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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6일 기유 1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주역》을 강하고, 관찰사의 임명·군공의 허위 문제 등을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다.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 행 대사헌(行大司憲) 홍진(洪進), 동지사(同知事) 이항복(李恒福), 특진관(特進官) 이제민(李齊閔), 참찬관(參贊官) 김우옹(金宇顒), 특진관 윤선각(尹先覺), 참찬관 정숙하(鄭淑夏), 정언(正言) 정형욱(鄭馨郁), 검토관 정경세(鄭經世), 기사관(記事官) 신성기(辛成己)·민유경(閔有慶)·윤의립(尹義立)이 입시하였다. 】 강이 끝나자 정숙하가 아뢰기를,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윤선각에게 이르기를,

"경이 유사 당상으로 있으니, 속히 의논해서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덕령(金德齡)은 내가 잘 모른다. 당초에 사람들이 사실과 너무 지나치게 말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무능하다고 여긴다. 위명이 꺾이자 군졸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나의 생각에는 비록 필부의 용맹이라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그는 한쪽 지역을 방어하게 할 만하니, 지금 전라 감사에게 하서하여 군병을 뽑아 보내 주기도 하고 또는 군량을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해서 군세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처럼 해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하니, 이항복은 아뢰기를,

"신이 동궁을 배종하고 남하했을 때 호남 사람이 김덕령의 기이한 일을 극도로 말하니, 듣는 자는 살피지 않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진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상소를 올려서 유 총병(劉總兵)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하고 영남의 일을 오로지 김덕령에게 맡기려고까지 하였으나, 신은 그 위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옛 역사책속에 실린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지혜와 용맹에 대한 일을 보아도 김덕령이 하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신이 김덕령전주(全州)에서 보고 말하기를 ‘옛날에는 군졸 중에서 뽑혀 상장(上將)이 된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먼저 전공을 세운 후에야 명장이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뛰어난 공을 세우도록 힘쓰라.’ 하니, 그는 신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그 진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더러 오활한 말을 한다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군사를 모집할 때에는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단지 기이한 말만을 믿고 적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전공을 세운다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군량이 이미 고갈되고 기이한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진에 속한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져 갔습니다. 또 말[馬]을 색출한 일 때문에 호남의 인심을 크게 잃어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조정에서 비록 군량을 조달해 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따를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여러 장수 중에 오직 이시언(李時言)만이 김덕령과 서로 좋아하여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하고 김덕령이시언과 더불어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니, 김덕령으로 하여금 이시언의 진중에 합치게 하면 온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조정이 사호(賜號)까지 하였는데 지금 이시언의 관하를 삼는다는 것은 사체에 부당하다. 나는 처음에도 믿지 않았지만, 이귀(李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말을 감히 하였는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용력은 쓸 만하니,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 모름지기 영남·호남으로 하여금 군량을 계속 조달하여 군세를 도와서 장려해 쓰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영남의 식량 조달은 당초부터 질서가 없이 산란하여 두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각진의 장수들이 스스로 가져다 먹었었는데, 홍이상(洪履祥)이 내려간 뒤로는 비로소 조정하기는 하였으나 지급하는 수량이 많지 않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불편하게 여겨, 이 때문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매우 염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원수의 장계를 보니, 홍이상이 비록 힘써서 하기는 하나 규모가 워낙 협소해서 살릴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아래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미 도원수로 하여금 영남에 가서 감사와 상의해서 경장(更張)하도록 하였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도원수는 아직까지 우도에 있고 감사와 더불어 상의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극히 우려됩니다. 영남을 좌·우도로 나누어서 서성을 감사로 삼으려 한 것은, 대개 서성이 재기(才氣)가 있고 남쪽 지방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김응남에게 이르기를,

