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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8권, 선조 28년 10월 29일 무진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종묘 사직·군정·체찰사·군사 훈련·병기·쇄마 등에 대한 사간원의 차자

사간원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금옥(金玉)과 비단은 한 지아비의 보화이고 토지와 인민은 만승(萬乘) 임금의 보화입니다. 보화는 대소의 다름이 있으나 그를 보화로 여기는 도리는 같습니다. 오늘날 보화를 소유한 자가 있을 경우 이를 애석히 여기고 돌아보고 사랑하여 간직함에 장소가 있고 지킴에 방도가 있게 하면 보화는 내 소유가 되거니와 심상히 여기고 경홀히 여겨서 보호하기를 삼가지 아니하고 방비하기를 엄밀히 하지 아니하면 보화는 내 소유가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보화를 소유하였습니다만, 전하의 마음이 애석히 여기고 돌보고 사랑하시는지 모르겠으며, 아니면 심상히 여기고 경홀히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애석히 여기시고 돌보고 사랑하신다고 하자니 헌신처럼 버리시려는 의사가 매양 말씀할 즈음에 나타나고, 전하께서 심상히 여기고 경홀히 여기신다고 하자니 밤낮 애쓰는 근심이 항상 정사의 사이에 간절하시니, 보화를 아낀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보화를 경홀히 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있으면 밖에 나타나고 마음 속에 둔 것은 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밖에 나타나고 말에 드러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저번날 하교에는 ‘내가 있는 것은 과객이 여관에 있는 것과 같다.’ 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보화를 사랑함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로써 살펴보면 심상히 여기신다고 하여도 되고 경홀히 여기신다고 하여도 됩니다. 금옥과 비단은 보화로서 작은 것이건만 한 지아비 한 지어미도 모두 스스로 사랑할 줄을 압니다. 토지와 인민은 이 얼마만한 큰 보화인데 전하께서는 보화로 여기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하시는 바를 살펴보건대, 다른 사람의 보화를 지키는 자가 그를 잠시 간수하고 보호하다가 주인이 오면 곧 되돌려 주고 물러가는 자와 같이 합니다. 국가를 소유하신 분이 진실로 이처럼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영토는 조종(祖宗)의 영토이고 인민은 조종의 인민이며, 종묘 사직은 조종의 종묘 사직입니다. 전하께서 조종의 명을 받아서 영토와 인민을 소유하시고 종묘 사직을 소유하셨으니 몸은 전하의 몸이지만 전하께서 그 몸을 자신의 소유로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위로는 조종의 부탁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래로는 신민의 소망을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매양 미안한 분부를 내리시고 머물고 나아가고 물러남을 마치 필부(匹夫)의 소위처럼 하려 하십니까. 전하께서 정무 보시기에 고달파서 그렇게 하신다고 하자니 전하의 춘추가 한창 성하시어 당요(唐堯)의 손위(遜位)331) 는 이러하지 않았으며, 전하께서 상란(喪亂)을 만나 스스로 기가 꺾이셨다고 말하자니 옛 사람은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며 국치를 씻기로 맹세한 자가 있었고 스스로를 깎아내려 물러나기를 구한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몸을 가벼이 하시고자 하니 조종의 부탁은 어찌하겠으며 신민의 소망은 어찌하겠으며 후세의 의논은 어찌하겠습니까. 인주의 한 마음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공경스러우면 어지러움이 도리어 다스려짐이 되고 한 생각이 게으르면 복이 바뀌어 재앙이 됩니다. 더구나 지금 국가의 난망(亂亡)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전하의 마음도 따라서 강해지지 못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며 정사에 부지런히 애쓰시고 계시지만 실로 물러나시려는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인심은 지극히 신령하여 모두 헤아릴 수 있으니 누가 전하의 근심을 근심하여 성의를 다하려 하겠습니까. 뭇 신하들의 해이와 국사의 궤열(潰裂)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동궁(東宮)이 전하에게는, 의리로는 군신(君臣) 사이나 은혜로는 부자 사이입니다. 골육의 정은 위아래에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의 부모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상의 명을 받아 전지와 집을 소유하고 노비(奴婢)를 소유하고, 처자를 거느리고서 같이 살며 슬하에서 무양(撫養)한다면 아들의 정이 안락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도적이 그 집에 드니, 노비와 가산이 자신에게 와서 다 탕진되었다고 하여, 나는 실로 조상의 죄인이라 그대로 살 수 없다 하고 남은 가산을 그 아들에게 다 전하고 나가버리면 아들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은 반드시 부모에게 부르짖어 울며 슬피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오히려 굳이 나가버리면 아들이 답답하고 그지없는 회포가 있어도 스스로 펼 곳이 없어서 장차 가슴이 답답하여 병이 될 것입니다. 전하가 동궁(東宮)에 대해서도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물러나고 손위(遜位)하는 박절한 말씀으로 동궁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시니 동궁이 타고난 성효(誠孝)로 이 하교를 들을 적마다 마음이 슬프고 몸이 떨려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모르십니다. 삼가 생각건대 동전(東殿)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이 반드시 이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한다.’ 하였으니, 전하께서 홀로 어찌 여기에 편안하시겠습니까.

