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강독하고 대신들과 천재, 이순신과 원균 등에 관해 의논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독(講讀)하였다. 신설(申渫)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이미 협박을 받아 갔으니 우리 나라의 사세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천변(天變)이 여러 번 일어나고 혜성(彗星)도 나타났는데, 당(唐)나라 때에 필성(畢星) 옆에 혜성이 나타나자 고구려가 망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어느 글에 있는가?"
하자, 신설이 아뢰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별이 그곳에 생겼는가?"
하자,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오거성(五車星) 옆에 나타났다고 하니, 오거성의 도수(度數) 안입니다. 필성은 고구려의 분야(分野)일 것입니다."
하고, 신설이 아뢰기를,
"태사(太史)가 점치기를 ‘필성 옆에 혜성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고구려가 장차 망할 상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오거성에 생기지는 않았으나, 필성에서 멀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혜성은 진(秦)의 분야라 한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오거성은 필성의 도수 안에 있습니다."
하고, 신설이 아뢰기를,
"오거성은 필성 위에 있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자미원(紫微垣) 근처라 하였는데, 오늘 새벽에 보니 이미 정성(井星) 근처였습니다. 이미 그러한 자취가 분명하다면 위에서 수성(修省)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정축년235) 측후(測候)할 때에 보니, 치우성(蚩尤星)이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 연(燕)의 분야에 나타났는데, 그 길이가 10여 척(尺)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20년 뒤에 반드시 큰 화(禍)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중국에 들어갔더니, 백관(百官)이 흰옷을 입고 사흘 동안 일식(日蝕) 때와 마찬가지로 빌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섭 유격(葉遊擊)이 묻기를 ‘왜적의 변에 재이(災異)가 있었는가? 동요(童謠)가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별로 없었다.’ 하고, 묻기를 ‘명조(明朝)의 황성(皇城)을 달자(㺚子)가 에워쌌을 때에는 무슨 재응(災應)이 있었는가?’ 하니, 섭 유격이 말하기를 ‘동요가 있었다. 이곳에는 동요가 없었는가?’ 하기에, 말하기를 ‘없었다. 그러나 기묘년236) 9월 사이에 장성(長星)이 기성과 미성 사이에 나타났는데, 그 재응이 이때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니, 섭 유격이 손을 올리고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성가퀴의 제도가 지나치게 넓고 크다. 대궐 터도 그러니 다 고쳐서 트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는 천문(天文)·지리(地理)의 학문을 통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성과 미성 사이에 생겼다는 말은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였다. 김홍미(金弘微)가 아뢰기를,
"요즈음 천문 분야를 보면 우리 나라가 아닙니다."
하고, 신설이 아뢰기를,