"진 유격(陳遊擊)이 적을 선유(宣諭)해도 적이 듣지 않는다는데 그래도 중국 사신은 나오겠는가? 적은 중국 사신이 오면 꼭 물러가겠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진 유격은 모욕을 이미 많이 받았습니다. 석 상서(石尙書)는 아마 이 적이 반드시 물러갈 것이라 생각하고 이와 같이 했을 것입니다. 단지 이해룡(李海龍)의 말만 들으면 중국 사신이 나올 경우 적이 물러갈 것 같다고 하지만, 중국 사신이 나올지의 여부는 역시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반드시 중국 사신이 나와서 그들을 물러가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의 품첩(稟帖)을 얻어본 뒤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영남에 주둔한 군사가 모두 수천 명도 못 되는데 군량마저 떨어졌으니, 적이 만일 물러간다면 그래도 지탱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상교에 의하여 진 유격의 품첩을 본 뒤에 조처하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각기 적의 정황에 대해 말하라. 저 적은 중국 사신이 나온 연후에 물러가려 하고, 중국 조정에서는 적이 물러간 연후에 내보내려고 하니,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윤선각은 아뢰기를,

"소신은 혼미한 사람이니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적이 물러가면 주문(奏聞)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적이 다 물러가지 않았으니 무슨 말로 주문하겠습니까? 진 유격누국안(婁國安)의 품첩이 들어가면 중국 조정에서 반드시 조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우리 나라는 주문하지 말고 짐짓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진 유격의 품첩을 보아서, 거기에 만일 절반이 건너갔다고 하였으면 사실대로 주문하기를 ‘중국 사신이 나온다면 적이 물러갈 생각을 가질 것이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이 거짓으로 절반이 건너가는 것처럼 하고 혹시 가지 않았거나 혹은 대마도(對馬島)까지만 갔다가 도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36척의 배에 1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실었다는 것은 절대 무리이니,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반드시 우리 나라의 주문을 기다려서 사신을 내보내지, 진 유격의 말만 듣고 내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이 물러가지 않았는데 사신이 나온다면 사체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낭패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을 나오게 하려면 마땅히 들은 바에 따라서 주문해야 하고, 만일 사신이 나와도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주문할 것이 없다. 오직 두 가지일 뿐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설사 주문을 한다 하더라도 다만 진 유격이 한 말로 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유격이 한 말이 있으면 마땅히 그 말대로 처리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저번에 석 상서의 자문을 보니, 적이 물러가지 않더라도 중국 사신은 반드시 나올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리 나라가 비록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사신은 응당 나올 것 같습니다.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경사에 가서 서둘러 사신을 내려보내면 적은 반드시 물러갈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나올 때 필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적이 물러가는 것은 마치 동쪽 문으로 나가고 서쪽 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책봉을 구하는 것이 만일 실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황제라 자칭하고 있으면서 봉후(封侯)를 구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필시 가탁하는 일일 것이다. 전일에 통신(通信)을 요구한 것도 역시 선화 후전(先和後戰)의 뜻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큰 뜻을 가지고 왔다가 지금은 형세에 곤란한 바가 있기 때문에 봉후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중원을 왕래하며 그 허실을 엿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왜적은 본시 금수인데, 중국 조정에 봉후를 구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왜적이 중국 조정에 통서하기를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부친다.’ 하여, 스스로 한 지역의 천자로 자처하였으니, 이는 바로 침범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의후(許儀后)가 올린 글을 가지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요즘 사사로 기복(起復)하여 사적(仕籍)에 함부로 오른 자는 깎아버리라는 공사(公事)가 있기 때문에 무사(武士) 중에 기복된 자들은 모두 불안해 하여 연달아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지금 항식(恒式)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무사를 조정에서 기복함은 전장에 쓰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니, 빠짐없이 다 방소(防所)에 내보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전진(戰陣)에 다 내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 기복한 자도 있는가?"

하자, 이항복이 아뢰기를,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자식이 어찌 감히 스스로 기복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매우 해괴한 일이다. 전일 경연에서 아뢴 것도 역시 이를 말한 것이다."