신들은 국사의 붕괴가 혹 물러나시겠다는 한마디 말씀에 원인이 있고 동궁의 질환도 물러나시겠다는 한마디 말씀에 또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니, 전하의 그 말씀은 상망(喪亡)의 빌미라고 말하여도 가합니다. 전하께서 물러나려는 한 가지 생각을 버리지 아니하시면 이윤(伊尹)·주공(周公)이 조정에 벼슬하고 손빈(孫臏)과 백기(白起)332) 로 하여금 사방을 지키게 하더라도 반드시 어떻게 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전하께서 생각을 바꾸어 한결같은 뜻으로 곧장 전진하시면 뭇 관료들이 앞을 다투어 권장되어 난을 다스리고 치세를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아, 오늘날의 사세는 비유컨대 큰 병을 치른 뒤에 온갖 병이 밖으로부터 침공하고 기의 증세가 안으로부터 일어나서 위태로운 상황을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시급한 일에 대해 논한다면 장수를 뽑고 군사를 훈련하며 기계를 수리하고 축적해서 민심을 무마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묘당(廟堂)에서 자세히 강구하고 충분히 조처하여 모두 제대로 조처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장수란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으로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므로 장재(將材)가 아니면 시체를 수레에 싣고 오는 흉화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장수를 선발함에는 재국(材局)의 대소를 묻지 아니하고 무예의 능부(能否)만 취합니다. 그리고 공과 죄를 핵실하지 아니하고 출척(黜陟)이 도리에 어긋나며, 망작(妄作)을 징치하지 아니하여 고식을 일삼습니다. 장수의 기용이 적의함을 잃고 군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지금 상께서 체찰사에게 특별히 명하시어 팔도를 나누어 위임하셨으니, 비록 설시(設施)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는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장수를 파견할 적에는 곤외(閫外)를 전제(專制)하도록 하여 군공(軍功)과 작상(爵賞)을 모두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대소의 호령을 모두 조정에 품의하게 하여 왕복하는 사이에 시일이 지연되고 가부의 즈음에 논의가 서로 견제되니, 이러한데도 성공을 바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남방의 체찰사는 이미 임명하여 보냈으나 난리에 대비하는 계책은 관서 지방이 더욱 시급합니다. 강상(江上)에 군사를 사열하고 방략을 지시하여 시기에 못 미치는 후회가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두 체찰사로 하여금 도내의 일을 오로지 총괄하게 하여 군무와 민정(民政)을 모두 편의에 따라 거행하게 할 것이요, 멀리에서 저지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수년 뒤에 그 효과를 내도록 기약하되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기를 마치 당 헌종(唐憲宗)이 배도(裵度)에게 한 것처럼 하신다면 공업(功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군사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습니다. 군사가 정예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아도 도움이 없습니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가 비수(淝水)에서 패배하였고333) , 항우(項羽)의 8천 군사가 천하에 횡행하였으니334) , 교련하지 않은 백성을 많이 모으는 것은 흩어지는 데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사는 평시에는 전야(田野)에 흩어져 살고 경급(警急)할 때에는 전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때문에 호미를 잡고 삽을 가지고 농사짓던 자가 치고 찌르는 무술을 익히지 않은 탓으로 적을 만나면 곧 도망쳐 달아나려는 마음을 내니 어느 겨를에 용기를 분발하여 적봉(敵鋒)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도감(都監)을 별도로 설치하여 포수(砲手)를 교습시키고 있으니, 군사를 훈련하고 정예를 힘쓰는 뜻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포 쏘기와 활 쏘기의 두 기예는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 쪽을 폐할 수 없는데, 포수·살수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학습하고 사수는 점차 생소하고 졸렬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위에서 좋아하는 바에 치우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활은 우리 나라의 장기인 것으로 역대에 적을 격파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패전은 곧 인심이 굳건하지 못하여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그러한 것이지 활의 탓은 아닙니다. 