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감사 이정암이 도적의 발생한 일과 그 대책을 아뢰다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치계(馳啓)하기를,
"도내에 도적이 일어나 간혹 수백 명씩 작당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나주(羅州)·남평(南平)·남원(南原)·광주(光州)·임실(任實)·전주(全州)·김제(金堤)·부안(扶安)·고부(古阜)·태인(泰仁)·흥덕(興德)·정읍(井邑)·고산(高山)·여산(礪山)·금산(錦山) 등의 지역이 더욱 심하여 대낮에도 사람을 협박하여 약탈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추포(追捕)되어 갇힌 자가 옥(獄)에 가득 찼고 형장(刑杖)을 받아 죽는 자가 뒤를 잇고 있는데도 도둑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이 도둑들은 전쟁이 일어난 3년 동안에 번거롭고 무거운 부역(賦役)으로 가업(家業)이 판탕되어 부모와 처자를 보존해 갈 방도가 없자 그만 양심을 상실하여 도적으로 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힘드는 부역을 늦춰주고 개과 천선할 길을 열어준다면 한 순간에 사나운 백성을 순진한 백성으로 전이(轉移)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군관(軍官) 신수팽(申壽彭)을 조포장(措捕將)으로 정하여 열읍(列邑)을 순행하면서 자신이 늙고 병들어 겁에 질린 나머지 군사로 자신을 옹위하기에 급급한 채,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많이 잡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민심이 시끄럽고 반란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적미(赤眉)와 황건(黃巾)의 변089) 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바야흐로 수령과 상의해서 각기 그 마을의 향병(鄕兵)을 결성하고 그 중에서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를 추대하여 영장(領將)으로 삼고 인리(隣里)와 약속하여 차차로 구제하도록 하되,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농사도 짓고 보초도 서게 하며, 만약 마음을 고쳐 개과 천선하는 자가 있으면 전범(前犯)의 죄과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榜)으로 효유하여 도적의 발생을 방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독부(督府)의 【유정(劉綎)임. 】 대군(大軍)이 남원(南原)으로 이주(移駐)해 있는데, 이들을 지대(支待)할 산료(散料) 등의 일에 있어서 조금도 다른 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남 좌·우도(左右道) 장사(將士)들의 식량도 전과 같이 독책하여 운송하므로 물력(物力)이 탕갈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세상으로도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이 오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영남 지방이 적에게 함몰되긴 했었지만, 가을에 심은 밀과 보리가 매우 잘 여물었고 심어 놓은 잡곡(雜穀)들도 모두 무성하게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체로 이 도(道)가 정역(征役)을 감면받음으로써 민력(民力)이 조금 펴졌고 남아 있는 백성들이 농사(農事)에 전력할 수 있었던 소치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옛날에 전쟁을 할 때에는 오디[桑椹]를 먹기도 하고 부들속[蒲嬴]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꼭 곡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에야 전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영남 우도에 유주(留駐)하고 있는 장사들은 본도(本道)에서 전과 같이 연속하여 궤향(饋餉)하더라도, 좌도는 그 도와 강원·충청도 등에서 편의한 대로 양식을 공급토록 한다면 본도의 민력이 일분이나마 펴질 것이며 따라서 도적을 지식시키는 계책이 된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에 복계(覆啓)하라고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이 일어난 지 3년 동안 번거롭고 무거운 부역 때문에 백성들이 모여 도적이 되었는데,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적을 지식시키는 계책은 오직 안집(安輯)과 무마(撫摩)에 있는 것이지 잡아 죽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니, 이정암(李廷馣)의 장계(狀啓) 내용이 합당하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 이일이 신수팽을 정송(定送)하여 옥석(玉石)을 분간하지 않고 많이 체포하는 것만을 힘쓰고 있다고 하니, 그 계책은 잘못된 것입니다. 괴수만을 잡아죽이고 나머지 무리는 돌려보내어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이일에게 이문(移文)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남 장사들의 양식은 중국군이 나온 뒤로는 현재 한 섬의 양식도 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도(右道)는 전라도에서 운반해 오고 좌도(左道)는 본도와 충청도·강원도에서 거두어 운반해다 먹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천리 밖의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도원수에게 이문하여 상량(商量)해서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71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註 089]적미(赤眉)와 황건(黃巾)의 변 : 적미는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났던 도적으로 자기들의 무리를 식별하기 위하여 눈썹을 빨간 색으로 물들였기 때문에 적미라고 이름하였다. 황건은 황건적을 말하는 것으로 후한(後漢) 말엽에 일어났던 도적인데 장각(張角)의 무리로서 역시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이름한 것임.
○壬辰/全羅監司李廷馣馳啓曰: "道內盜賊竊發, 或數百作倘。 羅州、南平、南原、光州、任實、全州、金堤、扶安、古阜、泰仁、興德、井邑、高山、礪山、錦山等地尤甚, 白晝攻刼, 略無畏忌。 追捕械繫, 累累滿獄, 杖斃相繼, 而接踵復起。 竊思此盜, 不過兵興三載, 賦役煩重, 蕩失家業, 父母、妻子, 不得相保, 喪其良心, 盜弄潢池中耳。 若寬其力役, 開其自新之路, 則龍蛇赤子, 只在一轉移間, 而巡邊使李鎰, 以軍官申壽彭, 定爲措捕將, 巡行列邑, 老病恇刦, 擁兵自護, 不分玉石, 多捕是務, 民心囂然, 思亂不已。 臣恐赤眉、黃巾之變, 復起於今日。 方與守令相議, 各其坊裏, 團結鄕兵, 推其中人望所屬者, 定爲領將, 約束隣里, 次次相救, 分兵一半, 且耕且戌, 如有革心自新者, 雖有前犯, 姑置勿論事, 張榜曉諭, 期於屛息, 而自今督府 【劉綎也。】 大軍, 移駐南原, 支待散料等事, 不藉一毫於他道, 嶺南左右道將士糧餉, 亦依前督運, 非徒物力蕩竭, 勢所難支。 臣聞往來人言, 嶺南雖經陷沒, 秋耕兩麥, 甚爲成實, 付種雜穀, 亦皆茂盛云。 蓋因此道, 旣減征役, 民力稍寬, 保存餘民, 專於農事所致也。 古之行師, 或食桑椹, 或給蒲嬴, 豈必待穀腹然後赴戰哉? 臣之愚(臣)〔見〕 , 嶺南右道留駐將士, 則自本道, 依前連續饋餉, 左道則其道及江原、忠淸等地, 隨便繼糧, 小寬本道一分之民力, 兼爲弭盜之策。" 上令備邊司覆啓, 啓曰: "兵興三載, 賦役煩重, 民聚爲盜, 乃其理也。 止盜之策, 唯在於安輯撫摩, 而不在芟夷勦除。 李廷馣狀啓之意, 可謂得矣。 李鎰定送申壽彭, 不分玉石, 多捕是務, 其爲計謬矣。 殲厥渠魁, 散遣餘黨, 使之復業之意, 移文于李鎰爲當, 而嶺南糧餉, 天兵出來之後, 時無一甔之輸。 但右道則全羅搬運, 左道則本道及忠淸、江原道, 收拾運饋, 似爲便當, 而千里之外, 難以遙度, 移文于都元帥, 使之商量啓聞。"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30책 5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71면
- 【분류】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