하니, 윤선각이 아뢰기를,

"본사의 회계는 다만 사사로 기복한 자를 지적했을 뿐이지, 무사를 모두 기복하지 말라고 이른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이 병조에 있을 때 보니, 금군 차첩(禁軍差帖)과 군사의 면역(免役)·노제(老除) 등의 첩(帖)이 하루에 거의 50여 장이나 나갔습니다. 만일 국가에 도움이 있다면 상규(常規)에 구애받아서는 아니되나 그 이해를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군(正軍)이 거의 역을 면하고 관속(官屬)도 모두 역을 면하게 되면 장차 형태를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니, 이 폐단을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군수(軍需)에 도움이 된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한갓 폐단만 있다면 장차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익이 많고 손해가 적으면 오히려 할 수 있지만 손해가 많고 이익이 적으면 결코 개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의 말이 옳다. 또 군공(軍功)도 허위가 많다. 군공 성책(軍功成冊)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평행장(平行長)의 군사가 거의 없어졌을 것인데 오히려 감축된 바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미안한 줄은 아나 사실이 이와 같다. 비록 꼭 다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그 폐단은 그렇다. 전일 계본(啓本) 중에서 보고한 왜적의 수는 3백 명 미만이었는데 목을 벤 숫자가 3백 명이 넘으니, 극히 무도하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근일에 군공청(軍功廳)의 문서를 보았더니, 그 중에 신의 서압(署押)을 위조한 것이 두 장 있었고 함부로 기록된 자는 30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함부로 기록된 부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폐단도 막지 않아서는 아니됩니다. 지금부터는 군공 성책을 도목정(都目政)045) 에 일체 사용치 않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책을 도목에서 쓰고 안 쓰는 것은 비변사와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한명윤(韓明胤)영동(永同)을 사수한 공은 신이 일찍이 장계하였습니다. 한명윤은 일개 서생(書生)이면서 종시 역전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그의 아내도 절부(節婦)로서 적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신이 한명윤을 보고 위로하였더니, 한명윤은 ‘이때에 감히 처자의 죽음을 말하겠는가.’ 하여, 신이 도리어 부끄러워하였습니다. 한명윤이 소매 속에서 자그마한 책을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군부(軍簿)인데, 군량을 얻어가지고 이 고을 경계에 있는 산 속에 숨어서 적을 무찌를 계획을 하기 원한다.’ 하기에, 신이 군량을 넉넉히 주고 또 용장(勇將) 권희인(權希仁)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누차 밤을 이용해 공격하여 적이 물러갔습니다. 권희인웅천(熊川)의 싸움에서 죽고, 한명윤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다가 중국군에게 구타당해 죽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들으니 투항한 왜인이 한명윤을 왜인을 포박한 사람이라고 여겨 차 죽였다 한다."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도 처음에 듣기는 윤선각과 같았는데, 그 후에 들으니 투항한 왜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한명윤은 일개 서생으로서 몸을 일으켜 적을 쳤다. 담략(膽略)이 남보다 뛰어났고 성의를 다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하다가 끝내는 죽기에 이르렀으니, 옛날의 열사(烈士)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권희인은 자원하고 나서서 적을 치되 종시 혈전하였다. 적의 성에 먼저 오르는 등 용맹을 날려 여러번 전공을 세우고 싸움에서 죽었으니, 역시 장부라 할 만하다. 】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같이 뛰어난 사람은 별도로 포증(褒贈)을 해야 합니다. 김성일(金誠一)은 당초에 의분하여 적을 막았는데, 그 공이 매우 큽니다. 유극량(劉克良)파주(坡州)의 접전에서 처음에는 불가한 일로 생각하고 모두 믿고 따르지 않았는데 마침내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또한 가상합니다."

