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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1권, 선조 30년 8월 5일 계해 2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내전의 경호 문제, 중국군의 남방 방어 문제, 서울의 내성 수축 문제를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참판 노직(盧稷)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우부승지 권희(權憘), 가주서 권진(權縉), 허적(許𥛚), 검열 임수정(任守正)·이필영(李必榮)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보(賊報)가 날로 위급해져 언제 어떻게 될지 근심스러운데, 내전(內殿)이 이곳에 있으니 만약 형세가 위급해지면 어떻게 계획해야 할 것인가? 전부터 비변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는데, 내 어찌 반드시 겁이 많고 지모가 없기 때문에 그러겠는가. 나도 도성을 떠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창졸간에 일이 일어나면 사세가 매우 난처해질 것이니, 경들은 심사 숙고하여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외부에서 감히 말할 수는 없으나 무슨 일인들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장수가 여기에 와 있으니 사태가 전일과는 다릅니다. 한 번 거조하는 일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지 않습니다. 그동안 상께서 생각하신 것을 인대하실 때마다 들려주셨고 신하들도 생각했던 것이 있으면 남김없이 모두 진술하였는데 만약 좋은 계책이 있으면 또한 취용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오늘날의 형편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가 들어오면 사세가 매우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가 도착하기 전에 조처하려고 했는데 삼사(三司)의 논열(論列)과 대신(大臣)의 계사(啓辭)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많은 말들을 하였다. 지금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되게도 재상의 자리에 있으니 국가에 대한 모든 일을 성의를 다하여 논의하는 것이 당연한 임무인데, 더구나 이와 같이 막대한 일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래서 계사를 그렇게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묘당에서 모두 ‘중국 장수가 들어오면 왜적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중국 장수가 들어오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경들은 장운익(張雲翼)의 계사와 소 안찰(蕭按察)의 말을 보지 않았는가. 외부 사람들은 모두 중국 장수를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지금 마 도독(麻都督)의 군사는 겨우 1만여 명에 불과하니, 어떻게 10만이나 되는 적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적은 비상한 왜적(倭賊)들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중과 부적으로 너무도 상대가 안 될 듯싶다. 또 듣건대 마 도독이 지금 남쪽으로 내려 가려 한다고 한다. 마 도독은 대장이니 하루 아침에 일이 불행하게 되면 우리 나라는 그만두고라도 천하의 대세가 이로부터 아예 글러지고 말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니 비록 큰 차질이야 없겠지만 만약 대처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되어 다른 곳으로 물러나 주둔하거나 서울로 후퇴하여 지키게 된다면, 한갓 명성과 위세만 손상시킬 뿐, 흉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니 차라리 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나를 겁쟁이로 여길 테니 이제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모름지기 잘 생각하여 조처하라."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적의 흉측한 꾀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적이 만약 마 도독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서울이 허약하다는 것을 탐지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곧바로 서울로 침입한다면 사세가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하니, 노직은 아뢰기를,

"적이 헛점을 이용하여 곧바로 쳐들어 오면 피차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도독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한갓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리하게 될 듯싶습니다."