포가 진실로 적을 방어하는 데에 긴요한 것이기는 하나 활 쏘기는 더욱이 권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듣건대 여염 사이의 무사가 자못 실망하여 활 쏘기의 정예로움이 점차 예전과 같지 않다 합니다. 경외(京外)의 포수·살수와 사수를 모두 권장하여 그들이 흥기되어 각기 그 기예를 다하게 하고 허약하고 재능이 없는 자는 대오에 함부로 끼어들어 군량을 허비하지 못하게 하면 위급할 때에 쓸모가 있는 동시에 실로 먼 장래를 위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아, 기계를 정예롭게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급선무입니다. 우리 나라가 군기에 대해서는 오직 박실(朴實)함만 취하고 경예(輕銳)함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갑주(甲胄)나 창검(槍劍)이 모두 쓸데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고 그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은 오직 활 한 가지 무예뿐입니다. 그런데 임진년335) 이후에 산실(散失)되어 남은 것이 없으니 혹시라도 경급(警急)함이 있게 되면 무엇을 믿고서 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민간에 있는 장인(匠人)을 널리 모아 방어가 요긴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화살을 만들도록 하고 또 호남에 있는 전죽(箭竹)을 많이 베어 배에 실어 운반하여 시일을 정해 놓고 일을 하되 새로 만드는 갑주나 창칼은 정예롭게 만들도록 하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에 민첩하고 옮기고 실어나르는 데에 편리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전함과 전마(戰馬) 또한 예비해야 하는데, 바다 어귀와 강가에 배가 대어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위사(衛士)와 기졸(騎卒)은 모두 병들어 있으니, 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재(船材)를 베어다가 전함을 많이 만들고 목장의 말을 끌어 내어 전사(戰士)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기계는 예비함이 있고, 군사는 믿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 먹을 것이 풍족한 뒤에야 군사가 풍족하게 된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가 평시에는 약간의 축적이 있었으나 변란을 겪은 뒤에는 남김없이 불타서 군량은 수개월 양식이 없고 군사들은 주린 기색이 많습니다. 비록 관직을 파는 직첩(職帖)이 촌리에 두루 차고 조도(調度)하는 관리가 여염에 출입하여도 몇 섬의 곡식을 축적하고 몇 개의 창고를 채워서 군자(軍資)에 보충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조충국(趙充國)이 오랑캐를 막을 적에 먼저 둔전(屯田)을 시행하였고336) ,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위(魏)나라를 칠 적에 오직 농사를 권장하는 데에만 힘을 썼습니다. 지금 군량을 이어대는 계책으로는 둔전만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각읍·각진(各鎭)·각보(各堡)·각역(各驛)에서 모두 진전(陳田)을 널리 일구게 하여 각처의 장관으로 하여금 각기 그 전토를 관장하게 하고 감사(監司)가 총괄하여 근만(勤慢)을 고찰해서 권징(勸懲)하는 자료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을이 된 뒤에 회계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고도 곡식을 낸 것이 많은 사람은 직을 초수(超授)하고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도 곡식이 적은 사람은 벌을 중하게 해야 합니다. 또 별둔전관(別屯田官)을 다 파하여 서로 침탈하는 바가 없게 하고 오직 수령에게 전부를 책임지우면, 관이 많아서 서로 견제되는 폐단이 없고 소임을 오로지 하여 일을 성취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이니, 수삼 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반드시 남은 저축이 있을 것입니다.

