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전에서 남방과 서북쪽의 변고에 대한 비변사 당상들의 의견을 듣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쪽의 일이 아직도 평정되지 못하였는데 서북쪽에 또 변고가 있으니, 각기 소회를 진술하라."
하니, 영의정 유성룡이 나아와 아뢰기를,
"건주(建州)의 달자(㺚子)가 굴강(屈强)한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위원(渭原)의 일로 원망이 이미 깊어졌으니 변경의 흔단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의 병력이 단약한데도 첨방(添防)할 대책이 없고 군량도 다 떨어졌으니, 이것이 가장 급히 근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강변의 형세는 수상(水上)은 박명현(朴名賢)을 시켜 살피게 하고, 수하(水下)는 이시언(李時言)을 병사로 삼아 그곳에서 책응(策應)하도록 하되 계속 지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병사와 대등한 사람을 보내면 일이 혹 견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보신(崔輔臣)은 이미 별장이 되었으니, 만일 이 사람으로 하여금 안주 이북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성(龜城) 사이에 주둔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주 이남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에 주둔하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최보신이 어떤 사람인지 신이 모르겠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연소하고 경솔하다고 여겨지는데 다른 사람 또한 합당한 자를 얻지 못하겠습니다. 황해 병사 구사직(具思稷)도 달려가 구원하게 해야 하나 그 사람의 기량을 신이 또한 알지 못합니다. 대개 변경 방어가 이와 같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여 경성의 소민(小民)도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절박해 있어서 혹 흩어져 가는 자도 있으니, 반드시 인심을 안정시킨 뒤에야 다른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만일 흙이 무너지듯이 사태가 허물어지기라도 하면 호령으로 안정시킬 수 없고 계책으로도 모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도 또한 무슨 말을 하라."
하니, 좌의정 김응남이 아뢰기를,
"밖에서 논한 바는 성룡이 다 아뢰었습니다. 평안도의 여러 진보(鎭堡) 가운데 고산리(高山里)가 요해의 가장 큰 진영(鎭營)이니, 반드시 계려(計慮)가 있고 형세를 아는 사람을 가려 차송(差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변장도 쓰지 못할 사람이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일시에 아울러 체직시키는 것은 소요스러울 것 같으나 또한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격에 능한 자를 얻을 경우에 그를 보내는 것이 또한 가합니다. 요즘 적을 살펴보건대 궤사(詭詐)함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창성(昌城) 이하로 나오게 되면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나오려 하면 어느 곳인들 불가하겠는가. 평안도를 살펴보면 막아낼 길이 없다. 강물을 한계로 삼고 있으나 얼음이 얼면 육지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하니, 형조 판서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소신이 함경도에는 왕래한 적이 없으나 지금 그 도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이 적은 노을가적(老乙可赤)의 휘하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적이 곧 노호(老胡)가 보낸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지만 평안도로 나오더라도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평안도는 군사가 없다. 비록 수만 명이 있기는 하나 모두 각진(各鎭)에 흩어져 있으니 갑자기 나올 경우 어떻게 응원할 수 있겠는가. 장수를 가리는 것이 급하기는 하나 이 또한 염려스럽다."
하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잡이 아뢰기를,
"강계에서 의주까지 토병(土兵)의 원수(元數)는 경우 2천여 명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0만 여의 대군이 구름처럼 나온다면 설령 2천 명이 한 곳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버티어내겠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만일 독로강(禿老江)으로 나온면 더욱 지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강계에 눈이 막히면 근심이 없다.’고 하나, 신의 의견으로는 만일 얼음이 얼면 매우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청천강의 상류는 매우 얕아서 걸어서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주를 지키면 이 적이 반드시 뒤를 돌아볼 것이다. 전에 왜적에게 듣건대 ‘그대 나라는 달걀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깥을 깨뜨리면 그 안은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반드시 어느 곳에서인가는 막아 지켜야 된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적유령(狄踰嶺)을 지켜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간에 사사로이 저축한 것이 있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민가가 드물기 때문에 서남처럼 저축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염에서 노략질할 데가 없으면 어떻게 내지에 깊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강계(江界)·희천(熙川) 등처에는 여염이 지극히 드물어서 노략질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관창(官倉)을 잃게 되면 어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산성(山城)에 의거한 뒤에야 지킬 수 있다. 중원의 성도 오히려 지키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안주·정주 등의 성으로 말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변장으로 말하면 반드시 물러가 지킨 뒤에야 나아가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또 얼음을 뚫는 일에 관해서 비변사에서도 말하였으니 강의 얼음을 많이 떠서 담처럼 쌓아두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독로강(禿魯江) 어구 및 압록강 등처는 상거(相距)가 혹 50리 사이가 떨어진 곳도 있습니다. 강물이 얼 때에 얼음을 뚫어 굴혈을 만들고 가지가 많은 나무를 많이 심어서 녹각성(鹿角城)처럼 막는다면 적의 기병(騎兵)이 감히 돌격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품방(品防)이란 것은 얼음을 뚫어 굴혈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얼음을 떠서 쌓아 놓는 것이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기병은 풍우 같으나 독로강가에서는 그대로 그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압록강은 백성이 부족하니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평안도의 형세는 반드시 강가의 험요(險要)를 굳게 막아서 튼튼히 지키는 계책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일 처음에 잘못하여 적을 맞아 경내에 들어오게 하면 마치 터놓은 물처럼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독로강과 파저강(婆猪江)은 적이 들어오는 큰 길이고 구령(仇寧)과 창주(昌洲) 이하는 또 만군이 길이 몰아쳐서 들어오는 곳이니 그 사이에 형세가 험요한 곳을 가려 반드시 지킬 곳으로 삼고 군량·군기·화포 따위 등 모든 기구를 미리 그곳에 실어다 넣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적유령(狄踰嶺)·우현(牛峴) 및 삭주(朔州) 연평령(延平嶺)이 곧 의거할 만한 요해지입니다. 이러한 곳들은 본도의 임무를 받은 자가 그때그때 형세를 살펴 잘 조처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가 헤아려서 하라. 강변의 성은 평지에 설치했는가?"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위원(渭原)과 벽동(碧潼)은 산에 의지하여 쌓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산에 의거하여 쌓았다 하더라도 내려다보는 봉우리가 있으면 좋지 않다. 옛사람은 무모하였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위원성 역시 내려다보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하고, 형조 참판 유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삭주는 적을 막는 요해처이고 군량도 많이 저축되었으나 그 성은 사면을 모두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전교에서 이 삭주의 군량을 옮겨 두려 하셨으나 대군이 연평령을 막아 끊으면 옮겨두지 않아도 됩니다."