하고, 김명원은 아뢰기를,

"신의 용렬한 소견으로는 도독이 여기에 있으면 이는 호표(虎豹)가 산에 있는 것과 같은 형세가 되지만 내려간다면 군세(軍勢)가 고립되어 오히려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게 될 뿐이니, 좋은 계책이 아닐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령 도독이 이곳에 있는다면 한강은 파수할 수 있겠으나 도성은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양장(兩將)218)남원전주에 주둔하고 있지만 군세가 매우 허약하고 마 도독의 군사 역시 많지 않으니 경솔하게 남하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생각이 부족하여 모두 일반적인 계획만 생각하고 있다. 하찮은 적 몇 명을 잡는다 해서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적이 만약 곧바로 쳐들어오면 앞뒤로 적을 맞게 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그와 같습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자연히 그런 근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들이 5년 동안 변경에서 양곡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그 의도가 어찌 없겠는가. 아마도 전일에 전라도를 함락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쌓였던 분심을 이곳에서 풀려고 하여 진주(晉州)에서 와 같이 도륙하고서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의도가 필시 근본인 도성에 있을 것이다. 들으니 평수길(平秀吉)이 몸소 낭고야(郞古耶)에 도착했다 하는데, 그의 음흉한 뜻은 실로 헤아리기가 어렵다. 임진년 초기에 내가 ‘왜적은 마치 금(金)나라 태조(太祖)가 요주(遼主)를 공격한 일219) 과 같이 서울을 공격할 것이다.’ 하였는데,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들 하여 결국 내가 경박한 말을 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말았지만 오늘날 과연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의 두 장수가 남쪽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고 도독이 현재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저 적이 일지병(一枝兵)으로 곧장 쳐들어 오지는 못할 것이고 필시 가을 추수 때를 기다렸다가 길을 나눠 병진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어찌 전라도만 염려되겠습니까. 지금 수로에는 보장(保障)이 될 만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적이 만약 양호(兩湖)를 점령한다면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약탈할 것인데 만약 두어 달이 지나 한강이 얼게 되면 천연적인 요새지도 믿을 바가 못됩니다. 자다가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오늘날의 대책으로는 그래도 강탄(江灘)을 굳게 지키는 것뿐인데, 중국 장수의 분부는 단지 궁성을 수축하는 데에만 급급하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궁성을 수축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경의 생각을 말해 보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성 안에 초가를 지어 백관과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 거처하게 하고 중국 장수들은 외성(外城)을 지키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 밖은 3면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니, 적이 일단 점거하여 식량 조달과 군사 원조를 모두 끊어버리면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될 것입니다. 안찰(按察)은 ‘외성을 철거하고 내성을 수축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기어코 성을 수축하고야 말 의도입니다. 그런데 도독은 ‘치첩(雉堞)220) 만을 수축한다.’고 하니, 이는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한강에 얼음이 얼기까지는 두어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천연적인 요새를 잃고 나면 다시는 손쓸 곳이 없고, 앞으로 중국군이 때를 맞추어 일제히와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노직이 이르기를,

"상류의 형세는 얼음이 얼지 않더라도 우려되는 곳이 많습니다. 충주(忠州) 이상은 얕은 여울이 매우 많아 물이 줄어들 경우 도보로도 건널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이 적을 물리친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혹시라도 불행하게 되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 것이다. 승첩을 거둔다 하더라도 어떻게 금년 안에 왜적을 모두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여러 해 지구전을 벌인다면 후일에 대한 계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니, 노직이 아뢰기를,

"전일에 소 안찰(蕭按察)이 신들을 불러놓고 성을 수축하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우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외성에서 철수하고 내성을 수축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으며, 적이 만약 외성에 가득 차 우리에게 식량과 구원군이 모두 두절된다면, 이는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물력이 고갈되어 토목 공사를 일으킬 능력이 없는데 형세가 또한 이와 같다.’ 하였더니, 소 안찰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내성에 당신나라 백성을 들여 보내고 외성에 우리 군사가 파수하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인가. 당신나라 사람들은 늘 외성은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고 내성은 너무 좁아서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하며, 사색(辭色)이 매우 거칠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 안찰이 무슨 일로 왔다던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칙지(勅旨) 안에도 없었으니, 그가 온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노직은 아뢰기를,

"군사를 감독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의아스럽거니와 내성을 수축한다는 말은 더욱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사면이 모두 높은 산이니 적이 만약 둔거(屯據)한다면 이는 곧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는 안찰이 이렇게 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는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점으로 보면 중국에도 인재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안찰을 세 차례 접견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예모를 번번이 달리했다. 내가 중국 장수를 많이 보아 왔지만 아직껏 이와 같은 자는 보지 못했다. 그가 강을 건너 왔을 무렵 의주(儀註)221) 를 보고 말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연회나 벌이며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가.’ 하고서도, 도독(都督)이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하루도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어떻게 된 사람이길래 언행이 그러한가. 내가 중국 장수를 헐뜯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대체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중국 조정에서는 늘 조선 사람들은 모여 술만 마시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는데 사실 조선 사람도 잘못이 있지만 중국 대관(大官)이 이처럼 일을 처리하니 한심하다 하겠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일이 성지(聖旨)에 기록되어 있으니 만약 궁성을 수축하지 않는다면 필경 난처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현재 어려운 사정을 간곡하게 진술하여 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개유토록 하고, 만약 부득이하면 수축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토목 공사를 하느라고 인력과 물자를 허비하는 것이 매우 중대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사실 무근한 말을 날조할까 무척 두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제 도승지에게 이르기를 ‘궁성은 끝내 버릴 수 없는 곳이니 들어가서 지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수축해야 할 것이다.’ 하였더니, 호민이 아뢰기를 ‘일단 수축한 뒤에 우리를 들어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옳다."