하고, 홍진은 아뢰기를,

"김성일은 당초에 웅천(熊川)을 지켰는데, 적의 예봉이 몰려와 그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무장과 군졸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발사하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꼼짝 않고 앉아서 군관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한 왜졸을 죽이니, 적이 조금 물러나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성일이 있었더라면 진주(晉州)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주가 보전될 수 있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창의 독전(倡義督戰)하기로는 김성일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의 초모 격서(招募檄書)를 보면, 충의가 분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성일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046) ,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자,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성일은 적정(賊情)을 분명히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윤길(黃允吉)은 매우 걱정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간웅(奸雄)이고 평행장(平行長)박실(朴實)한데 싸울 때마다 꼭 이기니, 가장 염려된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이다. 성일은 속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신은 성일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처지인데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물어보았더니, 성일도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다만 ‘남쪽 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이를 염려한 것이니, 어전(御前)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잘못 계달(啓達)한 것일 것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김성일은 자가 사순(士純)이고 안동(安東) 사람인데, 위인이 강직하고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과감한 말로 직간을 하였고, 기축년047) 에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을 때에는 정직하게 자신을 가져 조금도 의구함이 없었다. 왜인의 서계(書契)에 패만(悖慢)한 말이 많이 있자 엄격한 말로 꾸짖어 물리치고 받지 않으니, 왜적의 괴수도 모두 두려워했고 따라서 서계의 내용을 고쳤다. 그가 귀국해서 홍문관 부교리가 되어 자주 소차(疏箚)를 올려서 당시의 병폐를 절실하게 지적하였다. 간신 정철기축 역옥(己丑逆獄)048) 으로 인하여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을 터무니없는 죄로 얽어 죽이니, 사람들은 모두 최영경의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김성일이 어전에서 항언으로 변명하여 설원과 복관이 되게 하였으니, 청론(淸論)의 한 맥이 이를 힘입어 이어졌다. 임진년 봄에 그는 영남의 병마 절도사로 임명을 받아 남쪽 변방으로 달려갔다. 왜적이 이미 이르니 열군(列郡)은 와해되어 풍문을 듣고 온통 분산하였으나 김성일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보수(保守)할 계획을 하였다. 적이 웅천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말에 내려 호상에 버티고 앉아 비장을 독촉해서 싸우게 하여 왜적의 선봉장을 베니, 흉적이 이 때문에 조금 물러서게 되었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김성일이 ‘왜구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과감하게 말하여 방비를 해이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이 내려져 있었는데, 특별히 이를 용서하고 이내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하자, 그는 도로 영남 지방으로 들어가서 동지를 불러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니, 원근에서 모두 향응하였으므로 함락되었다가 도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이 16∼17읍이나 되었다. 그의 초유 격문은 충의가 분발하고 사의가 격렬하였으므로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로 하여금 듣게 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동해서 눈물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우도 순찰사로 올려 제수되었다. 계사년049) 여름에 병으로 군막(軍幕)에서 죽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 중에는 애통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 김성일은 옛날의 유직(遺直)이라 할 만한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조목(趙穆)이 전에 소명을 받고 올라오지 않았는데 필시 가난하여 탈 말을 갖추어 길을 떠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다시 소명을 내리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에 그를 경연에 입참시키라는 전교가 계시자, 아랫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부르라. 경연관이 많이 결원되고 두 사람만이 있으니 매우 미안하다. 왜 차출하지 않는가?"

하였다. 【조목은 퇴계 선생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머리가 희도록 경전을 연구하고 행의(行義)가 매우 높았다. 김응남이 그를 불러 경연에 두기를 청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 】 응남이 아뢰기를,

"근래에 탐풍(貪風)이 크게 일고 있는데 이런 때에는 청백한 사람을 높이 등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종조에서 조원기(趙元紀)라는 자를 통정 대부(通政大夫)·가선 대부(嘉善大夫)·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린 일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아름다운 규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때에도 청백한 사람이 있는가?"

하자, 응남은 아뢰기를,

"이기(李墍)의 청소(淸素)한 절개는 남들이 따르기 어려운 바입니다. 이 밖에 어찌 한두 사람 정도뿐이겠습니까."

