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를 공격하는 일을 논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체찰사에게 선전관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본사(本司)의 뜻은 이미 회계 안에 다 말했습니다. 다만 군병이 이미 모였고 군사들의 마음이 서로 분기한다면, 마땅히 임기(臨機)하여 계책을 결정해서 편의한 대로 종사해야 할 것이고 먼데서 억측(臆測)으로 하는 말에 구애되어 사기(事機)를 잃지 않도록 하라는 뜻도 또한 하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는 국가의 대사에 관계된 것이니 어제 본사의 회계에 다 말했다. 나의 뜻은 초봄에 거사하려고 하던 때에 이미 다 말했으니 고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징을 울려서 싸움에 이긴 자도 있고 복이 있는 사람은 신명(神明)도 도왔으니, 혹 만분의 일이나마 가망이 있는 일이다. 대저 두헌(竇憲) 같은 사람으로도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공적을 새겼고,306) 우윤문(虞允文)은 문신(文臣)인데도 금주(金主) 양(亮)을 격파하였으니,307) 병가의 승패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적(賊)을 토벌한다고 하는데 어찌 저지(沮止)하겠는가. 곤외(閫外)는 장군(將軍)이 절제하는 것이니 그의 재량(裁量)에 맡겨 하는 바를 보아야 한다. 단지 적에게 잡히어서 끝내 멸망을 재촉하는 데 지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대개 적과 대결(對決)해온 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는 적을 헤아리는 데에 밝지 못한 것인가. 지금 다시 다른 일은 말할 필요가 없고, 쉽게 알 만한 것으로 말하겠다. 고인(古人)이 병사(兵事)를 논하는 데는 단지 장수(將帥)의 현부(賢否)만을 논했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우리 나라의 장수에게 패한 적이 있는가? 적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변성(邊城)에 둔거(屯據)하여, 반드시 호(壕)를 깊이 파고 보루(堡壘)를 높이 쌓으며 곡식을 쌓아두고 병사를 훈련시켜 항상 싸움에 대비해 왔으니, 어찌 우리 나라 장사(將士)들이 마른 가지로 목책(木柵)을 세운 것과 같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무슨 물건으로 그들의 성을 공격할 것인가? 장편전(長片箭)으로 그들의 영루(營壘)를 쏘아대면 함락시킬 수 있는가? 군병을 정돈(整頓)하여 가까이 육박하면 적은 필시 상대하여 싸우지 않고 단지 지키기만 할 것이니, 수일 안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군량을 어디에서 내오며 누가 운송하겠는가? 하늘에서 곡식을 내려보내고 귀왕(鬼王)이 실어다 주겠는가? 왜적의 견고한 성 밑에서 양식이 끊어진다면 적들이 탄환 하나 쏘지 않아도 무너지고 흩어져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수백리에 진영을 잇댄 적들은 필시 4∼5만을 밑돌지 않을 것인데 이들은 모두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습성으로 여러 해 동안 싸움에 익숙해진 군사들이다. 이제 양호(兩湖)의 오합지졸 3천을 뽑아서 한 차례에 적을 섬멸하고자 하니,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다. 내 구구한 뜻을 다 토설할 수는 없고 다만 하늘이 성사시켜 주기를 축원할 뿐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5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56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註 306]두헌(竇憲) 같은 사람으로도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공적을 새겼고, : 두헌은 후한(後漢) 때 두 황후(竇皇后)의 오라버니이다. 헌은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여 사소한 원한도 다 보복하였다. 권력을 이용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다가 황후가 노하여 내궁(內宮)에 유폐시키자 헌은 주살될까 두려워하여 흉노(匈奴)를 쳐서 속죄하기를 청하였다. 헌이 장군에 임명되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계락산(稽落山)에서 북선우(北單于)와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국경에서 3천 리 되는 곳까지 쳐들어가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돌에다 공적을 새겼다. 《후한서(後漢書)》 열전(列傳) 제3.
- [註 307]
우윤문(虞允文)은 문신(文臣)인데도 금주(金主) 양(亮)을 격파하였으니, : 우윤문은 남송(南宋) 사람으로 6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 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금(金)나라 펴제 양(廢帝亮)이 40만 대군을 이끌로 남침하자 고종이 윤문에게 명하여 군대를 호궤(犒饋)하게 하였다. 윤문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고 작전을 지시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송사(宋史)》 권383 우윤문전(虞允文傳). - [註 307]
○備邊司啓曰: "體察使處, 宣傳官持有旨下去。 本司之意, 則已盡於回啓之中。 但軍兵旣聚, 士心爭奮, 則所當臨機決策, 便宜從事, 不拘於懸度遙制之言, 以失事機, 此意亦爲下書何如?" 答曰: "此係國之大事。 昨日本司回啓, 盡之矣。 予意則春初欲擧之時, 已盡言之, 可考而知也。 然古有鳴錚而戰勝者。 有福之人, 則神鬼助之, 或於萬分中, 一分可望之理。 夫以竇憲之人, 而勒石燕然; 虞允文之才, 而擊破金 亮。 兵家勝敗, 未可知也。 名曰討賊, 何能沮遏? 閫以外將軍制之。 觀其所爲可矣。 只恐爲賊所獵, 竟不過促亡而已。 大槪與賊嘗之久矣, 何我國之迷於料敵耶? 今不必更言他事, 願以易知者言之。 古人論兵, 只論將帥賢否。 未審行長、淸正, 爲我國將帥所敗者否? 賊入我國, 屯據邊城, 其必深溝、高壘, 積穀、鍊兵, 爲朝夕必戰之計矣。 豈如我將士, 以枯枝爲(遶)〔撓〕 者乎? 未審以何物攻其城? 以長片箭, 射其營壘, 則足以拔乎? 頓兵進薄, 賊不必與戰, 只自守而已。 不能攻拔於數日之內, 則未審軍糧從何處出, 而某人輸之? 天且雨粟, 而鬼王輸之乎? 絶糧於堅城之下, 則賊不發一丸, 而奔崩潰裂之不暇矣。 數百里連營之賊, 必不下四五萬, 而此皆輕生成性, 積年慣戰之兵也。 今抄兩湖烏合三千, 欲一揮撲滅, 異哉! 異哉! 區區之意, 不能盡吐, 但祝天成事而已。"
- 【태백산사고본】 32책 5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56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