아! 지금 백성이 관의 착취와 포학에 시달리는 것을 낱낱이 들 수 없으나, 쇄마(刷馬)와 일족(一族)에게 거두는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쇄마의 폐단을 말씀드리면, 중국군의 출입과 사명(使命)의 왕래 그리고 기타 공차(公差)의 왕래가 하루에도 그 수효가 일정하지 않는데 그들이 타는 말과 짐을 실어나르는 말을 모두 백성에게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한계가 있는 민력으로 한이 없는 중역(重役)을 담당해내야 하니, 어찌 지탱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마침내 구제할 만한 계책이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부득이하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제도(諸島)에 말을 기르는 것은 위급할 때에 쓰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일이 위급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때에 쓰지 아니하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더구나 제도(諸島) 목장의 말이 늙어서 저절로 죽는 것이 매우 많으니, 헛되이 늙어서 저절로 죽게 하는 것보다는 백성 구제하는 데에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일 일로 연변의 각읍에 대소를 헤아려 나누어 주어 수령으로 하여금 길러서 오직 중국군의 왕래에만 사용하게 하되 일이 평정될 때까지 한정하고, 사명을 받든 우리 나라 대소 관원은 모두 스스로 준비하여 타고 다니고 일체 관마를 허용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득이 긴급히 명을 전할 일이 있으면 도중(道中)의 역말을 주고 그 사이에 혹 역말을 타서는 안 될 사람이 타는 자가 있으면 감사에게 듣는 대로 계문하여 치죄하게 하면 쇄마의 폐단이 조금은 펴질 것입니다.

일족에게 물리는 폐단을 말씀드리면, 난리 뒤에 인구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다시피 하여 남아 있는 군졸은 겨우 열에 한 둘뿐인데, 병조에서는 존몰(存沒)을 핵실하지 아니하고 으레 입번(立番)을 책임지워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궐가(闕價)를 독촉합니다. 그래서 당자가 없으면 일족에게 내도록 책임지우고 일족이 지탱하지 못하면 또 일족의 일족에게 책임지우며 일족의 일족이 지탱하지 못하면 폐해가 이웃 마을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장정 하나 때문에 열 사람이 침해를 입고 한 호의 도망으로 인하여 열 집이 모두 비게 됩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빠져 한가로이 노는 자가 많은데도 찾아 내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괴로운 자는 더욱 괴롭고 편한 자는 더욱 편하여 군부(軍簿)는 장차 텅 비게 되고 백성의 원망은 날로 깊어갑니다. 이처럼 인심이 놀라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군적(軍籍)을 크게 정비할 수는 없으나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것은 강구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서방이나 남방에 모두 체찰사가 있으니 종사관으로 하여금 각도를 나누어 맡아 열읍(列邑)을 순행하면서 수령을 검칙(檢勅)하게 해서 사망한 자를 정밀히 조사하여 일족과 이웃이 침해당하지 않게 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한정(閑丁)으로서 은루(隱漏)된 자는 나타나는 대로 보충하고 또 일시에 그 액수(額數)를 다 채움으로써 소요를 일으키지 않게 하여 간사한 아전이 그 사이에서 손을 쓰지 못하게 하면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조금은 제거할 수 있고 군부도 또한 점차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이같이 하면 장수 임용에 방도가 있게 되고 군사 훈련에 방법이 있게 되며 기계가 준비되고 축적이 쌓여서 민생이 생업에 안정되고, 나라의 원기가 점차 충실해짐에 따라 나라의 대세(大勢)도 점차 확장되어 남쪽의 왜적의 떠돌아 다니는 혼과 서쪽 오랑캐의 날뜀은 이미 피부의 병 정도로 되어 이른바 큰병이란 것도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