하고, 정숙하는 아뢰기를,

"국운의 불행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사무가 매우 번거로운데도 위에서 자주 경연에 납시니, 이는 신민의 복입니다.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건대 성종조에 전(前) 직장(直長) 이유의(李惟義)라는 자가 이천(利川) 사람으로서 역학(易學)에 정통하자 역마편으로 불러 올려 경연에 입참시킨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성종조의 고사에 의하여 역학에 밝은 사람을 널리 구해다가 고문으로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조목처럼 어진 자도 경연관으로 삼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하겠다. 김홍미(金弘微)는 박학한 사람인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변(逆變) 때 파직되어 귀향했다가 변란 후에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 상을 당하여 또 안동 지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역》도 아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주역》을 아는지의 여부는 신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대개 박학하니 필시 잘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홍민(金弘敏)은 벌써 죽었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작년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하였다. 【김홍민은 타고난 자질이 온아하고 또 학행이 있었는데, 상주(尙州) 사람으로 현사(賢士)였던 김범(金範)의 아들이다. 】 미시에 경연을 파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31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45]
    도목정(都目政) : 도목 정사(都目政事)의 준말. 관원의 치적(治績)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좌천·파면을 시키는 일.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하였다.
  • [註 046]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 부견은 진(晉)나라 때 업(鄴) 땅에 웅거하여 대진천왕(大奏天王)이라 참칭하고 전연(前燕)과 전량(前涼)을 쳐서 영토를 넓힌 다음,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쳤다. 이때 사안은 진나라 상서 복야(尙書僕射)로 있으면서 부견의 백만 대군의 침입을 받았는데, 조금도 경동하지 않고 장수들을 지휘하여 부견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진서(晉書)》 권79·권113.
  • [註 047]
    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註 048]
    기축 역옥(己丑逆獄) : 1589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 옥사를 가리킨다.
  • [註 049]
    계사년 : 1593 선조 26년.

