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별전에 나가 《주역》 박괘를 강하고, 성영·이정구·권반 등과 시국을 논하다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유록(李綏祿)이 박괘(剝卦)를 강하였는데, 육오효(六五爻)의 ‘관어(貫魚)’에서 상구효(上九爻)의 ‘군자득여(君子得輿)’까지 두 번 읽고 해석하였다. 상이 유록이 진강한 부분을 읽었다. 강이 파하자 대사헌 성영(成泳)이 나아와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에 군자와 소민(小民)이 있어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이 삼대(三代)의 규례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종조부터 연분급재(年分給災)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매우 좋은 법입니다. 다만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겨 점차 해이해짐으로써 간교한 무리들이 뜻을 얻어 백성들만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난리 후에 기경(起耕)하는 대로 세를 거둔 것은 대개 부득이해서인데, 인심이 간교하여 공평하게 하지 못함으로써 교활한 자들은 결복(結卜)을 빠뜨려 숨기고 소민들만 유독 요역(徭役)에 응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1∼2복(卜)의 전답이라도 몹시 많은 세미(稅米)를 내게 되어 지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년의 경차관(敬差官)을 본부에서 논계하여 각별히 가려 보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호조의 사목(事目)은 예에 따라 해서 결복을 누락시킬 경우 전가 사변(全家徙邊)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별히 사목을 만들어서 비록 수령이나 당하의 관원이라 하더라도 혹 태벌(笞罰)을 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파출(罷黜)하는 등의 일은 비록 준기(准期)하여 시행하더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임진년 이전에 1백 년 동안 태평하여 사람들이 전쟁을 몰라 양병(養兵)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가혹하게 부릴 줄만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군인 되는 것을 괴롭게 여겼습니다. 지금은 양병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록 10분의 1을 세로 거두어도 누락되지만 않게 한다면 군량이 충분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착실하게 거행하지 않으면 역(役)을 하는 자는 지나치게 괴롭고 누락된 자는 안일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전라도는 44만 결(結)이었는데, 난리 후에는 절반쯤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고한 바는 6만 결 뿐이니, 나라에서 손실보는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다른 도 역시 이런 식이라면 국용(國用)이 어찌 넉넉하겠습니까."
하고, 동지사 이정구(李廷龜)는 아뢰기를,
"난리 후에 전제(田制)가 모두 무너져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양전(量田)하는 것을 혹 소란스럽다고 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비록 강명(剛明)한 관원이라도 서울에서 내려가면 반드시 자세히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니 금년 9월 수확한 뒤부터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경내를 출입하면서 상세히 순심(巡審)하여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고, 내년에 어사를 보내 조사해 속이거나 숨긴 일이 있을 경우 그 당시의 수령을 중죄로 다스리면 반드시 소란스럽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어느 한두 군현만 양전하면 그곳의 전결(田結)이 치우치게 많고 부역이 치우치게 무거워 백성들이 반드시 괴로와할 것이지만, 만약 온 나라를 다 사실대로 양전하여 내도록 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괴로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성영이 또 아뢰기를,
"금년에는 중국 군사가 이미 철수했으니, 바로 정사를 새롭게 해야 할 때인데,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반드시 먼저 전안(田案)을 정한 다음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 국용(國用)을 정하되, 비록 사대(事大)하고 상공(上供)하는 일이라도 평시의 규정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니 형식적인 말절(末節)은 모조리 제거하여 백성에게 취하는 데에 일정한 제도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하는 도리가 반드시 여기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어찌 적(敵)이 없는 나라가 있었겠습니까. 전일 상의원(尙衣院)의 무역(貿易)에 대해 간원에서 논계하자 쾌히 따르셨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감읍하였습니다. 이를 만약 확충해 나가신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라 나라가 작지만 국토가 수천 리를 밑돌지 않고 군사들이 아주 정예롭고 강하니 참으로 자강(自强)한다면 어찌 적을 토멸하여 복수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복수하는 일은 반드시 백성 사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백성 모으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그러면 강적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예전에 고구려는 삼국(三國) 중에 하나였는데도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침략을 이겨냈는데, 더구나 지금이겠습니까. 편안할 때에 십분 유념하여 절검(節儉)을 몸소 실천해서 민력(民力)을 아끼고 길러야 합니다. 지금 당장의 강화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나 뜻을 후일 복수하는 데 두면 역시 불가할 것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년에 국가에서 전결(田結)을 잃지만 않는다면 세입(稅入)이 15만 석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비록 4만 석을 백관들의 녹으로 반급(頒給)한다 하더라도 남는 것이 많을 것이며, 그밖에 공물(貢物) 등의 일을 모두 참작해 정해 오로지 양병(養兵)에 힘을 쓴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옛말에 ‘급하지 않은 관원을 줄여 전사(戰士)들을 양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임진란 때처럼 사나운 적이 아닌 소소한 적이라도 어떻게 해보지 못할 것입니다.