아! 우리 나라의 팔도는 중국의 큰 주(州) 하나에 지나지 않는데, 군현을 나눈 것이 그 수효가 3백여 개나 됩니다. 소읍의 민호(民戶)가 혹 백 호에도 채 차지 않는데 관가의 모양은 대읍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치우치게 괴롭고 부역이 고르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관이 많으면 백성이 어지럽다.’고 하였으니 어찌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잔읍(殘邑)을 합병하되 인정을 따르고 지리를 쫓아서 길이 정제(定制)로 만들면 관이 많지 아니하고 부역이 치우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변이 있은 이후로 사명(使命)의 왕래가 매우 많아 열읍이 곤폐(困弊)되어 장차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순안 어사(巡按御史)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명에 견줄 바가 아니어서 위엄이 온 도에 행해지고 지공(支供)과 추종(趨從)이 방백에 비길 정도여서 가는 곳마다 떠들썩합니다. 당초 특별히 파견한 의도는 수령을 탄압하여 비위(非違)를 금지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머물러 있는 지 오래 되자 서로 친숙해짐에 빠져서 음식과 역참(驛站)만 수고롭게 함을 면하지 못하니, 이는 각도에 하나의 감사(監司)를 더 둔 것으로 도움은 없고 해로움만 있습니다. 만일 순안 어사를 파하고 때때로 어사를 특별히 보내어 규찰한다면 수령이 두려워할 줄 알아 폐해를 끼치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태평을 누린 지 2백 년 동안에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대적을 만나자 위아래가 허둥지둥하여 창졸간에 서울을 버리는 계책을 내었으니 아! 또한 위태로왔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을 힘입어 고도(故都)로 돌아왔으니, 진실로 매양 믿고 잘한 계책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 왜구가 물러가지 아니하였고 서쪽 변경은 경보가 있어 적이 국경을 침범하기 전에 민심이 먼저 어지러워져서 동서로 달아나기도 하고 모여서 서로 조문하기도 하여 마치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 반드시 죽을 사람처럼 하니 인심의 흩어짐과 기상(氣象)의 비참함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삼군(三軍)이 지극히 많으나 장수에게 매여 있으므로 장수가 겁내지 않으면 군사도 겁내지 않으며, 백성이 지극히 많으나 군대에 의지하므로 군사가 동요하지 않으면 백성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말하면 지금 백성이 안정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전하께서 진정함이 없는 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큰 복은 거듭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군신 상하가 힘을 다하고 마음을 맹세하여 함께 사직을 지켜 꼭 죽을 각오의 뜻을 보인 뒤에야 만민의 마음이 안정되고 삼군의 사기가 진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훗날 혹 풍진의 경보가 있을 때 전일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면 외적이 이르기도 전에 반드시 다른 변고가 있을 것이니, 온전하기를 구하는 것이 도리어 화를 재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앞의 일을 징계하여 후일을 힘쓰소서. 처분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는 살펴보았다. 충성이 이러하니 국사를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감척(感惕)함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심사는 크게 그렇지 아니한 점이 있다. 다른 일은 묘당(廟堂)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68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88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마정(馬政)

  • [註 331]
    당요(唐堯)의 손위(遜位) : 요임금이 나이 많자 순(舜)임금에게 양위(讓位)하였는데 순임금이 섭정(攝政)한지 28년 만에 요임금이 죽었다.
  • [註 332]
    손빈(孫臏)과 백기(白起) : 손빈(孫臏)은 전국(戰國) 때 제(齊)나라의 명장이고, 백기(白起)는 전국 때 진(秦)나라의 명장.
  • [註 333]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가 비수(淝水)에서 패배하였고 : 부견은 중국 전진(前秦)의 3대 왕으로 천하를 통일하고자 출전(出陣)하였다가 진(晉)의 사현(謝玄)에게 패배하여 망했다.
  • [註 334]
    항우(項羽)의 8천 군사가 천하에 횡행하였으니 : 항우가 원래 강동(江東)의 자제 8천 명으로 기병(起兵)하여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서초 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사기(東記)》 항우 본기(項羽本紀).
  • [註 335]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336]
    조충국(趙充國)이 오랑캐를 막을 적에 먼저 둔전(屯田)을 시행하였고 : 조충국은 한 무제(漢武帝)·선제(宣帝) 때의 명장. 선령(先零)이 모든 강족(羗族)과 함께 배반하자 조충국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는데, 방략(方略)을 도상(圖上)하고 또 둔전법(屯田法)의 편의함을 역설하면서 편의십이사(便宜十二事)를 상소하였다.

