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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41권, 선조 26년 8월 2일 계미 4/7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황정욱을 삼성 추국하여 적진에서 있었던 일을 공초받다

국역

삼성(三省)이 모여 황정욱(黃廷彧)을 추국하였다. 위관(委官)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급제(及第) 황정욱이 공초(供招) 【*】 하였습니다. 그가 승복(承服)을 하지 않으니 형추(刑推)하여 진실을 캐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형추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황정욱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제가 당초 승여(乘轝)가 성(城)을 떠나실 적에 황급히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한 뒤 들어가 알현(謁見)하였더니, 왕자(王子) 보호의 임무를 주시고 이어 방백(方伯)들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소호(召號)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한 몸에 두 가지 임무를 겸하여 받았으니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오래 머물러 있을 형세가 아니어서 곧 철원부(鐵原府)에 도착하여 양호(兩湖)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였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대적(大賊)은 이미 포천(抱川)의 길로 나왔습니다. 곧 왕자를 모시고 회양부(淮陽府)로 피란하였으나 적의 세력이 점점 가까와오므로 부득이 추지령(楸池嶺)을 넘어 통천(通川)에 도착하니, 또 수많은 적선(賊船)이 동해(東海)로 오고 있다는 비보(飛報)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안변(安邊)으로 들어가니 적이 이미 영하(嶺下)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할 즈음에 대가(大駕)와 중전(中殿)께서 이 도(道)로 옮겨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신자(臣子)의 도리상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기성(箕城)347) 이 함락당하고 대가는 멀리 용만(龍灣)348) 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부자(父子)가 함께 통곡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넋이 다 빠졌습니다. 이에 북도(北道)의 민심이 이미 배반한 줄도 모르고 다만 깊이 들어가면 혹시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서 회령(會寧)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왕자가 적에게 잡히는 환란을 초래하였으니 왕자를 잘 보호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호의 임무는 일에 모두 번잡스러운 것이고, 보호의 임무는 심장(深莊)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어서 두 가지 일이 서로 모순되어 겸전하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화환(禍患)의 빌미를 누구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민(叛民)이 왕자를 묶어 적에게 넘겨주자 적은 왕자를 얻고는 기화(奇貨)로 여겨 강화(講和)를 하고서야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어린 왕자가 죄없이 죽게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왜인의 진정을 계달(啓達)하자니 매우 애긍(哀矜)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배행(陪行)한 자로서 저들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계달하지 않는다면 잔인무상(殘忍無狀)한 사람이 될 뿐더러 보호하는 뜻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적정(賊情)349) 을 인하여 밀장(密狀)를 써서 보냈으니, 이는 의리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졸간에 쓴 것이라서 혹시 그 사이에 땅을 끊어주라는 말이 있었는지를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렴풋이 기억되기로는, 쪼개어 노끈으로 만들어 어지럽게 쓴 글을 봉과(封裹)한 것과 그 밀서에, 거짓으로 화친을 허락하고서 서서히 도모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적중(賊中)에서 치장(馳狀)하는 것은 평상시에 여러 관원이 둘러 앉아 함께 의논하여 증감(增減)하고 필삭(筆削)해서 말을 가려쓰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 및 김귀영(金貴榮)·이영(李瑛)·한극함(韓克諴)천식(賤息)350) 황혁(黃赫)이 각기 다른 방에 갇혀 있어 서로 통할 수가 없었고, 또 그때 안변(安邊) 사람이 문서(文書)를 가지고 가다가 잡혀 와서 50여 명이 모두 도살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틈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기초(起草)하면 정서(正書)할 겨를도 없이 그 초본을 황급히 올려보냈기 때문에 조리가 없고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 만약 그 글을 조사하여 죄를 주기로 한다면 죽어야 될 자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 위장(僞狀)은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은밀히 당부하여 수화(水火) 속에 던져버리고 밀장(密狀)만을 행재소(行在所)에 전달하라고 하였는데, 이홍업(李弘業)·이진충(李盡忠)이 잘못 전달한 것은 모두 위장이며, 이혜(李蕙)만이 진·위(眞僞) 두 서장을 다 가지고 갔으나 밀장만을 올렸고, 김귀영(金貴榮)은 위장만을 가지고 갔으나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강화(講和)의 일을 비록 거짓으로 허락하기는 하였지만 저의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어려울 듯하여 천식(賤息) 혁(赫)과 모의하기를 ‘할지(割地)에 대한 일은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로서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고서, 곧 장문(長文)의 글을 만들어 한극함(韓克諴)의 군관(軍官) 이장배(李長培)에게 정서(正書)시키고, 또 언서(諺書)로 번역하여 통사(通事) 함정호(咸廷虎)로 하여금 적중에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그 글의 대략은 ‘제후(諸侯)의 토지는 천자(天子)에게서 받은 것이니 사사로이 끊어서 남에게 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이후로 역대의 황조(皇朝)가 모두 우리를 내복(內服)으로 보았다. 