재물과 곡식이 있은 다음에야 군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안팎이 텅비었기 때문에 묘당(廟堂)에서도 양병하는 일을 어렵게 여깁니다. 지금은 남쪽 변방만 염려될 뿐 아니라 서북 지방 역시 염려되는데, 녹이나 받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무사안일하게 날짜만 보내고 있다가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양병(養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헌납 권반(權盼)은 아뢰기를,
"난리 이후에 사로(仕路)가 맑지 못하여 벼슬아치가 모두 세도가에서 나와 각사(各司)의 관원과 수령을 모두 이런 무리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비록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시지만 은택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여 민폐가 여기에서 생깁니다. 지금 처음 입사(入仕)하는 관직이 조금 좋은 자리가 나면 밖의 사람들이 먼저 ‘아무 재상의 아들이 수망(首望)이고, 누가 부망(副望)이다.’고 지적해 말합니다. 이런 폐단을 제거하면 벼슬길이 맑고 깨끗해질 것이며 원근에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격려될 것입니다. 공도가 행해지는 것은 바로 사론(士論)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안에서는 재상으로 하여금 밖에서는 방백으로 하여금 조행(操行)이 있는 사람을 뽑게 해서 처음 입사하는 자리가 비었을 경우 그들을 차임하였다가 뒤에 그들을 수령으로 삼는다면 백성들의 힘이 펴질 것입니다."
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전결에 대한 일은 좌우에서 자세히 진달하였고, 상께서도 이미 자세히 알고 계시니 더 이상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대개 임진년 이후 10년이 지났습니다. 나라가 큰 난리를 겪고 났으니 반드시 큰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도 전에는 작은 나라로서 큰일을 당하여 목전에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에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기해년 이후에는 할 수도 있었는데,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민망합니다. 모름지기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조치한 뒤에 다시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제(田制)에 대한 한 가지 일은 급급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제가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회복될 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당 생기가 돌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대소 신료들은 자기 집에 돌아가 보면 모두 1년을 살아갈 밑천이 장만되어 있는데, 나라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비록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만 대본(大本)이 서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신이 일찍이 호조 참의가 되었을 때에 고제(古制)를 살펴보았더니, 국초에는 세입(稅入)이 40여 만석이었는데, 군사들의 봉록이 4만여 석이고, 제향조(祭享條)가 4만여 석이었으며, 공물(貢物)로 쓰는 것도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때 봉록을 반급(頒給)하는 제도로, 형조의 도관 정랑(都官正郞)의 녹이 45석이라 하였으니, 이 정도면 많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받아들여 쓰는 것은 적고 저축은 많았기 때문에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3창(倉)의 저축이 2백 3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그후에는 제향(祭享)이 점차 많아지고 잡용(雜用) 역시 많아져 임진년 초에 이르러서는 저축된 것이 겨우 50여 만 석이었으니, 이미 3분의 2가 줄어든 것입니다.
