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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5권, 선조 31년 10월 12일 갑자 5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우의정 이덕형이 중국군의 전투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우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치계하였다.

"유 제독(劉提督)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步)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오듯 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督戰)하지 않았습니다. 부총병(副總兵) 오광(吳廣)의 군사는, 대장의 호령이 있기를 고대하다가 순거(楯車)에 들어가 잠자는 때도 꽤 있었습니다. 그때 조수(潮水)는 차츰 빠지고 수군(水軍)도 물러갔습니다. 왜노(倭奴)는 육군(陸軍)이 일제히 진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여 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는 놀라서 1백 보쯤 후퇴하고 각 진영의 사기(士氣)도 모두 떨어졌으니, 그날 한 짓은 아이들 장난과 같았습니다. 이미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대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3일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血戰)하여 대총(大銃)으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막사[房室]를 맞추자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金晬)가 문을 열어 젖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제독은 노기(怒氣)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성 위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 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이와 같은데도 팔짱만 끼고 지나쳤으니, 제독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아서 장수와 군졸들이 모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마침 사천(泗川)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혼란하여 후퇴를 결정하였으니 더욱 통곡할 일입니다. 제독이 수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초부터 공을 서로 다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끝내 일처리가 잘못되고 말았으니 더욱 통곡을 금할 수 없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10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2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右)〔左〕 議政李德馨馳啓曰: "劉提督初二日攻城時, 諸軍前進城下六十步許, 賊之銃丸如雨, 提督終不偃旗督戰。 吳副緫 兵, 苦待大將號令, 或有入楯車, 而困睡者頗多。 于時潮水漸落, 水兵亦退。 倭奴見陸兵不卽齊進, 縋城直下, 前攻兵, 被殺二十餘人, 兵驚退百步, 各營之氣已沮, 當日所爲, 有同兒戲。 旣不督進, 又不捲回, 使各兵立過半日, 徒引賊之鉛丸, 提督所爲, 殊不可曉。 初三日, 水兵乘潮血戰, 大銃中行長房屋, 倭人驚遑, 俱就東邊, 若從西邊進入, 則城可陷矣。 金睟排門請戰, 提督有怒色, 終不動兵。 城上有女人呼曰: ‘此時倭賊空虛, 天兵速入云云。’ 機會如此, 而袖手差過, 提督行事, 正如奪魄之人, 將卒皆輕侮。 適見泗川敗報, 事情已亂, 決意退兵, 尤爲痛泣。 提督之與水兵不協, 則爲因初有爭功之心, 而終乃處事益錯, 尤不勝痛泣。"


  • 【태백산사고본】 66책 10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52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