하고,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정탁(鄭琢)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형세가 중원의 요동(遼東)과 계주(薊州)가 평탄한 것과는 다르므로, 적이 반드시 장사(長蛇)처럼 들어올 것이니, 많더라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먼저 군량을 조달하여 형세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이미 안주에 큰 진을 설치하고 또 영변·구성·정주에 중병(重兵)을 주둔시킨 것은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적이 그 사이에 출몰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먼저 적이 이길 수 없는 형세를 구축한 다음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경중(京中)의 포수 2초(哨)를 평안도로 내려보낸다 하는데 경성을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본도에서 교련한 포수를 정밀히 뽑으면 2천 명은 얻을 수 있으니, 이들로 나누어 방어하면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포수를 내려보내지 않으려 하는가? 병조 판서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서울이 포수를 내려보내면 서울이 허술할 뿐만 아니라 처자들이 그들의 요미(料米)만을 의지하고 있는 데다가 또 의장(衣裝)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변경의 추위를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본도의 포수를 강변에 나누어 보내고 황해도의 포수를 차차 미루어 보내면 또한 일로에 공궤(供饋)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어서 매우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하라."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구성(龜城)과 정주(定州) 사이에 군사를 주둔시키면 최보신(崔輔臣)이나 혹 다른 사람 중에서 가려 보낸 뒤에야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신잡이 아뢰기를,
"군사는 징발할 수 있으나 양식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양식이 없으면 수만 명의 군사가 곧 흩어져 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본도에는 부민(富民)이 없고 다른 데에서는 얻을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연전의 전세(田稅)는 콩이 1만여 석이고 쌀은 겨우 2천 석뿐이니, 이것으로는 중국군을 공궤하는 것도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 작미(身貢作米) 및 내수사 노비의 신공을 모아서 쓸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삼번 군사(三番軍士)의 봉족(奉足)과 대량미(代糧米)를 각각 그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는데 거의 2만 2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각처에 저축해 두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명년 봄에 무사하면 방수(防戍)하는 군인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 이것은 약간 넉넉합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다른 물건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오직 노잔(老殘)한 군사를 뽑아내어 그 대가로 쌀을 얻으면 가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서 속히 상량해서 하도록 하라. 모든 일은 의논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절목(節目)에 따라 착실히 거행하라."
하였다. 헌국이 아뢰기를,
"1∼2월이 멀지 않으니 의논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포성(滿浦城)은 험한가?"
하자, 신잡이 아뢰기를,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기까지는 극히 험합니다. 고산리(高山里)는 평야에 있어 험지에 의지함이 없습니다."
하고, 좌부승지 이호민(李好閔)은 아뢰기를,
"험지에 의지하지 않으면 평지에 축조한 중원의 제도보다도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옳다. 중원의 성은 극히 높고 우리 나라의 성은 높지 않으니, 험지에 의지한 곳이 없으면 안 된다."
하였다. 상이 신잡에게 이르기를,
"모곡(募穀)을 시행할 수 없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평안도 사람은 공명첩(空名帖)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찬(金瓚)이 아뢰기를,
"평안도 군량의 작미(作米)는 유사(有司)가 이미 다 헤아려 조처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해조(該曹)에서 저축하고 있는 은냥을 의주에 넉넉히 보내어 중강(中江)에서 곡식을 무역하여 곧 배로 운반해서 강가 여러 곳에 나누어 두게 하면 반드시 큰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절후가 늦어 얼음이 얼면 미처 배로 운반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적이 어느 지방에 있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함경남도 및 강계(江界) 등처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여연(閭延)·무창(茂昌) 등은 궁벽한 곳입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중원 애양보(靉陽堡) 근처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 유격(胡遊擊)의 격서(檄書)가 이미 들어갔는가? 선유(宣諭)에 관한 일을 그만 둘 수 없다. 중국군이 여기에 왔다는 기별을 저들이 반드시 들어 알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 군사도 아울러 보낼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은 간첩을 중하게 여겼으니, 모집하여 정해 보내야 합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만포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그들은 평상시 왕래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전일 서방 수령은 서용한 사람 중에 해유(解由)에 구애되지 말고 월등 인원(越等人員)을 의망(擬望)할 일로 승전(承傳)을 받들었습니다. 북도 및 남방의 방어가 긴요한 곳도 모두 서방 수령의 예에 의하여 해유에 구애되지 말고 월등인을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 일러서 살펴 하게 하라."