인구수는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입니다. 그런데 평시에는 사족(士族)만 전장(田庄)을 소유하고 백성들은 모두 없어 다 함께 아울러 갈아 먹었는데, 난리 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경작하기 때문에 개간(開墾)한 것은 평시에 비해 크게 감소되지 않았으나, 전제(田制)가 이와 같으므로 잔약한 백성들만 유독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결(田結)의 숫자는, 전라도가 40여 만 결, 경상도가 30여 만 결, 충청도가 27만 결인데, 근세 이래로 잇따라 하지하(下之下)로 세를 받아들여 비록 평시라 해도 세입이 겨우 20만 석이어서 국초에 비하면 절반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난후에 팔도의 전결이 겨우 30여 만 결로, 평시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양전(量田)하는 한 가지 일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실행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폐단 또한 많을 것이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괴로와하는 것은 공물이지 전세(田稅)가 아닙니다. 공물을 납부할 때 10두(斗)를 납부할 것이 10석까지 불어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모름지기 견감하고 절용(節用)하여 저축해야 됩니다. 1년에 1만 석을 저축하면 10년이면 10만석이 되고 1년에 10만 석을 저축하면 10년이면 1백만 석이 됩니다. 반드시 재용(財用)이 넉넉한 연후에야 성지를 쌓고 병기를 수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어》에 ‘절용하여 백성을 사랑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말이 비록 천근하나 상하에 모두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 재용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옳은 도리가 아닌 것으로, 근본에 힘쓰고 용도를 절약하는 것 이외에는 천하에 다른 생재(生財)의 방도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계·갑·정·무(癸甲丁戊)의 규정대로 10년을 시행하면 나라의 저축이 반드시 넉넉해질 것입니다.
신은 매번 대궐 안에서 항상 말하기를, ‘현재의 급선무는 경비를 절약하고, 전제를 정하며, 군하(群下)가 서로 책면(責勉)하여 붕당을 깨고 염치를 권려하며 상께서 마땅히 성심을 열고 공도를 펴기를 힘쓰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섯 가지 이외에 더 급하고 간절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특진관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병적(兵籍) 한 가지 일은 마땅히 전제와 함께 해야 하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병적이 비록 긴절하나 이 여섯 조목에 비해서는 급하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참으로 대신다운 말이다. 다만 경비와 전제에 대해 듣기는 들었지만 내가 그 곡절을 모르겠다. 그처럼 급한 일을 유사(有司)는 왜 시행하지 않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경비에 대한 일은, 금년에 시행하면 명년에 그 효과가 나타나고, 명년에 시행하면 후년에 반드시 효과가 나타날 것을 명백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이 전번에 입시(入侍)하여 두 차례 계달했으나 말이 뜻을 나타내지 못하여 다 진술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해가 저물어 긴 말을 드릴 수가 없으나, 백성을 소복하는 일은 이보다 큰 것이 없고 국가의 시책도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경비를 절약하는 방도는 매우 많습니다. 