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주역》을 강하고, 이항복·이호민·심희수·황신 등과 시국을 논하다
묘시 정각에 임금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시독관 윤의립(尹義立)이 이괘(頣卦)를 진강하였는데 ‘육사전이(六四顚頣)’에서부터 ‘시대유복경야(是大有福慶也)’까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영사 이항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난후에 춘추관의 사초(史草)는 뒤따라 수정하여 거의 완사(完史)가 되었지만 변초(變初)의 사초는 미처 수정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때의 사관 가운데 간혹 생존한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임금께서 ‘낙후(落後)된 자에게 수정시킬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한 사초는 다른 사람이 수정할 수 없으니 그들이 그 직에 있을 때의 일은 그들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 번 상교가 엄하였기 때문에 공사장(公事場)에서 상달하기가 미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입시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특진관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소신이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서로(西路)에 갔을 적에 사관이 모두 낙후되었으므로 지평 신경진(辛慶晉)을 인견할 때에 사관이 미비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당하 문관에는 소신만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신을 시켜 입시하게 하였었습니다. 난리중이어서 지필(紙筆)을 얻지 못하여 빈손으로 입시하였었는데, 지금 일기(日記)를 수정하려 하니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직접 입시한 사람도 이러한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나라는 멸망할지언정 사기(史記)는 멸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죄를 졌다고 하나 전일 이미 그 직에 있었으니, 그들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동지사 심희수가 아뢰기를,
"그들이 기록한 사초는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기록한 사초는 춘추관에 보존하지 않았는가? 사초만 있으면 꼭 그 사람들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자, 항복이 아뢰기를,
"춘추관에는 보관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영상(領相)은, 지금 중국 사신이 올 때를 당하여 기강과 물력이 모두 판탕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체면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매우 염려된다. 대신들은 각별히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조처하도록 하라."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서로(西路)가 심한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서울로 오기 전에는 접대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역로(驛路)에 우선 지시하여 지체됨이 없게 한 뒤에야 수응(酬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조금 체면을 세울 수 있겠지만 황해도에서는 전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마필(馬匹)이 가장 귀합니다. 나라의 보배는 말에 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싼 데다 얻기도 어려워 형세가 대비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앞으로 이 일이 가장 급하다. 그러나 우선 조사(詔使)를 접대한 연후에야 다른 일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니 상하가 더욱 마음을 다하라."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금년은 큰 흉년이어서 백곡이 패기는 했지만 여물지 않고 나라에는 구황(救荒)할 수 있는 염곡(鹽穀)이나 상평창(常平倉)·군자창(軍資倉)의 쌀이 없으니, 별다른 일이 없어도 민력(民力)이 지탱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뜻밖의 일이 있고, 서북(西北)의 일도 매우 걱정스러운 데이겠습니까. 명년의 일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만 구황의 비축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양 조사가 올 적마다 우리 나라에는 제반 일에 절목(節目)이 너무 많아 백성들에게 폐해만 주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소에도 절목이 번다한 데 대한 폐단을 경도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였을 때도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체모가 유지되었었습니다. 지금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물력(物力)이 풍족할 듯한데도 점점 쇠잔하여지고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란 전에 평화로왔던 세월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변란 후 현재 물자의 허비와 백성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군병을 조련하는 이외에는 경비를 절감하여 제반 일이 물력과 서로 걸맞게 한뒤에야 일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진상하는 방물(方物)과 공물(貢物)을 평시처럼 마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을 아끼는 도리이겠습니까. 옛날에는 백성의 부역이 1년에 3일 정도였는데 지금은 석 달뿐만이 아니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조사(詔使)가 나온다고 합니다. 지난 날 중국 장수가 서울에 가득했을 때는 부족한 점이 있어도 그들은 그래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조사를 접대하는 데는 나라에 정해진 규정이 있어 감할 수가 없겠으나 그렇게 되면 백성이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급하지 않은 일은 모두 중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게 하여야 합니다."