하였다. 정언 조정립(趙正立)이 아뢰기를,
"병사(兵事)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세월만 끌고 의논만 하면 그야말로 길가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일이 끝나지 못할 것이므로 마땅히 체찰사를 보내어 모든 일을 검칙(檢飭)하게 해야 합니다. 황해도의 무사는 지금 시취(試取)한 것으로 보면 5천여 인이나 되니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장령(將領)을 별도로 가려 훈련시켜 행장을 꾸려놓게 하고 변고를 들으면 들여보내는 것이 좋은 계책입니다. 그 도의 일이 매우 이완되어 있습니다. 병사(兵使) 구사직(具思稷)은 임무를 살피지 못하니 체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兵使)는 체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새로 차임한 사람이 간혹 전 사람만도 못한 경우도 있다. 평안도에 체찰사를 내려보내는 일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비변사가 의논하라."
하였다. 김찬이 아뢰기를,
"금년의 전세(田稅)를 모두 하하(下下)로 정하였으므로 민정(民情)이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올해 비록 풍년이 들었습니다만 어찌 수확하지 못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대신에게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해조가 이미 감정(勘定)했는가?"
하자, 호조 판서 한응인(韓應寅)이 아뢰기를,
"전일 경연관(經筵官) 노직(盧稷)이 재상(災傷)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모두 하하(下下)로 시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곳은 어찌 하지하(下之下)에 그치는가."
하였다. 김찬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은 중국 사신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서 요역(徭役)이 매우 번다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有司)가 헤아려서 조처하라."
하였다. 상이 덕형에게 이르기를,
"황해도에서 이번에 시취한 사람 중에 용예(勇銳)한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방(榜)을 별도로 한 무리를 만들어 요해처에 유주(留駐)시켜 변고를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감사·병사에게 보내어 나누어 방어하도록 하면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장령(將領)을 가려 별도로 일대(一隊)를 만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분리하여 정송(定送)하면 비록 참으로 용맹한 무사라 하더라도 무용을 쓸 데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출신(出身)이니 반드시 잘 통솔하고 잘 부리는 사람을 얻어 정송하는 것이 가하다. 판서는 더욱 힘쓰라."
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소신이 경상도에 어미를 뵈러 갔다가 체찰사 이원익을 만나 보았는데, 원익이 ‘왕명화(汪鳴和)가 와서 「적이 교사(狡詐)하기는 하나 반수 가까이 바다를 건너갔으니,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세로 보아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다만 소서비(小西飛)가 이미 우리 나라에서 군사 훈련하는 일을 통보하였으므로 관백이, 조선이 이미 이와 같이 하니 우리가 느슨히 할 수 없다고 하여 일기도(壹岐島)로 하여금 군사 4만을 모아 훈련하게 하였는데, 일기도를 주관하는 자가 간신히 청하여 1만 명을 훈련하는 것에 그쳤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소서비가 전에 성 중에 있었으니 무슨 일인들 듣지 못하였겠는가. 중원의 일도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이다."
하였다. 선각이 아뢰기를,
"심 유격이 ‘이원익이 체찰사가 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행장(行長)이 먼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원익이 또 ‘왜적이 철수한 뒤 중원을 왕래한다고 핑계하고서 나오면 형세상 금지하기 어렵고 또 통정(通情)할 수도 없으니, 중국인을 별도로 가려 군사 없이 홀로 머물러 있게 하면 편당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왜적이 아직까지 배회하고 있으니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반드시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철수하여 돌아가면 주문(奏聞)할 때 언급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하삼도(下三道)를 제어할 사람을 보낼 적에 병비도(兵備道)를 설치하자는 말은 어떠한가? 호 유격의 무리가 나오게 되면 말해서는 안 된다. 평안도·강원도 등의 감사의 장계를 볼 적마다 진실로 차마 보지 못하겠다. 【각도에 분파된 교사(敎師)들이 가는 곳마다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으며 이름을 대조하여 토색질하여 편오(編伍)의 군사들 중 파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서로 번갈아 가며 교련하였으나 하나도 정해진 규식이 없어서 하는 업이 점차 생소하게 되었다. 】 그러나 비변사가 그때그때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영리한 통사(通事)로 하여금 순안순무 아문(巡按巡撫衙門)에 은냥을 가지고 가서 그들이 무뢰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여 잘 조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체에 온당하지 못하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이미 석 상서(石尙書)에게 통지하였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그 잘못 열어본 서찰에도 유격의 일은 서서히 처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손 군문(孫軍門)과 서로 틈이 있기 때문에 곧 철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 군문이 석 상서와 서로 틈이 있는가?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손 군문과 과도관(科道官) 등은 조공(朝貢)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석 상서는 봉공(封貢)을 허락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지금 왜적이 아직도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있으므로 발언하기 어려워서 이처럼 운운한 것입니다."