하였다. 응남이 아뢰기를,

"도독은 이곳에 주둔하고, 파 유격(頗遊擊)의 일지병을 나주(羅州)로 파송하는 한편, 전주에도 성이 있고 식량이 있으니 또 일지병을 보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도 이런 논의가 있었는데 이 일은 어떠한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남원(南原)전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책응하기가 어렵습니다. 들으니 나주에는 쌀 1천 석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주·남원·순천·나주 등 네 곳은 모두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 당상이 도독을 찾아가 요청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로는 식량 조달이 가장 어렵습니다. 누국안(婁國安)의 말을 듣건대, 진주(晉州)단성(丹城) 근처는 벌써 텅 비어 인가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졌다 합니다. 부세(賦稅)를 거두고 곡식을 모으려면 반드시 추수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백성들이 흩어졌으니 누구에게 수확을 시키겠습니까. 군산창(群山倉)의 전세미(田稅米)도 상황이 다급하게 될 경우 주선하여 보관해 둘 겨를이 없을 것이며 산동(山東)의 곡식 또한 요즘 풍랑이 거세어 해로로 운반할 수 없으므로 경리 역시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평안·황해 두 도의 곡식을 모두 운반해 오면 산동의 곡식을 옮겨다 그 수만큼 충당하겠다고까지 하였는데, 만약 서둘러 식량을 조치하지 않으면 대병(大兵)의 접제(接濟)를 하루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탄금대(彈琴臺)에 성을 수축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성은 쌓지 말도록 하라."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탄금대의 형세가 매우 좋습니다. 충주는 서울의 울타리가 될 뿐아니라 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형세상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곧바로 군사를 나누어 쳐들어 온다면 매우 막기 어려운 형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성룡이 또 아뢰기를,

"지금 중국 장수들은 후속 군사를 기다렸다가 늦은 가을쯤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퇴보(退保)에 대한 일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후퇴하여 웅거할 곳이 없으니, 이 곳을 버린다면 어느 곳이 보전할 만한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동·서의 방호장(防護將)들이 모두 군사가 없어 겨우 5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므로 적병이 날로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정탐도 못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별도로 외방의 무사라도 모집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일이 다급해지면 상의할 틈이 없을 터이니 각자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대체로 오늘날의 일은 중국 장수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임의로 할 수 없으니, 사태를 다시 관망하며 조처해야지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적의 수가 더 늘어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서둘러 발동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의 일은 필시 차마 말못할 형세가 될 것입니다."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222) 에 대해 모두 적절한 방책이 없는데 한번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국가의 흥망과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태가 급하게 되면 미처 주선할 기회가 없을 것이며 그 환란 또한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개 왜적이 문정(門庭)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틈을 엿보고 있는 한 도성은 바로 군중(軍中)인데, 내전을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끝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식으로 일을 요리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해낼 것인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적보(賊報)가 날로 급해지고 있다. 만약 남쪽 지방의 한두 고을이 함락된다면 다시 손을 쓴 수 없을 것인데 저 영상은 ‘급해지거든 그때 조치하자.’고 하니 이는 고집스런 말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형편은 임진년과는 다를 듯합니다. 임진년에는 적이 동파(東坡)에 이르고 나서야 서흥 부사(瑞興府使) 남의(南疑)가 비로소 군사 1백여 인을 거느리고 내전(內殿)을 받들어 호위하고 갔지만, 지금은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임진년과 같지 않다고 하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에서 방어하는 장수들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하면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중대하여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을 하셨으니 어느 곳으로 계책을 정하셨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나의 소견을 스스로 믿으려는 것은 아니다. 전부터 내 말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들어 맞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아직 징험되지 않은 것은 ‘중국 군사가 난병이 될 것이다. [天朝亂兵]’고 한 말 뿐인데, 사태가 위급해지면 중국 병사로 인한 화란이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전일 내전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에 왜적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서서히 사태를 관망하며 모셔오자고 하였으나 대신이 계사를 올리고 삼사(三司)가 차자(箚子)를 올려 기어코 서울로 돌아오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 때문에 오늘과 같은 낭패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내 말이 적중된 셈이다. 그리고 강제로 주사(舟師)를 부산 절영도(絻影島)의 외양(外洋)으로 내보내 패망케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말은 하지 않았으나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교를 내렸었다. 지금 중국 장수가 남원과 전주 두 곳에 분주(分駐)하고 있지만 적이 10만 군을 동원하여 공격해 온다면 수천 군사로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남쪽의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른다면 서울에 있는 중국 병사인들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난병(亂兵)이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형세란 나날이 달라지는 법이니 일률적으로 고집하여 말할 수는 없다. 적세의 중과(衆寡)를 멀리서 헤아릴 수는 없으나 만약 중과 부적으로 양·진(楊陳) 두 장수가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온다면 중국 군사도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내가 물러가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묘사(廟社)와 삼궁(三宮)을 어떻게 모셔야 한단 말인가. 나는 중국 장수를 따라가야 하겠지만 내전(內殿)은 이피(移避)하지 않을 수 없다. 늘 염려하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방에 믿을 만한 장수가 한 명도 없으니, 이러한 때에 만약 선처하지 않았다가 사태가 위급해진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권희(權憘)가 아뢰기를,