한(漢)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을 설치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부여군(扶餘郡)을 증설(增設)하였으며, 대명(大明)에 이르러서는 팔도의 군현(郡縣)을 모두 요동(遼東)에 예속시켜 의관과 문물을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고 우리 국왕(國王)에게 어보(御寶)를 맡겨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가령 표류한 중국 사람을 솔해(率解)하게 되면 천자가 지방관(地方官)에게 상을 내리듯이 우리 국왕에게 상을 내렸으니 실제로는 중국 땅을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사가 나와서 방어(防禦)하는 것도 대개 이 때문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적들이 ‘천자에게 조공(朝貢)하는 자라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그럴 듯하다.’고 하여 이후로는 강화하기를 고대하면서도 땅을 끊어 달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지난 1월 18일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소장(小將)과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나라 사람 심이(沈怡)를 보내어 천식 에게 와서 묻기를 ‘조선의 땅을 천자가 끊어주려 하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답하기를 ‘조선과 중국은 집안의 부자(父子)와 같은 사이인데 어찌 땅을 떼어줄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소장이 달려가서 청정에게 이것을 보고하고, 다시 돌아와서 신에게 이것을 묻기에 신이 ‘너희 나라가 아무 까닭없이 침범해 왔는데 천자께서 어찌 고황제(高皇帝)께서 주신 땅을 끊어서 너희들에게 주겠는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심 유격(沈遊擊)이 강상(江上)을 왕래할 때에 심 유격에게 게첩(揭帖)을 써 보내어 피차 잘못 대답하는 일이 없게 하였는데, 심 유격이 적과 더불어 수작한 말을 우리 일행(一行)이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적이 끝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실로 신의 한마디 말이 그것을 예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바치고서 생환하기를 도모하였다는 말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만 뜻밖이어서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신은 행리(行李)를 반민(叛民)들에게 다 빼앗겨 가진 물건이라고는 다만 보내주신 백금(白金) 10냥(兩)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변(安邊)에서 풍중영(馮仲纓)이 거짓으로 화친을 할 때 왕자 탈출을 도모하기 위하여 백금을 수합(收合)해서 적장에게 주었는데, 이 말이 전파되어 신 혼자만이 백금을 주고서 애걸했다고 와전(訛傳)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왜적의 뜰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더욱 무리(無理)합니다. 저 개 돼지 같은 왜적이 만약 격노한다면 왕자라도 온전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긴 하였지만 평소에 그들이 왕자를 알현할 때면 갓을 벗고 맨발로 뜰 밑에서 서서 나배(羅拜)351) 하였으므로 우리 일행들도 인국(隣國)352) 의 대부를 만나면 약간 공경하여 대하였을 뿐, 적중에서 이미 나왔거나 아직 나오지 못했거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지 않아 왕자께서 나오게 되면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 조금도 숨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과 김귀영은 적들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는데, 어찌 신 홀로 무릎을 꿇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만 무리한 말입니다. 땅을 베어 준다고 했다는 것과 뇌물을 바쳤다는 것과 무릎을 꿇었다는 일에 대해서는 함정호(咸廷虎)·이장배(李長培)·심이(沈怡)조인징(趙仁徵)·김운(金雲)·기언인(奇彦仁)·김천(金闡) 등을 추문(推問)하시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臣)자를 쓰지 않은 이유는 이러합니다. 저 적들이 신자를 쓰는 데 피차를 가리지 않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함부로 쓰기 때문에 평소 진신(縉紳) 사이에서는 괴이하게 생각하며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있는 사람이 쓸데없는 위장(僞狀) 속에 이 신자를 썼다가 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 문서(文書)의 격식(格式)을 알게 한다면 뜻밖에 따르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없지 않을 것이기에 전후의 위장에 모두 신자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 위장의 경우 어렴풋이 기억되는데, 신자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행의 작위(爵位)를 모두 쓰지 않았으며, 작위를 쓴 경우에는 그 사람의 성(姓)자를 쓰지 않았고, 신의 자식의 이름도 평소 항상 쓰던 자획(子劃)과 달리 썼으니, 본문(本文)이 올라오면 삼척동자라도 한눈에 그것이 위장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장을 등서(謄書)하면서 먼저 모호하여 밝히기 어려운 말로써 멀리에서 그 실정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단정하여 갑자기 신인이 공분하는 극악(極惡)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누가 그 정위(情僞)를 따져 시비를 분변하겠습니까. 천심(天心)이 진노하고 인언(人言)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진충이 위장을 받아가지고 갈 때 두 왕자와 이영(李瑛)·황혁(黃赫) 등은 남대문(南大門) 밖에 있었고 저는 장흥고동(長興庫洞)에 있었습니다. 그 위장에 관백 전하(關白殿下)라고 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해동기(海東記)》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을 일명 관백이라 한다.’ 