○(巳)〔己〕 酉/上御別殿, 講《周易》 【領事金應南、行大司憲洪進、同知事李恒福、特進官李齊閔、參贊官金宇顒、特進官尹先覺、參贊官鄭淑夏、正言李馨顒、檢討官鄭經世、記事官辛成已ㆍ閔有慶ㆍ尹義立入侍。】 講畢, 鄭淑夏曰: "金應瑞病重, 其軍代領, 當爲有旨。 宣居怡, 次次赴任後下去, 則其期甚遠。 且聞裵楔有水疾, 不合舟師之任云。" 上曰: "裵楔, 雖猛將, 有水疾則不可用於舟師矣。" 應南曰: "臣等未之聞也。" 尹先覺曰: "宣傳官趙光翼, 自元帥處來言: ‘裵楔將爲赴任, 而晋州之民, 遮道願留, 使不得出城, 元帥亦以爲難處。 欲令宣居怡, 來在幕下’ 云。 應瑞病重, 不能董戎, 姑以(郭再佑)〔郭再祐〕 , 代領其衆, 此有旨, 似當速爲下送。" 上曰: "速爲之。" 應南曰: "裵楔旣爲水使, 卽當赴任, 而爲百姓所遮, 不得出城之言, 極爲駭愕。 如此之言, 不可使聞於朝廷也。" 上謂先覺曰: "卿爲有司堂上, 速議處之。"上曰: "金德齡, 予不知之, 當初人言, 太過其實。 今則反以爲無能爲也。 威名頓挫, 軍卒散落云。 予意以爲, 雖曰(四)〔匹〕 夫之勇, 亦未易得, 可使防禦一隅。 今宜下書于全羅監司, 或抄送軍兵, 或繼給糧餉, 以助軍勢, 如何? 不可如是解弛。" 李恒福曰: "臣陪東宮南下時, 湖南之人, 極言德齡奇異之事。 聽者不察, 和而倡之。 其(陳)〔陣〕 下之人, 至欲陳疏, 使劉總兵撤還, 而專以嶺南之事, 委於德齡, 臣則不以爲信。 觀古史中, 載關羽張飛智勇之事, 未有如德齡所爲者也。 臣見德齡全州, 言曰: ‘起自行伍, 擢爲上將, 古有其人, 而今則不然。 必先立戰功, 然後可以爲名將。 須抄精兵, 勉立奇功。’ 渠則以臣言爲然, 其陣下之人, 皆以臣爲迂論, 不之信也。 方其募兵之時, 聞風者, 只恃奇異之言, 以爲不見賊面, 可獲戰功, 爭相坌集, 今則糧道已竭, 少無異事, 故陣下之軍, 幾盡潰散。 且以括馬之事, 大失湖南人心, 訾謗蜂起。 朝廷雖使調運兵糧, 必不興起聽從也。"應南曰: "諸將之中, 唯李時言, 與德齡相好, 以爲可用, 德齡亦欲與時言同事云。 若令德齡, 合於時言陣中, 似爲便當。" 上曰: "始則朝廷至於賜號, 而今爲時言管下, 事體不當。 予則初亦不信, 李貴不知何如人, 敢言兩腋出虎之言乎? 安有是理? 然其勇力則可用, 豈易多得? 須令嶺南、湖南, 繼運糧餉, 以助軍勢, 奬礪用之可也。" 先覺曰: "嶺南糧餉, 當初散亂無統, 不成頭緖, 故各陣之將, 自爲取用。 洪履祥下去之後, 始爲料理, 而所給之數不敷, 諸將皆以爲不便, 以此不相協睦云, 至爲可慮。" 上曰: "見都元帥狀啓, 洪履祥, 雖致力爲之, 規模狹小, 似無活法矣。" 先覺曰: "自下亦以爲然, 已令元帥, 往嶺南, 與監司相議更張矣。 近聞元帥尙在右道, 不與監司議定云, 極爲憂慮。 嶺南分左、右道, 欲以徐渻爲監司者, 蓋以徐渻有才氣, 備諳南中事情故也。" 上謂應南曰: "陳遊擊宣諭賊中, (以)〔而〕 賊猶不聽。 天使然且出來乎? 賊則待天使之來, 必爲退去乎?" 應南曰: "陳遊擊受辱已多矣。 石尙書則意謂此賊必退, 而如是爲之。 但聞李海龍之言, 天使若出來, 則似當退去云, 而亦未知天使出來與否也。" 上曰: "我國當何以處之?" 應南曰: "必須天使出來, 使之退去。" 上曰: "陳遊擊稟帖得見後, 某樣處置似當。" 應南曰: "嶺南諸軍, 未滿數千, 而糧餉竭乏。 賊若退去, 則猶可支, 不然, 無可爲矣。 當依上敎, 見陳遊擊稟帖後處之, 甚當。" 上曰: "卿等各言賊情。 彼賊, 則欲待天使出來, 然後退去; 天朝, 則欲待賊徒退去, 然後出送。 未知何以處之?" 先覺曰: "小臣迷劣, 何能知之? 然, 天朝令我國待賊退, 方爲奏聞。 今賊未盡退, 以何辭奏聞乎? 陳遊擊婁國安稟帖入去, 則天朝必有處置之事。 我國, 不爲奏聞, 姑待之可也。" 應南曰: "見陳遊擊稟帖, 如以爲半渡云, 則從實奏聞曰: ‘天使出來, 則賊有退意’ 云云, 何妨?" 上曰: "然。" 恒福曰: "賊佯若半渡, 而或不去, 或往對馬島而卽還, 未可知也。 以三十六隻之船, 載一萬五千之軍, 必無其理。 天朝則必待我國之奏聞, 然後天使出送, 必不只聽陣遊擊之言而出送矣。 賊若不退, 而天使出來, 非但事體虧損, 必有狼狽之患。" 上曰: "欲使天使出來, 則當隨所聞, 措辭奏聞, 若以爲天使雖來不關云, 則不爲奏聞。 准此兩端而已。" 恒福曰: "設使奏聞, 只以遊擊所言, 爲辭而已。" 上曰: "陳遊擊, 若有所言, 則當聽其言而處之爲當。" 經世曰: "頃見石尙書咨文, 則賊雖不退, 天使必來。 臣意以爲, 我國雖不爲奏聞, 天使似當出來。 遊擊言: ‘我往京, 催降天使, 則賊當退去’ 云云。 來時必有所聞故云云矣。 賊之退去, 如東門出而西門入, 未可信也。" 上曰: "賊之求封, 若出於實情云, 則彼乃自稱皇帝, 而欲求封(候)〔侯〕 者, 何也? 此必假托之事。 前日要求通信, 亦是先和後戰之意也。" 先覺曰: "始則有大志而來, 今則勢有所難, 故以求封爲名, 欲往來中原, 覘其虛實也。" 上曰: "然。 賊本是禽獸, 其於天朝求封, 有何關乎?" 經世曰: "賊通書于中朝曰: ‘日出處天子, 寄書日沒處天子’ 云。 自爲一方天子, 此乃犯順之意也。" 上曰: "以許儀后上書見之, 則可知矣。" 恒福曰: "近日, 私相起復, 冒托(任)〔仕〕 籍者削去事, 有公事, 故武士之起復者, 皆不自安, 續續呈訴。 今當定爲恒式。 武士自朝廷起復者, 爲用於戰所, 而有此擧也, 無遺盡送於防所乎?" 上曰: "豈必盡送於戰(陳)〔陣〕 乎? 自爲起復者, 亦有之乎?" 恒福曰: "多有之矣。" 上曰: "人子豈敢自爲起復乎? 此甚可駭。 前日筵中所啓, 亦謂此也。" 先覺曰: "本司回啓, 但〔言〕 其私自起復者, 非謂武士皆勿爲起復也。" 恒福曰: "小臣在兵曹見之, 禁軍差帖, 軍士免役、老除等帖, 一日幾出五十餘張。 若有補於國家, 則不可拘於常規, 然不可不審其利害而爲之。 正軍幾至免役, 官屬亦皆免役, 將無以成形, 此弊不可不預防也。" 上曰: "若補軍需則可也, 不然而徒有其弊, 將不可防矣。" 恒福曰: "利多而害小, 猶可爲也, 害多而利小, 決不可不爲之更定也" 上曰: "判書之言, 是矣。 且軍功亦多虛僞。 以軍功成冊所錄見之, 則平行長之軍, 幾至無遺, 而尙無所減矣。 予之此言, 固知未安, 而事實如此。 雖不必皆然, 而弊則然矣。 前者, 啓本中所報賊之數, 未滿三百, 而斬級過於三百, 極爲無謂。" 先覺曰: "近日, 見軍功廳文書, 其中有僞造臣之署押二張, 而冒錄者三十餘人。 以此推之, 冒錄之類, 不可勝數。 此弊亦不可不防。 今後, 軍功成冊都目, 一切勿用似當。"上曰: "成冊都目, 用與不用, 與備邊司議處。" 先覺曰: "韓明胤死守永同之功, 臣曾爲狀啓。 明胤, 書生, 而終始力戰, 其志可尙。 其妻亦節婦也。 聞賊將至, 自刎而死。 臣見明胤而慰之, 明胤曰: ‘此時, 敢言妻子之死乎?’ 臣反自愧。 明胤袖出小冊曰: ‘此乃軍簿, 願得軍糧, 隱於縣界山中, 以爲攻勦之計’ 云, 臣優給軍餉。 且使勇將權希仁, 協力爲之。 其後, 累次夜攻, 賊亦退去, 希仁死於熊川之戰, 明胤尙州牧使, 爲兵所歐打而死矣。" 上曰: "予聞降, 以明胤爲捕之人, 蹙殺云。" 經世曰: "臣初聞與尹先覺同, 厥後聞之, 爲降所害云。 【韓明胤, 一書生, 挺身討賊, 膽略過人, 竭誠履險, 終至於死, 無愧於古之烈士矣。 權希仁, 自願討賊, 終始血戰, 先登賈勇, 屢立戰功, 卒死於戰陣, 亦可謂之壯夫也。】 應南曰: "如此表表之人, 別加褒贈。 金誠一, 當初奮義禦賊, 其功甚大。 劉克良, 坡州之戰, 初以爲不可, 而皆不信從, 終乃力戰死之, 亦爲可嘉。" 洪進曰: "金誠一當初守熊川, 賊鋒來逼, 其勢甚盛, 武將軍卒, 以爲無可奈何, 莫敢發射, 誠一遂下馬據胡床, 屹然不動, 使軍官射之, 得斬一, 以此小退, 不敢進云。 誠一若在, 晋州亦可以保矣。" 經世曰: "誠一雖在, 晋州之得保與否, 未可知也, 倡義督戰, 無如誠一者。 觀其招募檄書, 忠義奮發, 令人感動矣。" 上曰: "誠一受欺於秀吉則多矣。 秀吉着氈笠, 抱兒子, 跣足而見之, 誠一乃大言曰: ‘秀吉易與耳。 日本不足慮。 (符堅)〔苻堅〕 百萬之兵, 謝安聞而不動, 何畏乎此賊乎?’ 云。 此非受欺於秀吉乎?" 左右皆曰: "誠一不能明見賊情而然也。" 上曰: "黃允吉, 則甚憂之曰: ‘平義智奸雄, 平行長朴實, 每戰必勝, 最爲可慮’ 云云。 此必有所見矣。 誠一受欺明矣。" 恒福曰: "臣與誠一不相識, 其時同在政院, 嘗問之, 誠一亦深以爲憂。 但言: ‘南中人心, 先自動搖, 我雖大言鎭定, 而猶不解惑’云。 渠之所言, 未必非爲此慮, 而榻前之啓, 必爲誤達也。"