○戊辰/司諫院上箚曰:

伏以, 金玉錦繡, 一夫之寶也; 土地人民, 萬乘之寶也。 寶有大小之異, 而寶之之道則同。 今人之有其寶者, 愛惜之、顧戀之, 藏之有所, 守之有道, 則寶爲我有矣; 尋常焉、輕忽焉, 護之不愼, 備之不密, 則寶非我有矣。 今我殿下, 有其寶矣, 第未知殿下之心, 以爲愛惜, 而顧戀之耶? 抑未知尋常, 而輕忽之耶? 以殿下爲愛惜而顧憐也, 則棄屣之意, 每見於言語之際; 以殿下爲尋常而輕忽也, 則宵衣之憂, 常切於政事之間, 不可謂愛其寶也, 亦不可謂輕其寶也。 雖然, 存諸中則形於外, 有其心者發乎言。 殿下欲退之心, 形於外, 發乎言者, 非一非再, 而頃日之敎至曰: "予之在, 如過客之在逆旅。" 是果有心於愛寶者乎? 以此觀之, 則雖謂之尋常, 可也, 雖謂之輕忽, 可也。 金玉錦繡, 寶之小者也, 而一夫一婦, 皆知自愛。 土地人民, 是何等寶, 而 殿下獨不念寶之之道乎? 觀殿下之所爲, 正如守他人之寶者, 暫時看護之, 主人來, 則卽還授退去者。 有國家者, 固如是乎? 而況土地, 祖宗之土地也; 人民, 祖宗之人民也; 宗廟、社稷, 祖宗之宗廟、社稷也。 殿下受祖宗之命, 有其土地、人民, 有其宗廟、社稷, 則身雖殿下之身, 殿下不得自有其身矣。 奈何上不念祖宗之托, 下不顧臣民之望, 每下未安之敎, 而去留進退, 欲如匹夫然哉? 謂殿下倦于勤而致然, 則殿下之春秋鼎盛, 唐堯之揖遜, 不如是矣; 謂殿下遭喪亂而自沮, 則古之人有臥薪嘗膽, 而誓雪國恥者, 未聞徒自貶損而求退者也。 殿下雖欲自輕其身, 其於祖宗之托何, 其於臣民之望何, 其於後世之議何? 人主一心, 國家存亡之所係也。 一念之敬, 亂反爲治; 一念之怠, 福轉爲禍。 況今國家亂亡無日, 而殿下之心, 又從而不能自强乎? 殿下雖軫宵旰之憂, 實懷將退之心, 人心至靈, 皆能揣度, 孰肯憂殿下之憂, 而盡其誠乎? 群下之解體, 國事之潰裂, 無一不由於此也。 非但此也。 東宮之於殿下也, 義則君臣, 恩則父子也。 骨肉之情, 上下無間。 今有人之父母, 受祖考之命, 有其田宅, 有其奴婢, 率其子而同居, 撫養於膝下, 則子之情安樂矣, 一朝, 盜入其室, 奴婢、家業, 至我而盡蕩, 我實祖考之罪人, 不可以仍居, 盡傳餘業於其子, 奉身而出, 則子之心安乎? 否乎? 子必號泣於父母哀訴, 而父母猶且强之, 則子有悶迫罔極之懷, 而無處自伸, 將鬱結成疾矣。 殿下之於東宮, 亦猶是也。 殿下每以退遜迫切之說, 屢及於東宮, 東宮誠孝出天, 每聞斯敎, 摧心踧躬, 若無所容。 竊念東殿之愆違, 未必不由於此也。 孔子曰: "父母, 惟其疾之憂。" 殿下獨何安於此乎? 臣等竊恐國事之崩壞, 本於退之一言; 儲嗣之疾恙, 亦本於退之一言。 雖謂之喪亡之祟, 亦可也。 殿下不去欲退之一念, 則雖使立軒(陞)〔陛〕 , 守四方, 必無可爲之理。 倘殿下改思易慮, 一意直前, 則群僚競勸, 撥亂回治, 擧此而措之矣。 噫! 方今事勢, 譬如大病之餘, 百疾外攻, 而氣證內作, 奄奄之狀, 口不忍言也。 姑就急時之務而論之, 選將也, 訓卒也, 器械也, 蓄積也, 而撫養民心, 爲之本焉。 未知, 廟堂之上, 講之熟處之詳, 而盡得其道乎? 嗚呼! 將者, 三軍之司命, 國家之安危係焉。 非丈人, 則必有輿尸之凶。 我國之選將也, 不問材局之大小, 只取武藝之能否, 至於功罪不覈, 而黜陟乖當, 妄作不懲, 而姑息是事。 