하였고, 통신사(通信使)의 문서 안에도 대부분 관백 전하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국왕과 관백이 일인 이명(一人二名)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이 포로가 된 뒤에 적들이 관백을 호칭하여 사마(司馬)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평행장(平行長)·청정(淸正) 등 모든 적장(賊將)도 모두 사마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른바 사마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영감(令監)이란 호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에서야 비로소 관백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를 알면서 일행이 전하라고 함부로 칭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들의 서시(書示)하는 문자(文字) 사이에 참람하게 관백 전하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저희들의 관례에 따라 쓰게 하였는데 이 역시 우리가 존칭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쓰고 있는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곧 《해동기》 및 통신사의 문서에 칭한 것 때문에 깜박하는 사이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사정에 대해서는 신은 따로 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대개 중국 장수가 와서 강화하는 것은 참으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왕자를 탈출(脫出)시킨 뒤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니 그 강화는 필경 왜적을 속이기 위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위장을 쓴 사람이나 붓을 들어서 명한 사람이 모두 아무 생각없이 하였습니다. 이때 이진충이 함께 그곳에 있었는데, 적의 위협과 공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왕자 및 영(瑛)·혁(赫) 등이 모두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진충을 추문하면 그 곡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적중에서 먼저 나온 것은 수길(秀吉)이 두 왕자 이하를 송환하라고 허락하였기 때문에 심 유격이 일시에 모두 데리고 돌아오려고 평행장(平行長)에게 간청하니, 평행장은 ‘관백이 비록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으나, 아직 분명한 문서가 없으니, 천사(天使)가 일본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격은 신의를 지키지 않고 약속을 배반하였다고 책망하면서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소서행장은 여전히 허락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격이 말하기를 ‘두 왕자는 천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방송하더라도 부인(夫人) 이하와 노병자(老病者)들은 먼저 방송하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부인이 먼저 떠나면 피차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병이 생길 것이니 먼저 보낼 수 없고, 노병자는 먼저 보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유격이 방송할 명단에 신을 끼워 넣은 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인이 방송된다 하더라도 배행관(陪行官)이 없으면 형편이 더욱 낭패스럽기 때문에 신까지 아울러 요청했던 것인데, 신만 홀로 먼저 나가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또 천식 이 왕자를 모시고 있는데 만약 방송을 허락받고도 그대로 적중(賊中)에 머문다면 이는 적중을 편안한 곳으로 여기는 것이니 어찌 인정(人情)에 가깝겠습니까. 더구나 왕자께서 나오실 날이 머지 않은 데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유격이 신을 거느리고 나온 것이니, 이는 곧 왕자가 머지 않아 나오게 될 조짐입니다. 신이 만약 왕자를 버리고 먼저 나오고자 했다면 안변(安邊)에 있을 때 적장이 왕자를 모시고 함흥(咸興)으로 들어갈 즈음 그 기회를 틈타 부사(府使) 최전(崔錪)이 인마(人馬)를 보내어 신을 탈출시키려 하였는데 그때는 탈출하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금구(金軀)353) 를 버려 두고 먼저 탈출하는 것이 마음에 매우 미안하여 거절하고 인마를 돌려보냈습니다. 최전에게 물어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왕자를 모시고 적중에 잡혀 있었으나 어찌 탈출할 방법이 없었겠으며, 따르기 어려운 적도(賊徒)의 요청을 만났으나 어찌 잘 대처할 계책이 없었겠습니까. 옛날에 소무(蘇武)흉노(凶奴)에 잡혀 있을 적에 그 부하 상혜(常惠)가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기러기를 쏘아 잡았는데, 그 다리에 소무가 모택(某澤) 가운데 있다는 백서(帛書)가 매여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상혜의 이 거짓말이 위로 천자를 범하였으나, 당세에 죄를 받지 않고 도리어 충절(忠節)로 청사(靑史)에 이름이 전해졌습니다. 우리 일행도 왕자를 탈출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임기응변의 속임수로 위장(僞狀)을 만들었으나, 그 진정으로 말하면 왕자를 보호하려는 어리석은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땅을 떼어 준다고 한 것도 응변(應變)하는 계획일 뿐이었습니다. 잘한 일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은 채 잘못한 일만을 들추어 내어 대죄(大罪)로 얽어넣으려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전후에 적에게 잡혀 왕자를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왕자께서 나오시면 일행들의 시비·정위(情僞)를 조정에서 자연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이 일은 신 혼자서 책임질 성질도 아닌데 먼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중죄(重罪)를 덮어쓰게 되었으니 더욱 애매합니다. 신은 양조(兩朝)354) 의 구신(舊臣)으로 휴척(休戚)을 함께하였으며 왕실(王室)과 혼인까지 하였으므로 은분(恩分)이 지극히 중하니, 신의 순국(徇國)의 충성은 진정 보통 신하들의 유가 아닌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급한 사이에 몸을 보전하고자 하여 평소에 지키던 바를 잃었다면 다시 무슨 면목으로 곧장 행재소(行在所)로 와서 삼경(三京)355) 이 탕패(蕩敗)되고 이릉(二陵)356) 이 참변을 당한 뒤에 군부(君父)를 뵙고자 하였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한다면 금수(禽獸)도 그런 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유무를 임금께서 굽어살피시어 그때에 함께 있었던 여러 사람과 위장(僞狀)의 본문(本文)을 모두 가져다 빙문(憑問)하여 만일 일호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비록 중전(重典)을 받고 죽더라도 달게 여기겠으니, 상고하여 분간하소서."】

  • [註 347] 기성(箕城) : 평양.
  • [註 348] 용만(龍灣) : 의주(義州).
  • [註 349] 적정(賊情) : 적의 요구 조건.
  • [註 350] 천식(賤息) : 자기 자식의 겸칭.
  • [註 351] 나배(羅拜) : 여럿이 늘어서서 절하는 것.
  • [註 352] 인국(隣國) : 일본을 지칭.
  • [註 353] 금구(金軀) : 왕자.
  • [註 354] 양조(兩朝) : 명종(明宗)·선조(宣祖).
  • [註 355] 삼경(三京) : 서울·개성·평양.
  • [註 356] 이릉(二陵) : 선릉(宣陵)·정릉(靖陵).

