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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09권, 선조 32년 2월 9일 기미 4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우리 나라가 중국에 보낸 자문

우리 나라가 중국에 자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를 의논하여 알리는 일입니다. 이달 1일에 본인은 뒤처리를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을 확정하여 알려 달라는 여러 대인(大人)의 요청을 직접 받았습니다. 본인이 다시 생각해 보면 저들 왜적이 우리 나라를 7년간이나 유린하였는데 만약 중국 군사가 구원해 준 힘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들을 죽이고 물리쳐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해에 이들 적이 물러가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는 이미 다 허물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중국 군사가 철수하여 돌아가면 왜적은 당장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이는 존망과 사생(死生)이 관계된 일로서 본인이 아무리 미련하지만 어찌 자신에게 절실한 이해가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우리 나라 당장의 상황으로 보면 반드시 중국 군사의 힘을 빌어 끝까지 보전을 받아야겠으니 요충지에 주둔하는 일로 말하면 3만 명의 병력도 적은 듯하고 1∼2만을 추가하여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 실로 우리 나라의 큰 다행이고 본인의 소원입니다.

다만 우리 나라가 병란을 입은 후로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한 지가 7년이 지난 데다 정유년 5월부터는 각도의 공사(公私)간에 저축해둔 쌀과 콩을 모조리 긁어다가 대군을 공급하였으며, 요즈음에는 각도 배신(陪臣)의 장계에 의하면 서민의 집에 있는 금년 종자까지 도정(搗精)하여 당장 급한 군량에 충당하였고, 관직과 옥(獄)을 파는 등 각종 곡물을 받아들일 만한 사례로 남김없이 권장해 모집하여 거두어 들여 이제는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추수까지는 9개월이나 남았는데 그간에 필요한 식량은 우리 나라가 백방으로 마련하더라도 나올 곳이 없습니다.

군량을 구입하기 위한 은을 마련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송 경략(宋經略)은 우리 나라 사람의 자원을 개발하여 군량에 충당하기 위해 위관(委官)과 은 불리는 기술자를 각도의 고을에 보내 광산을 열어 은을 불리게 하는 등 많은 힘을 들였으나 얻은 것이라고는 모두 납뿐이었으므로 결국 그 일을 혁파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함경도 단천군(端川郡)에 예부터 내려오는 은광이 있기는 하나 1년 동안 불리는 양이 1천여 냥이 채 안 됩니다. 우리 나라에 만약 은의 자원이 있다면 나라의 재정이 탕진된 이때 무엇 때문에 숨기고 개발하지 않아 화폐를 유통시키고 군량이 넉넉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은 이미 우리 나라를 위해 국고를 무수히 소비한 마당에 우리 나라가 자신의 장래 일을 꾀하는 데 있어 중국의 만분의 일도 안 되는 비용을 아껴 다시 왜적의 침략을 부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을 두고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이 폐허가 되어 수만 명 군사에게 제공할 식량을 마련해 내기 어려운 상황임은 위에 말한 바와 같으니 아무리 많이 주둔시키고 싶더라도 중도에 식량이 모자라면 필시 일이 낭패하여 난처해질 염려가 있고, 만약 식량이 모자라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성원하는 세력이 없어 왜적이 곧 흉계를 꾸밀 것입니다. 전일에 여러 대인께서 여러 번 요구함에도 즉시 명을 듣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수륙병(水陸兵) 1만 5천 명의 인원이 우리 나라의 장졸(將卒)과 협력하여 조련하고 방어한다면 본인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계속 식량을 공급할 방도를 도모하겠습니다. 바라건대 귀원(貴院)과 귀부원(貴部院)은 우리 나라의 형편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힘껏 선처하여 천조의 변함없이 지극한 은혜를 완수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아울러 회답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자품(咨稟)하는 일로 위와 같이 이자(移咨)하니 살펴보시고 상부에 올려 시행하십시오. 이상입니다. 흠차 총독 경략 군문(欽差總督經略軍門)·흠차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흠차 감찰 요해 조선 등처 군무 감찰 어사(欽差監察遼海朝鮮等處軍務監察御史)에게 이자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73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외교-명(明) / 광업-광산(鑛山)

    朝鮮國王爲議報留兵事:

    本月初一日, 當職面受諸大人指諭善後留兵事, 宜商確咨報等因。 準此當職再念, 伊賊蹂躪小邦, 至七年之久。 倘非天兵拯救之力, 其能望殺退而有今日乎? 上年此賊不退, 則小邦已糜爛矣。 今日天兵撤回, 則倭賊朝夕必渡海矣。 此是存亡、死生所關, 當職雖甚惛, 豈不知切己之利害乎? 揆以小邦目前之事勢, 則必須仰賴天兵, 終始保全, 以留屯控扼之處言之, 三萬之兵, 亦似鮮少。 再加一二萬, 以爲保障, 實小邦之至幸, 而當職之情願也。 第小邦被兵以來, 民不得耕種, 已過七年, 自丁酉五月, 盡括各道公私所儲米、豆, 以供給大軍。 近據各道陪臣狀啓, 庶民之家, 今年種穀, 亦已碾米爲糧, 以濟一時軍食之急缺, 至於賣官鬻獄, 各項開納事例, 勸募收取, 不遺錙銖, 今已無餘力矣。 自今至于秋成, 尙有九箇月子, 其間應用糧料, 小邦雖百計措辦, 而無辦出之處。 至於折色餉銀, 則小邦之不使銀, 天下之人所共知。 先該經略, 欲開小邦山澤之利, 以濟軍餉, 分遣委官及吹鍊匠役, 前往各道州縣, 開礦吹鍊, 費力甚多, 而所得皆鉛子, 遂罷其役。 唯是咸鏡道 端川郡有舊來銀礦, 而一年吹鍊, 不滿千餘兩。 若小邦有産銀之利, 則當此國計空竭之時, 何故秘之不發, 不使貨泉流通, 軍餉爲裕也? 天朝旣爲小邦, 費累百萬帑藏, 而小邦爲自家善後計, 反靳其萬一之費, 再〔招〕 寇禍, 豈有是理? 參之天理、人情, 在所必無。 玆者地方, 蕩爲荒墟, 累萬兵廩支糧料, 艱於辦出, 如上所陳, 雖欲多留, 而中途餉乏, 則必有狼狽難處之患。 若因糧少而不留兵, 則小邦無以爲聲勢, 而倭賊便生其兇計。 前日諸大人, 屢勤指諭, 而未卽聞命者, 誠以此也。 如得水陸兵一萬五千餘數, 協同小邦將卒, 操鍊防戍, 則當職當拮据, 以圖接濟。 煩乞貴院、貴部院,(貴院)矜愍小邦事勢, 量力善處, 以畢天朝終始曲全之恩, 不勝幸甚。 仍乞備由回照。 擬合咨稟, 爲此合行移咨, 請照驗轉輿施行。 須至咨者。 右咨欽差總督經略軍門、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欽差監察遼海朝鮮等處軍務監察御史。


    • 【태백산사고본】 68책 109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73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외교-명(明) / 광업-광산(鑛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