用將之失宜, 軍法之不嚴, 類如此, 誠可痛也。 今者自上, 特命體察使, 分寄八路, 雖未知設施之如何, 而其盡心循國, 則必異於他人矣。 然而古者之遣將也, 使專制閫外, 軍功爵賞, 皆自決焉。 今也則大小號令, 皆稟朝廷, 往復之間, 日月遲延, 可否之際, 論議掣肘, 如是而欲望其成功, 難矣。 南方體察, 已爲推轂, 陰雨之計, 則關西尤急。 視師江上, 指授方略, 不可使有後時之悔。 又使兩體察, 專摠道內之事, 軍務民政, 皆以便宜行之, 勿爲從中遙沮, 期以數年, 責其成效, 而不搖於人言, 有如憲宗之於裵度也, 則功業庶可成就矣。 嗚呼! 兵務精, 不務多。 兵不精, 則雖多無益。 (符堅)〔苻堅〕 之百萬, 敗北於淝水; 項羽之八千, 橫行於天下, 則衆聚不敎之民, 適足爲潰散之助矣。 我國之兵, 平時則散處於田畝, 警急則驅之於戰鬪, 故荷鋤帶鍤者, 不習擊刺之法, 遇賊見敵, 則輒生奔潰之心, 何暇奮勇皷氣, 以挫賊鋒哉? 今者別設都監, 敎習砲手, 其鍊兵務精之意至矣。 然而砲、射二技, 如鳥兩翼, 不可偏廢, 而砲、殺則人爭學習, 射手則漸至生拙。 豈上之所好, 有所偏哉? 弧矢, 乃我國之長技, 歷代之勝敵, 皆以此也。 今玆之敗衂, 是人心不固, 望風奔潰而然, 非射之罪也。 砲固切於禦敵, 射尤不可不勸也。 竊聞閭巷間武士, 頗有失望解體者, 弧矢之精, 漸不如前。 若於京外砲、殺與射手, 一體勸勵, 使之興起, 各盡其妙, 而殘劣無才者, 使不得濫廁行間, 虛費軍糧, 則緩急有用, 而實是長遠之計也。 嗚呼! 器械精利, 兵家之先務也。 我國之於軍器, 唯取朴實, 不尙輕銳, 故甲冑、槍劍, 皆爲無用之物, 而其中可恃者, 唯弧矢一藝而已。 壬辰以後, 散失無遺, 脫有警急, 何所恃而禦賊? 今宜廣募匠徒之在民間者, 分遣于防緊處, 使之董造, 又於湖南, 多所箭竹, 載船以運, 刻日就役, 而甲冑、槍劍之新造者, 務令精利, 使捷於坐作, 便於轉輸。 且戰艦、戰馬, 亦當預備, 而海口、江徼, 不見舳艫之接, 衛士騎卒, 皆有玄黃之歎, 此不可不慮也。 斫伐船材, 多裝鬪艦, 捉出場馬, 分給戰士。 如此則器械有備, 而軍有所恃矣。 嗚呼! 足食而後足兵, 乃不易之言也。 我國平時, 稍有蓄積, 經變之後, 灰燼無餘, 兵無數月之糧, 士多飢餒之色。 雖使賣職之帖, 遍滿於村巷, 調度之官, 出入於閭閻, 未聞積幾石充幾庫, 以補軍資, 豈不寒心哉? 充國之防也, 先事屯田; 孔明之伐也, 唯務勸農。 方今繼糧之策, 莫如屯田。 宜於各邑、各鎭、各堡、各驛, 皆令廣墾陳田, 使各處之官, 各掌其田, 以監司總之, 考察勤慢, 以爲勸懲, 而至秋成會計, 不煩民而出穀多者, 超其職, 煩民而穀少者, 重其罰, 又悉罷別屯田官, 使無相侵奪, 唯專責於守令, 則無官多掣肘之弊, 有任專成事之效, 而不出數年, 必多餘積矣。 嗚呼! 今民之困於誅暴者, 不可枚擧, 而刷馬與一族之弊, 爲尤甚。 以刷馬之弊而言, 則軍之出入, 使命之絡繹, 其他公差往來者, 一日之內, 不定其數, 而所騎之馬, 所輸之駄, 皆責於民, 以有限之民力, 辦無窮之重役, 豈有可支之理乎? 百爾思之, 終無可救之策, 誠可悶也。 無已則有一焉, 國家之蓄馬諸島, 所以備緩急之用也。 今日國家之事, 可謂急矣, 不於此時, 而更待何日乎? 矧諸島場馬之老而自斃者甚多。 與其空老而自斃, 曷若致用於救民乎? 