재상(宰相)에게 전부터 후한 녹을 주어 기르는 것은 충후(忠厚)한 도리이긴 합니다. 그러나 녹이란 경작(耕作)의 대신이니, 관사(官事)를 하는 자는 녹을 주어야 하지만 한산(閑散)한 사람은 녹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조종조에서 대신이 치사하는 규정을 둔 것도 역시 이 때문입니다. 지금 동지(同知)와 첨지(僉知)의 숫자가 매우 많은데, 병 때문이거나 혹은 현임에서 해임되어 군직(軍職)에 부쳐진 자는 녹이 없는 체아직(遞兒職)을 주어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말한 바 성심을 여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성심을 여는 일을 어떻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풍채가 빼어났기 때문에 웃으면서 아랫사람들을 접해 다 말하게 하였습니다. 성(誠)은 일정한 체(體)가 없어 외모로서는 형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심이 이르는 곳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고, 들리지 않는 말이 없습니다. 만약 성심을 열면 내일 언로(言路)가 곧바로 열릴 것이니, 그렇게 되면 비록 깊은 궁중에 있더라도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다 아실 수 있습니다. 옛날 임금들이 이른바 ‘형체 없는 데서 보고, 소리 없는 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충성스런 말이 나오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상의 마음을 해쳐서 어떠한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상의 마음을 헤아려 혹 거슬리지 않을까 걱정해 꾸며서 진달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들으면 아름답지만 일을 시행하는 데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도를 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분이 있으니, 어찌 하나하나가 모두 천리(天理)에서 나오겠으며 인욕(人欲)의 사(私)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털끝만큼이라도 사에 가리우면 천리 밖까지 잘못되게 됩니다. 근래 외간에서 형옥(刑獄)을 다스리거나 벼슬을 차임할 즈음에 혹 사사로운 청탁이 있지나 않나 의심스럽습니다. 상께서 입지(立志)를 광명정대하게 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의심이 없도록 하시면 기강이 저절로 서고 모든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붕당을 깨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붕당에 대한 말은 비록 하천(下賤)들이라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심한 경우로 말하면 미관말직이라도 뜻을 얻은 사람은 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만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이루어지지 못하니, 모든 일이 이러합니다. 또한 염치(廉恥) 한 가지 일에 대해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난리 후에는 사대부들이 난리 전과는 전혀 달라서 비루한 일이 아주 많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천하게 여겨 누가 무슨 일을 해도 백성들이 듣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칠 수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예전에 어찌 신과 같은 대신이 있었겠습니까. 