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감사 이용순이 충청도의 역적 사건을 치계하다
충청 감사 이용순(李用淳)이 치계하기를,
"신이 당초 도내에 좀도둑이 있다고 듣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종적을 알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질수(李質粹)가 차사원(差使員)으로 서울에 올라가 관아를 비웠을 때 군도장(郡都將) 강염(姜焱)이 도적의 무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탐문해본 결과 그때에야 온양(溫陽)·목천(木川)·전의(全義)·진천(鎭川)·청주(淸州) 등지에 꽤 많은 도적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금년 봄에 군수 이질수가 그 무리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성용개(成龍介) 등 3인은 오히려 곧바로 공초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 뒤 점차로 추적 탐문하면서신이 군관 출신 오문갑(吳門甲) 등을 별도로 조포장(措捕將)으로 정해 이질수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전령을 가지고 각 고을을 출입하면서 전의의 도적 고망난(高亡難)과 막금(莫金), 청주의 도적 내은세(內隱世), 목천의 도적 권생(權生), 진천의 도적 한종손(韓從孫) 등을 체포하여 온양군에 이감(移監)하고 사건의 실상을 추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막금이 강염을 살해하였다는 사유를 이미 승복하였는데 그 공초에 관련된 이가 무려 70여 인으로서 모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하기에 현재 추적하여 체포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 중 고망난이 바로 그들의 괴수라고 하기에 이질수에게 세밀히 심문하라고 하였더니 고망난이 공초하기를 ‘나는 괴수가 아니고 천안 금제역(金蹄驛)에 사는 화수(和愁)가 장수로 자처한다. 그의 매부로 태인현(泰仁縣)에서 옮겨온 노비 주질근(注叱斤)과 동생 주질금(注叱金) 등 일가가 전라도에 함께 살면서 자주 통행했는데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7월에 청주 초치원(招致院)에 갔더니 주질근이 화수의 분부라고 하면서 「당류(黨類)에게 알려 8월을 기한으로 천안·목천 지방 경계에 있는 광야에서 대회를 한다. 」 하였다. 그리고 나는 호남 사람이니 호남인들을 끌고 오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따르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참살한다고 위협하므로 어쩔 수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8월이 되어 모이기를 기약한 날에 나갔더니 화수·주질근 형제 및 산추(山秋) 등과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온 사람 30여 명이 서로 모여 약속하기를 「누구는 선봉이 되고 누구는 후군이 되며, 누구는 기병이 되고 누구는 보병이 된다. 」고 하며 일일이 부대를 나눈 뒤 각각 다시 흩어져 돌아갔다. 금년 2월 13일 다시 주질금을 초치원에서 만났는데 주질금이 말하기를 「지난해 9월 사이에 연산(連山)·은진(恩津) 지경의 마고해평(麻姑海坪)에서 두 차례 대회를 갖고 결진(結陣)했다. 」고 하였으며 전라도에서 한 일을 자세히 물었더니 「결당(結黨)한 사람들이 순창(淳昌)·함양(咸陽) 두 고을에 많이 있는데 서로 오가며 비밀히 큰 계획을 모의하고 있다. 괴수는 순창에 사는 권대덕(權大德)의 큰 아들이고 거사는 7∼8월 사이에 일으키려 한다. 」고 하였다. 화수와 주질금 등을 불시에 체포해 추문해 보면 대역(大逆)의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공초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그 자가 간사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 대략만 공초하고 도적 괴수의 이름자 역시 바른대로 공초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끝까지 추궁했더니 공초하기를 ‘도적의 괴수는 순창(淳昌) 읍내에 살던 고(故) 옹청하(邕淸河)의 두 아들 중 큰 아들이 괴수인데, 관명(冠名)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아명(兒名)은 옹수(邕壽)이다. 