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15일 경신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경상도의 군향, 군사훈련, 인재등용 등에 대하여 의논하다

상이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洪履祥)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저 곳의 일이 매우 절박하여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일은 원수(元帥)가 있고, 체찰사 또한 내려갔으니 소신은 마땅히 그들의 절제에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군량의 조달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조치해 장만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어떻게 지시하던가?"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비변사의 말은, 곡식이 익은 후에 적이 충돌해 올 계획이 있을 것이니 들의 곡식을 깨끗이 수확해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은 들을 깨끗이 치우는 일도 쉽지 않다고 여깁니다. 가까운 곳에 산성(山城)이 있어야만 운반해서 저장할 수가 있는데 영남에는 삼가 산성(三嘉山城)만 있고 달리 지킬 만한 곳이 없습니다. 창고의 곡식도 지금 바야흐로 거두어들이는데 둘 곳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난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여러 장수들이 화목하지 못하여 반드시 시기에 임해 일을 그르칠 걱정이 있다 하니, 경이 마땅히 조정하라. 이것이 제일 급한 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군공(軍功)이 진실을 잃어서 허위가 너무 많은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나라 사람을 베어 바치는 경우도 있으니 경은 마땅히 금단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는 공이 있는데도 상이 공에 맞지 않는 자도 마땅히 찾아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군량을 모으는 것은 반드시 농사에 힘쓴 연후에 장만할 수 있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는 권장해서 힘써 경작하도록 하라. 또 왜적과 평야에서 대치하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으니 반드시 지형을 살펴 험준한 곳을 점거하여 산성을 쌓아야 하며, 또 들을 깨끗하게 거두어서 적들이 양식을 취할 곳이 없게 하라. 이것이 용병(用兵)의 계책이다. 수군은 유달리 전과 같지 못하여 잔병(殘病)이 너무 심하니, 또한 충분히 단속하고 격군(格軍)을 많이 줘야 한다. 본도에 좌·우 수사(左右水使)가 있는데 저와 같이 움츠리는 것은 부당하다. 3도의 병세(兵勢)를 합하여 기회를 살펴 진공하고 모든 일을 착실히 행해야 한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군사를 쓴 지 3년이 되니 물력이 탕진되고 농·공·상·고(農工商賈)의 백성이 거의 모두 죽고 없어졌는데 경상우도가 더욱 심합니다. 요행히 살아 있는 자도 생활할 도리가 없어서 아무리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더라도 적병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대군(大軍)이 지금 그곳에 있으므로 양식을 운반하느라 백성들이 많은 폐해를 받습니다. 또 토적(土賊)이 크게 성한데 반드시 다 간악한 무리는 아닙니다. 만약 양식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이내 이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키면 정병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경상도의 사람만 가져도 적을 칠 수 있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적당하게 수를 감하여 그들의 식량을 대신 받아서 그 지방 군사를 모집하면 굶주린 백성이 군사의 대열에 편입될 뿐 아니라 도적들도 반드시 모집에 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경이 내려가서 원수(元帥)와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이때의 급선무는 참으로 성교와 같이 농사에 힘쓰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두 가지 일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사는 평상시에 전혀 훈련을 시키지 않고서 전시에는 꼭 죽을 자리로 내보내니 어찌 무너져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千子文)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尙州)에는 궁수(弓手)가 3인뿐이었다 한다. 풍속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 또 신묘 연간에 조회오는 왜인이 연이어 2년을 오지 않자 영남사람들은 저들에게 자중지변(自中之變)이 있다 핑계하면서 적이 반드시 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깔보고서야 되겠는가. 백 번을 싸운 후에야 반드시 좋은 장수가 있는 것이니 경이 본도에 가서 장수의 재목이 있거든 찾아서 아뢰도록 하라. 중국은 비록 도적이나 오랑캐일지라도 다 등용하기 때문에 저 이평호(李平胡) 같은 사람도 도독(都督)이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장수는 항상 장수이고, 군졸로 있는 자는 항상 군졸로 있게 된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편비(褊裨) 중에 용력이 있어서 한 부대를 감당할 만한 자는 얻기가 어렵지 않으나, 대장의 경우는 필부(匹夫)의 용력만으로 구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더욱 얻기가 어렵고, 비록 있다 하더라도 알아내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대체로 편비는 다만 용기를 보아서 용감하게 잘 싸우는 자를 차차로 승진시키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공(功)을 논함이 진실하지 못하니 적의 머리를 벤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일찍이 고황제(高皇帝)281) 의 전기를 보니 전장에 나갔던 사람으로 부상을 입은 자는 꼭 상을 주었다 하니 이것은 본받을 만하다. 군인들 중에 부상을 입은 자는 이제라도 그 몸을 점검해서 별도로 포상을 하는 것이 옳다."