원문

○會三省, 推鞫黃廷彧。 委官尹斗壽啓曰: "及第黃廷彧供稱: ‘廷彧, 當初乘輿出城之時, 蒼黃扈駕, 旣到東坡館入謁, 則命授保護王子之任, 仍與方伯, 召號勤王。 一身兼受兩任, 自知不堪, 而勢不可久留, 卽到鐵原府, 移檄兩湖, 糾合義旅, 略無應募之人, 而大賊已出抱川之路。 乃奉王子, 避亂于淮陽府, 賊勢漸迫, 不得已踰楸池嶺通川。 又有飛報, 賊船從東海來者, 不知其數云。 乃又移入安邊地, 則賊已到嶺下。 自此欲往行在之際, 聞大駕、中殿移向此道, 臣子之義, 不可捨去。 繼聞箕城失守, 大駕遠出龍灣。 父子相與痛哭, 莫知所之, 魂魄上天。 乃不知北道民心之已叛, 但念深入之或可免, 轉入會寧, 終致金(軀)陷賊之患。 其不能保護之罪, 萬死無惜。 但號召之任, 事皆煩鬧, 保護之任, 宜務深莊, 而兩事矛盾, 勢難兼全, 禍患之祟, 亦難可免矣。 叛民縳給王子, 賊得之以爲奇貨, 欲講和而放送之矣。 (身)〔臣〕 恐其年少王子, 無辜而就死, 欲啓達其情,極爲哀矜。 陪行者, 若舍置其言, 而不爲之啓, 則是乃殘忍無狀之人, 亦有乖於保護之義。 因其賊情, 而成送密狀, 義所當然。 倉卒所書, 未知其間, 或有割地之言, 全未省記。 雖或有之, 依俙省得, 其裁割爲繩, 亂書封裹者, 如歸結之以僞許其和, 徐爲之圖耳。 大抵賊中馳狀, 非如常時諸官, 圓僉同議, 增減筆削, 采擇其語而書之。 臣及金貴榮李瑛韓克誠、賤息, 各囚異房, 不得相通。 其時安邊之人, 有見捉文書, 而辭連五十餘人, 盡被屠殺, 故艱得其隙。 或一人起草, 則不暇正書, 以其草慌忙上送, 多有無倫次不成摸樣者。 若按其書而求其罪, 則其可死者非一二。 其僞狀, 則潛付所遣之人, 卽投諸水火, 只以密狀, 達于行在云云。 如李弘業李盡忠之悞達者, 皆是僞狀; 李蕙, 只持其眞、僞二狀, 而只納密狀; 金貴榮, 只持僞狀而不納。 臣自念, 講和之事, 雖是僞許, 恐難得情, 乃與賤息謀曰: 「割地一事, 在擄者亦有可拒之術。」 乃作長書, 令韓克諴、軍官李長培正書, 又譯以諺書, 令通事咸廷虎, 宣言於賊中。 其書大槪, 「諸侯土地, 受之於天子。 非但不可私割, 我國自箕子受封之後, 歷代皆視爲內服。 時置四郡, 增置扶餘郡, 至于大明, 以八道郡縣, 皆隷于遼東。 衣冠文物, 一從制, 委國王御寶以治事。 如有率解中國漂流之民, 則天子頒賞于地方官, 其實中國之地, 使我國治之。 今此天兵之來禦者, 蓋以此也。」 諸賊曰: 「若朝貢於天子者, 不能自擅, 其言似然矣。」 此後, 諸賊苦望和事, 而絶口不言割地。 去正月十八日, 淸正使小將及在擄沈怡, 來問於賤息曰: 「朝鮮土地, 天子欲割與, 則此可爲乎?」 答曰: 「朝鮮之於中國, 如家人、父子之親。 豈有割與之理? 決無是也。」 小將以此走報, 還以此問于臣, 答曰, 「汝國雖無故加兵, 天子豈有割高皇帝所錫之地以與乎?」 此後不復再言。 及沈遊擊往來江上之時, 書送揭帖, 俾無彼此失對, 雖其與賊酬酢之語, 一行之人, 邈然不得聞知。 賊竟不更擧此言者, 實由於臣之一言, 有以預防之也。 至若納貨圖還之言, 不知出自何人, 千萬慮外, 省記不得, 而臣行李盡爲叛民所奪, 無有所齎之物, 只有賜送白金十兩。 安邊 馮仲纓僞和之時, 以圖出王子爲要, 收合白金, 給與賊將。 無乃此言流播, 以爲臣獨給乞哀悞傳乎? 若屈膝虜庭之言, 尤爲無理。 彼犬羊之賊, 若暴怒之極, 則雖王子, 亦有難全之患。 常時謁見王子之時, 則皆免冠徒跣, 羅拜庭下, 一行之人, 待隣國大夫, 稍加敬待, 不論多少, 已出、未出之人, 皆無此事。 王子不久出來, 自當知之。 衆目俱在, 不可少隱矣。 況臣及金貴榮, 則賊以爲老病, 一不見面。 臣獨爲屈膝, 千萬無理。 割地納貨屈膝事, 咸廷虎李長培沈怡趙仁徵金雲奇彦仁金闡等推問, 則昭然可知。 不書臣字, 則彼賊使用臣字, 不問彼此, 略無嫌焉, 常時縉紳之間, 莫不怪笑。 在擄之人, 乃用此字於不用僞狀之中, 使賊知我國文書格式, 則不無意外難從之患, 故前後僞狀, 皆不書臣字。 此番僞狀, 則依俙想得, 非但不書臣字, 一行皆削爵, 而書爵不書姓字; 息名, 亦異於常時恒用之畫。 若以本文上送, 則雖三尺童子, 一見可知其僞爲, 而乃謄書其狀, 先以疑似難明之言, 斷其不可遙度之情, 驟達於神人共憤之極, 當此之時, 孰有舒究其情僞, 分卞其是非哉? 天心震怒, 人言之紛紛, 勢所宜然。 李盡忠受去僞狀之時,兩王子及等, 在南大門外矣, 身則在長興庫洞。 其書關白殿下者, 未知其由, 到今思之, 《海東記》, 日本國王, 一名關白云, 至於通信使文書內, 亦有多稱關白殿下, 故我國之人, 皆以爲國王關白, 乃是一人, 而有二名。 及臣被擄之後, 聞諸賊稱號關白爲司馬。 如平行長淸正等凡賊將, 亦皆稱司馬。 所謂司馬, 如我國令監之稱。 於是, 始知關白之爲臣, 則一行萬無妄稱之理。 自中書示文字間, 則僭稱關白殿下, 故令我亦依他書之, 此亦非我尊稱之也。 但依其自中所稱而已。 此等無乃爲《海東記》及通信使文書所謂, 而忘却之中, 乃有此失耶? 其曲折, 臣別處於門內, 故未知其事。 大抵以爲天將之來和, 非眞和也; 必僞許其和, 圖脫王子之後, 始爲擧事。 其和畢竟是出於詭僞, 故其僞狀書之者, 信筆着名者, 出於無心。 此時, 李盡忠同在其處, 不知賊有威迫恐脅之事, 兩王子及輩, 皆恇刼失措, 莫知所爲。 若推問李盡忠, 則可知其曲折矣。 身先出事, 則秀吉許還兩王子以下, 故沈遊擊欲一時偕還, 懇請于平行長, 行長言: 「關白, 雖令放送, 時未有的當之書。 待日本回來天使, 可同往也。」 遊擊責以失信背約, 寧殺我身, 行長猶不肯許。 遊擊曰: 「兩王子, 雖待回來天使放送, 夫人以下及老病者先送。」 云云。 行長曰: 「夫人先往, 則彼此必生憂戀之病。 老病之人, 可先放也。」 遊擊之竝及臣者, 非爲臣也, 夫人雖出, 若無陪行官, 則勢又狼狽, 故竝請之, 而獨許臣先出。 又有賤息, 陪侍王子。 若見放送, 而仍爲留在, 則是以賊中爲可安之地, 豈近人情乎? 況王子出來之日, 亦爲不遠者乎? 以此遊擊, 率與出來者, 乃王子將出之兆也。 臣若欲棄王子先出, 則在安邊時, 府使崔錪, 乘賊將陪王子入往咸興之際, 送人馬要令超出。 當此之時, 其出甚易, 而旣受保護之命, 棄金軀先出, 極爲未安於心, 拒而還送。 若問崔錪, 則可知虛實矣。 大抵陪王子陷在賊中, 豈無圖出之術, 遇賊徒難從之請, 豈無善處之策乎? 昔者蘇武之在凶奴也, 其屬及(常武)〔常惠〕 詭言: 「天子射上林, 得雁, 足有繫帛書, 言在大澤中。」 (常武)〔常惠〕 之詭言, 上侵天子, 乃不以此獲罪於當世, 反以忠節垂名於靑史。 一行之人, 雖以脫王子爲急, 權行詭道之僞狀, 其情不過保護之愚計。 至於割地之事, 亦是應變之微謀, 而好底事皆隱而不揚, 詭底事, 欲結以大罪。 如此則前後陷賊保護之人, 皆駢首就死, 豈不冤痛哉? 大抵王子出來, 則一行之人, 是非、情僞, 朝廷自當洞知。 非臣所獨當之事, 而以其先出之故, 誤蒙重罪, 尤極曖昧。 臣兩朝舊臣, 休戚是同, 至於托婚王家, 恩分極重, 區區徇國之忠, 固非凡臣之比。 死生危迫之際, 若欲全身, 而喪其平日所守, 則更何面目, 直詣行在, 欲見君父於三京蕩敗, 二陵慘變之後乎? 人而如此, 禽獸且不食其餘。 有罪、無罪, 天日照臨, 其時各人及僞狀本文, 皆取考憑問, 如有一毫之不實, 雖伏重典, 實所甘心, 相考分揀’ 云。 黃廷彧不爲承服, 刑推得情何如。" 答曰: "刑推不足惜, 然不忍殺之。 遠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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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41권, 선조 26년 8월 2일 계미 4/7 기사 /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황정욱을 삼성 추국하여 적진에서 있었던 일을 공초받다

국역