"무슨 재응인지 모르겠으나, 대개 그 재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감생(減省)하고 공구(恐懼)하여 인애(仁愛)하는 하늘에 응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홍미가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 때에 혜성과 일식의 변이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나, 문제가 능히 덕으로 변이를 사라지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재응이 없었습니다. 일념(一念)이 선하면 경성(慶星)·경운(慶雲)이 나타나고, 일념이 악하면 열풍(烈風)·진뢰(震雷)가 나타납니다. 상께서 공구 수성하며 마음으로 힘을 다하소서. 그러면 하늘에 있는 변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나타나는 것은 반드시 부른 까닭이 있을 것이니, 분야이건 분야가 아니건 간에 각별히 하늘에 응답하는 도리를 다하여 응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세가 위급한 것이야 벌써 아는 일로 반드시 혜성이 생긴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손 경략(孫經略)은 우리 나라를 구원할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 나라의 도리로서는 그 뜻에 따라서 미리 조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제에서 군사를 철수한 뒤에 나도 물었고 비변사도 주둔시켜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산도(閑山島)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윤근수(尹根壽)가 아뢰기를,
"반드시 한산도를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산도는 진을 비울 수 없다. 그러나 지킬 경우에 군사가 적어서 세력이 분산되겠거니와 양향(糧餉)은 또 어떻게 장만하여 내겠는가?"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거제를 지키고 주사(舟師)로 왜적의 양도(糧道)를 끊으면 감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4∼5년 동안 군사를 훈련시키며 움직이지 않은 것은 대포(大砲)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대포를 만든다면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중국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대포는 왜의 배가 얇으므로 설치하지 못할 것이나, 진천뢰(震天雷)는 우리 나라에서 배워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수전(水戰)과 궁시(弓矢)의 기예는 배워 익히지 않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적이 궁시를 익히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활줄이 느슨해지므로 쏘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읍(列邑)의 산성(山城)이 다 해주(海州)와 같으면 좋겠다. 성이 좋지 못하면 백성이 다 성을 버리고 나갈 것으로,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은 성이 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이 험하지 않은데도 지키게 하는 것은 백성을 죽을 땅으로 모는 것이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진주(晉州)에서 성을 함락시킬 때에는 비루(飛樓)를 만들어서 성를 함락시켰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람이 가르쳤다. 이제 다시 출동하면 반드시 대포를 배울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많이 투항해 들어갔으므로, 활을 잘 쏘는 자도 있을 것이고 포를 잘 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번에 다시 군사를 출동해 온다면, 형세가 반드시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중국 조정에서 대군(大軍)을 내보낸다는 소식이 적중에 흘러 들어간다면 이것은 참으로 염려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나 이 말은 좋다. 적이 들으면 마음 속으로 침범하기 어렵다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김광엽(金光燁)이 아뢰기를,