하였다. 선각이 아뢰기를,
"듣건대 심 유격이, 유동립(柳東立)은 광망(狂妄)하여 데리고 갈 수 없다 하고 황신(黃愼)은 적당하여 데리고 가고자 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의 뜻대로 데리고 갈 수 있겠는가. 또 중국 사신은 무슨 까닭으로 지레 적영(賊營)에 들어간단 말인가?"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청정이 머뭇거리고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다그쳐서 보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왜영에 들어간 뒤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려 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선각이 아뢰기를,
"평의지(平義智)가, 두반(頭班)이 아직도 머물러 있으니 청정도 반드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응남은 아뢰기를,
"이 이반(二班)이 간 뒤에 사은(謝恩)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북도는 거리가 멀고 인심이 어리석으며 또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무장(武將)이 탐학을 부려 인심을 많이 잃고 있으니, 영적(零賊)이 출몰할 때에 백성들을 또한 유인할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인심을 위열(慰悅)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려 하는가?"
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평소에 납의(衲衣)나 군기(軍器) 등을 본도에 내려보내어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지금도 전례에 의거하여 내려보내고 또 그들의 고통을 위문하며 잡역(雜役)을 줄여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에 이르라."
하였다. 홍문관 교리 김홍미(金弘微)가 아뢰기를,
"본관(本館)의 관원 가운데 《주역(周易)》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김시헌(金時獻)이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대신이 스스로 임명한 것이어서 조처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윤선각의 말을 듣건대, 이원익이 경연관이 없는 것을 미안하게 여긴다 하니, 다시 비변사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정신(廷臣)이 스스로 가려 임명하는 일이 있었으니 사체가 미안하다. 내 의견으로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홍미가 아뢰기를,
"지난번 내의원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신기(神氣)가 불안하신 듯하므로 소신이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온 나라의 날짐승·물고기·동물·식물이 모두 상을 의지하고 있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전에 없던 상란(喪亂)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스스로 몸을 닦아 남을 책망하고 성심(聖心)을 정하여 인정을 급히 수합하여 점차 정돈하며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면 세상 일이 어찌 다스리기 어렵겠습니까. 마음이란 신명(神明)하기가 헤아릴 수 없으며 위태롭게 동하면 안정되기가 어렵습니다.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에 ‘진인(眞人)의 호흡은 발꿈치에 이른다.’ 하였는데, 축적하기를 오랫동안 하면 번뇌가 징정(澄精)되고, 본체(本體)가 맑아지는 것으로, 이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지름길입니다. 만일 조금만 잘못 쓰면 이단(異端)에 들어가게도 됩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사려(思慮)가 번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염중(念中)이었으므로 어지러워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자(程子)는 ‘계박(係迫)이 하나의 관주(串珠)와 같다.’ 하였습니다. 불가(佛家)의 주념(注念)은 돈오(頓悟)를 바라는 것이니 상달하기 미안합니다. 어떤 중이 고승(高僧)에게 묻기를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뜰 앞 잣나무에 있다.’ 하였는데, 이 뜻을 사색하여 깨닫게 되었다 합니다. 또 어떤 중이 마음을 안정하는 술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마음을 가지라.’ 하였습니다. 그 중이 사색해봐도 깨닫지 못하겠으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전혀 깨치지 못하겠다.’ 하니, 고승이 대답하기를 ‘그러면 네 마음이 보존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이단(異端)의 일이니 우리 유학(儒學)의 진맥(眞脈)을 모르면 이처럼 잘못 가게 됩니다. 반드시 신기(神氣)를 안정하고 의리를 길러야 합니다. 옛사람이 ‘심성을 수양하는 데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본원을 먼저 맑게 하면 도적은 근심할 것도 못 됩니다."
하고, 훈련 도정(訓鍊都正) 조경(趙儆)은 아뢰기를,
"강계의 형세는 신도 보았습니다. 적의 통로가 험하기는 하나 얼음이 얼 때에는 독로강(禿魯江) 어구가 곧 육지가 되어 버립니다. 만일 이곳으로부터 벌등포(伐登浦) 등처로 돌아 나오게 되면 강계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신잡이 가지 많은 나무를 심어 막아내는 계책을 말하였하으나 적도 찍어내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벌등포보(伐登浦堡)를 그 옆 험지에 의거한 곳으로 옮겨 설치하고, 다른 보(堡)도 첩입(疊入)하게 하며, 또 남쪽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수령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선각은 아뢰기를,
"그러면 산양회(山羊會)·동건강(童巾江) 등처도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 또한 비변사가 의논해서 조처하라."
하였다. 홍문관 부수찬 홍경신(洪慶臣)이 아뢰기를,
"평안도 수령을 다수 개차(改差)하였습니다. 지방 적미(糴米)를 거두어 들이는 때에 재촉하여 내려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때에 부임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치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령이 까닭없이 관직을 버리는 것은 극히 부당합니다. 그러나 혹 병이 중하여 떠나갈 경우는 조종조에서 기한이 찰 때까지 서용하지 않고 도로 외임(外任)을 제수하였으니 이것은 극히 엄한 법입니다. 지난번에 정엽(鄭曄)은 실지로 병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방(關防)의 지방이 아니니 잡아오는 것은 과중합니다. 이것이 규식이 되면 안 됩니다."