"지금은 중국 장수가 와 있으니 임진년과는 형편이 다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난처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전에도 하였다. 내가 평일에 보살피던 백성이라도 일이 위급해지면 소란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수가 달자(㺚子)인 중국 군사이겠는가. 달자는 견양(犬羊)과 같은데 난병이 안 된다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이런 곡절은 전혀 생각지 않고 한갓 인심이 동요된다고만 말하고 있으니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마음 속에 생각한 바가 있어도 으레 남의 말하기를 꺼려서 감히 하지 않아 마치 속담에 ‘남의 술수에 빠진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인정(人情)이 그렇다는 것이지 입시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묘사(廟社)는 처리하기 더욱 어려우나 옛날 사람 중에는 묘사를 군중(軍中)에서 모신 자도 있었다. 즉 한 고조(漢高祖)가 동분 서주 전쟁을 치르면서도 소하(蕭何)로 하여금 관중(關中)에서 사직을 지키게 하였다. 《전한사(前漢史)》에 ‘소하가 관중에 사직을 세웠다. [蕭何建社於關中]’고 한 것이 그것이다. 후일 왜적을 토벌한 후에 묘사를 건립한들 무슨 잘못이 되겠는가. 오늘날 도성은 실로 군중인 셈이니 상하가 모두 군복을 입고 계엄할 때인데 어찌 처변(處變)할 방도가 없겠는가?"

하니, 응남이 아뢰기를,

"신이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전년에 인대(引對)했을 때에 상이 하교하시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바다를 건너 오면 서울을 지키기 어려우니 내전을 이어(移御)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장수가 성에 가득하니 서서히 사태를 관망하며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부질없이 법언(法言)을 논하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진실된 계책을 다시 생각해 보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다시 사태를 보아가면서 도독에게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논의만 하고 말 것인가? 우리 나라의 논의는 대부분 좋지만 어찌 논의만 가지고 적을 물리쳐 대사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8책 9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7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註 218]
    양장(兩將) : 양원(楊元)과 진우충(陳愚衷).
  • [註 219]
    금(金)나라 태조(太祖)가 요주(遼主)를 공격한 일 : 금나라 태조(太祖)는 요병(遼兵)과의 싸움에서 전군(前軍)을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요주(遼主)가 거느리는 중군(中軍)을 공략함으로써 요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는 왜병이 곧바로 왕이 있는 서울을 공격한다는 뜻임. 《금사(金史)》 권2 수국(收国) 원년 12월조.
  • [註 220]
    치첩(雉堞) : 성 위에 쌓은 담.
  • [註 221]
    의주(儀註) : 나라의 전례에 관한 절차를 주해(註解)하여 기록한 책.
  • [註 222]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 : 첫째 내전(內殿)을 서울에 머물게 하느냐의 여부, 둘째 중국 장수를 남쪽으로 보내어 남방(南方)을 지키게 할 것인가의 여부, 셋째 서울에 내성(內城)을 수축할 것인가의 여부임.