若於路傍各邑, 量其大小而俵給之, 使守令馴養, 只用於軍之往來, 而限事定間, 我國使命大小人員, 皆令自備騎行, 一切勿許官馬, 有不得已緊急傳命之事, 則以道中驛馬給之, 其間或有不當騎而騎者, 則使監司, 隨所聞啓聞治罪, 則刷馬之弊, 不無少紓矣。 以一族之弊而言, 則亂後人口, 散亡殆盡, 軍卒餘存, 什僅一二, 而兵曹不覈存歿, 例責立番, 行移各道, 督〔責〕 闕價。 當身不存, 則責出於一族; 一族不支, 則又責於一族之一族; 一族之一族不支, 則害及於隣里。 以一夫之故, 而十人被侵; 以一戶之逃, 而十室皆空, 其間或多漏名閑遊, 而不爲刷出。 是故, 苦者偏苦, 逸者偏逸, 而軍簿將虛, 民怨日深。 當此人心驚擾之日, 雖未能大段軍籍, 其利於國而便於民者, 則不可不講, 以解倒懸。 今者西南, 皆有體察使, 使其從事官, 分掌各道, 巡行列邑, 撿勑守令, 淸査其死亡者, 勿令族隣被侵, 而閑丁之隱漏者, 隨現充補。 又不爲一時盡塡其額, 以致騷擾, 使姦吏不得用手於其間, 則可以少祛侵徵之弊, 而軍簿亦得漸完矣。 夫如是, 則任將有道, 訓卒有方, 器械有備, 蓄積有儲, 而民生安業, 國之元氣漸實, 國之大勢漸張, 南賊之遊魂, 西之跳梁, 已爲皮膚之疾, 而所謂大病者, 有不足患矣。 噫! 我國八道, 不過中國之一大州, 而分爲郡縣, 多至三百餘矣。 小邑民戶, 或不滿百, 而官家模樣, 無異大邑, 故其民偏苦, 而其役不均。 古人云: "官多則民擾。" 豈不信哉? 今宜合幷殘邑, 因人情、順地理, 永作定制, 則官不多, 而役不偏矣。 事變以後, 使命旁午, 列邑困弊, 將不能支。 至於巡按御史, 非他使命之比, 威行一道, 供億趨從, 擬於方伯, 到處騷然, 當初特遣之意, 欲其彈壓守令, 禁止非違, 而留連旣久, 狃於相熟, 或不免徒勞廚傳。 是於各道, 剩設一監司, 而無益有害也。 若罷巡按, 而時或特遣御史糾察, 則守令知懼, 而不至貽弊矣。 我國, (承)〔昇〕 平二百年, 民不知兵, 猝遇大賊, 上下遑遑, 倉卒出去之計, 吁亦殆矣。 賴天之祐, 旋軫故都, 固不可每恃而爲得計也。 今寇未退, 西鄙有警, 賊未犯境, 民心先擾, 或東西奔竄, 或聚會相弔, 有若今日不死, 則明日必死者然, 人心之渙散, 氣象之悲慘, 有不忍見也。 三軍至多, 而係於將, 故將不怯則軍亦不怯; 兆民至衆, 而依於軍, 故軍不動, 則民亦不動。 以此而言, 則今民之不定, 未必不由於殿下之無以鎭之也。 夫大福, 不可再僥。 自今以往, 君臣上下, 戮力誓心, 共守社稷, 以示必死之意, 然後萬民之心以定, 三軍之氣可振矣。 不然而他日, 或有風塵之警, 猶循前日之覆軌, 則外賊不至, 而必有他變, 思所以求全, 而反所以速禍也。 伏願殿下, (徵)〔懲〕 於前而勉於後焉。 取進止。

上答曰: "省箚。 忠款如此, 何憂國事? 無任感惕。 然予之心事, 則有大不然者。 他餘事, 則當與廟堂議處。"


  • 【태백산사고본】 41책 68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88면
  • 【분류】
    농업-전제(田制)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마정(馬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