삼성(三省)이 모여 황정욱(黃廷彧)을 추국하였다. 위관(委官)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급제(及第) 황정욱이 공초(供招) 【*】 하였습니다. 그가 승복(承服)을 하지 않으니 형추(刑推)하여 진실을 캐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형추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황정욱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제가 당초 승여(乘轝)가 성(城)을 떠나실 적에 황급히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한 뒤 들어가 알현(謁見)하였더니, 왕자(王子) 보호의 임무를 주시고 이어 방백(方伯)들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소호(召號)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한 몸에 두 가지 임무를 겸하여 받았으니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오래 머물러 있을 형세가 아니어서 곧 철원부(鐵原府)에 도착하여 양호(兩湖)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였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대적(大賊)은 이미 포천(抱川)의 길로 나왔습니다. 곧 왕자를 모시고 회양부(淮陽府)로 피란하였으나 적의 세력이 점점 가까와오므로 부득이 추지령(楸池嶺)을 넘어 통천(通川)에 도착하니, 또 수많은 적선(賊船)이 동해(東海)로 오고 있다는 비보(飛報)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안변(安邊)으로 들어가니 적이 이미 영하(嶺下)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할 즈음에 대가(大駕)와 중전(中殿)께서 이 도(道)로 옮겨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신자(臣子)의 도리상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기성(箕城)347) 이 함락당하고 대가는 멀리 용만(龍灣)348) 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부자(父子)가 함께 통곡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넋이 다 빠졌습니다. 이에 북도(北道)의 민심이 이미 배반한 줄도 모르고 다만 깊이 들어가면 혹시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서 회령(會寧)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왕자가 적에게 잡히는 환란을 초래하였으니 왕자를 잘 보호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호의 임무는 일에 모두 번잡스러운 것이고, 보호의 임무는 심장(深莊)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어서 두 가지 일이 서로 모순되어 겸전하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화환(禍患)의 빌미를 누구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민(叛民)이 왕자를 묶어 적에게 넘겨주자 적은 왕자를 얻고는 기화(奇貨)로 여겨 강화(講和)를 하고서야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어린 왕자가 죄없이 죽게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왜인의 진정을 계달(啓達)하자니 매우 애긍(哀矜)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배행(陪行)한 자로서 저들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계달하지 않는다면 잔인무상(殘忍無狀)한 사람이 될 뿐더러 보호하는 뜻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적정(賊情)349) 을 인하여 밀장(密狀)를 써서 보냈으니, 이는 의리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졸간에 쓴 것이라서 혹시 그 사이에 땅을 끊어주라는 말이 있었는지를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렴풋이 기억되기로는, 쪼개어 노끈으로 만들어 어지럽게 쓴 글을 봉과(封裹)한 것과 그 밀서에, 거짓으로 화친을 허락하고서 서서히 도모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적중(賊中)에서 치장(馳狀)하는 것은 평상시에 여러 관원이 둘러 앉아 함께 의논하여 증감(增減)하고 필삭(筆削)해서 말을 가려쓰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 및 김귀영(金貴榮)·이영(李瑛)·한극함(韓克諴)천식(賤息)350) 황혁(黃赫)이 각기 다른 방에 갇혀 있어 서로 통할 수가 없었고, 또 그때 안변(安邊) 사람이 문서(文書)를 가지고 가다가 잡혀 와서 50여 명이 모두 도살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틈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기초(起草)하면 정서(正書)할 겨를도 없이 그 초본을 황급히 올려보냈기 때문에 조리가 없고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 만약 그 글을 조사하여 죄를 주기로 한다면 죽어야 될 자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 위장(僞狀)은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은밀히 당부하여 수화(水火) 속에 던져버리고 밀장(密狀)만을 행재소(行在所)에 전달하라고 하였는데, 이홍업(李弘業)·이진충(李盡忠)이 잘못 전달한 것은 모두 위장이며, 이혜(李蕙)만이 진·위(眞僞) 두 서장을 다 가지고 갔으나 밀장만을 올렸고, 김귀영(金貴榮)은 위장만을 가지고 갔으나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강화(講和)의 일을 비록 거짓으로 허락하기는 하였지만 저의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어려울 듯하여 천식(賤息) 혁(赫)과 모의하기를 ‘할지(割地)에 대한 일은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로서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고서, 곧 장문(長文)의 글을 만들어 한극함(韓克諴)의 군관(軍官) 이장배(李長培)에게 정서(正書)시키고, 또 언서(諺書)로 번역하여 통사(通事) 함정호(咸廷虎)로 하여금 적중에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그 글의 대략은 ‘제후(諸侯)의 토지는 천자(天子)에게서 받은 것이니 사사로이 끊어서 남에게 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이후로 역대의 황조(皇朝)가 모두 우리를 내복(內服)으로 보았다. 한(漢)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을 설치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부여군(扶餘郡)을 증설(增設)하였으며, 대명(大明)에 이르러서는 팔도의 군현(郡縣)을 모두 요동(遼東)에 예속시켜 의관과 문물을 한결같이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고 우리 국왕(國王)에게 어보(御寶)를 맡겨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가령 표류한 중국 사람을 솔해(率解)하게 되면 천자가 지방관(地方官)에게 상을 내리듯이 우리 국왕에게 상을 내렸으니 실제로는 중국 땅을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번에 중국 군사가 나와서 방어(防禦)하는 것도 대개 이 때문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적들이 ‘천자에게 조공(朝貢)하는 자라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그럴 듯하다.’