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68권, 선조 28년 10월 7일 병오 4/8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오랑캐에 대해 적극적인 방비를 하고 정세를 탐지하도록 하다
국역
비변사가 아뢰었다.
"들판의 풀을 태워서 호인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성상의 헤아리심이 실로 범연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쪽의 지세가 넓고 멀어서 형세상 다 태울 수 없으며 만일 저쪽 땅으로 넘어가서 까닭없이 불지르는 것은 놀라 의심하고 선동하는 것이 될 근심이 없지 않아서 아마도 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이 적이 우리 경내를 침범해 오더라도 들에 노략질할 것이 없으면 형세상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니, 오직 험준함을 의거하고 들판을 깨끗이 치우는 것이 급무입니다. 그리고 변경에 풀이 자라나서 불태울 만한 곳은 불태우고 강 근처의 민가에 들어갈 만한 곳은 또한 들어가게 하며 성을 수리하고 품방(品防)을 많이 파서 모든 비어(備禦)할 수 있는 대책을 각별히 조치할 일로 김대래(金大來)에게 일러서 보내소서.
또 전 병사(兵使) 신잡(申磼)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강변(江邊)의 열진(列鎭)에 군기와 양곡이 모두 떨어졌다.’ 합니다. 설령 내지의 군사를 뽑아 보낸다 하더라도 먹을 만한 양곡이 없고 사용할 만한 기계가 없습니다. 변경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이러한 뜻도 아울러 말해 보내어, 감사·병사와 같이 의논하여 추이(推移)해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창졸의 용도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본도의 전세미(田稅米)는 상시에는 강변의 7읍에 수납하여 내지의 운산(雲山)·희천(熙川)·구성(龜城) 3도회의 군량으로 삼게 하였는데, 근래에는 중국 장수의 지대(支待) 때문에 모두 직로(直路)에 납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변이 근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군량 마련에 방책이 없으니, 평시의 예에 의하여 전부를 변경에 납입하지는 못하더라도 4분의 3을 3도회에 납입케 하여 군량의 용도에 보충하도록 하되, 이 추곡(秋穀)을 흩기 전에 급급히 받아들일 일로 또한 말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방비에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어찌 지나치게 의심하여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풀을 불태우는 일은 가장 절급(切急)하다. 이들은 심상한 오랑캐가 아니어서 갑사(甲士)가 10만이라도 결코 지탱하기 어려운데 관서(關西)의 사졸이 얼마나 있는가. 이러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저 오랑캐는 활을 잘 쏘고 싸움에 익숙하며 달리고 치는 것이 장기인데, 우리 군사는 단약하고 겁쟁이여서 들판에서 교전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패할 것이요, 평지의 성도 지키기 어려울 듯하니 모름지기 산성을 가려 들어가 웅거하도록 하라. 사소한 진보(鎭堡)의 토병(土兵)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으니 있든 없든 상관이 없으니, 곧 오랑캐들을 도와주는 바가 될 것이니, 모두 튼튼한 성이나 큰 진영(鎭營)에 들어가게 하라. 들판을 청소하고 기다리되 반드시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중도에서 막아야 하는데 화기가 아니면 불가하다. 내지의 몇몇 곳에도 반드시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킨 뒤에야 강변이 믿는 데가 있어서 유지하게 될 것이다. 관서는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하나 포수는 생소하여 서울의 포수만 못하니, 수효를 헤아려 뽑아 보내도록 하라. 또 오랑캐는 반드시 얼음이 언 뒤에, 왜적은 반드시 봄물이 일 때 침입하므로 2월 이전에는 왜적이 감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명련(韓明璉)·김덕령(金德齡)은 모두 한 시대의 용장으로 남방에 헛되이 머물러 있으니, 그 휘하를 거느리고 혹은 군사를 모집하여 좌우 별장(左右別將)으로 칭하고 관서의 요긴한 곳에 둔수(屯守)하게 하다가 변을 듣고 달려가게 하면 족히 한 모퉁이를 감당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명성이 있으니 관서의 인심이 진정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또 전일 전교하였는데 내 말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오랑캐를 격파하는 것은 항복한 왜인이 아니면 불가하다. 김응서(金應瑞)는 본디 체차(遞差)해야 한다. 만일 이때에 김응서의 대임을 차출하고 응서로 하여금 그 휘하의 항복한 왜인 및 고언백(高彦伯) 진중의 항복한 왜인을 거느리고 관서의 모처(某處)에 가서 진수(鎭守)하도록 하면 사변이 있을 경우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반드시 적을 헤아려야 능히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적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간첩을 써야 하니, 다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오랑캐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게 하는 것도 가하다. 무릇 방비하는 일 가운데 가볍고도 급한 것은 김대래에게 말해 보내고 크고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뒤에 의계(議啓)하되 또한 반드시 병조 판서와 같이 의논하라."
