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수의 간궤함과 이덕형의 탐오함을 들어 비판하는 사평
윤두수는 탐오하고 음흉하며 교활한데 표독한 정철과 마음을 같이해서 기축년·경인년 사이에 많은 사류(士類)를 살해함으로써 유감을 마음껏 풀었다. 그리하여 최영경(崔永慶)을 죄에 얽어넣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덕형은 기복(起復)이 되어 이판(吏判)에 제수되었으므로 매양 검은 철릭을 입고 정석(政席)에 참여하였는데, 상기(喪紀)가 이 때문에 크게 무너졌으므로 물론(物論)이 그르게 여겼다. 그래서 그의 정사(呈辭) 내용에도 사숭지(史嵩之)062) 의 기복에 대한 비난만 있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병판(兵判)으로 있을 적에 병조의 군사를 사역시켜 남대문 밖 옛터에다 집을 지었는데 포루(砲樓)·별영(別營)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 썼다. 홍경소(洪敬紹)가 사산 감역(四山監役)으로서 이를 목견하고 말하였다.
덕형의 아비 민성(民聖)이 문화 현령(文化縣令)이 되었을 적에 공명 고신첩(空名告身帖)을 많이 내어 소 1백여 두를 사서 통진(通津)에 있는 전장(田庄)의 들에다 방목(放牧)하였는데, 들판이 누렀었다고 한다. 통진에다 집을 지을 적에는 창호(窓戶)를 모두 문화현에서 만들어 실어다가 썼다. 뒤에 그 아비가 통진 현감에서 체직되자마자 덕형이 경리(經理)의 접반사가 되어 통진의 쌀 1백여 석을 취용(取用)하는 형식으로 공문을 내었다. 그리고는 근친(覲親)을 이유로 통진으로 달려가서 대청(大廳)에 앉아 급히 창고의 쌀 1백여 석을 내어다가 그 고을에 있는 집으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러자 고을의 이속(吏屬)이 들어와서 호소하기를,
"새 현감이 오면 무엇을 먹으라고 그러십니까?"
하면서, 가져가지 말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덕형은 듣지 않고 급급히 실어가게 하였다. 채정선(蔡楨先)과 채경선(蔡慶先)의 농장이 통진에 있고 그들의 형 길선(吉先)이 민성(民聖)을 대신하여 문화 현감으로 교대하였기 때문에 두 곳의 일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권반(權盼)이 덕형과 혼인할 적에, 정선이 말리기를,
"아비를 시켜 죄를 범하게 하였으니 용심(用心)이 무례하기 그지없는 자이다. 혼가(婚家)를 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권반이 따르지 않았다.
훈련 도감 제조로 있을 적에는 2∼3일 간격으로 매번 노자(奴子)를 보내어 쌀 3∼4석과 적두(赤豆)와 대두(大豆) 2∼3석을 가져갔는데 계속해서 이렇게 가져다 썼으며, 한번은 새로 난 밀 15석을 가져간 적도 있었다. 낭청 박자우(朴子羽)가 마침 도감의 공사(公事) 때문에 덕형의 집엘 갔더니 밀을 짊어진 자가 덕형의 집으로 들어왔는데, 뜰에다 멍석을 펴고 이를 말리더라고 하였다.
덕형은 또 반복스럽기가 극심하였다. 그의 처부(妻父) 이산해(李山海)는 동론(東論)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덕형도 실은 산해와 마음을 같이 하였었다. 그런데 술을 가지고 서인(西人) 김권(金權)의 집에 가서는 처부의 잘못을 크게 말하였다. 경자년에 유성룡(柳成龍)이 논박을 받았을 적에 덕형이 차자(箚子)를 올려 성룡의 당류에 공박했으므로 성룡의 당류들이 원망했었다. 덕형이 그뒤 도로 성룡의 당류에 빌붙자 성룡의 당류는 그의 반복스러움을 모르고 자못 추존(推尊)하는 자까지 있었다.
덕형이 일찍이 유대정(兪大禎)에게 말하기를,
"벼슬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러번 번복해야만 고관 대작(高官大爵)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자, 대정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몇 번이나 길을 번복해서 정승에 이르렀소이까?"
하니, 덕형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윤두수의 간궤함과 이덕형의 탐오하고 궤휼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복상(卜相)에 들었으니, 너무도 괴이한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면
- 【분류】인사(人事) / 인물(人物)
- [註 062]사숭지(史嵩之) : 송(宋)나라 사람으로 벼슬이 우승상 겸 추밀(右丞相兼樞密)에 이르렀고 영국공(永國公)에 봉해졌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적에 이종(理宗)이 기복(起復)시키려 하였으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중지한 일이 있음. 《송사(宋史)》 권173 사숭지 열전(史嵩之列傳).
○斗壽, 則貪濫兇猾, 而與毒澈同心, 於己丑、庚寅年間, 多殺士類, 以逞其憾, 至於構殺崔永慶、德馨則起復爲吏判, 以墨色天益, 每參於政席, 喪紀因此大壞, 物論非之。 是以其呈辭, 亦有徒有史嵩之起復之誚之語。 爲兵判時, 役兵曹軍, 治南大門外舊基而作家, 取砲樓別營之材瓦而用之。 洪敬紹, 以四山監役, 目見而言之。 其父民聖, 爲文化縣令時, 多出空名告身, 鬻牛百餘頭, 放於通津田庄之野, 野爲之黃。 作通津家時, 窓戶皆造於文化而輸用。 其父, 後爲通津縣監, 纔遞, 德馨以經理接伴使, 以通津米百餘碩取用樣, 出公文, 以覲親事往通津, 馳入其縣, 坐於大廳, 急出倉米百餘石, 使送於其縣之家, 縣吏等入訴曰: "新縣監來, 何物食之乎?" 懇請不爲取去, 德馨不聽, 使之急急輸去。 蔡楨先、慶先, 於通津有農庄, 其兄吉先, 爲民聖 文化交代, 故明知兩處事。 權盼與德馨婚姻時, 楨先止之曰: "役其父, 使之犯罪, 用心無狀, 不可爲婚姻家。" 盼不能聽。 爲訓鍊都監提調時, 間二三日, 輒送奴, 取米三四碩、赤豆太豆二三碩以去, 連續取用。 嘗取新麰十五碩以去, 郞廳朴子羽, 適自都監, 因公事, 往德馨家, 則負麰者入德馨家, 布網席曝之於庭云。 德馨且以反覆爲事, 其妻父李山海, 力主東論, 德馨實與山海一心, 而持酒往西人金權家, 大言妻父之非。 庚子年柳成龍被論時, 德馨陳箚攻成龍之類, 成龍之類怨之。 德馨厥後, 反附於成龍之類, 成龍之類, 不知其反覆, 頗有推尊之人。 德馨嘗言於兪大楨曰: "仕宦者, 必累度飜轉, 然後乃可至於高官大爵。" 大楨笑曰: "大(鑑)〔監〕 幾度飜轉, 至於政丞乎?" 德馨大笑。 斗壽之奸賊, 德馨之貪縱詭譎, 至於此極, 而入於卜相, 可怪之甚也。
宣宗昭敬大王實錄卷之第一百二十一終
- 【태백산사고본】 74책 12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4책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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