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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6일 경신 2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동작강에서 중국군의 진법 연습을 관람하다

상이 동작동(銅雀洞) 사장(沙場)에 나아가 진 유격과 습진(習陣)하였는데, 진은 방진(方陣)이었고, 백포(白布)로 성첩(城堞) 모양같이 만들어진 것을 휘장으로 둘러놓았다. 그런데 그것이 해에 반사되어 4∼5리(里)까지 하얗게 뻗치어, 일찍이 우리 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으로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 상이 곧바로 진중(陣中)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장군단(將軍壇) 아래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로 읍하고 자리에 앉자 4면의 조장(組帳)이 드디어 걷히고 습진이 시작되었는데, 1명의 중국인이 홍패(紅牌)를 들고 꿇어앉아 외치기를 ‘관기(官旗)는 명령을 들으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진법(陣法)이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방식과 같은가 다른가?"

하니, 서성(徐渻)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남으로 내려갈 때 중국인들이 습진하는 것을 보고 훈련 도감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군대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서성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4천 명의 병력이었으나 도산(島山) 전쟁에서 죽고, 지금은 3천 4백여 명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진세(陣勢)를 보니 군용(軍容)이나 깃발이 질서 정연하고 당당하여 우리 나라 진법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이 병력이 큰 들판에 널려 있으면 보기에 적잖게 보여 만약 적병이 와서 보았을 때 틀림없이 몇 만 명쯤 되어 보인다고 할 만큼 병력의 다소를 짐작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하였다. 기고관(旗鼓官)이 각기 나아가 명령을 듣고 난 뒤 왜병 모양으로 꾸민 수십 명이 앞으로 나와 알현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왜병들이 어찌하여 나타났소이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당인(唐人)을 왜병 모양으로 꾸민 것으로 군중에다 두고 그들로 하여금 왜노의 기밀을 탐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혹 적진과 가까이 있을 때는 적진을 오가며 탐문도 하는 간첩 구실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3·6·9일이면 으레 습진하고 있으니, 이곳 군대도 우리 군대를 따라 습진한다면 토병(土兵)도 병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중국인 1명이 또 행영 우방패(行營遇放牌)를 들고 꿇어앉아 외쳤다. 상이 이르기를,

"이 진법은 유 제독(劉提督)의 방식과 같은가?"

하니, 서성이 아뢰기를,

"유 제독의 방식은 한 번 싸울 때 아홉 번을 변하는데 이것은 조금 다릅니다."

하였다. 중국인 하나가 또 야영 출기패(夜營出奇牌)를 들고 나와 꿇어앉아 외치자 중국인들이 군대를 정비하여 진을 치면서 왜병들이 밤에 쳐들어 오는 시늉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적의 진영을 쳐부순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저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또 한 중국인이 포충 삼첩패(布衝三疊牌)를 들고 나와 꿇어앉아 외쳤다. 상이 이르기를,

"저렇게 뛰면서 달려가는 것은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하니,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왜노들의 하는 짓이 저와 같습니다."

하였다. 중국인 하나가 또 대충 오첩패(大衝五疊牌)를 들고 꿇어앉아 외치니, 복병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왜노를 포위하는 모양을 하였는데, 상이 그것을 보고 이르기를,

"옛말에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해서 진격한다는 것은 바로 저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이번에는 또 중국인 1명이 위소 획공패(圍巢獲功牌)를 들고 나와 꿇어앉아 외치니, 중국군들이 모두 피리를 불면서 달려오는 시늉을 하였는데, 이는 바로 승리를 아뢰는 모양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저렇게 엄정한 중국의 습진법을 보지 못했다가 지금 보니 너무도 질서 있고 당당하여 왜적 정도야 치고말고 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유격이 또 타권을 앞에서 보여주었는데, 그 법은 뛰면서 몸을 날려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이나 목, 혹은 등을 치며, 가슴과 배를 번갈아 치기도 하고, 볼기와 허벅지를 문지르기도 하는데 주먹 쓰는 것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한 지 사람이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삼지창(三枝搶) 쓰는 법과 언월도(偃月刀) 쓰는 법, 낭선(筤筅)·당파(鏜把)·등패(橙牌) 쓰는 법 등을 보여주고 나서 유격이 말하기를,

"지금 저 여러 기법을 각기 따로따로 했기 때문에 별로 기묘하게 보이지 않지만, 만약 저것들을 한 부대로 편성하여 서로 치고 막고 하는 모양을 한꺼번에 하게 하면 참으로 볼 만합니다."