【史臣曰: "金誠一, 字士純, 安東人。 爲人勁直而慷慨, 有大節。 立朝, 以敢言直諫。 己丑, 以通信副使, 往日本, 正直自持, 略無疑懼。 奴書契, 語多悖慢, 嚴辭責之, 斥而不受, 賊酋亦皆畏憚, 從而改之。 及還長玉堂, 屢上疏箚, 切中時病。 奸臣鄭澈, 因己丑逆獄, 搆殺處士崔永慶, 國人皆知其冤, 而莫敢言者。 誠一於榻前, 抗言卞之, 雪冤復官, 淸論一脈, 賴而不死。 壬辰春, 受嶺南節度使之命, 馳往南邊, 賊已至矣。 列郡瓦解, 望風奔潰, 誠一獨屹然爲保守計。 賊之入熊川也, 下馬據胡床, 督褊裨戰之, 斬得先鋒將, 兇鋒以此少退。 其時朝廷, 以誠一敢言寇不足畏, 使防備廢弛, 已命挐鞫, 特原之, 仍爲招諭使, 還入嶺界, 倡率同志, 糾合義旅, 遠近響應, 淪陷之邑, 還爲我有者, 十六七矣。 其招諭一檄, 忠義奮發, 辭意激烈, 雖使愚夫、愚婦聞之, 必皆心動而淚落也。 陞授右路巡察使, 癸巳夏, 以病卒於戎幕, 聞者莫不痛之。 嗚呼! 誠一可謂古之遺直也。"】