고 하여 이후로는 강화하기를 고대하면서도 땅을 끊어 달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지난 1월 18일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소장(小將)과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나라 사람 심이(沈怡)를 보내어 천식 에게 와서 묻기를 ‘조선의 땅을 천자가 끊어주려 하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답하기를 ‘조선과 중국은 집안의 부자(父子)와 같은 사이인데 어찌 땅을 떼어줄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소장이 달려가서 청정에게 이것을 보고하고, 다시 돌아와서 신에게 이것을 묻기에 신이 ‘너희 나라가 아무 까닭없이 침범해 왔는데 천자께서 어찌 고황제(高皇帝)께서 주신 땅을 끊어서 너희들에게 주겠는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심 유격(沈遊擊)이 강상(江上)을 왕래할 때에 심 유격에게 게첩(揭帖)을 써 보내어 피차 잘못 대답하는 일이 없게 하였는데, 심 유격이 적과 더불어 수작한 말을 우리 일행(一行)이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적이 끝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실로 신의 한마디 말이 그것을 예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바치고서 생환하기를 도모하였다는 말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만 뜻밖이어서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신은 행리(行李)를 반민(叛民)들에게 다 빼앗겨 가진 물건이라고는 다만 보내주신 백금(白金) 10냥(兩)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변(安邊)에서 풍중영(馮仲纓)이 거짓으로 화친을 할 때 왕자 탈출을 도모하기 위하여 백금을 수합(收合)해서 적장에게 주었는데, 이 말이 전파되어 신 혼자만이 백금을 주고서 애걸했다고 와전(訛傳)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왜적의 뜰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더욱 무리(無理)합니다. 저 개 돼지 같은 왜적이 만약 격노한다면 왕자라도 온전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긴 하였지만 평소에 그들이 왕자를 알현할 때면 갓을 벗고 맨발로 뜰 밑에서 서서 나배(羅拜)351) 하였으므로 우리 일행들도 인국(隣國)352) 의 대부를 만나면 약간 공경하여 대하였을 뿐, 적중에서 이미 나왔거나 아직 나오지 못했거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지 않아 왕자께서 나오게 되면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 조금도 숨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과 김귀영은 적들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는데, 어찌 신 홀로 무릎을 꿇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만 무리한 말입니다. 땅을 베어 준다고 했다는 것과 뇌물을 바쳤다는 것과 무릎을 꿇었다는 일에 대해서는 함정호(咸廷虎)·이장배(李長培)·심이(沈怡)조인징(趙仁徵)·김운(金雲)·기언인(奇彦仁)·김천(金闡) 등을 추문(推問)하시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臣)자를 쓰지 않은 이유는 이러합니다. 저 적들이 신자를 쓰는 데 피차를 가리지 않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함부로 쓰기 때문에 평소 진신(縉紳) 사이에서는 괴이하게 생각하며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있는 사람이 쓸데없는 위장(僞狀) 속에 이 신자를 썼다가 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 문서(文書)의 격식(格式)을 알게 한다면 뜻밖에 따르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없지 않을 것이기에 전후의 위장에 모두 신자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 위장의 경우 어렴풋이 기억되는데, 신자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행의 작위(爵位)를 모두 쓰지 않았으며, 작위를 쓴 경우에는 그 사람의 성(姓)자를 쓰지 않았고, 신의 자식의 이름도 평소 항상 쓰던 자획(子劃)과 달리 썼으니, 본문(本文)이 올라오면 삼척동자라도 한눈에 그것이 위장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장을 등서(謄書)하면서 먼저 모호하여 밝히기 어려운 말로써 멀리에서 그 실정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단정하여 갑자기 신인이 공분하는 극악(極惡)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누가 그 정위(情僞)를 따져 시비를 분변하겠습니까. 천심(天心)이 진노하고 인언(人言)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진충이 위장을 받아가지고 갈 때 두 왕자와 이영(李瑛)·황혁(黃赫) 등은 남대문(南大門) 밖에 있었고 저는 장흥고동(長興庫洞)에 있었습니다. 그 위장에 관백 전하(關白殿下)라고 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해동기(海東記)》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을 일명 관백이라 한다.’ 