하였다.
원문
○備邊司啓曰: "野草焚燒, 使胡人不得牧馬, 聖算所及, 實出尋常, 第聞彼邊地勢闊遠, 勢不可盡焚, 而若踰越彼地, 無端放火, 不無驚疑煽動之患, 恐難爲之。 但此賊, 雖來犯我境, 野無所掠, 則勢不得長驅深入, 惟據險淸野, 最爲急務。 此邊草長可焚處則焚之, 近江民家可以量入處, 亦爲疊入, 繕完城子, 多掘品防, 凡所備禦之策, 各別措置事, 金大來處言送。 且卽招前兵使申磼問之, 則江邊列鎭, 軍器、糧餉, 俱爲匱乏云。 設令抄送內地之軍, 而無粟可食, 無器械可用。 邊事至此, 極爲寒心。 此意竝爲言送, 與監司、兵使同議, 推移分置, 以備倉卒之用, 似爲宜當。 且本道田稅米, 常時則輸納于江邊七邑, 內地雲山、熙川、龜城三都會, 以爲軍糧, 而近來則以唐將支待之故, 皆令輸入于直路, 當此事變可虞之時, 備糧無策。 雖不能依平時(金)〔全〕 數輸入於邊上, 而四分之三, 輸入于三都會, 以補軍餉之用, 而趁此秋穀未發之前, 急急捧受事, 亦爲言送, 何如?" 上答曰: "依啓。 防備所當爲之事, 豈可過疑而不爲? 焚草一事, 最爲切急。 此非尋常之虜, 帶甲十萬, 決難支吾。 關西士卒有幾, 豈不寒心? 彼虜善射慣戰, 長於馳擊; 我兵單弱怯懦, 爭鋒於原野。 其勢必敗, 而平地之城, 亦恐難守, 須令擇山城入據之。 小小鎭堡土兵, 不過十餘, 有無不關, 而適足爲虜人所資, 皆令疊入於堅城大鎭, 淸野以待, 必據險邀截, 而非火器不可。 內地數三處, 亦必屯兵固守, 然後使江邊有所恃而維持。 關西, 雖曰錬兵, 而砲手生踈, 不若京中砲手, 量數抄送。 且虜必合氷, 倭必春汛, 二月之前, 倭賊必不敢動。 韓明璉、金德齡, 俱以一時驍將, 空留於南方。 宜令率其麾下, 或募兵, 稱以左、右別將, 屯守於關西要緊處, 聞變馳來, 足當一隅, 而此人等, 俱有聲名, 關西人心, 不無所鎭。 且前日傳敎, 而不用予言矣。 雖然虜勢至此, 不可坐而待之。 破虜, 非降倭不可。 金應瑞本當遞差。 若於此時, 差出應瑞之代, 使應瑞, 率其麾下降倭及高彦伯陣中降倭, 往鎭于關西某處, 如有事變, 可以得志矣。 大抵用兵, 必先料敵, 而能爲制勝者也。 如欲料敵, 必用間牒。 更令邊將, 詳探虜情亦可矣。 凡防備之事, 輕且急者, 則言送于金大來, 大且難決者, 則隨後議啓, 而又必與兵判同議。"
선조실록68권, 선조 28년 10월 7일 병오 4/8 기사 /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오랑캐에 대해 적극적인 방비를 하고 정세를 탐지하도록 하다
국역
비변사가 아뢰었다.
