품하고 호조의 문부(文簿)에 기록하여 뒷날 명(明)나라 군사의 군량에 보태게 하는 한편 그 고을 사람 김기남(金起南) 등을 유사로 삼아 그 일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정유 재란 때에 소모사(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이 복수장(復讎將)으로 이산(尼山)에 있었는데 적의 세력이 가까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진지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충주(忠州)로 깊이 들어갔다가 적이 영남으로 물러나자 비로소 괴산으로 돌아와서는 의곡을 빼앗아 그의 군사에게 먹이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관을 보내 유사를 협박하면서 창고를 열게 하였으나 김기남이 호조에서 관리하는 곡식이라며 굳게 지키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채유희가 마침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반드시 사용하려고 한다면 체문(帖文) 한 장을 받아서 뒷날의 증거로 삼아야 하겠다.’고 하자 그 군관이 발끈 성내면서 돌아가 김시헌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시헌이 갑자기 격노하여 급히 종제(從弟) 김시형(金時亨)으로 하여금 건장한 군졸 30여 명을 이끌고 가서 공아(公衙)를 격파하고는 채유희를 끌어내어 뜰에다 결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불문곡직하고 극형을 가하려 하자 채유희가 조용히 말하기를 ‘무슨 죄로 나를 죽이려 하는가? 한 마디 말이나 하고 죽겠다.’ 하니, 시헌이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명문(明文)을 만들어서 공량(公糧)을 먹이라고 한단 말인가.’ 하며, 바로 군인에게 목궁(木弓)을 가져오게 하여 양쪽 끝을 부지르고는 그 중 큰 것을 가지고 수없이 난타하였습니다. 채유희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영공은 나를 모르는가? 나는 영공과 고조(高祖)의 친족이 되는데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하고 부르짖자 시헌이 더욱 노하여 또 돌로 입을 쳐서 이빨이 부러지고 기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야 끌어내었는데 마침내 토하고 죽었으니 원통하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헌이 꼭 죽이려고 했던 것은 무슨 명목이며, 유희가 죽임을 당한 것은 무슨 죄란 말입니까.
시헌은 김제갑(金悌甲)의 아들입니다. 그 아비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면 피눈물을 흘리면서 선봉이 되어 죽음을 바쳤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내에서만 맴돌면서 오직 곡식 빼앗는 일을 가지고 노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자기의 울분을 풀었으니 그가 독기를 부린 이유를 따져보면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신들이 그 원인을 논하여 원통함을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헌은 당대의 명사(名士)입니다. 바야흐로 그가 복수장이 되었을 때 일로(一路)에서 소문을 들은 이마다 모두 왜적을 토벌하리라고 시헌에게 기대했는데 경내에 도착하고나자 아비의 원수는 망각한 채 여주(驪州)에서 첩(妾)을 사 음탕한 짓을 자행하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술에 취해 노래하며 낮을 밤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천성이 또 혼매하고 망령되어 살인을 무척 많이 하였는데 이 때문에 크게 민심을 잃어 듣고 보는 자마다 이를 갈며 타매(唾買)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유희는 견개(狷介)한 성품을 지닌 자로서 그의 마음씀이 형편없는 것을 익히 보고는 일찍이 불만스러운 뜻을 말하는 사이에 누차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괴산 사람은 태반이 시헌의 친속이었는데 암암리에 헐뜯은 말을 시헌의 귀에 흘려 보낼 줄이야. 그러자 시헌이 이 기회를 틈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풀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체문을 받아야겠다는 한 마디 말이 어떻게 격노를 유발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유희가 도에 지나치게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강개한 서생의 말로 보고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희가 법률상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보호받을 수 있는 공신의 자손으로서 율에 있어 감등(減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시헌은 감히 개인적인 분노로 인하여 반드시 죽인 다음에야 통쾌하게 여겼으니 그 남모르게 사람을 해치고 거리낌없이 법을 멸시한 행위에 대해서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유희가 토적에 앞장선 것은 시헌이 분명히 아는 바이며 시헌 역시 유희로 인해 그 원수를 조금이나마 갚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시헌이 유희에게 덕을 본 것이 이러한데도 시헌이 이처럼 죽이고 말았으니 시헌이 어찌 유희의 원수가 될 뿐이겠습니까. 지하에 있는 자기 아비에게도 원수같은 자식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희가 처음 죽었을 때 좌상 김응남(金應南)이 죽은 이를 조문하고 자식을 위로하라는 명을 받고 도내에 선포할 때 가까운 고을의 선비들이 연명으로 상서(上書)하였으나 위에까지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 덕일(德一)이 격쟁(擊錚)하며 원통함을 호소한 다음에야 본도에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유희의 원통한 죽음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시헌은 대사간의 직책을 사피하면서 왜곡된 무사(誣辭)로 성총을 속였습니다. 이에 덕일이 뒤이어 기해년 봄에 어가 앞에서 호소하였는데, 그때에도 법을 맡은 관리가 죽이려 하였으나 이헌국(李憲國)이 분석해준 덕택으로 겨우 모면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전하께서 그의 속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서 막아 저지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데, 왕법(王法)이 이토록 시행되지 않으니 신들은 더욱 절통해 합니다.