하고, 흥미는 아뢰기를,
"유신(儒臣)의 대우는 무부(武夫)와는 다릅니다. 무부는 대부분 군법으로 종사(從事)하지만 유신은 예의 염치(禮義廉恥)를 배양합니다. 정엽의 병은 실지인지 아닌지를 물론하고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고,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신점(申點)은 아뢰기를,
"남적(南賊)이 물러가지 않았는데 김덕령을 서방으로 옮겨보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덕령의 범죄는 작지 않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유사(有司)가 감히 다스리지 못하고 수령도 묻지 못하니 극히 놀랍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왜노(倭奴)가 익히 듣고 비장(飛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또한 많지만 우선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비장이니 협을(挾乙)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장성 현감 이귀(李貴)의 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내가, 무군사(撫軍司)에서 한신(韓信)을 대접하듯 한다는 말을 듣고 웃었었다. 익호(翼虎)라는 칭호를 준 것은 더욱 사리에 당치 않은 일이다.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 어찌 날개가 있겠는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사정이 민박(悶迫)하여 부득이 내려갑니다만 물의(物議)가 용납하지 않고 소명(召命)이 여러 차례 내리니, 위축되고 황공하여 마치 죄를 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체찰사의 중임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성은 탕패(蕩敗)되어 공허하며 기전(畿甸) 또한 경리(經理)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임무를 받은 바가 가까우면 조치할 수 있으나 멀면 형세가 서로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함경 일도는 유능한 자에게 맡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는 이미 감사·병사가 있으니, 자기가 해야 할 바의 일을 호령하고 규획(規劃)하는 것이 가하다."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여주(驪州)에 갔더니 출신(出身) 몇 사람이 와서 ‘금년은 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니 만일 농한기에 연습하면 어찌 성취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듣건대,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사를 나누는 등의 일에 극히 정상(精詳)하다 하니, 경기·충청도에도 차례로 거행하게 하여 장수를 얻어 그에게 맡기면 군사가 없는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파사성(婆裟城)은 극히 험한가?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형세가 너무 드러나서 속에 은밀한 곳이 없고 성 뒤에는 봉우리가 있으니 반드시 평양의 모란봉처럼 험한 요새를 만들어 굳게 지켜야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진(龍津)은 의거할 만한 험한 산이 없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는 곧 독산(獨山)이므로 형세는 좋으나 배설(排設)이 잘못된 듯합니다. 월계(月溪)에도 산성이 있어 장강(長江)을 굽어보고 있으니, 곧 천연의 요새이며 포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니 성세가 의지할 만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68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78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군자(軍資) / 외교-왜(倭) / 왕실-국왕(國王)