"들판의 풀을 태워서 호인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성상의 헤아리심이 실로 범연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쪽의 지세가 넓고 멀어서 형세상 다 태울 수 없으며 만일 저쪽 땅으로 넘어가서 까닭없이 불지르는 것은 놀라 의심하고 선동하는 것이 될 근심이 없지 않아서 아마도 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이 적이 우리 경내를 침범해 오더라도 들에 노략질할 것이 없으면 형세상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니, 오직 험준함을 의거하고 들판을 깨끗이 치우는 것이 급무입니다. 그리고 변경에 풀이 자라나서 불태울 만한 곳은 불태우고 강 근처의 민가에 들어갈 만한 곳은 또한 들어가게 하며 성을 수리하고 품방(品防)을 많이 파서 모든 비어(備禦)할 수 있는 대책을 각별히 조치할 일로 김대래(金大來)에게 일러서 보내소서.
또 전 병사(兵使) 신잡(申磼)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강변(江邊)의 열진(列鎭)에 군기와 양곡이 모두 떨어졌다.’ 합니다. 설령 내지의 군사를 뽑아 보낸다 하더라도 먹을 만한 양곡이 없고 사용할 만한 기계가 없습니다. 변경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이러한 뜻도 아울러 말해 보내어, 감사·병사와 같이 의논하여 추이(推移)해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창졸의 용도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본도의 전세미(田稅米)는 상시에는 강변의 7읍에 수납하여 내지의 운산(雲山)·희천(熙川)·구성(龜城) 3도회의 군량으로 삼게 하였는데, 근래에는 중국 장수의 지대(支待) 때문에 모두 직로(直路)에 납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변이 근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군량 마련에 방책이 없으니, 평시의 예에 의하여 전부를 변경에 납입하지는 못하더라도 4분의 3을 3도회에 납입케 하여 군량의 용도에 보충하도록 하되, 이 추곡(秋穀)을 흩기 전에 급급히 받아들일 일로 또한 말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방비에 있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어찌 지나치게 의심하여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풀을 불태우는 일은 가장 절급(切急)하다. 이들은 심상한 오랑캐가 아니어서 갑사(甲士)가 10만이라도 결코 지탱하기 어려운데 관서(關西)의 사졸이 얼마나 있는가. 이러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저 오랑캐는 활을 잘 쏘고 싸움에 익숙하며 달리고 치는 것이 장기인데, 우리 군사는 단약하고 겁쟁이여서 들판에서 교전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패할 것이요, 평지의 성도 지키기 어려울 듯하니 모름지기 산성을 가려 들어가 웅거하도록 하라. 사소한 진보(鎭堡)의 토병(土兵)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으니 있든 없든 상관이 없으니, 곧 오랑캐들을 도와주는 바가 될 것이니, 모두 튼튼한 성이나 큰 진영(鎭營)에 들어가게 하라. 들판을 청소하고 기다리되 반드시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중도에서 막아야 하는데 화기가 아니면 불가하다. 내지의 몇몇 곳에도 반드시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킨 뒤에야 강변이 믿는 데가 있어서 유지하게 될 것이다. 관서는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하나 포수는 생소하여 서울의 포수만 못하니, 수효를 헤아려 뽑아 보내도록 하라. 또 오랑캐는 반드시 얼음이 언 뒤에, 왜적은 반드시 봄물이 일 때 침입하므로 2월 이전에는 왜적이 감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명련(韓明璉)·김덕령(金德齡)은 모두 한 시대의 용장으로 남방에 헛되이 머물러 있으니, 그 휘하를 거느리고 혹은 군사를 모집하여 좌우 별장(左右別將)으로 칭하고 관서의 요긴한 곳에 둔수(屯守)하게 하다가 변을 듣고 달려가게 하면 족히 한 모퉁이를 감당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명성이 있으니 관서의 인심이 진정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또 전일 전교하였는데 내 말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 오랑캐를 격파하는 것은 항복한 왜인이 아니면 불가하다. 김응서(金應瑞)는 본디 체차(遞差)해야 한다. 만일 이때에 김응서의 대임을 차출하고 응서로 하여금 그 휘하의 항복한 왜인 및 고언백(高彦伯) 진중의 항복한 왜인을 거느리고 관서의 모처(某處)에 가서 진수(鎭守)하도록 하면 사변이 있을 경우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반드시 적을 헤아려야 능히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적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간첩을 써야 하니, 다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오랑캐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게 하는 것도 가하다. 무릇 방비하는 일 가운데 가볍고도 급한 것은 김대래에게 말해 보내고 크고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뒤에 의계(議啓)하되 또한 반드시 병조 판서와 같이 의논하라."
