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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27일 임술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비망기로 병이 심하여 정무를 보기 어려우니 세자가 섭정하도록 전교하다

비망기(備忘記)로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나의 사정이 민박(悶迫)하여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전일에 이미 모두 유시하였으므로 지금 다시 췌언(贅言)할 필요가 없다. 수년 이래로 오직 날마다 세자(世子)가 책봉(冊封)되기만 바라왔으며 세자가 책봉되기만 하면 그날로 물러나려고 결심하여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만 번 꺾여져도 도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처럼 간절한 이 마음을 한 번도 가슴 속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는데, 불행히도 중국 조정에서는 즉시 책봉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연하고 있다. 이는 진실로 당초에 경(卿)들이 지나치게 생각하여 먼저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나를 오도(誤導)한 탓이다.

더욱 한없이 마음이 아파오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속에서도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질병이 고황(膏肓)에 깊이 박혀 정신이 없어지고 단지 형체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고 두 눈이 모두 어두워져 지척의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몇 줄의 글도 자획(字劃)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심병(心病)마저 생겨 날로 더욱 고질이 되어 하는 말이 잘못되기만 하고 하는 일도 어그러지기만 하여 혼망(昏妄)과 전도(顚倒)를 거듭하고 있으니 놀랍고 당황스럽다. 두 팔은 삼대처럼 뻣뻣하고 두 다리는 잘 펴지지 않아 사지(四肢)와 백체(百體)가 아프지 않은 데가 없는데 특히 가슴 속의 답답한 기운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죽을 날이 이미 가까와져 의술(醫術)이나 약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러면서도 정무(政務)를 듣고 학문을 강론하고 온갖 기무(機務)를 수작(酬酢)하다니, 천하에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하루 넘기기가 1년 같으며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므로 질병이 갈수록 더해지는데 그런데도 이 몸은 매여 있는 형편이다. 아, 예나 이제나 돌아갈 데가 없었던 궁한 사람을 말하자면 어찌 한이 있겠는가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다시 있었겠는가.

구성(具宬)의 서장(書狀)이 온 뒤로 즉시 나의 뜻을 전유(傳諭)하고 싶었지만 섭장(葉將) 【섭 유격(葉遊擊)이다. 】 이 서울에 머무르고 있어 사세가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었고, 이어서 역적의 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틈이 없었는데 이제는 중국 장수도 떠났고 역적의 옥사(獄事)도 끝났으니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일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중국 조정이 아직도 세자를 책봉하지 않았으니 선위(禪位)하는 일을 지금 감히 다시 말할 수는 없지만, 섭정(攝政)하게 하는 일만은 역대에 시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께서 모두 이미 시행하셨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전규(前規)이다. 시급히 섭정하게 하는 일을 거행하여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모두 세자의 말을 들어 처리하여 훌륭한 다스림을 도모함으로써 다시 국가를 회복시키도록 하라. 나는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들어앉아 병을 요양할 것이다. 다행히 이렇게 해서 몇 해나마 목숨을 연장하게 된다면 제대신(諸大臣)에게서 받은 은혜가 크다 할 것이다. 구구한 소원이 먹을 때나 잘 때나 이에 있다.

내가 보건대, 세상의 유식하다는 선비들도 관작(官爵)과 이록(利祿)에 있어서는 갖가지 계책으로 도모하여, 구차하게 염치없는 짓을 하기에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옛적에 송 영종(宋英宗)은 전위(傳位)할 적에 오히려 난색(難色)이 있었거니와, 지금 나는 임금의 자리를 내놓는 것을 변모(弁髦)처럼 여겨 한없이 간절하게 기구(祈求)하고 있으니, 이는 내 마음 속에 반드시 지극히 견디기 어렵고 지극히 민박(悶迫)한 바가 있어서이다. 무릇 아래에 있는 사람이 민박한 심정을 호소하면 위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굽어보아 곡진하게 들어주는 법이다. 더구나 나는 전후로 여러 차례 경(卿)들에게 호소했는데 끝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어찌 인정일 수 있고 도리일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사람의 일이란 아침 저녁 사이에 어떠할지 알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병세(病勢)가 이러하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통함을 간직한 채 말라 죽어 버린다면, 나의 눈이 감기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구천(九泉)에서라도 함께 만나게 된다면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마땅히 시급하게 거행하고 다시 전일처럼 상지(相持)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다행한 것이 없겠다."