○丙辰/上御別殿, 引見備邊司堂上。 上曰: "南事, 尙未定, 西北, 亦有變。 各陳所懷。" 領議政柳成龍進啓曰: "建州 㺚子, (屈)〔崛〕 强十餘年。 今因渭原之事, 怨隙已深, 邊釁必生, 而西邊兵力寡弱, 添防無策, 軍糧亦乏, 此最急憂。 且江邊形勢, 水上則令朴名賢察之, 水下則李時言, 爲之兵使, 當從中策應, 而不可無繼援。 若送兵使敵體之人, 則事或掣肘。 崔輔臣已爲別將, 若使此人, 率安州以北之軍, 屯於龜城之間; 又使他人, 率安州以南之軍, 屯於安州, 則似好, 而崔輔臣, 臣不知其何如也。 以臣所見, 年少輕率, 他人亦不得其可者矣。 黃海兵使具思稷, 亦當馳援, 而其爲人器, 臣亦不知。 大槪邊防如此, 故人心洶懼, 京城小民, 朝不謀夕, 或有散去者。 必定人心, 然後他事可議。 若或土崩, 則不可以號令定之, 不可以計慮聚之也。" 上曰: "左相, 亦爲某言。" 左議政金應南啓曰: "在外所議, 成龍盡啓矣。 平安道列鎭堡中, 高山里最爲要害大鎭。 必擇有計慮識形勢之人差送, 而其餘邊將, 亦不無不用之人, 廁乎其中, 一時竝遞, 雖似騷擾, 亦不可不擇。 得其能爲突擊者送之, 亦可矣, 近觀此賊, 詭詐不測, 若出於昌城以下, 則可防矣。" 上曰: "賊若出來, 則何處不可? 觀平安一道, 無可拒截。 雖限江水, 合氷則成陸矣。" 刑曹判書李憲國啓曰: "小臣, 咸鏡道, 則未嘗往來, 而今見其道啓本, 此賊, 老乙可赤之麾下乎?" 上曰: "北道之賊, 乃謂老胡所送, 則予所不知, 雖出於平安道, 孰能禦之? 大抵平安道無兵。 雖有數萬, 皆散在各鎭, 設使猝發, 豈及應援? 擇將雖急, 此亦可慮。" 知中樞府事申磼啓曰: "江界至義州, 土兵元數, 僅二千餘名矣。" 上曰: "十萬餘衆, 如雲出來, 則設令二千, 同聚一處, 何以支吾?" 申磼曰: "若出於禿魯江, 則尤不可支。 人皆謂江界, 雪塞則無虞, 而臣以爲, 若合氷, 則極難矣。 且淸川江上流極淺, 可以步涉矣。" 上曰: "若守安州, 此賊必顧後矣。 前聞倭賊云: ‘爾國如鷄卵。’ 言破外則其內自潰也。 必於某處拒守可也。" 申磼曰: "狄踰嶺, 可以守之。" 上曰: "民間有私儲者乎?" 申磼曰: "民家稀罕, 故無如西南積蓄者矣。" 上曰: "閭閻, 若不得作賊, 則豈可長驅?" 申磼曰: "江界、熙川等處, 閭落至稀, 無所掠處矣。" 兵曹判書李德馨啓曰: "若失官倉, 豈不可憂?" 上曰: "必據山城, 然後可守。 中原城, 尙不足守, 況如安州、定州等城, 迂闊矣。 以邊將言, 必有退守, 然後可以進戰。 且鑿氷之事, 備邊司亦言之, 多伐江氷, 積置如墻, 則不亦可乎?" 申磼曰: "禿魯江口及鴨綠江等處, 相距或五里、十里間, 江水合氷時, 鑿氷成穴, 多植多枝木, 捍如鹿角城, 則賊騎不得突入矣。" 上曰: "所謂品防, 鑿氷成穴。 予所言者, 伐而積之也。" 成龍曰: "虜騎如風雨, 禿魯江邊, 則猶可防之, 鴨綠江, 則人民不足, 豈能成乎?" 德馨曰: "平安道形勢, 必須固阨江邊之險, 以爲堅守之計。 若失其初面, 而迎敵入境, 則有如決水之難遏矣。 禿魯江、婆猪江, 爲賊來大路, 而仇寧、昌洲以下, 又爲萬衆長驅之地。 其間, 擇其形險, 以爲必守之地, 如軍糧、軍器、火砲諸具, 預爲輸入其處。 其後則狄踰嶺、牛峴及朔州 延平嶺, 乃是險阨可據之地。 此等處, 只在本道受任者, 臨譏察勢, 善爲措置而已。" 上曰: "備邊司, 量爲之。 江邊城, 設於平地乎?" 申磼曰: "渭原、碧潼, 則依山築之。" 上曰: "雖依山築之, 而若有俯臨之峯, 則不可。 古人可謂無謀。" 申磼曰: "渭原城, 亦有俯臨之峯。" 刑曹參判柳永慶啓曰: "朔州爲賊要害, 軍糧亦多儲, 而其城四面, 皆可窺見。 頃日傳敎, 欲移此州軍糧, 而若大軍拒截延平嶺, 則雖不移置, 可也。" 行知中樞府事鄭琢啓曰: "我國形勢, 非如中原遼、薊之平坦, 賊必以長蛇入來, 雖多可以對敵。 必先調兵糧, 以保形勢爲當。" 成龍曰: "旣設大鎭於安州, 又屯重兵於寧邊、龜城、定州, 亦莫不然, 則賊不得出沒於其間矣。 且當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也。" 