하였고, 통신사(通信使)의 문서 안에도 대부분 관백 전하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국왕과 관백이 일인 이명(一人二名)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이 포로가 된 뒤에 적들이 관백을 호칭하여 사마(司馬)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평행장(平行長)·청정(淸正) 등 모든 적장(賊將)도 모두 사마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른바 사마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영감(令監)이란 호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에서야 비로소 관백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를 알면서 일행이 전하라고 함부로 칭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들의 서시(書示)하는 문자(文字) 사이에 참람하게 관백 전하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저희들의 관례에 따라 쓰게 하였는데 이 역시 우리가 존칭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쓰고 있는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곧 《해동기》 및 통신사의 문서에 칭한 것 때문에 깜박하는 사이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사정에 대해서는 신은 따로 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대개 중국 장수가 와서 강화하는 것은 참으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왕자를 탈출(脫出)시킨 뒤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니 그 강화는 필경 왜적을 속이기 위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위장을 쓴 사람이나 붓을 들어서 명한 사람이 모두 아무 생각없이 하였습니다. 이때 이진충이 함께 그곳에 있었는데, 적의 위협과 공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왕자 및 영(瑛)·혁(赫) 등이 모두 겁을 먹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진충을 추문하면 그 곡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적중에서 먼저 나온 것은 수길(秀吉)이 두 왕자 이하를 송환하라고 허락하였기 때문에 심 유격이 일시에 모두 데리고 돌아오려고 평행장(平行長)에게 간청하니, 평행장은 ‘관백이 비록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으나, 아직 분명한 문서가 없으니, 천사(天使)가 일본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함께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격은 신의를 지키지 않고 약속을 배반하였다고 책망하면서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소서행장은 여전히 허락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격이 말하기를 ‘두 왕자는 천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방송하더라도 부인(夫人) 이하와 노병자(老病者)들은 먼저 방송하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부인이 먼저 떠나면 피차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병이 생길 것이니 먼저 보낼 수 없고, 노병자는 먼저 보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유격이 방송할 명단에 신을 끼워 넣은 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인이 방송된다 하더라도 배행관(陪行官)이 없으면 형편이 더욱 낭패스럽기 때문에 신까지 아울러 요청했던 것인데, 신만 홀로 먼저 나가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또 천식 이 왕자를 모시고 있는데 만약 방송을 허락받고도 그대로 적중(賊中)에 머문다면 이는 적중을 편안한 곳으로 여기는 것이니 어찌 인정(人情)에 가깝겠습니까. 더구나 왕자께서 나오실 날이 머지 않은 데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유격이 신을 거느리고 나온 것이니, 이는 곧 왕자가 머지 않아 나오게 될 조짐입니다. 신이 만약 왕자를 버리고 먼저 나오고자 했다면 안변(安邊)에 있을 때 적장이 왕자를 모시고 함흥(咸興)으로 들어갈 즈음 그 기회를 틈타 부사(府使) 최전(崔錪)이 인마(人馬)를 보내어 신을 탈출시키려 하였는데 그때는 탈출하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금구(金軀)353) 를 버려 두고 먼저 탈출하는 것이 마음에 매우 미안하여 거절하고 인마를 돌려보냈습니다. 최전에게 물어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왕자를 모시고 적중에 잡혀 있었으나 어찌 탈출할 방법이 없었겠으며, 따르기 어려운 적도(賊徒)의 요청을 만났으나 어찌 잘 대처할 계책이 없었겠습니까. 옛날에 소무(蘇武)흉노(凶奴)에 잡혀 있을 적에 그 부하 상혜(常惠)가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기러기를 쏘아 잡았는데, 그 다리에 소무가 모택(某澤) 가운데 있다는 백서(帛書)가 매여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상혜의 이 거짓말이 위로 천자를 범하였으나, 당세에 죄를 받지 않고 도리어 충절(忠節)로 청사(靑史)에 이름이 전해졌습니다. 우리 일행도 왕자를 탈출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임기응변의 속임수로 위장(僞狀)을 만들었으나, 그 진정으로 말하면 왕자를 보호하려는 어리석은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땅을 떼어 준다고 한 것도 응변(應變)하는 계획일 뿐이었습니다. 잘한 일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은 채 잘못한 일만을 들추어 내어 대죄(大罪)로 얽어넣으려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전후에 적에게 잡혀 왕자를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게 될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왕자께서 나오시면 일행들의 시비·정위(情僞)를 조정에서 자연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이 일은 신 혼자서 책임질 성질도 아닌데 먼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중죄(重罪)를 덮어쓰게 되었으니 더욱 애매합니다. 신은 양조(兩朝)354) 의 구신(舊臣)으로 휴척(休戚)을 함께하였으며 왕실(王室)과 혼인까지 하였으므로 은분(恩分)이 지극히 중하니, 신의 순국(徇國)의 충성은 진정 보통 신하들의 유가 아닌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급한 사이에 몸을 보전하고자 하여 평소에 지키던 바를 잃었다면 다시 무슨 면목으로 곧장 행재소(行在所)로 와서 삼경(三京)355) 이 탕패(蕩敗)되고 이릉(二陵)356) 이 참변을 당한 뒤에 군부(君父)를 뵙고자 하였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한다면 금수(禽獸)도 그런 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유무를 임금께서 굽어살피시어 그때에 함께 있었던 여러 사람과 위장(僞狀)의 본문(本文)을 모두 가져다 빙문(憑問)하여 만일 일호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비록 중전(重典)을 받고 죽더라도 달게 여기겠으니, 상고하여 분간하소서."】

  • [註 347] 기성(箕城) : 평양.
