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218) 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10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36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역사-사학(史學) / 농업-전제(田制)
- [註 218]병신년 : 1596 선조 29년.
○左議政李德馨馳啓曰: "本月十九日, 泗川、南海、固城之賊三百餘隻, 合勢來到露梁島, 統制使李舜臣領舟師, 直進逆戰, 天兵亦合勢進戰。 倭賊大敗, 溺水致死, 不可勝計, 倭船二百餘隻敗沒, 死傷者累千餘名。 倭屍及敗船木版、兵器、衣服, 蔽海而浮, 水爲之不流, 海水盡赤。 統制使李舜臣及加里浦僉使李英男、樂安郡守方德龍、興陽縣監高得蔣等十人, 中丸致死。 餘賊百餘隻, 退遁南海, 留窟之賊, 見賊船大敗, 棄窟遁歸倭橋, 糧米移積於南海江岸者, 竝棄而遁去。 行長亦望見倭船大敗, 自外洋遁去事。"
【史臣曰: "李舜臣爲人忠勇, 且有才略, 明紀律, 愛士卒, 人皆樂附。 前者統制使元均, 貪虐無比, 大失軍情, 人皆離貳, 遂致丁酉閑山之敗。 元均死後, 以舜臣代之, 舜臣初至閑山, 收合餘卒, 措備器械, 廣開屯田, 販賣魚鹽, 軍餉有裕。 不數月,軍聲大振, 有虎豹在山之勢。 及今曳橋之戰, 陸兵則觀望不進, 舜臣與天朝舟師, 晝夜血戰, 多有斬獲。 一夕倭賊四名, 乘船出去, 舜臣告於陳璘曰: ‘此必請援之倭也。 出去今已四日, 明日間大兵必至。 我兵先往逆戰, 庶得成功。’ 陳璘初則不許, 舜臣涕泣固請, 璘乃許之。 遂與天兵搖櫓,達夜進去, 天未明, 到露梁, 則賊果大至。 出其不意, 良久血戰, 舜臣親自射倭, 而賊丸中胸, 仆於船上, 其子欲哭, 軍心遑惑。 李文彧在傍, 止其哭, 以衣掩其屍, 遂嗚鼓進戰, 衆皆以爲舜臣不死, 出氣奮擊。 賊遂大敗, 人皆謂死舜臣破生倭。 及訃音傳播, 湖南一道之人, 莫不痛哭, 雖老嫗、兒童, 無不悲泣。 其丹忠許國, 忘身死義, 雖古之良將, 無以加也。 惜乎! 朝家用人失當, 使舜臣, 不得盡展其才。 若使舜臣, 丙、丁年間, 不遞統制之任, 則豈致閑山之敗沒, 而兩湖爲賊之窟乎? 吁其惜哉!"】
- 【태백산사고본】 67책 10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36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역사-사학(史學)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