정유년 이후로 소신은 직무를 볼 기력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이 편치 못했던 점은 그런 상황에서 범범하게 자급과 차서에 따라 구차하게 자리만 채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으므로 이에 체면(遞免)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상께서는 큰 일을 담당할 만한 사람을 얻어 지금 어떤 일을 시행하심으로써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의 본뜻은 실로 어진 사람에게 양위하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을 담당한 옛 사람 중에는 ‘내가 아니면 누가 능히 하겠는가.’라고 한 사람도 있는데, 경은 어째서 어진 이에게 사양할 마음을 갖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제 재주를 헤아리고, 시세를 헤아렸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공소(空疏)한데 어찌 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상께서 만약 힘써 구하신다면 예로부터 어찌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때가 있었겠습니까. 오직 어떻게 구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5책 14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28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신분-양반(兩班)
○戊寅/卯正。 上御別殿, 講《周易》。 侍讀官李綏祿, 講《剝卦》, 自六五貫魚, 止君子得輿, 再讀釋, 上讀綏祿進講處。 講罷, 大司憲成泳進曰: "自古治國家, 有君子小民。 什一而稅, 三代定規。 我國家, 自祖宗朝, 有年分給災之制, 實是良法, 但法久弊生, 漸致解弛, 奸猾得志, 小民偏受其苦者多矣。 亂後隨起隨稅之規, 蓋出於不得已, 而人心奸巧, 不能平正, 奸猾隱漏結卜, 小民獨應徭役, 故雖一二卜之田, 出米無窮, 不能支當矣。 今年 敬差官, 本府論啓, 請各別擇遣者, 爲此故也, 而戶曹事目, 隨例爲之, 以隱漏結卜, 爲全家徙邊, 此法不行久矣。 臣之意以爲, 各別作事目, 雖守令堂下之員, 或施笞罰可也。 若罷黜等事, 雖至准期, 不足懼之矣。 且我國壬辰以前, 昇平百年, 人不識兵, 莫念養兵, 只知虐使, 故人苦爲軍。 今則養兵不得不爲。 雖什一而稅, 若不失漏, 則足贍軍餉。 今若不着實擧行, 爲役者太苦, 隱漏者安逸, 其何以堪之哉? 平日全羅道, 爲四十四萬結。 亂後起耕幾半云, 而所報只六萬結, 則國家所失者, 幾何哉? 他道亦稱是, 則國用安能裕哉?" 同知事李廷龜曰: "亂後田制蕩然, 不能成形。 量田或云騷擾, 而臣意以爲不然。 雖剛明之官, 自京下去, 則必不能詳察。 自今年九月收穫之後, 令其邑宰, 出入境內, 詳細巡審, 從實以報, 待明年遣御史考覈, 如有欺隱, 重治其時守令, 則必不至騷擾矣。 但一郡一縣獨爲, 則其地田結偏多, 賦役偏重, 民必苦之。 若擧一國, 從實量出, 則民必不苦矣。 當今最急者, 莫大於此矣。" 成泳又曰: "今年天兵已撤, 正改紀其政之時, 而悠悠度日。 必須先定田案, 然後量入爲出, 制爲國用。 雖事大上供之事, 不可一從平時規矩, 繁文末節, 盡皆除去, 取民有制可也。 恢復之道, 必由此出。 且自古豈有無敵之國乎? 前日尙衣院貿易, 諫院論啓, 至蒙快從, 群下莫不感泣。 若擴而充之, 何事不可爲? 我國雖小, 封壃不下數千里, 士馬最稱精强。 苟能自强, 則豈有不能討賊復讐之理乎? 復讎之事, 必以愛民爲主, 聚民爲本, 則强敵不足畏。 昔高句麗, 以三分之國, 猶能支隋、唐之來侵。 況於今乎? (宴)〔晏〕 安之時, 十分留念, 躬行節儉, 愛養民力可也。 目今和之一事, 雖極可愧, 然志在於後日復讎, 則亦無不可。 臣之意, 今年國家, 若不失田結, 則稅入不下十五萬石。 雖以四萬石, 頒百官之祿, 其餘尙多。 其外如貢物等事, 竝皆酌定, 專致力於養兵, 則亦可優爲。 古有捐不急之官, 撫養戰士之言。 苟不如此, 雖非壬辰之劇賊, 小小之賊, 亦不可爲矣。 財穀有之, 然後可得軍士之心。 內外蕩然, 故廟堂亦以養兵爲難事。 今者, 非徒南邊可憂, 西北亦可慮。 但素食而充位, 優游而度日, 脫有緩急, 將何以爲之乎? 我國養兵一事, 不可不爲也。" 獻納權盼曰: "亂離以後, 仕路不淸, 官由勢進, 各司守令, 皆此輩爲之, 故自上恤民雖勤, 而澤不下究, 民弊由是而興矣。 