○上御別殿, 引見大臣、備邊司有司堂上。 領敦寧府事李山海、領議政柳成龍、行判中樞府事尹斗壽、左議政金應南、行知中樞府事鄭琢、行刑曹判書金命元、兵曹參判盧稷, 右副承旨權憘、假注書權縉許𥛚、檢閱任守正李必榮入侍。 上曰: "賊報日急, 朝夕可虞, 而內殿在此, 勢若尤急, 何以爲計? 自前備邊司不用予言, 然予豈必恇怯無謀? 予亦知出避之難。 倉卒之間, 事甚難處, 卿等其熟思而善處之。" 成龍曰: "自外雖不敢言, 何事不思乎? 但天將在, 事勢與前有異。 一擧措之間, 所係非輕。 自上睿算所及, 每諭於引對之時, 自下凡有所懷, 亦盡達無蘊矣。 如有長策, 亦可取用。 大槪今日之勢, 恐不得任意, 伏願三思焉。" 上曰: "天將入來, 則事勢至難, 故欲趁未到前處之, 則三司論列, 大臣啓辭, 多費辭說, 不一而足。 今旣至此, 將若之何?" 成龍曰: "臣等忝在相位, 凡國家有事, 義當竭誠極論。 況此莫大之事乎? 啓辭不得不爾也。" 上曰: "前日廟堂皆言: ‘天將若來, 賊自退。’ 今果然乎? 天將入來, 則不得自由之意, 曾已言之矣。 卿等不見張雲翼啓辭, 蕭按察之言乎? 外人皆以天將爲可恃, 今兵, 僅萬餘, 安能當十萬之賊? 況此非嘗兵乎? 以予觀之, 衆寡强弱, 不敵遠矣。 又聞麻都督, 方欲南下云。 是大將, 一朝事若不幸, 我國則已矣, 天下事, 自此去矣。 勝負, 兵家常事。 雖不至蹉跌, 若勢有所難處, 或左次某地, 或退守京城, 徒損聲威而已, 兇賊益肆鴟張矣, 不如不往之爲愈。 人皆以予爲恇怯, 今不欲更言。 須商量處之。" 曰: "兇謀難測。 賊若探知都督南下, 京城孤弱, 遶出他路, 直衝京城, 則勢甚狼狽。" 亦曰: "乘虛直衝, 彼此不及。 都督南下, 非徒無益, 恐反不利。" 命元曰: "以臣庸劣見之, 在此則有隱然虎豹在山之勢, 下去則軍勢孤弱, 反受侮於彼賊, 恐非得計也。" 上曰: "設使都督在此, 漢江猶可把截, 都城不可守。 今兩將駐南原全州, 而軍勢甚孤。 軍亦不多, 不可率爾南下。 我國之人, 智慮不周, 皆思一船之計。 雖捕零賊, 竟何補哉? 賊若直衝, 則腹背受敵, 奈何?" 曰: "臣之所見, 亦如此矣。" 應南曰: "自有此憂。" 上曰: "五年境上, 屯糧鍊兵者, 豈無其意? 蓋以前日, 未陷全羅, 今欲洩憤於此, 屠戮如晋州而後已。 不然其意, 必在根本矣。 聞平秀吉親到郞古耶云, 其志叵測。 壬辰之初, 予言彼有之勢, 廷臣多以爲不然。 予輕薄發端, 受言多矣, 今果何如耶?" 成龍曰: "兩將分駐南方, 都督方鎭京城, 彼賊似不能以一枝直擣, 必待秋成, 分路竝進。 然豈特全羅爲可慮? 今則水路無一保障, 深可慮也。" 上曰: "此語誠然。" 成龍曰: "賊若屯據兩湖, 恣意焚掠, 而若待數月, 長江氷合, 則天塹之勢, 亦無所恃。 中夜思之, 心膽俱隳隳。 然今日之策, 猶在於拒守江灘。 天將分付, 只急於修築宮城, 其意所在, 未可知也。" 上曰: "宮城修築之意, 卿試言之。" 成龍曰: "欲作草屋於城內, 使百官人民, 入此室處, 而天將防守外城云。 城外三面, 皆高山, 賊若一據, 糧援俱絶, 則有若籠中鳥也。 按察則以爲: ‘撤外城, 以築內城云。’ 其意必欲修築而後已。 都督則只修造雉堞云, 是不過鎭定人心之具耳。 