申磼曰: "京中砲手二哨, 下送平安道云, 京城不可使虛踈。 本道敎鍊砲手精抄, 則可得二千, 以此分防, 似無不足。" 上曰: "然則砲手不欲下送乎? 兵判之意, 如何?" 德馨啓曰: "臣之意, 亦如是。 京中砲手下送, 則不但京中虛踈, 渠等妻子, 只仰渠料, 且衣裝不備, 不耐邊寒。 以本道砲手, 分送江邊; 黃海道砲手, 次次推送, 則亦無一路供饋之弊, 似甚便好矣。" 上曰: "備邊司議爲之。" 德馨曰: "龜城、定州間屯兵, 則崔輔臣, 或他人中, 得人送之, 然後可爲掎角矣。" 申磼曰: "軍則可以調發, 而糧餉無出處。 若無糧餉, 則數萬之軍, 卽爲潰散, 極可悶慮。 本道無富民, 他無可得之路。 年前田稅, 太萬餘石、米僅二千石。 以此供饋天兵, 亦患不足。 今之可爲者, 唯各司奴婢身貢作米及內需司奴婢身貢, 輳合用之, 而臣曾將三番軍士奉足、代糧米, 令各其界首官捧之, 則幾至二萬二千餘石。 儲置各處, 使之待變, 而明春若無事, 則給送防戌軍人, 此則稍優矣。" 德馨曰: "他物則不敷。 唯老殘軍士, 抽出得米, 似可矣。" 上曰: "備邊司速爲商量爲之。 凡事不可只消議論, 逐節着實行之。" 憲國曰: "正二月不遠, 不可徒爲議論。" 上曰: "滿浦城險乎?" 申磼曰: "自北至南, 極險矣。 高山里則在平野, 無據險也。" 左副承旨李好閔啓曰: "若不據險, 不如中原之築於平地也。" 上曰: "承旨之言, 然矣。 中原之城極高, 我國之城不高, 而無據險之處, 則不可矣。" 上謂申磼曰: "募穀不可爲乎?" 申磼啓曰: "平安之人, 無不受空名帖者矣。" 大司憲金瓚啓曰: "平安道軍糧作米, 有司己盡料理矣。 又有一策, 該曹所儲銀兩, 優送義州, 貿穀於中江, 則使船運, 分置於江上諸處, 必大有益, 但恐節晩氷合, 未及船運矣。" 上曰: "此賊在於何方?" 德馨曰: "咸鏡南道及江界等處, 最近。" 申磼曰: "在閭延、茂昌等僻處。" 成龍曰: "在中原靉陽堡近地。" 上曰: "胡遊擊檄書, 已入去乎? 宣諭之事, 不可已也。 唐兵來此之奇, 渠必聞知矣。 但未知倂送我國人否也。" 德馨曰: "古人重間諜, 或自募定送可也。" 申磼曰: "滿浦人可送, 以其居常往來故也。" 吏曹判書洪進啓曰: "前日, 西方守令, 就敍用人中, 勿拘解由, 越等人員擬望事, 捧承傳矣。 北道及南方防緊處, 竝依西方守令例, 勿拘解由, 越等擬望何如?" 上曰: "言于備邊司, 察而爲之。" 正言趙正立啓曰: "兵難遙度。 淹以歲月, 徒爲論議, 則正如道傍作舍。 宜送體察使, 撿勑諸事可也。 黃海武士, 以今試取觀之, 五千餘人, 豈曰少乎? 別擇將領, 訓鍊裝束, 聞變入送, 策之善也。 其道之事, 甚爲弛緩。 兵使具思稷, 不能察任, 所宜遞易。" 上曰: "兵使當遞, 而我國新差之人, 或不如舊矣。 平安道體察使下送事, 予則未解。 備邊司議之。" 金瓚曰: "今年田稅, 皆定下下, 民情爲悶。 今歲雖登, 豈無不穫之人乎?" 上曰: "頃使大臣議此, 而該曹已勘定乎?" 戶曹判書韓應寅啓曰: "前者, 經筵官盧稷, 請不許災, 故皆以下下施行。" 上曰: "好處則豈止下之下?" 金瓚曰: "畿甸, 則天使久留, 徭役甚煩。" 上曰: "有司量處。" 上謂德馨曰: "黃海道今次取人中勇銳者, 非止一二。 此一榜, 別爲一群, 留駐要害處, 待變如何?" 德馨啓曰: "若送於監、兵使處, 使之分防, 則不能成形。 當擇將領, 別爲一隊爲當。" 上曰: "分離定送, 則雖眞勇士, 無所用武。 此皆出身, 必得統御善將之人, 定送可也。 判書更勉勵焉。" 同知中樞府事尹先覺啓曰: "小臣覲母於慶尙道, 與體察使李元翼相見, 則曰: ‘汪鳴和來言: 「賊雖狡詐, 而幾半過海, 雖不知早晩, 勢必入去。 但小西飛, 已通我國鍊兵之事, 故關白以爲: 『朝鮮, 旣能如此, 吾不可緩。』 使一岐島, 聚兵四萬而訓鍊, 主島者(艱)〔懇〕 請, 止鍊一萬。」 云。’" 上曰: "其言, 雖不可信, 小西飛, 頃在城中, 何事不聞? 中原之事, 亦必細知。" 先覺曰: "沈遊擊云: ‘李元翼爲體察使, 南下之言, 行長先聞之。’ 云。 元翼且言: ‘倭賊撤回後, 託以往來中原而出來, 則勢難禁抑, 且不得通情。 別擇唐人, 無兵獨留, 則可爲便當’ 云。" 成龍曰: "倭賊尙爾徘徊, 其去難必定。 若卷回, 奏聞時, 可以及之。" 上曰: "若送制其下三道之人, 如設兵備道之言, 則奈何? 如胡遊擊輩出來, 則不可說。 每見平安、江原等道監司狀啓, 誠不忍見。 【各道分派敎師等, 在在誅求, 照名徵索, 編伍之兵, 無不破産。 迭相敎鍊, 無一定規, 所業漸就生踈焉。】 然, 備邊司臨機議處。" 德馨曰: "使通事伶俐者, 齎去銀兩於巡按、巡撫衙門, 言其無賴作弊之事, 使之善處何如?" 上曰: "事體未穩。" 成龍曰: "天使想已通於石尙書。 故其誤拆之書, 亦言遊擊之事, 而徐當處置云。 