권대덕(權大德)의 큰 아들은 글도 잘하고 벗도 많으나 계려(計慮)가 옹수를 못 당하므로 옹수를 대장으로 삼고 권(權)을 중군으로 삼았다. 화수는 용력이 있는 데다가 상도(上道)에 거주하기 때문에 선봉장으로 정해 충청도의 병력을 구관(句管)하게 하였다. 그런데 도적질 따위는 하지 않고 도당을 많이 결속하여 단지 시장에서 모여 약속을 맺곤하므로 이 때문에 그 거사의 자취를 아는 이가 드물다. 도당의 이름을 기록한 책은 중군장 권가의 집에 감춰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당의 이름 자를 각각 변경하여 사람들에게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내 이름은 명부 속에 고석(高石)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초한 것이 이와 같기에 신이 앞으로 불러내어 직접 물어보니 다 확실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수라는 자는 현재 통제사의 영문에 있으므로 즉시 체포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곧바로 군관을 보내 비밀히 행이(行移)하였습니다. 주질금 등은 아침 저녁으로 옮겨 다녀 일정한 종적이 없으므로 지금 그 거처를 비밀히 탐문하여 체포하게 하는 한편 전라 순찰사에게도 비밀히 통지하여 기관을 설치해서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동도(同道) 적도들의 용모와 나이를 후록(後錄)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9책 149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78면
- 【분류】행정(行政)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보건(保健)
○戊午/忠淸監司李用淳馳啓曰: "臣自初聞道內, 有狗鼠, 猶未知蹤跡, 上年冬, 溫陽郡守李質粹, 以差使員上京, 空官之際, 郡都將姜焱爲賊輩所殺。 因此訪問, 始乃知溫陽、木川、全義、鎭川、淸州等地, 散處者頗多。 今年春, 郡守李質粹, 緝捕大黨成龍介等三人, 猶不直招而死。 自後漸次跟聽, 臣軍官出身吳門甲等, 別定措捕將, 令李質粹指揮, 持臣傳令, 出入各官, 行捕全義賊高亡難ㆍ莫金、淸州賊內隱世、木川賊權生、鎭川賊韓從孫等, 移囚溫陽郡, 窮覈事狀。 莫金則殺害。 姜焱情由, 已爲承服, 其所辭連者, 無慮七十餘人, 皆散漫諸處, 方挨次跟捕, 而其中高亡難, 則乃其巨魁云, 故令李質粹, 細加盤問, 則亡難招內, ‘渠則非魁, 而天安 金蹄驛居和愁, 自爲將帥。 其妹夫泰仁縣移來奴注叱斤及其同生注叱金等一家, 同居全羅道, 頻數通行, 未知其意, 而前年七月, 淸州 招致院往之, 則注叱斤, 以和愁分付, 知會黨類, 八月爲期, 天安、木川地界曠野之中, 大會云云。 渠則以爲湖南人也, 招引湖南人說道, 初不聽從, 則刦以斬殺, 不得已同參, 至八月期會日進去, 則和愁、注叱斤兄弟及山秋等, 或全羅道、或忠淸道人三十餘名, 相聚約束曰: 「某爲先鋒, 某爲後軍, 某也騎兵, 某也步兵。」, 一一分部後, 各各還散。 今年二月十三日, 更逢注叱金於招致院, 注叱金言內, 「前年九月間, 連山、恩津地境麻姑、海坪, 二巡大會結陣」 云。 全羅道所爲之事, 詳細問之, 則結黨之人, 多在淳昌、咸陽兩邑之中, 互相往來, 密議大計。 魁首則淳昌居權大德長子, 擧事則欲於七八月間, 起動云云。 和愁、注叱金等, 不意捕捉推問, 則大逆情狀可知。’ 云。 臣觀此招辭, 則其奸謀秘計, 非不詳知, 而大段納供, 賊魁名字, 亦不直招, 窮詰更招, 則招內, ‘賊魁則淳昌邑內故邕淸河之子二人中, 長子爲魁。 冠名則未知爲某, 兒名則邕壽、權大德長子, 則能文多友, 而計慮不及邕壽, 故以邕爲大將, 以權爲中軍, 和愁(爲)〔有〕 勇力, 且居上道, 故定爲先鋒將, 使句忠淸之兵, 而不事偸竊, 多結徒黨, 只於場市, 聚會結約, 以此知其擧事之跡者鮮。 徒黨大名成冊, 則中軍將權家家藏云。 徒倘名字, 各各變改, 使人不得相識, 以故渠名, 則成冊中, 以高石置簿。’ 所供如是。 臣進前親問, 一一的實。 同和愁, 方在統制使營下, 不可不登時捕捉, 故卽發軍官, 秘密行移, 注叱金等, 朝夕變遷, 靡有定蹤, 時方密問去處措捕。 全羅巡察使處, 一邊秘通, 使得設機捕捉, 同道賊徒等, 容貌年歲, 後錄上送事。" 入啓。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89책 149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78면
- 【분류】행정(行政)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보건(保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