신들은 모두 초야의 미천한 신분이오나 흉인(凶人)이 천벌을 피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일찍이 마음이 아프고 뼈가 깎이는 듯하여 전후로 몇차례에 걸쳐 호소하였는데 번번이 저지 당했으므로 신원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 성상께서 통쾌히 깨달으시어 억울하게 죽은 현인이 바야흐로 신원되었음므로 【최영경(崔永慶)의 원통한 죽음이 신원된 것을 가리킴. 】 감히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여 우러러 성총을 번독케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엄중히 국문하여 국법으로 단죄함으로써 황천에 사무친 원통함을 풀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조종에 계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시헌은 전일에 재주와 학문으로 꽤 명망이 있었으나 소모(召募)하는 일을 당하여 원수를 망각하고 첩을 구하여 인륜의 기강을 무너뜨렸으므로 사론(士論)이 끼워주지 않았다. 감정을 품고 선비를 죽인 일에 대해서는 유생들의 소장이 본디 과격하니 모조리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죄를 주지 않고 오히려 청현(淸顯)의 관직을 보존케 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사론이 다시 발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소장을 계하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 또한 시행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89책 149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80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
○慶尙道儒生安命男等。 上疏曰:
臣謹按枉死儒臣蔡有喜, 本朝勳臣蔡壽之曾孫, 而判書紹權, 乃其祖也。 家傳詩禮, 行己有律, 爲流輩所推許。 粤在變初, 首倡義旅, 推其舅李逢爲將, 極力討賊, 射斬幾二百, 大抵有喜規畫力也。 及逢之倅槐山, 有喜往從之, 又與傍邑士子, 募聚義穀千餘石, 啓稟于朝, 置簿戶曹, 以補後日天兵之餉, 使郡人金起南等, 爲有司, 管其事。 丁酉之變, 召募使金時獻, 以復讎將, 在尼山, 聞賊勢將近, 棄陣先遁, 深入忠州, 賊退嶺南, 始還槐山, 將奪義穀, 以食其軍, 遣其軍官, 脅迫有司, 使之開庫。 起南以戶曹句管之穀, 堅執不許。 有喜適在其傍, 乃曰: "必欲用之, 宜受一紙帖文, 以爲後考之地。" 其軍官, 勃然起去, 訴于時獻, 時獻輒發暴怒, 亟令其從弟時亨, 率壯軍三十餘名, 擊破公衙, 曳出有喜, 縛致于庭, 不問曲折, 將加極刑。 有喜乃從容言曰: "何罪殺我? 願發一言而死。" 時獻曰: "汝欲使我, 成明文, 而食公糧耶? 旋使軍人, 取木弓, 折去兩端, 握其中大者, 亂打無算。 有喜呼痛曰: "令公不知我乎? 我於公, 爲高祖之親。 何忍至此?" 時獻益怒, 又以瓦礫擊口拉齒, 至氣絶然後曳出, 遂致嘔血而死。 冤乎痛哉! 時獻之必殺者, 何名, 有喜之見殺者, 何罪? 時獻, 悌甲之子也。 痛其父之死, 復其父之讎, 則當泣血先登, 以效一死, 而逗留境上, 唯以奪穀一事, 快於不當怒之地? 究其逞毒之由, 則必有所以。 臣等請爲窮源之論, 以白其冤可乎! 時獻, 當時之名士也。 方其爲復讎將也, 一路聞風者, 皆以討賊, 望於時獻。 及到其境, 忘父之讎, 買妾驪州, 恣其淫褻, 到處酣歌, 俾晝作夜, 性又昏妄, 殺人甚多。 由是大失群情, 凡有耳目, 無不切齒唾罵, 而有喜以狷介之性, 熟觀其用心之無狀, 嘗有未滿之意, 屢形於言語間。 不知槐山之人, 太半時獻親屬, 陰以詆訾之辭, 漏于時獻之耳。 時獻乘此機會, 以濟其蓄憾耳。 不然, 受帖一言, 何至觸怒乎? 設使有喜語涉過中, 書生慷慨, 容可恕矣。 且使有喜, 身犯罪過, 法固當死, 功臣有蔭之孫, 律應減等, 而時獻敢因私怒, 必殺然後快於心, 其陰賊害物, 蔑法無忌, 爲如何哉? 有喜之首事討賊, 時獻之所明知, 時獻亦因有喜, 而少復其讎矣。 有喜之德於時獻如是, 而時獻之所殺在此, 豈但時獻爲有喜之讎人, 幽冥之下, 不免爲乃父之讎子矣。 有喜之始死也, 左相金應南, 承弔死問孤之命, 宣布一道, 近邑士子, 連名上書, 而未聞上達, 其子德一, 擊錚訟冤然後, 令本道覈實, 則有喜之冤死, 至此尤爲明白, 而時獻之辭避諫長也, 曲爲誣辭, 以欺聖聰。 德一犯駕之訴, 繼在己亥之春, 而執法之官, 又欲擠殺, 賴李憲國分析, 僅乃得免。 此則非但殿下, 厚被其誣, 當時壅遏之狀, 可想見矣, 而王法之不行如此, 臣等尤切痛焉。 臣等俱以草野寒賤, 目見凶人幸逭天誅, 未嘗不痛心切骨, 前後籲呼, 動輒見沮。 自分萬不一伸, 幸今聖心快悟, 枉死之賢, 方得伸雪, 【指伸雪崔永慶之冤死也。】 故敢陳危懇, 仰瀆天聰。 伏願嚴加鞫問, 斷以邦憲, 俾釋窮泉之冤。
啓下刑曹。
【史臣曰: "時獻, 前時頗有才學有名, 當召募之擧, 忘讎卜妾, 斁敗倫紀, 士論不齒。 至於殺士之際, 挾憾之事, 則儒生之疏, 固爲過激, 雖不可盡信, 而至今不之罪, 猶保淸顯, 則宜乎士論之重發也。 疏雖啓下, 而厥後亦不施行。"】
- 【태백산사고본】 89책 149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380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가족(家族)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