今者, 初入仕之官, 若稍好, 則外人爲先指點某宰相之子爲首望, 某爲副望云。 若去此弊, 則仕路淸明, 遠近聞風, 亦且激勵。 公道之行, 是士論之行, 內而宰相、外而方伯, 令選抄有操行之人, 初入仕有闕, 以此差除, 後以此人爲守宰, 則民力可紓矣。" 李恒福曰: "田結之事, 左右極陳, 自上亦已詳知, 不必更陳。 大槪壬辰以後十年矣。 國之經大亂, 必有大擧措, 而頃者, 則事勢難行, 以小國當大事, 取辦目前, 不遑他事矣。 己亥以後, 可以有爲, 未做一事, 極爲可悶。 須思先務, 措置而後, 更及他事。 今日田制一事, 所當急急爲之。 臣之意, 田制若此, 國無蘇復之理。 賊退以來, 宜有生氣之路, 而頓無之。 今此大小臣僚, 歸視其家, 則皆能辦一年之資, 而國則不然。 雖欲爲之, 大本不立, 故諸事難成。 臣平時, 曾爲戶曹參議, 閱觀古制。 國初, 稅入四十餘萬石, 而軍士祿四萬餘石, 祭享條四萬餘石。 貢物之用, 亦不過此。 其時頒祿之制, 刑曹都官正郞之祿, 四十五石云。 此則雖多, 而一時所捧, 用少儲多, 故逮至中廟朝, 三倉所儲, 至於二百三萬石之多。 其後祭享之路漸廣, 雜用之路亦多, 下及壬辰之初, 所儲僅五十餘萬石, 則已縮三分之二矣。 人口數, 則比平時, 僅十分之一, 而平時則士族只有田庄, 民皆無之, 皆竝耕而食。 亂後, 人皆自耕, 故所墾者, 不至大減於平時, 而田制如此, 殘民獨受其苦矣。 田結數, 全羅道四十餘萬結, 慶尙道三十餘萬結, 忠淸道二十七萬結。 近世以來, 連以下之下收稅, 雖在平時, 而稅入僅二十餘萬石。 比於國初, 則減半矣, 而亂後八道田結, 僅三十餘萬結, 則不及平時全羅一道矣。 其何以成國之模樣乎? 今此量田一事, 必須若排大難而爲之, 然後可成。 弊則必多有之, 皆不可計矣。 且民之所苦者, 貢物也, 非田稅〔也〕 。 貢物所納之時, 十斗所納, 則幾至於十石, 故以此民不能堪矣。 今則必須蠲減節用, 以存餘儲。 一年餘一萬石, 則十年成十萬石矣, 一年餘十萬石, 則十年成百萬石矣。 必財用裕, 然後城池器械, 乃可修也。 《語》云: ‘節用而愛人。’ 註云: ‘言雖至近, 上下皆通’, 此外言財, 皆是非道。 務本節用之外, 天下無生財之道矣。 今以癸、甲、丁、戊之規爲守, 行之十年, 則國儲必裕矣。 臣每於闕中常謂曰: ‘當今切務, 節經費、定田制, 群下相責勉, 破朋儻、勵廉恥, 自上當以開誠心、布公道爲務, 此六者之外, 更無急切之事矣。" 特進官金睟曰: "籍兵一事, 當與田制作對, 不可漏於其中。" 恒福曰: "籍兵雖切, 比於此六條, 似緩矣。" 上曰: "卿言, 眞大臣之言, 但經費田制雖聞, 而予未知其曲折。 如是其急, 則有司何不行之?" 恒福曰: "經費之事, 今年爲之, 明年必有其效, 明年爲之, 後年必有其效, 明白可知。 小臣前此入侍, 再度啓達, 而辭不達意, 未能盡陳, 今亦日晩, 難以長言, 然百姓蘇復之事, 莫大於此, 國家施措, 亦莫大於此也。 節經費題目, 甚多。 宰相從前以厚祿養之, 忠厚之道也, 然祿者, 代耕者也。 爲官事者, 當食祿, 居閑之人, 宜有無祿之理。 祖宗朝, 大臣有致仕之規, 亦爲此也。 今同知、僉知, 其數甚多, 或以病, 或解見任, 而付軍職者, 宜作無祿遞兒以處之, 無妨。" 上曰: "領相所謂, 開誠心者, 將何以爲之?" 恒福曰: "自上開誠心之事, 何可盡陳? 昔唐 太宗, 神采英毅, 故開顔接下, 導使盡言。 誠無定體, 外貌難以形容, 誠心所到, 事無不成, 言無不進。 若開誠心, 則明日言路卽開。 然則雖在深宮之中, 小民疾苦, 無不盡達。 古之人君, 所謂視於無形, 聽於無聲, 正謂此也。 近來忠言不進, 下賊上心, 每遇一事, 則必揣度上意, 猶恐或拂, 修飾以進, 故聽其言則美, 施於事則迂矣。" 上曰: "布公道, 當如何?" 恒福曰: "雖人君, 有人心道心之分。 豈能一一盡出於天理, 而無人欲之私乎? 如有蔽於一毫之私, 則謬以千里之外。 近來外間刑獄差除之際, 或有便房請謁之疑。 若自上立心, 光明正大, 使群心曉然無疑, 則紀綱自立, 萬目畢張矣。" 上曰: "破朋儻當如何?" 恒福曰: "朋儻之言, 雖下賤, 無不知之。 以甚者言之, 雖微末小官, 得志之人, 所爲之事成, 失志之人, 則不成。 凡事類此。 且廉恥一事, 豈盡形言乎? 亂後士大夫, 與亂前頓異, 鄙瑣之事極多, 人視而賤之, 誰爲某事, 民不與也。" 上曰: "未可改之乎?" 恒福曰: "古豈有如臣之大臣? 丁酉以後, 小臣無供職之氣力, 而且不自安者, 此時不可泛泛以資級次例, 苟充其位, 故玆欲遞免, 哭願自上, 得可以擔當大事之人, 及此時施設某事, 不失此機會也。 臣本意, 實在於讓賢也。" 上曰: "古人擔當者有曰: ‘非我孰能爲之?’ 卿何存讓賢之心乎?" 恒福曰: "量己之才, 度一時, 故有此言。 自顧空踈, 寧無推讓之心乎? 自上若力求, 則自古豈無其人之時乎? 唯在求之如何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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