하니, 허성(許宬)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성(徐渻)의 장계를 보니 역시 이러한 소청이 있었는데, 비변사에서 회계하기를 ‘간혹 스스로 상처를 만드는 자도 있으니 이것으로 기준을 삼을 수 없다.’고 한 바 있습니다."

하고, 이상이 아뢰기를,

"병가의 일은 상벌이 엄격한 연후에 공을 이룰 수가 있는데 우리 나라는 대부분 허위가 많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의성(義城) 사람 중에 머리를 베어 온 공로로 과거에 오른 자가 20여 명인데 모두 전장에 나간 일이 없고 한 사람만 한 번 전장에 나갔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이같이 사사로운 정만 따르므로 사졸들이 해이해지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이 그 곳에 가거든 마땅히 허위를 금하고, 만약 공로가 있는데도 알려지지 않아 억울해 하는 자가 있으면 별도로 계문(啓聞)하여 논상(論賞)하라. 내가 듣기에는 우리 군사로서 전장에서 죽은 자가 있는데 돌아올 때 보면 이미 그 머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그런 폐단이 많습니다."

하고, 이상이 또 아뢰기를,

"외방의 일은 모두 수령에게 달려 있어서 참으로 적임자가 아니면 감사가 아무리 호령을 해도 반드시 폐기하고 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을 멀리 끌어댈 것 없이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 같은 사람을 경은 본받아야 한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이원익은 인심이 복종하고 호령도 신명(神明)같아서 저절로 어길 수 없게 되지만, 신이야 재기(才氣)가 부족하니 무슨 일을 이루겠습니까. 전장의 일은 급히 보고해야 하는데 장계의 전달이 늘 지체됩니다. 근자에 들으니, 유지(有旨)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도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는 군중의 긴급한 일은 원수가 종사관이나 군관을 보내 취품(取稟)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비변사는 마땅히 낭청을 도원수에게 보내고, 도원수는 종사관이나 군관을 보내서 직접 지시를 받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변방 장수의 처리가 잘못되면 실수가 적지만, 만약 조정에 아뢰어서 잘못 처리되면 적이 반드시 알게 되어 손해가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5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2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

  • [註 281]
    고황제(高皇帝)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다.