蓋與孫軍門相隔, 故不卽令撤耳。" 上曰: "孫軍門與石尙書, 相隔乎? 予全不知。" 成龍啓曰: "孫軍門與科道官等, 以爲不可許貢; 石尙書, 則請許封貢。 以此不相能。 方今倭賊尙未渡海, 故難於發言, 而如是云云矣。" 先覺曰: "聞沈遊擊, 謂柳東立, 狂的不可率去; 黃愼的當, 欲爲率去云。" 上曰: "豈以渠意率去乎? 且天使, 何故徑入賊營乎?" 成龍曰: "淸正遲回不去, 故催迫欲送云。" 上曰: "天使入倭營後, 淸正不肯渡海, 則奈何?" 先覺曰: "平義智, 以頭班尙留, 淸正亦必不往云。" 應南曰: "以此二班去後, 謝恩亦難也。" 德馨曰: "北道途里邃遠, 人心愚頑。 且京師絶遠, 武將貪(瘧)〔虐〕 , 多失人心, 零賊竊發之時, 亦不無誘引之患。 慰悅人心之擧, 恐不可不爲也。" 上曰: "欲何以爲之?" 德馨曰: "平日, 衲衣、軍器等物, 下送本道, 俵給軍士矣。 今亦依前例下送。 且問其疾苦, 完護雜役。" 上曰: "言于備邊司。" 弘文館校理金弘微啓曰: "本館官員, 全無解《周易》者。 金時獻爲李元翼從事官。 大臣自辟, 處置似難, 而聞先覺之言, 則元翼以無經筵官, 爲未安云。 更令備邊司, 議處何如?" 上曰: "古有廷臣自擇之事, 體叚未安。 予意則似難矣。" 弘微曰: "頃見內醫院傳敎, 神氣似不安。 小臣見之, 不覺涕出。 一國飛潛、動植, 皆仰上身。 國運不幸, 遭無前之喪亂。 自上修己責人, 定其聖心, 急收人情, 漸次整頓, 內修外攘, 則世事豈難治哉? 心者, 神明不測, 危動難安。 魏伯陽 《參同契》謂: ‘眞人之息, 至踵。’ 積之之久, 煩惱澄靜, 本體瑩然, 治心之捷徑。 若少誤用, 或入於異端。 司馬光思慮煩亂, 達朝不寐, 而念中, 故不亂云。 程子以爲: ‘係迫, 似一串珠。’ 佛家注念, 冀其頓悟, 上達未安。 一僧問高僧: ‘佛何在?’ 曰: ‘在庭前栢樹。’ 思索此意, 因以悟發。 又一僧問安心之術, 曰: ‘然心來。’ 其僧思索不得, 謂之曰: ‘了不可得。’ 曰: ‘將則爾心存也。’ 此異端之事, 不知吾儒眞脈, 則如此誤往。 必須安恬神氣, 滋養義理。 古人云: ‘養心, 莫善於寡慾。’ 若先澄淸本源, 則盜賊非所患矣。" 訓鍊都正趙儆啓曰: "江界形勢, 則臣亦見之。 賊路雖險, 氷合之時, 禿魯江口, 便成陸地。 若從此處, 繞出伐登浦等處, 則江界蹶矣。 申磼, 雖言植捍之策, 賊亦可斫而入。 臣意以爲, 伐登浦堡, 移設于其傍據險處, 他堡疊入。 又令南官守令, 有兵者守之, 則似好矣。" 先覺曰: "然則山羊會、童巾江等處, 亦可爲也。" 上曰: "此亦備邊司議爲之。" 弘文館副修撰洪慶臣啓曰: "平安道守令, 多數改差矣。 今方收糴之時, 不可不催促下送。 如有趁不赴任者, 則摘發治罪, 何如? 守令無故棄官, 極爲不當, 而或病重而去, 則祖宗朝准期不敍, 還除外任, 此是極法。 頃者鄭曄, 病之實否, 雖不可知, 旣非關防之地, 則拿來過重。 以此成規, 則不可。" 弘微曰: "儒臣接待, 與武夫不同。 武夫多以軍法從事, 儒臣則當培養禮義廉恥。 鄭曄之病, 不論實否, 而似爲未安。" 行僉知中樞府事申點啓曰: "南賊未退, 而金德齡移送西方, 似爲未穩。" 上曰: "金德齡犯罪不小。 殺人而有司莫敢治, 守令不得問, 極爲駭愕。" 成龍曰: "倭奴飽聞, 謂之飛將。 其罪亦多, 姑留其處爲當。" 憲國曰: "飛將挾乙, 皆是長城縣監李貴之說。" 上曰: "當初, 予哂撫軍司如待韓信之語。 賜號翼虎, 尤爲無理。 人腋之下, 豈有虎乎?" 成龍啓曰: "私情悶迫, 不得已下去, 物議不容, 召命屢下, 跼縮兢惶, 有如負罪。 且旣受體察重任, 筋力所及, 敢不殫竭? 京城在〔在〕 蕩然空虛之中, 而畿甸亦多經理之事。 所受者, 近則可以措置, 遠則勢不相及。 咸鏡一道, 請畀能者。" 上曰: "咸鏡道, 旣有監、兵使, 但爲己所事, 號令、規畫可也。" 成龍曰: "小臣頃往驪州, 出身數人來言: ‘今歲豐登, 若於農隙鍊習, 豈不成就?’ 云。 聞李時發鍊兵、分軍等事, 極爲精詳。 京畿、忠淸, 次第擧行, 得將授之, 不患無兵。" 上曰: "婆娑城, 極險乎? 形勢如何?" 成龍曰: "形勢太露, 中無隱處。 城後有峯, 必如平壤 牡丹峯, 設險堅守, 可也。" 上曰: "龍津, 無據險處乎?" 成龍曰: "此乃獨山, 形勢則好, 而排設似誤。 月溪亦有山城, 俯臨長江, 乃是天險, 而砲聲相聞, 聲勢可倚矣。"
- 【태백산사고본】 41책 68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5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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