하였다.
원문
○備邊司啓曰: "野草焚燒, 使胡人不得牧馬, 聖算所及, 實出尋常, 第聞彼邊地勢闊遠, 勢不可盡焚, 而若踰越彼地, 無端放火, 不無驚疑煽動之患, 恐難爲之。 但此賊, 雖來犯我境, 野無所掠, 則勢不得長驅深入, 惟據險淸野, 最爲急務。 此邊草長可焚處則焚之, 近江民家可以量入處, 亦爲疊入, 繕完城子, 多掘品防, 凡所備禦之策, 各別措置事, 金大來處言送。 且卽招前兵使申磼問之, 則江邊列鎭, 軍器、糧餉, 俱爲匱乏云。 設令抄送內地之軍, 而無粟可食, 無器械可用。 邊事至此, 極爲寒心。 此意竝爲言送, 與監司、兵使同議, 推移分置, 以備倉卒之用, 似爲宜當。 且本道田稅米, 常時則輸納于江邊七邑, 內地雲山、熙川、龜城三都會, 以爲軍糧, 而近來則以唐將支待之故, 皆令輸入于直路, 當此事變可虞之時, 備糧無策。 雖不能依平時(金)〔全〕 數輸入於邊上, 而四分之三, 輸入于三都會, 以補軍餉之用, 而趁此秋穀未發之前, 急急捧受事, 亦爲言送, 何如?" 上答曰: "依啓。 防備所當爲之事, 豈可過疑而不爲? 焚草一事, 最爲切急。 此非尋常之虜, 帶甲十萬, 決難支吾。 關西士卒有幾, 豈不寒心? 彼虜善射慣戰, 長於馳擊; 我兵單弱怯懦, 爭鋒於原野。 其勢必敗, 而平地之城, 亦恐難守, 須令擇山城入據之。 小小鎭堡土兵, 不過十餘, 有無不關, 而適足爲虜人所資, 皆令疊入於堅城大鎭, 淸野以待, 必據險邀截, 而非火器不可。 內地數三處, 亦必屯兵固守, 然後使江邊有所恃而維持。 關西, 雖曰錬兵, 而砲手生踈, 不若京中砲手, 量數抄送。 且虜必合氷, 倭必春汛, 二月之前, 倭賊必不敢動。 韓明璉、金德齡, 俱以一時驍將, 空留於南方。 宜令率其麾下, 或募兵, 稱以左、右別將, 屯守於關西要緊處, 聞變馳來, 足當一隅, 而此人等, 俱有聲名, 關西人心, 不無所鎭。 且前日傳敎, 而不用予言矣。 雖然虜勢至此, 不可坐而待之。 破虜, 非降倭不可。 金應瑞本當遞差。 若於此時, 差出應瑞之代, 使應瑞, 率其麾下降倭及高彦伯陣中降倭, 往鎭于關西某處, 如有事變, 可以得志矣。 大抵用兵, 必先料敵, 而能爲制勝者也。 如欲料敵, 必用間牒。 更令邊將, 詳探虜情亦可矣。 凡防備之事, 輕且急者, 則言送于金大來, 大且難決者, 則隨後議啓, 而又必與兵判同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