"체찰사(體察使)가 군사를 호궤(犒饋)하고 상주며 선유(宣諭)하면 군정(軍情)이 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 밖의 각도에도 조정에서 교서(敎書)로 선유하고 사신을 보내어 호위(犒慰)하면 누구인들 은명(恩命)에 감격하여 그 마음을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 의논하여 하겠으나, 군사에게 먹일 물건을 어느 곳에서 내겠는가?"
하자, 김광엽이 아뢰기를,
"장만하려면 한 고을에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76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23책 2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과학-천기(天氣)
○上御別殿, 讀《周易》。 申渫曰: "天使旣已脅去, 我國事勢, 極爲難矣。 近者天變屢出, 彗星亦見。 唐時畢星之傍, 彗星生, 故高句麗亡云云。" 上曰: "其言在於何書乎?" 渫曰: "《文獻通考》有之矣。" 上曰: "此星生於其處乎?" 應南曰: "生於五車星之傍云云, 五車星之度數內也。 畢星, 高句麗之分野乎?" 渫曰: "太史占之曰: ‘畢星之傍生彗星, 此高句麗將亡之象。’ 果然。 今者雖不直生於五車星, 而不遠於畢星也。" 上曰: "今此彗星, 秦之分野云云矣。" 應南曰: "五車在畢之度內也。" 渫曰: "五車在畢星之上也。" 應南曰: "紫微垣近處云矣, 今曉見之, 則已井星也。 已然之跡昭然, 則自上不可不修省矣。 臣於丁丑年測候之時見之, 蚩尤星生於箕、尾之間, 燕之分也, 其長十餘尺。 人皆謂二十年之後, 必有大禍云云, 其後中原入去, 則百官白衣三日祈禱, 如日蝕之時云云矣。 頃者葉遊擊問於臣曰: ‘倭賊之時, 災異有乎? 童謠有乎?’ 臣曰: ‘別無有矣。’ 與語曰: ‘天朝皇城㺚子圍之時, 有何災應乎?’ 遊擊曰: ‘有童謠矣。 此處無童謠乎?’ 曰: ‘無矣。 但己卯年九月間, 長星生於箕、尾之間, 無乃其應生於此時乎?’ 遊擊上手而言曰: ‘然也。’ 仍曰: ‘城堞之制, 過爲闊大。’ 至於大闕基址, 皆欲改開云。 大槪當身, 天文地理之學, 無不通曉矣。" 上曰: "生于箕、尾之言, 從何聽知耶?" 弘微曰: "近觀天文分野, 則非我國矣。" 渫曰: "不知某災矣, 大槪其變不測。 請減省恐懼, 以答仁愛之天可矣。" 弘微曰: "漢 文帝時, 彗星、日蝕之變, 不一而現, 而文帝能以德消變, 故竟無其應也。 一念之善, 慶星、慶雲; 一念之惡, 烈風、震雷。 請自上恐懼脩省, 致力於方寸之間, 則在天之變, 庶可消矣。" 應南曰: "天災之出, 必有所召。 分野、不分野之間, 各別盡其應天之道, 以應之, 可矣。" 上曰: "時勢之危急, 已可見矣。 不必彗星生, 然後知之矣。" 且曰: "孫經略有救我國之心, 在我國道理, 當順承其意, 而預爲措備, 可矣。" 上曰: "李舜臣, 外議以爲何如人耶?" 應南曰: "舜臣, 可用將矣。 至於元均, 則雖有病處, 大槪淸白持身, 勇力善戰, 則有之矣。" 上曰: "舜臣初則力戰, 而厥後雖零賊, 不勤捕捉, 而且無揚兵討賊之擧, 予每疑之矣。 東宮南下時, 屢度送人, 招之不來。" 應南曰: "元均當初, 使人招舜臣, 而舜臣不來, 故均痛哭云云。 均請兵於舜臣而成, 功反居於舜臣上, 故以是兩將之間, 相隔云云矣。" 上曰: "舜臣爲人, 終必能成功者乎? 未知何如也。" 應南曰: "不可知也, 將士以舜臣, 從容適中云矣。 今者巨濟之鎭, 則須送元均, 可矣。 若守巨濟, 則非此人, 其誰乎?" 上曰: "巨濟撤兵之後, 予亦問之, 而備邊司亦非不欲屯守, 而閑山島則何以爲之?" 根壽曰: "不必守閑山島矣。" 上曰: "閑山島, 不可空其鎭矣, 若守之, 則兵小而勢分, 糧餉又何以辦出乎?" 應南曰: "若守巨濟而以舟師, 絶其倭賊糧道, 則莫敢來過矣。" 上曰: "渠賊四五年鍊兵不動者, 無乃爲大砲乎? 若爲大砲, 則非徒我國, 至於中朝, 亦不可當矣。" 根壽曰: "大砲則倭之舟船薄, 故不能爲矣。 震天雷則學於我國矣。" 上曰: "我國水戰及弓矢之技, 無乃學習乎?" 應南曰: "渠賊欲習弓矢, 而人以爲筋膠破解, 故不能射云矣。" 上曰: "列邑山城, 皆如海州則好矣。 城若不好, 則民皆棄城而出。 不欲守之, 城不險之故也。 城若不險而使之欲守, 則是驅民於死地矣。" 應南曰: "晋州陷城時, 飛樓爲之後, 陷城云云矣。" 上曰: "中原人敎之矣。 今若更動, 則必學大砲矣。" 應南曰: "我國之人, 多有投入, 或有善射者, 或有善砲者, 若更動兵而來, 則勢必難支矣。 且天朝大兵出來之奇, 若流入於賊中, 則是固可慮。" 上曰: "雖然, 此言好矣。 賊若聞之, 則其心必以爲難犯矣。" 光燁曰: "體察使, 軍犒賞宣諭, 則軍情莫不歡抃。 他餘各道, 自朝廷亦有敎書宣諭, 遣使犒慰, 則孰不感激恩命而奮發其心哉?" 上曰: "議于備邊司爲之, 而(搞)〔犒〕 軍之物, 從何處出乎?" 光燁曰: "若欲措之, 則一邑可以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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