하고서, 여러 기법을 한꺼번에 보이도록 명하니, 대장(隊長)이 맨 앞에 서고 등패가 그 다음에, 포수(砲手)가 또 그 다음에, 그리고 낭선·장창(長槍)·삼지창의 순위로 서서 서로 번갈아 전진과 후퇴를 하고 좌로 돌고 우로 빠져나오고 하면서 각자 있는 묘기를 다 자랑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저 한 부대에서 단 1명이라도 죽으면 그 나머지는 비록 살아 있어도 모두 군법으로 처단하기 때문에 제각기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우리 나라 칼 쓰는 법을 보여주니, 유격이 말하기를,

"기법은 좋으나 다만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르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우리 나라의 말 달리는 법을 보이면서 말 위에서 서기도 하고 안장 위에 거꾸로 서기도 하니, 유격이 보고는 잘한다고 하였다. 술자리를 걷고 대가(大駕)가 먼저 들어왔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09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외교-명(明)

○上幸銅雀沙場, 與陳遊擊習陣。 陣乃方陣, 以白布如城堞狀, 作帳圍抱。 光景照日, 皓皓四五里, 眩奪人目, 曾東方所未見。 上直馳陣中, 至將軍壇下下馬, 相揖就座, 四面組帳, 遂放偃, 遂習陣, 一唐人持紅牌跪呼曰: "官旗聽令。" 上曰: "此陣法與訓鍊都監同乎? 不同乎?" 徐渻曰: 李元翼南下時, 見唐人習陣曰: "與訓鍊都監, 略同云矣。" 上曰: "此軍幾何?" 徐渻曰: "初以四千之兵, 島山戰亡之後, 三千四百餘名矣。" 上曰: "觀此陣勢, 軍容、旗色, 井井堂堂。 我國陣法, 有同兒戲。 且此兵布滿大野, 見之不少。 若以賊兵來, 則必不下數萬云矣, 兵之多小, 斟酌爲難矣。" 旗鼓官各就聽令之後, 爲形者數十, 謁于前, 上曰: "此何以現耶?" 遊擊曰: "此乃以唐人, 作形, 置於軍中, 使之體探奇。 或賊陣相近, 則往來相問, 間牒之人也。 遊擊曰: "吾軍三、六九日, 例爲習陣。 此處兵隨吾軍習之, 則土兵亦知兵矣。" 一唐人又持行營遇放牌, 跪呼, 上曰: "此陣法與劉提督同耶?" 徐渻曰: "劉提督一戰九變, 此則稍異矣。" 一唐人又持夜營出奇牌, 跪呼, 唐人整軍成陣, 作子夜犯之狀。 上曰: "古有斫營之言, 正謂此也。" 一唐人又持布衝三疊牌跪呼, 上曰: "彼踴躍趨進者, 作何狀耶?" 鄭經世曰: "子形狀若彼矣。" 一唐人又持大衡五疊牌, 跪呼, 伏兵一時竝起, 圍抱子狀。 上曰: "古有魚貫而進, 正謂是也。" 一唐人又出圍巢獲功牌, 跪呼, 則唐兵有吹角馳來之狀, 此乃奏捷之形也。 上曰: "不見天朝習陣之嚴整如此, 今得見之, 井井堂堂, 倭賊不足平也。" 遊擊又呈打拳技於前, 其法踴躍騰身, 以兩手自擊其面, 或擊其項, 或擊其背, 或交打其胸腹, 或撫其臀股, 用拳捷疾神速, 人莫敢當其前。 又呈三枝(搶)〔槍〕 技, 呈用偃月刀技, 呈筤筅及鏜把、撜牌於前, 遊擊曰: "今此諸技, 各各習之, 不見奇妙, 若令諸技, 作一隊竝呈, 以作相擊相禦之狀, 則可觀矣。" 遂命諸技, 一時呈技, 隊長在前, 橙牌居次, 砲手又居次, 筤筅、長(搶)〔槍〕 、三枝(搶)〔槍〕 , 又次次居之, 迭相進退, 左旋右抽, 各臻其妙。 遊擊曰: "此一隊中一人死, 則其餘雖生, 皆處以軍法, 故各致死力矣。" 上以我國用劍技呈之, 遊擊曰: "技則善矣, 但敎以不畏死, 然後用之。" 又呈我國馳馬技, 或立於馬上, 或倒立於鞍上, 遊擊曰: "善矣。" 遂撤酒, 大駕先入。


  • 【태백산사고본】 63책 99권 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09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