應南曰: "趙穆, 前承召命, 不得上來。 必是貧窶, 不能備騎登道而然也。 更爲下召宜當。 前有入參經筵之敎, 在下之人, 莫不感激。" 上曰: "更召之。 經筵官多闕, 只有二人, 殊爲未安。 何不差出乎?" 【趙穆, 受業於退溪先生李滉之門。 白首窮經, 行義甚高。 應南請召置經席, 甚盛擧也。】 應南曰: "近來貪風大熾。 此時淸白之人, 不可不崇用。 祖宗朝有趙元紀者, 以淸白, 陞通政、嘉善、資憲。 此是美規。" 上曰: "此時亦有淸白之人乎?" 應南曰: "李墍淸素之節, 人所難及。 此外豈止一二人乎?" 淑夏曰: " 國運不幸, 至於此極, 事務甚煩, 而自上頻御經筵, 此臣民之福也。 臣見《國朝寶鑑》, 成廟朝, 有前直長李惟義者, 利川人也。 精通《易》學, 驛召入參講席。 今亦依成廟朝故事, 博求明《易》之人, 以備顧問宜當。 今則雖賢如趙穆者, 亦未得爲經筵官, 甚欠事也。" 上曰: "言出故及之, 金弘微, 博學人也。 今在何處?" 經世曰: "逆變時, 罷官歸鄕, 亂後拜慶尙都事, 遭母喪, 又在安東地。" 上曰: "《周易》, 亦知之乎?" 經世曰: "知《易》與否, 臣亦未知, 大槪博學, 必能知之。" 上曰: "金弘敏已死乎? 經世曰: "上年病死矣。" 【弘敏, 天資溫雅, 且有學行。 尙州人, 賢士金範之子也。】 未時, 罷對。


  • 【태백산사고본】 36책 6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431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