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치계하다
경상 좌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였다.
"흥양(興陽) 출신 김경립(金慶立) 등 10명이 왜적들 속에서 작은 배를 훔쳐 타고 장기(長鬐) 지경에 들어와 정박하였습니다. 적정을 탐문하였더니 ‘지난해 7월에 관백(關白)이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상(發喪)을 하지 않았는데 제장들은 소문을 듣고 철병(撤兵)하여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갈 때 대마도의 왜노들은 분탕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멀리 외진 섬으로 피해갔다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돌아왔다. 본도(本島)의 남정(男丁)은 5∼6백 명에 불과하고 굶주림이 극심하여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그들이 수축한 산성(山城)을 곧바로 쳐부술까 겁을 먹어 주야로 쉬지도 못하고 있다. 왜장들이 모두 관백이 머물던 곳에 모여 그 자리를 뺏으려고 하자 새 관백이 「나는 나이도 어리고 무능하니 어찌 자리를 다투겠는가. 너희들이 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스스로 물러나겠다. 」고 하였다. 사천(泗川)에 주둔한 왜장 심안돈오(沈安頓吾)는 【바로 석만자(石蔓子)이다. 】 바로 살마주(薩摩州)의 강하고 억센 병사인데 관백과 더불어 한 차례 접전하여 사상자가 각기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자웅(雌雄)을 결정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여러 왜장들은 사방에 석성(石城)을 구축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을 삼고는 매일 재목(材木)을 모아들이고 있으며, 전일 인질로 보낸 자녀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조만간에 관백의 자리를 탈취하려는 변란이 있게 되고 죽도(竹島)와 사천에 있는 왜장이 대신 오르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대마도와 낭고야(郞古耶) 왜장이 상서(上書)하여 조선과 다시 수교하기를 요청했지만 관백이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대마도의 형세는 군사가 매우 적고 기근(饑饉)이 또한 심하니, 이런 때에 들어가 친다면 조금도 항전(抗戰)할 리가 없으며 다른 섬의 왜병도 필시 구원하러 오지 못할 것이므로 진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을 중국 장수에게 통보하여 힘을 합쳐 나아가 무찔러 만분의 일이나마 설분(雪憤)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우리 나라에 왜적(倭賊)은 만세토록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다. 남정(男丁)들이 비록 죽었지만 훌륭한 병사를 5만 명쯤은 갖출 수가 있고 창고가 비록 비었다지만 군량미는 몇 년간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 군신 상하가 힘을 합치고 서로 권면하여 이 적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천지에 설 수가 없고 이 원수를 갚지 못하면 조종(祖宗)을 뵈올 수 없다고 여기면서 인의(仁義)로 인심을 모으고 충분(忠憤)으로 사기(士氣)를 고무시켜 화친을 말하는 자의 머리를 베어 장대끝에 효수(梟首)하고 절의로 죽은 사람의 충성을 표창하며 태묘(太廟)에 고함으로써 삼군(三軍)의 병사로 하여금 나아가 죽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게 한다면 비록 중국 군사의 원조가 없더라도 적은 감히 다시금 우리의 천참(天塹)081) 을 엿보지 못할 것이다. 임진 이래의 일을 살펴보면 조신(朝臣)으로서 국정(國政)을 담당한 자들이 그럭저럭 한가히 지내는 데 불과하였고 변장(邊將)으로 병권(兵權)을 잡은 자는 단지 세월만 보내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적이 침입하면 오직 구원을 청하는 데 신속하지 못할까 겁을 내고 적이 후퇴하면 오로지 철병(撤兵)이 늦지 않을까 염려했을 뿐, 한 사람도 청해(靑海)에 활을 걸고 이오(伊吾)에 칼을 울리려는 뜻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평소에 제대로 배양(培養)하지 못하여 조련(操練)하는 데 법도가 없었기 때문에 제몸만 알고 임금은 생각할 줄 모르며 사사로움만 알고 공적인 것은 모른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김응서(金應瑞)는 흉적이 패하여 달아나는 기회를 틈타 진격하여 조금이나마 울분을 씻으려고 하였으니 가의(賈誼)의 태계(笞係)하는 술책보다 비록 치밀하지 못한 듯하나 번쾌(樊噲)의 적진을 횡행(橫行)하자고 요청한 일과 같은 것으로 역시 가상하다 하겠다. 그러니 자신이 묘당(廟堂)에 있으면서 힘써 화의(和議)에 찬동한 자들과 비교한다면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
- [註 081]천참(天塹) : 요해지.
○慶尙左兵使金應瑞馳啓曰: "興陽出身金慶立等十名, 自倭中偸得小船, 來泊(長耆)〔長鬐〕 境。 訪問賊情, 則前年七月關白死後, 秘不發喪, 諸將聞奇, 撤兵而還。 還時對馬島 倭奴, 恐被焚掠, 遠避僻島, 俟過乃還。 本島男丁不過五六百, 飢荒太甚, 將不聊生。 又恐天兵直擣, 修築山城, 晝夜不暇。 倭將等皆聚關白所在之處, 欲奪其位, 新關白曰: ‘我年少無能, 豈能爭位? 爾等欲之, 我當自退。’ 泗川留駐倭將沈安頓吾, 【卽石蔓子也。】 乃蕯摩州强悍之兵, 與關白一度交鋒, 死傷各數百, 未決雌雄而退。 諸倭將, 四面皆築石城, 以爲久住之計, 日以調集材木, 前日質送子女, 盡爲還出。 早晩有奪位之變, 則竹島及泗川 倭將當代立云。 且對馬島及郞古耶 倭將上書, 請與朝鮮, 更爲修好, 關白堅執不許云云。 大槪對馬島形勢, 軍兵甚少, 饑饉又甚, 此時往擊, 少無拒戰之理, 他島倭兵, 必不來援, 進攻不難。 此意通于天將, 協力進攻, 以雪萬一之憤。"
【史臣曰: "我國之於倭賊, 萬世必報之讎也。 男丁雖斃, 勝兵可備五萬, 倉廩雖空, 糧餉足支數年。 君臣上下苟能協力交修, 以爲此賊未滅, 不可以立於天地, 此讐未報, 不可以見於祖宗, 仁義以結人心, 忠憤以鼓士氣, 斬言和者之首, 梟之旗竿, 褒死節者之忠, 告之太廟, 使三軍之士, 進死爲榮, 而退生爲辱, 則雖無天兵之助, 而賊不敢再窺於天塹矣。 竊觀壬辰以來, 朝臣之當國者, 不過悠泛而已, 邊將之柄兵者, 不過(玩揭)〔玩愒〕 而已。 賊來則惟恐請援之不速, 賊退則惟恐撤兵之不早, 未聞有一人掛弓靑海, 鳴劍伊吾之志者, 蓋由於培養不素, 組練無方, 知身而不知君, 知私而不知公, 豈不痛哉? 金應瑞因兇賊敗遁之機, 欲圖進取, 以洩小憤, 賈誼笞(係)〔傌〕 之術, 雖似甚踈, 樊噲橫行之請, 亦足可尙。 比之身居廟堂, 力贊和議者, 大相遠矣。"】
- 【태백산사고본】 69책 11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9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