하고, 대사헌 황신(黃愼)은 아뢰기를,
"금년에는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조사가 나온다고 합니다. 끝내 우리 나라는 조금 안정되어 그간에 감한 일도 옛 규정대로 모두 회복하고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더구나 감해서는 안 될 일인 데이겠습니까. 모두 평시에 규정대로 따른다면 백성이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임시로 감한다면, 감사가 벌써 분정(分定)하여 민간에게 거두어들인 뒤일 것이어서 감하라는 명령이 있더라도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온다는 기별을 확실히 알면 미리 소용되는 물품을 강정(講定)하여 팔도에 반포하여야 합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전일 황홍헌(黃洪憲)이 나올 때에 소신이 홍천 현감(洪川縣監)으로 있었는데 그때 일을 보건대, 본 고을에는 절인 송이버섯 세 사발이 정해졌는데 상납할 때에는 베 40여 필이 소비되었습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에는 온갖 일이 모두 그러합니다."
하고, 특진관 신식(申湜)은 아뢰기를,
"기강이 퇴폐하여 아랫사람들이 폐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소용되는 물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간에서 폐단을 부리는 일이 끝이 없는 탓입니다. 본디 우리 나라는 부세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많아 민력이 여기에서 손상됩니다. 각 고을의 공물은 각각 사주인(私主人)이 있어 자기네끼리 서로 나누어 점유하여 부자간에 계속 전하고 있는데 본색(本色)의 물건이 좋더라도 10배의 값을 내지 않으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을해년168) 과 병자년169) 사이에 조정에서 이런 일을 염려하여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두고 사주인을 모두 혁파하였더니, 저들이 그 명맥을 잃자 원망이 분분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 다시 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작폐가 난후에 더욱 심하니 지금 공안(貢案)을 수정할 때에 중간에서 방해하는 일을 통렬히 혁파하여야 합니다. 근래 중국 사신이 또 나온다는데 국가에는 제반 물건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본색만 바치게 한다면 민생이 어찌 곤궁에 빠지기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접사(遠接使)가 시문을 짓는 일은 나의 마음에 온당치 못하다. 시(詩)란, 읊조리기나 하는 하찮은 기예인데 그것을 가지고 중국 사람과 이기기를 힘쓰는 것은 매우 미안하니, 지금은 일체 하지 말도록 하고자 한다. 이 뜻이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다른 것은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간혹 수작(酬酌)이 있게 되면 부득이 응수하여야 하지만 타인이 지은 것을 빌어 쓰기까지 하는 것은 성실한 도리가 아니어서 매우 미안하다. 소국(小國)이 대국 사람에게 지는 것이 무엇이 해로운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이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당초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 사람을 무식하게 여겼었는데 시장(詩章)을 보고 나서는 칭찬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전과 다르다. 이 같은 일은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심지를 뽑아 양전(量田)하는 일은 이미 시행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흉년에 이런 일이 있어 민간이 크게 소요되어 잇따라 이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또 중국 사신이 나올텐데 민정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타량(打量)하는 경차관의 일은 우선 정지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