長江氷合, 只隔數月, 天塹失險, 更無所措。 只望後頭大兵, 趁此齊到而已。" 上曰: "兵家勝負, 不可預料。 豈可徒恃天兵, 而不爲之計乎?" 稷曰: "上流形勢, 不待氷合, 多有可虞。 忠州以上, 淺灘極多, 若水落則可以徒涉矣。" 上曰: "都督若擊却之則幸矣, 倘或不幸, 一敗塗地矣。 設使勝捷, 豈可必於今年盡滅? 若持久數年, 則後日之計, 不可不慮。" 曰: "前日按察招臣等, 專責築城一事, 臣等曰: ‘撤外城而築內城, 豈得容衆? 賊若瀰漫外城, 糧援俱絶, 是坐而待亡也。 況小邦物力殫竭, 不能起土, 形勢亦如此云’, 則按察大怒詬責曰: ‘內城則入汝國人民, 外城使天兵把守, 有何不可? 爾國每稱外城, 以爲闊大難守, 內城則以爲狹小難容。 然則欲將何爲?’ 辭色甚厲矣。" 上曰: "蕭按察以何事來?" 命元曰: "無勑旨中, 未知所以來。" 曰: "監軍云云矣。" 上曰: "外城不可爲守, 內城之說, 尤未曉其意。 四面高山, 賊若屯據, 則是自抵滅亡也。" 成龍曰: "似是按察, 以是爲塞責之具耳。" 上曰: "以此觀之, 中朝亦無人矣。" 上曰: "接見按察凡三度, 禮貌皆異。 予見天將多矣, 未有如此者。 越江之初, 見儀註言: ‘此何時而雍容樽俎之間云’, 而往來都督處, 無日不泥醉, 此何等人也? 予非敢毁天將, 大槪如是耳。 天朝每責以朝鮮, 群飮廢事云, 朝鮮人, 固亦非矣, 天朝大官, 處事如此, 可謂寒心。" 成龍曰: "宮城若不修築, 則此事載在聖旨中, 終必有難處之患。 宜盡其形勢, 使李德馨反覆開諭, 如不得已, 則起役似當矣。" 應南曰: "虛費工役, 雖極重大, 其言不可不曲從。 不然, 深恐搆捏無形之言。" 上曰: "予昨言于都承旨曰: ‘宮城非終棄之地, 雖不入守, 姑可修築云’, 則好閔曰: ‘旣修之後, 若令驅入, 則何以處之?’ 云。 此言誠然。" 應南曰: "都督則駐此而如頗遊擊一枝兵, 派送羅州, 而全州有城有糧, 又送一枝兵, 似爲便當。" 上曰: "前亦有此議, 此事何如?" 成龍曰: "南原全州相遠, 難以策應。 聞羅州只有米一千石云。 然全州南原順天羅州四處, 皆不可不守。" 上曰: "令兵曹堂上, 可往見都督而請之。" 成龍曰: "今日之事, 糧餉至難。 聞婁國安之言, 晋州丹城近處, 已盡空虛, 人烟斷絶。 收稅募穀, 必待秋穫, 而百姓已散, 誰使刈取? 羣山倉田稅, 若至蒼黃, 則亦未及周(施)[旋] 藏置, 山東之穀則今已風高, 海路不通, 經理亦以爲悶。 至曰平安黃海之穀, 沒數搬運, 則以山東之穀, 推移充數云。 若不趁急措置, 則大兵接濟, 一日爲難。 且彈琴臺築城事, 何以爲之?" 上曰: "不關城子, 可勿築。" 成龍曰: "形勢甚好。 忠州京城藩障, 復據上流, 形勢不可不守。 若俟氷合, 則分兵直進, 勢極難遏。" 又曰: "今天將方待後頭兵馬, 秋抄有進取之計, 退保一事, 不可開說, 而此時退無所據, 雖捨此, 臣未知其某地爲可保也。 東、西防護將, 皆無軍兵, 只有五人, 賊兵日迫, 而瞭望亦不得爲云, 誠可寒心。" 應南曰: "別聚外方武士, 以備緩急爲當。" 上笑曰: "是何言之太(旱)〔早〕 ? 可徐徐爲之。" 上曰: "事急則不及商議, 各陳所懷。" 