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문 도감이 수군과 승리한 것에 대해 중군과 담화한 내용을 아뢰다
군문 도감(軍門都監)이 아뢰기를,
"오늘 신이 나아가 중군(中軍)을 만나 보고 적이 도망간 사정과 수군이 크게 승리한 연유에 대해서 담화하였습니다. 그러자 중군이 1폭의 당보(塘報)를 내보이고, 이어 말하기를 ‘적추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도망 간 것에 대해서 나도 그 상세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전날 국왕께서 물으셨지만 번거롭게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지관(質官)을 들여보낸 일은 노야도 알고 있다. 다만 노야의 생각은 그들로 하여금 적추를 찔러 죽이고 돌아오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여 왜적이 그들을 그대로 데리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필시 등한히 왕래하지 않고 도중에서라도 시행하려고 했을 것인데 복건(福建) 등지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일은 그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없지 않을 것인데, 유 제독(劉提督)의 생각은 대개 적중에 이간질을 시키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부실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 나라에서는 말하지 말라. 훗날 그런 일이 발각되면 유 제독이 스스로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국왕께서 군문·경리를 만나보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 두 노야도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다. 군사를 머물러 두는 일에 대해서 전일 노야가 나에게 묻기를 「유 총병(劉總兵)을 머물게 하려는데 어떻겠는가?」 하기에, 나는 배신의 말을 들은 적이 있으므로 즉시 대답하기를 「유 총병의 일에 대해서 이 나라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으니 결코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 진 도독에게 수군·육군을 아울러 통솔하게 하여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 하니, 군문도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품하기를 ‘오유충(吳惟忠)은 노성하고 청검하며, 진인(陳寅)·진잠(陳蠶)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니 머물게 할 만하다.’ 하니, 중군이 말하기를 ‘진 도독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오·진 두 장수는 다시 품달하여 조처하겠다. 다만 그대 나라에서 군문·경리·과도(科道)·어사(御史)의 네 아문에 모두 자문을 보내되, 어느 장수라고 성명은 쓰지 말고 단지 수군이 가장 긴요하니 다수의 수군을 남겨 달라고 하고 육군의 장수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는 사람을 머물게 해달라고 범연히 청한다면, 나도 곁에서 찬조할 생각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일에 기패관(旗牌官) 주충(朱忠)이 독전하는 일로 영기(令旗)를 가지고 주사의 진영에 가서 적들이 탈출하여 도망치지 못하도록 진 도독에게 경계하였는데, 그가 어제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추 소서행장이 강화를 칭탁하면서 여러 왜추에게 구원을 청하여 울산(蔚山)·부산(釜山)·사천(泗川) 등지의 적들이 모두 구원병을 보내왔다. 사천이 순천(順天)과 가장 가까우므로 먼저 주사와 서로 마주쳐 혈전이 벌어졌다. 당초에 행장이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유 제독과 진 도독에게 강화하자고 하면서 유 제독에게는 수급 2천을, 진 도독에게는 수급 1천을 보내 줄 터이니 자기를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였다. 진 도독은 그 말을 믿고서 말하기를 「나에게도 수급 2천을 보내주면 보내 줄 수 있다. 」 하자, 행장이 날마다 예물을 보내고 주찬(酒饌)·창검(槍劍)따위의 선물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남해(南海)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 」 하자, 이순신(李舜臣)이 말하기를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 하였으나, 진 도독은 듣지 않았다. 14일 1척의 작은 배를 보냈는데 왜인 8명이 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왜선이 나간 지 이미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묘도(猫島) 등지로 가서 파수하여 차단시켜야 한다. 」 하였다.
