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에서 군현을 합병하는 데 5가지 폐단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자 다시 잘 헤아리라고 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군현(郡縣)을 합병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폐단이 있습니다. 민정(民情)은 오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인데 하루아침에 오랜 것을 폐하여 다른 곳에 예속시키면 반드시 섭섭한 마음을 품는 것이니, 이것이 그 불가한 첫번째 이유이고, 당초 군치(郡治)를 설립할 때에 반드시 사경(四境)의 거리를 참작하여 백성들이 출입하는 데에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운 폐단이 없는 중앙에 정하였는데 지금 다른 고을에다 옮겨 예속시킨다면 새로 예속된 고을에 높은 산이나 절벽이 있을 수도 있어 70∼80리를 가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한 번 왕래하자면 반드시 밤을 지새워야 하니, 이것이 민정이 불편하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본읍(本邑)의 인리(人吏)들이 새로 예속된 고을 사람들을 마구 부리어 요역(徭役)이 본읍에 비하여 10배나 되어 그 폐단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경내(境內)에 출참(出站)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길이 너무 멀어서 관속(官屬)들이 뛰어다니며 공억(供億)하느라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예속당한 고을의 인리나 관속들이 반드시 식량을 싸가지고 가서 입번(入番)해야 되고 그 해가 다가도록 다른 곳에 우거하고 있어야 하는 탓으로 농사를 돌볼 수가 없어 먼저 이산(離散)하게 되는 것이 다섯 번째 폐단입니다.
조종조 때에도 합병시킬 뜻이 있어 과천(果川)을 금천(衿川)에 예속시키려 하자 과천 백성들이 원치 않았고, 금천을 과천에 예속시키려 하자 금천 백성들이 원망하였으므로 끝내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의 시에,
과천에 예속시키자니 금천 백성이 원망하고
금천에 예속시키자니 과천 관리가 걱정하네
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 네 고을을 합병한 뒤로 용담(龍潭) 등처의 백성들이 식량을 싸가지고와서 정소(呈訴)하고 있으니 민정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보니 매우 주밀하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으니 불가불 말하여 참고에 대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허다한 곡절은 내가 알 수 없으나 대강(大綱)만을 말하자면 우리 나라처럼 작은 나라에서 군현을 설치한 것이 3백 여곳에 이르므로 백성은 작은데 관리는 많으니, 이것은 이른바 양은 열 마리인데 목동이 아홉인 격이다. 그리고 3백이나 되는 군현에 어떻게 모두 어진 수재(守宰)를 가려 제수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의 수령은 그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고 개체(改遞)가 일정치 않은 형편이어서 백성들은 영송(迎送)과 침학에 시달릴 뿐 조정에서 베푸는 덕택을 못 보았다. 옛날 제(齊)나라는 대국이었는데도 그 성이 70개에 불과하였다. 중국에는 도리(道里)가 매우 먼데도 이 때문에 허다한 폐단이 있다는 말을 못들었다. 내가 평소부터 군현을 합병하여 그 숫자를 2백으로 줄이더라도 부족한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3백이나 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만일 경장(更張)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일을 먼저 시행해야 될 것이므로 이제 계사를 인하여 굳이 이르는 것이다. 전에 듣건대,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군현이 이렇게 많은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고 하니, 다시 참작하여 상세히 헤아려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4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02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吏曹啓曰: "合倂郡縣, 有五弊。 民情戀舊, 一朝廢其舊而屬於他, 必有感恨之懷。 其不可一也。 當初設立郡治, 必以四境道里遠近, 酌定居中, 民之出入, 無偏近偏遠之處, 今移屬於他縣, 則其新屬之縣, 或有高山、絶壑, 動經七八十里, 一有往來, 必至經夜, 民情不便二也。 本邑人吏, 虐使新屬之邑, 凡有徭役, 十倍於本邑, 不堪其弊三也。 境內若有出站之處, 則里數絶遠, 官屬奔走供頓, 不堪其苦四也。 所屬之邑, 人吏官屬, 必裹糧立番, 終年客寓他處, 而不得顧其耕農, 爲先離散, 其弊五也。 祖宗時, 亦嘗有合倂之意, 欲屬果川於衿川, 果民不願, 欲屬衿川於果川, 衿民怨苦, 終不可施。 其時之人有詩曰 ‘屬果 衿民怨, 移衿 果吏愁。’ 今此合倂四邑之後, 龍潭等處之民, 贏糧呈訴, 民情所在, 可見矣。" 答曰: "觀此啓, 辭極爲周密。 然予意則有不然者。 不可不言之, 以備參量。 所謂許多曲折, 則予不能知之, 只以大綱言之, 我國以如許小國, 設置郡縣, 至於三百有餘, 民少而吏多。 是所謂十羊九牧。 三百郡縣, 安能一一得賢守宰乎? 況我國守令, 不能久於其任, 遞改無常, 民困於迎送侵虐, 不見朝廷德澤。 昔齊大國也, 其城不過七十, 中原道里甚遠, 未聞因此而有所謂許多之弊。 予平日妄以爲, 合郡邑, 數止二百, 非不足。 安有三百爲哉? 如欲更張, 必先施此擧。 今因啓辭, 敢言之。 前聞, 或者曰: ‘我郡縣如是之多, 蓋有所爲而爲’ 云。 更爲參量詳度施行。"
- 【태백산사고본】 28책 4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02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