"이런 양전은 실속이 없이 백성의 재물만 허비하는 데 불과할 듯합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6책 14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1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명(明) / 재정(財政) / 교통-마정(馬政) / 농업(農業) / 구휼(救恤) / 역사(歷史) / 어문학(語文學)
○甲午/卯正, 上御別殿, 講《周易》。 侍讀官尹義立進講《頤卦》, 自六四顚頤, 止是大有福慶也。 講畢, 領事李恒福進曰: "亂後, 春秋館史草, 隨後修正, 幾成完史, 而但變初史草, 多未及修。 其時史官, 或有存者, 而自上以爲落後之人, 不可使修正云, 故至今不爲矣。 渠所記草, 他人不得爲之, 渠居其任時事, 未可使渠修之乎?" 上曰: "不可爲也。" 恒福曰: "頃者上敎至嚴, 故以公事場上達未安, 今適入侍, 故敢達矣。" 特進官李好閔曰: "小臣扈駕往西路時, 史官盡爲落後。 持平臣辛慶晋引見時, 史官未備, 堂下文官, 只有小臣, 故大臣, 令臣入侍, 擾攘之時, 未得紙筆, 空手入侍。 今欲修正日記, 慢不省記。 親身如此, 況他人乎? 國可滅, 史不可滅。 此人等雖犯罪, 前者旣在其職, 令渠修之如何?" 同知事沈喜壽曰: "渠所記草, 他人必不得解見矣。" 上曰: "其時所記草, 春秋館不爲藏置乎? 旣有草, 則不必其人之爲也。" 恒福曰: "春秋館無存矣。" 上謂恒福曰: "領相, 天使當來, 而此時紀綱物力, 俱爲板蕩, 何以則可以成形乎? 極可慮。 大臣各別率百僚爲之。" 恒福曰: "西路極爲凶荒, 入京前接待極難。" 上曰: "驛路爲先處置, 使毋遲滯, 然後可以酬應, 何以則可乎?" 恒福曰: "平安道, 稍爲成形, 而黃海道則將絶。 我國馬匹最貴。 國之寶在馬, 其價極多, 而得之亦難, 勢難爲立待矣。" 上曰: "前頭此事最急。 必先待詔使, 然後可及其他。 上下更加盡心。" 好閔曰: "今年大凶, 百穀秀而不實, 而國無救荒鹽穀及常平軍資倉之米。 雖無別樣之事, 民力尙難支也。 況又有意外之事, 而西邊亦可憂, 明年之事, 不可形言。 救荒之具, 亦爲措置, 不可少緩, 且每有詔使之來。 我國凡事, 節目太多, 只貽民弊。" 上曰: "常時節目煩多之弊, 卿亦詳知矣。" 好閔曰: "三國鼎峙之時, 有民人焉, 有社稷焉, 尙能爲國之體。 今則統合三韓, 物力似爲饒足, 而漸至殘薄者, 其故何哉? 亂前豊亨豫大之事, 固不足言, 傷財病民, 亂後尤甚, 治兵訓鍊之外, 省費節用。 凡事與物力相稱, 然後可以爲矣, 而今者進供方物及貢物, 依平時例磨鍊。 此豈恤民之道乎? 古者用民力, 歲不過三日, 而今則不但三(月)〔日〕 而已, 其何以堪乎? 且詔使又將出來云。 頃日天將滿城之日, 則雖有欠缺, 彼尙恕之。 詔使接待, 則國有定規, 不可減損, 民必不能支持。 不急之事, 盡皆節省, 以紓民力可也。" 大司憲黃愼曰: "今年八道凶荒, 而詔使又將出來。 近來我國, 以爲稍定, 雖可裁減者, 尙且盡復舊規。 況此天使接待之事, 則尤不可裁減者乎? 若盡從平時之規, 則民必不支, 萬一臨時裁減, 則監司必已爲分定, 收合於民間之後矣。 雖有減損之命, 惠澤不及於民。 若定知其來奇, 則豫爲講定所入, 頒布於八道可也。" 沈喜壽曰: "前日黃洪憲出來時, 小臣爲洪川縣監, 見之本縣, 只定沈松茸三沙鉢, 而上納之際, 幾費布四十餘匹。 天使時, 百事如此。" 特進官申湜曰: "紀綱頹廢, 下人作弊, 雖天使出來, 應入之物, 能幾何哉? 中間作弊之事, 則無有紀極。 元來我國, 賦輕貢重, 民力多傷於此。 各官貢物, 各有私主人, 私相分占, 父子相傳。 本色之物雖好, 若無十倍之價, 則不得捧上。 乙亥、丙子年間, 朝廷軫念此事, 特置正供都監, 盡革私主人, 渠輩失其命脈, 怨咨紛紜, 未幾復爲此輩作弊之事, 亂後尤甚。 今方貢案修正之時, 痛革中間阻當之事可也。 近又有天使之來, 國家百物匱竭。 若只捧本色, 則民生豈至重困哉?" 上曰: "遠接使作詩之事, 予心殊爲未便。 詩者只是吟詠末技, 而至與上國之人, 務爲相勝, 極是未安。 今則欲令一切勿爲, 此意如何?" 恒福曰: "天使來我國, 他無所爲, 故爲此事矣。" 上曰: "間或有酬, 則不得已應之可也, 至有借述他人之作, 而用之時。 又非誠實之道, 極爲未安。 小國雖見屈於大國之人, 有何害乎?" 恒福曰: "此有所以然。 當初天使, 必以我國爲荒莽, 而及見詩章, 頗相賞許, 故展轉至此也。" 上曰: "今時則與前有異, 如此等事, 一切勿爲可也。" 沈喜壽曰: "抽栍量田事, 今旣施行, 雖不可止, 如此凶年, 又有此事, 民間大致騷擾, 潰散相繼。 今天使又將出來, 不可不順民情。 令監司、守令打量, 敬差官之事, 姑爲停止爲當。" 李好閔曰: "如此量田, 似無得實, 不過糜百姓之財耳。" 巳時罷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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