○庚申/上引見慶尙道觀察使洪履祥。 上曰: "如有欲言之事, 言之。" 履祥曰: "彼處之事, 甚爲悶迫, 決難堪任。 軍中節制之事, 自有元帥, 而體察使亦往, 小臣只當聽其節制, 而第聞糧餉甚難, 雖多般思量, 了無措辦之路。" 上曰: "備邊司, 何以指授?" 履祥曰: "備邊司言, 穀熟後, 賊有衝突之計, 宜淸野以待。 臣意則淸野亦不易。 近處必有山城, 乃可輸納, 而嶺南只有三嘉山城, 無他可守之地。 倉穀今方收糴, 而無可置處, 此實難矣。" 上曰: "聞諸將不睦, 必有臨機敗事之患。 卿宜調劑。 此是第一件事。 其二, 軍功失實, 虛僞甚多, 至斬我國人以納, 卿宜禁斷。 其中有功, 而賞不稱功者, 亦宜訪問而處置。 軍糧聚關, 必須力農, 然後可辦。 旣往已矣, 將來勸課, 使之力耕也。 且與此賊, 平野對陣, 則萬無得勝之理, 必須相勢據險, 以築山城。 且令淸野, 以使賊無所因糧, 此爲用兵奇策。 水軍, 殊不如前, 殘病太甚, 亦宜百分檢飭, 多給格軍。 本道有左、右水使, 不宜如彼退縮, 宜合三道兵勢, 相機進攻。 凡事着實行之。" 履祥曰: "用兵三載, 物力蕩竭, 農、工、商賈, 死亡殆盡, 而慶尙右道尤甚。 幸而生存者, 亦無生理, 雖有金城湯池, 不可禦敵, 而大軍方在其地, 轉輸糧餉, 民多受弊。 且土賊大熾, 不必皆奸(究)[宄]之徒, 若裒糧募聚, 因爲訓鍊, 則可爲精兵。 苟如此, 雖慶尙一道之人, 亦可以討賊也。 兩湖之軍, 斟酌減數, 受代糧, 以募土兵, 則不唯飢民, 得編行伍, 而盜賊亦必應募矣。" 上曰: "事難遙度。 卿下去, 與元帥議處。" 履祥曰: "此時急務, 誠如聖敎, 力農、鍊兵二者而已。 我國之兵, 平時專不訓鍊, 而驅於必死之地, 安得不潰散乎?" 上曰: "慶尙一道, 習俗之誤蓋久。 雖親兄弟, 若挾《千字》爲高談, 則上座而禮貌之; 持弓矢, 習武藝, 則下庭而賤惡之。 聞事變之前, 尙州射夫, 只有三人云。 習俗如此, 何以禦敵乎? 且, 辛卯年間, 朝連二年不來, 而嶺南之人, 諉之於自中之變, 以爲賊必不來。 如是玩侮可乎? 百戰之餘, 必有良將。 卿往本道, 有將才者, 訪問以啓。 中原, 則雖盜賊或㺚子皆用之, 如李平胡, 亦爲都督矣。 我國之人, 爲將帥者, 恒爲將帥; 在部伍, 則長在部伍。" 履祥曰: "褊裨中, 如有勇而可當一隊者, 則得之不難矣。 至於大將, 則不可以匹夫之勇求之, 尤難得也。 雖或有之, 知之亦難。 彼(編)〔褊〕 裨, 則但觀其勇敢力戰者, 次次陞遷, 可也。" 上曰: "我國之人, 論功不實, 斬級亦不可信也。 嘗見《高皇帝紀》, 赴戰人被傷者, 必賞之。 此可爲法。 軍人之被傷者, 今宜點閱其身, 別加褒賞也。" 曰: "頃見徐渻狀 啓, 亦有此請, 而備邊司回啓曰: ‘或有自作傷處者, 不可以此爲準。’ 云矣。" 履祥曰: "兵家事, 賞罰嚴明, 然後可以濟事, 而我國, 則類多虛僞。 臣嘗聞義城人, 有以斬級登第者卄餘人, 而皆未曾赴戰, 而只一人一至戰所云矣。" 上曰: "此將帥之過也。 如是循私, 故士卒解體矣。" 上曰卿往彼, 宜禁虛僞, 如有功而抱悶鬱抑者, 別爲啓聞論賞。 予聞我軍之死戰場者, 來時見之, 已失其頭云矣。" 履祥曰: "此弊滔滔矣。" 履祥曰: "外方之事, 都在守令, 苟非其人, 則監司雖有號令, 必廢閣不行矣。" 上曰: "古人不須遠引, 如平安監司李元翼, 卿宜取法。" 履祥曰: "李元翼, 人心旣服, 號令如神明, 自不可違越, 如臣則才氣不逮, 何事可成? 戰所之事, 所當急報, 而狀啓之傳, 每至稽滯。 近聞有旨齎去者, 爲土賊所殺云。 今後則軍中緊關事, 元帥宜遣從事官, 或軍官取稟可也。" 上曰: "此是予意。 備邊司宜送郞廳於元帥, 元帥宜送從事官、軍官, 親聽指揮, 可也。" 履祥曰: "邊臣處置之誤, 則所失猶小。 若取稟於朝廷而誤處, 則賊必知之, 所損多矣。"


  • 【태백산사고본】 32책 54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2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