‘18일 4경에 여러 곳의 구원병이 크게 몰려와 드디어 대전이 벌어졌는데 포와 화살은 쏘지도 않고 불뭉치만을 적선에 던져 2백여 척을 소각시켰다. 그러자 옷가지와 온갖 물품이 바다를 덮었는데, 행장은 떠내려오는 물품과 하늘에 치솟는 화염을 보고서 구원병이 크게 패한 것을 알고 외양(外洋)으로 도망쳤다. 먼 곳의 구원병도 그들의 선봉이 패한 것을 알고 감히 와서 구제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만약 며칠만 더 지체하여 사방의 구원병이 모여 왔더라면 왜교(倭橋)의 일이 매우 위태로왔을 것이다. 대개 행장의 계책은 겉으로는 강화를 하는 체하면서 몰래 구원병을 청하여 먼저 주사를 함께 치고 이어 육군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인데, 적선의 선봉이 이미 패하여 흉계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의 뜻이 천리에 순종하는 자를 돕는 것인 듯하다. 21일에 주사가 남해로 나아갔으나 왜적은 벌써 도망치고 없었다.’ 하였습니다.
당보를 동봉하여 입계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10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39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軍門都監啓曰: "今日臣卽見中軍, 講話賊遁事情及水兵大捷之由, 則塘報一幅出示, 仍言曰: ‘行酋遁去之意, 俺亦不知其詳, 前日國王亦問之, 而煩不敢對。 但質官入送之事, 老爺亦知之。 第老爺之意, 欲使此輩, 刺殺賊酋而來矣, 事竟未得遂, 仍爲帶去。 此輩必不等閑往來, 雖於行路, 亦欲試之, 而或從福建等處出來矣。 此事不無其間曲折, 而劉提督大槪欲爲行間於賊中。 雖有不實之事, 爾國不(消)〔須〕 說。 後日事發, 則劉也自當逃不得其罪。 國王雖見軍門、經理, 不必提起此等說話。 兩老爺亦不無未安之意。 留兵一事, 則前日老爺問之於俺曰: 「欲留劉揔兵如何?」 俺曾聞陪臣之言, 故卽對曰: 劉之事不厭此邦人心, 決不可留。 陳都督可以兼統水、陸, 留之似當。」 軍門亦曰: 「爾言是矣」 云。’ 臣又稟曰: ‘吳惟忠老實淸約, 陳寅、陳蠶, 皆好人, 亦可留。’ 中軍曰: ‘陳都督則已爲定奪矣, 吳、陳兩將, 當更稟處之。 但軍門、經理、科道、御史四衙門, 皆爲移咨, 而不擧某將姓名, 只曰水兵最關, 多數留之, 陸將以驍勇有計慮者, 泛然請留, 則俺亦從傍贊助爲計’ 云。 且旗牌官朱忠, 前日以督戰事, 持令旗送于舟師, 戒飭陳都督, 使賊不得脫走, 而昨日回來言曰: ‘行賊託稱講和, 請救於諸酋, 而蔚山、釜山、泗川等賊, 皆送援兵。 泗川與順天最近, 故先與舟師, 相値血戰。 當初行長, 怕其天威, 與劉、陳相講, 劉處約送首級二千, 陳處約送首級一千, 許我放還云云, 陳都督信之曰: 「送二千則可放出。」 行長連日送禮, 酒饌、槍劍, 饋遺不絶, 仍曰: 「南海有壻, 邀與計議, 欲使人請來, 願出送此船云云」 李舜臣曰: 「詐譎之言不可信。 請壻云者, 欲請援兵, 決難許之。」 陳都督不聽。 十四日出送一小船, 坐倭八人。 厥後李舜臣曰: 倭船出去已四日, 援兵必將至矣。 吾輩當往猫島等處, 把截待之。 十八日四更, 諸處援兵大至, 遂與大戰, 無暇放砲、射矢, 只以包火投之於賊船, 燒破二百餘隻。 衣服什物, 蔽海而下, 行長見其浮來之物, 烟焰漲天, 知援兵大敗, 從海外遁去遠處。 援兵知其先鋒已敗, 不敢來救, 遂還去。 若遲延數日, 援兵四集, 則倭橋之事殆哉! 大槪行長之計, 陽爲約和, 陰待援兵, 欲先合擊舟師, 仍攻陸兵, 而賊船先鋒已敗, 未遂兇計。 或者天意助順矣。 二十一日舟師薄至南海, 倭賊已爲遁去’ 云。 塘報同封入啓。" 傳曰: "知道。"
- 【태백산사고본】 67책 10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539면
- 【분류】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