成龍曰: "大槪今日之事, 天將在此, 不得任意, 更觀事勢, 不可輕易處之。 賊若充斥則已, 不爲速發, 則前頭之事, 必有不忍言者矣。" 曰: "上中下三者, 俱無善策, 一擧措之間, 所關非細, 不可不慮。" 上曰: "事急則必未及周旋, 其患亦有不忍言者。 大槪賊在門庭, 朝夕伺釁, 都城乃軍中也。 奉內殿入城, 終至難處, 是何事也? 料理如此, 何事可做?" 上曰: "賊報日急。 南方一二邑見陷, 則更無措手足。 彼領相曰: ‘急而後爲之’ 云, 此固滯之言。" 成龍曰: "今日事勢, 似不如壬辰。 壬辰則至東坡後, 瑞興府使南嶷始率軍百餘人, 奉護內殿而往, 今則必不如是。" 上曰: "何以謂不如壬辰?" 成龍曰: "京畿防禦等將, 各有所率軍, 使之扈衛則可以成形。 此事極重, 不可率爾講議。 今旣發言, 未知有計於何地。" 上曰: "予非自恃己見。 從前予言符合無差, 人皆知之。 時未驗者, 天朝亂兵之語耳。 事勢危急, 則唐兵之禍, 有難忍言。 前日內殿在海州時, 以賊屯京城, 欲徐觀事勢而奉來, 則大臣啓辭, 三司陳箚, 必令奉還而後已。 以致今日之狼狽, 此亦予言之驗也。 勒使舟師, 出於釜山 絶影外洋, 以致敗沒何耶? 予雖不形諸言語, 每下不可不愼之敎。 今雖天將分駐南原全州, 賊以十萬來衝, 則數千之兵, 其能抵當乎? 南方之事若至於此, 則在京天兵, 其亦可恃乎? 其不爲亂兵, 何可必乎? 凡天下事勢, 一日各異, 不可固執一槪而言。 賊勢衆寡, 不可遙度, 若强弱不敵, 兩將, 捲甲而還, 則天兵之不可恃, 明矣。 予非欲退避之也。 廟社、三宮, 何以處乎? 予則當隨天將, 內殿不可不移避。 每念一夜之間, 不知有何事也。 前面無一將可恃, 此時若不善處, 及至事急, 雖悔何追?" 曰: "今則天將在, 事勢與壬辰不同矣。" 上曰: "事之難處, 予已言之。" 上曰: "不得自由之言, 自前言之矣。 雖我平日撫養之赤子, 事若危急, 未必無亂, 況天兵多是㺚子? 㺚子, 犬羊也。 安保其無亂? 此等曲折, 專不致念, 徒以人心搖動爲言, 亦未可曉也。 我國之人, 雖有所思, 例避人言, 不敢便發。 如俗所謂落人謀下者, 誠可怪也。 此泛言人情, 非謂入侍之人如此爾。 且廟社, 尤難處。 古人雖或有奉廟社於軍中者, 驅馳東西, 而使蕭何守關中社稷。 前史有之曰: ‘蕭何建社於關中。’ 他日討賊後, 建立廟社, 何妨? 今日都城, 實軍中, 上下當戎服戒嚴, 豈無處變之道?" 應南曰: "臣與李元翼, 前年引對時, 自上下敎曰: ‘淸正渡海, 京城難守, 內殿當移御’ 云, 而今時則不然。 天將滿城, 處置極難。 徐觀事勢而審處宜當。" 上曰: "備邊司毋徒爲好論法言, 而可更忠計策。" 成龍曰: "更見事勢, 從容議于都督而處置, 可矣。" 上曰: "然則論議而已乎? 我國之論議, 則儘好矣, 豈可以論議, 殺賊成事乎?"


  • 【태백산사고본】 58책 9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7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軍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