하니, 대신들이 【좌목(座目)은 위에 보인다. 】 아뢰기를,

"삼가 하교(下敎)하신 말씀을 받들고 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진달할 말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그전부터 이 한 가지 일로 신들에게 하교해 오신 지도 이제 이미 몇 해가 되었고, 신들의 구구한 뜻을 또한 이미 천청(天廳)에 주문(奏聞)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군신(群臣)들의 심정에 안타깝게 여겨지는 바는, 시기로나 사세로나 어려운 일임을 성상께서도 이미 환히 다 알고 계실텐데도 이번에 또 이렇게 통절한 말씀으로 하교하셨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신들은 차마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들을 수도 없어, 오직 머리를 맞대고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당초에 신들이 먼저 세자 책봉을 청했던 것은 곧 사리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마는, 중국 조정에서 즉각 허락하지 않아 책봉에 관한 명이 내리지 않았으니, 전선(傳禪)하는 한 가지 일은 진실로 논할 바가 아니고, 섭정(攝政)하게 하는 일도 결코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는 사리에 있어서나 사세에 있어서나 너무도 분명한 일입니다. 지금은 다만 국가의 사세가 어렵고 위태한 데다가 구적(寇賊)들이 물러가지 않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고 흩어져 갖가지 변고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비록 뜻을 분발하고 정신을 가다듬기를 날마다 틈이 없이해도 오히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어찌 성상께서 인사를 사절하고 병을 요양하며 혼자 보낼 수 있는 때이겠습니까. 신민(臣民)과 만백성의 마음만 이로 인해 실망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조종(祖宗)과 천지의 신명이 성명(聖明)께 기대하고 있는 것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기세가 중간에 쇠퇴했다가 다시 떨치게 되는 예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번 실패하고나서는 지탱하지 못하는 수가 있기도 했는데, 그 기미는 임금이 심지(心志)를 자강(自强)하는 여부에 달렸었습니다. 중국의 예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때만 하더라도 현종(顯宗)이 또한 거란(契丹)의 난으로 인해 도성(都城)을 버리고 남쪽으로 행행(幸行)했다가 그 뒤에는 졸연히 정책과 교화(敎化)를 닦아 밝히고 밖으로는 호로(胡虜)들을 물리치고서, 능침(陵寢)을 수축하고 왕업(王業)을 공고하게 하여 고려 시대의 덕이 훌륭한 임금이 되었었는데, 이 모두는 현종 자신이 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일찍이 한 번 실패한 것 때문에 지나치게 물러나려 하는 것을 오늘날처럼 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 왕성하시어 정무(政務)에 싫증내실 때가 아니십니다. 비록 정신과 마음을 요양(療養)한다 하시더라도 자연히 갖가지 기무(機務)를 수작(酬酢)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꼭 겸양하고 물러가 한가로이 계시면서 조종(祖宗)들의 부탁을 저버리고 신민들이 실망하게 한단 말입니까. 동궁(東宮)은 본시 효성이 지극하여 이런 분부를 듣게 될 때마다 당황하고 민박(悶迫)하여 더러는 여러 날 음식을 폐하다가 건강이 편치 못하게 되는데, 신들은 또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 하찮은 정성일망정 굽어 살피시어 다시 더 숙고하소서. 신들의 말이 비록 졸렬하다고 하더라도 뜻만은 진실로 비통하고 절박합니다. 황송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7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壬戌/備忘記, 傳于大臣曰:

予情事之悶迫, 卽難堪者, 前日諭之已盡, 今不必更贅, 年來惟日望世子之封。 世子旣封, 卽日決退。 此心耿耿, 蓋未嘗頃刻而忘于懷, 如東流之水, 萬折而不廻, 不幸中朝, 不卽許封, 遷延到此。 是實當初卿等, 過爲先封世子以誤予也。 尤極痛心。 悶迫之中, 最難抵當者, 疾病深入膏肓, (盲)精神都喪, 只存形骸。 今則兩耳全閉, 兩眼竝昏, 咫尺之間, 不聞人語, 數行之書, 不辨字畫。 加之以心病, 日益沈痼, 出語悖謬, 處事乖戾, 昏妄顚倒, 可駭可愕。 兩臂麻木, 兩脚疲躄, 四支百體, 無處不病, 惟膈上之氣, 時未去耳。 死亡已近, 非醫藥所能爲。 如是而聽政講學, 酬酢萬機, 天下寧有是理乎? 以此度日如年, 日夜涕泣, 疾病轉劇, 此身猶繫。 嗟乎! 往古來今, 如窮人之無所歸者何限, 而豈復有如予者乎? 自具宬書狀之來, 卽欲傳諭予意, 而將。 【遊擊。】 留京, 勢有所不便, 繼以有逆變起, 無暇及此。 今則唐將去而逆獄畢, 予之情事, 可以伸矣。 中朝時未封世子, 禪位之事, 今不敢更言, 惟攝政之擧, 歷代行之非一。 我朝太祖太宗世宗, 皆已行之, 實我國之前規也。 願速行攝政之擧, 軍國之務, 悉聽世子處決, 圖惟至理, 重恢家國。 予則謝絶人事, 杜門養病, 幸以得延數年之命, 則其受恩於諸大臣者多矣。 區區所願, 食息在此。 予觀世上有識之士, 於官爵、利祿, 百計圖之, 苟且無恥, 有不暇顧。 昔 英宗, 於傳位之際, 尙有難色。 今予辭其位如弁髦, 祈懇不已, 此其心必有所至難堪至悶迫者, 存乎其中也。 凡在下者, 有籲號悶迫之情, 則在上者必俯從而曲聽之。 況予前後籲號於卿等, 而終不我聽, 則是豈人情, 亦豈理也哉? 世間人事, 昕夕難知。 今病勢如此, 萬一此志未遂, 含冤枯死, 則不但予目不瞑, 他日相見於九泉之下, 得無有悔乎? 宜速擧行, 勿復前日之相持, 不勝幸甚。

大臣 【座目見上。】 啓曰: "伏承下敎, 臣等相顧震駭, 不知所達。 自上從前, 以此一事, 下敎臣等者, 今已數年於玆矣, 臣等區區之意, 亦已徹聞於天聽者, 非止一再。 群情所悶, 時勢所難, 固已無不下燭, 而今者又有此敎, 辭旨痛切, 臣等非徒不忍讀, 亦不忍聞, 只聚首涕泣而已。 當初臣等請先封世子者, 乃事理之當然也。 天朝旣未卽許, 冊命未下, 則傳禪一事, 固所不論, 雖攝政之擧, 決不可行之, 此理勢之甚明者也。 但國勢艱危, 寇賊未退, 人心渙散, 變故百出, 當此之時, 雖奮志勵精, 日不暇給, 猶恐不濟。 此豈聖上謝絶人事, 養病自送之時乎? 非徒臣民, 萬姓之心, 因此而無不缺然, 雖祖宗天地之期望於聖明者, 恐不如此也。 自古國家之勢, 有中衰而復振者, 又有一敗而不支者, 其幾在於人君心志之自强與否。 在中國者不論, 如高麗顯宗, 亦因契丹之亂, 去國南幸, 其後卒然修明政敎, 外攘胡虜, 汛掃陵寢, 鞏固基業, 爲代盛德之主, 皆自顯宗之身而爲之。 何嘗以一敗之故, 而過爲避遜如今日乎? 自上春秋鼎盛, 非倦勤之時。 雖頤神養性, 而自不妨於酬酢萬機。 何必撝謙退閑, 以孤祖宗之托, 以缺臣民之望乎? 東宮, 誠孝天至, 每聞此敎, 遑遑悶迫, 或累日廢膳, 因致未寧。 臣等亦以此爲悶焉。 伏乞聖明, 俯察微懇, 更加三思。 臣等辭雖拙澁, 而意實痛迫。 惶恐敢啓。"


  • 【태백산사고본】 48책 7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4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