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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히다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전일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批答)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겨울이면 방안에 틀어박히고, 봄·가을에도 정원(庭苑)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난리를 만나고부터는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이런 기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치 밖의 일이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하여도 가할 듯하다. 전에도 민박(悶迫)한 뜻을 가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의(朝議)에 저지당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인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병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서(江西)에 머물면서부터는 몇 달을 먹지 못하였고, 지금은 오직 죽만을 마실 뿐이다. 밤이면 병풍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낮이면 정신이 혼란(昏亂)하여 멍청이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 광병(狂病)·목병(目病)·비병(痺病)·습병(濕病)·풍병(風病)·한병(寒病) 등 온갖 병이 함께 일어나서 이 한 몸을 공격하니, 한 줌의 원기(元氣)로써 어찌 그 병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광병으로 말하면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 세우기도 하니,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 목병으로 말하면 두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모든 계사(啓辭)의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지 않아 소경이 될 것인데, 예로부터 어디에 소경의 임금이 있었던가. 비병으로 말하면 몸의 반쪽이 허약한 데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은 뒤로는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오른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밤이면 쑤시고 아픈데 손으로 만져도 감각이 없어 마치 마른 나무 토막 같으니, 예로부터 어디에 한쪽 수족만 가진 임금이 있었던가.

이 밖에 고질이 된 더러운 병들은 일일이 들어 말할 수도 없다. 가을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도 갖옷을 껴입고 있으니 쇠약하여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형세가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러한데도 체면을 무릅쓰고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한 사람은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바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흉적이 이미 물러갔고 옛 강토(疆土)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世子)가 장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8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備忘記曰: "予自少多病, 半生以藥餌爲命, 此藥房諸人之所共知。 前日玉堂之批, 自言無意人世, 益可想矣, 今不須更言。 冬月則閉蟄一室, 至於春秋, 或未嘗窺苑, 自逢亂離, 千辛萬艱。 將此氣力, 至今不死, 誠理外之事, 而雖謂之天道無知可也。 前將悶迫之意, 籲祈非一, 而非但見逼於朝議, 讎賊未討, 義不可言病。 逮在江西, 不食數月, 今則唯啜粥飮。 夜則倚屛達曙, 晝則昏瞶無知。 其中狂病、目病、痺病、濕病、風病、寒病, 萬病俱作, 環一身而攻之, 以一握元氣, 寧有可堪之理? 以言其狂病, 則有時或歌、或哭, 叫呼奔突, 水火且不避, 見而泫然垂淚者有之, 見而愕然竪髮者有之。 自古安有狂病之君乎? 以言其目病, 則兩目翳盲, 不能辨物, 凡啓辭之字, 多不解見。 其成瞎人, 不日可待。 自古安有瞎目之君乎? 以言其痺病, 則半身偏虛, 衝犯霧露, 其證轉甚, 右手右脚, 全不運用, 晝夜刺痛, 以手摩之, 亦不知之, 恰似枯木。 自古安有一手一足之君乎? 其他痼病陋疾, 不可枚擧。 秋節未深, 重裘已襲, 萎薾奄奄之勢, 若不竢終日。 如此而冒作君人, 曾前古之所未有, 萬萬無此理。 今兇賊已退, 舊疆已復, 予志已決, 如水必東。 世子年長, 足以撥亂致治之主, 禪位諸事, 斯速擧行。"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8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