  • [註 348] 용만(龍灣) : 의주(義州).
  • [註 349] 적정(賊情) : 적의 요구 조건.
  • [註 350] 천식(賤息) : 자기 자식의 겸칭.
  • [註 351] 나배(羅拜) : 여럿이 늘어서서 절하는 것.
  • [註 352] 인국(隣國) : 일본을 지칭.
  • [註 353] 금구(金軀) : 왕자.
  • [註 354] 양조(兩朝) : 명종(明宗)·선조(宣祖).
  • [註 355] 삼경(三京) : 서울·개성·평양.
  • [註 356] 이릉(二陵) : 선릉(宣陵)·정릉(靖陵).

원문

○會三省, 推鞫黃廷彧。 委官尹斗壽啓曰: "及第黃廷彧供稱: ‘廷彧, 當初乘輿出城之時, 蒼黃扈駕, 旣到東坡館入謁, 則命授保護王子之任, 仍與方伯, 召號勤王。 一身兼受兩任, 自知不堪, 而勢不可久留, 卽到鐵原府, 移檄兩湖, 糾合義旅, 略無應募之人, 而大賊已出抱川之路。 乃奉王子, 避亂于淮陽府, 賊勢漸迫, 不得已踰楸池嶺通川。 又有飛報, 賊船從東海來者, 不知其數云。 乃又移入安邊地, 則賊已到嶺下。 自此欲往行在之際, 聞大駕、中殿移向此道, 臣子之義, 不可捨去。 繼聞箕城失守, 大駕遠出龍灣。 父子相與痛哭, 莫知所之, 魂魄上天。 乃不知北道民心之已叛, 但念深入之或可免, 轉入會寧, 終致金(軀)陷賊之患。 其不能保護之罪, 萬死無惜。 但號召之任, 事皆煩鬧, 保護之任, 宜務深莊, 而兩事矛盾, 勢難兼全, 禍患之祟, 亦難可免矣。 叛民縳給王子, 賊得之以爲奇貨, 欲講和而放送之矣。 (身)〔臣〕 恐其年少王子, 無辜而就死, 欲啓達其情,極爲哀矜。 陪行者, 若舍置其言, 而不爲之啓, 則是乃殘忍無狀之人, 亦有乖於保護之義。 因其賊情, 而成送密狀, 義所當然。 倉卒所書, 未知其間, 或有割地之言, 全未省記。 雖或有之, 依俙省得, 其裁割爲繩, 亂書封裹者, 如歸結之以僞許其和, 徐爲之圖耳。 大抵賊中馳狀, 非如常時諸官, 圓僉同議, 增減筆削, 采擇其語而書之。 臣及金貴榮李瑛韓克誠、賤息, 各囚異房, 不得相通。 其時安邊之人, 有見捉文書, 而辭連五十餘人, 盡被屠殺, 故艱得其隙。 或一人起草, 則不暇正書, 以其草慌忙上送, 多有無倫次不成摸樣者。 若按其書而求其罪, 則其可死者非一二。 其僞狀, 則潛付所遣之人, 卽投諸水火, 只以密狀, 達于行在云云。 如李弘業李盡忠之悞達者, 皆是僞狀; 李蕙, 只持其眞、僞二狀, 而只納密狀; 金貴榮, 只持僞狀而不納。 臣自念, 講和之事, 雖是僞許, 恐難得情, 乃與賤息謀曰: 「割地一事, 在擄者亦有可拒之術。」 乃作長書, 令韓克諴、軍官李長培正書, 又譯以諺書, 令通事咸廷虎, 宣言於賊中。 其書大槪, 「諸侯土地, 受之於天子。 非但不可私割, 我國自箕子受封之後, 歷代皆視爲內服。 時置四郡, 增置扶餘郡, 至于大明, 以八道郡縣, 皆隷于遼東。 衣冠文物, 一從制, 委國王御寶以治事。 如有率解中國漂流之民, 則天子頒賞于地方官, 其實中國之地, 使我國治之。 今此天兵之來禦者, 蓋以此也。」 諸賊曰: 「若朝貢於天子者, 不能自擅, 其言似然矣。」 此後, 諸賊苦望和事, 而絶口不言割地。 去正月十八日, 淸正使小將及在擄沈怡, 來問於賤息曰: 「朝鮮土地, 天子欲割與, 則此可爲乎?」 答曰: 「朝鮮之於中國, 如家人、父子之親。 豈有割與之理? 決無是也。」 小將以此走報, 還以此問于臣, 答曰, 「汝國雖無故加兵, 天子豈有割高皇帝所錫之地以與乎?」 此後不復再言。 及沈遊擊往來江上之時, 書送揭帖, 俾無彼此失對, 雖其與賊酬酢之語, 一行之人, 邈然不得聞知。 賊竟不更擧此言者, 實由於臣之一言, 有以預防之也。 至若納貨圖還之言, 不知出自何人, 千萬慮外, 省記不得, 而臣行李盡爲叛民所奪, 無有所齎之物, 只有賜送白金十兩。 安邊 馮仲纓僞和之時, 以圖出王子爲要, 收合白金, 給與賊將。 無乃此言流播, 以爲臣獨給乞哀悞傳乎? 若屈膝虜庭之言, 尤爲無理。 彼犬羊之賊, 若暴怒之極, 則雖王子, 亦有難全之患。 常時謁見王子之時, 則皆免冠徒跣, 羅拜庭下, 一行之人, 待隣國大夫, 稍加敬待, 不論多少, 已出、未出之人, 皆無此事。 王子不久出來, 自當知之。 衆目俱在, 不可少隱矣。 況臣及金貴榮, 則賊以爲老病, 一不見面。 臣獨爲屈膝, 千萬無理。 割地納貨屈膝事, 咸廷虎李長培沈怡趙仁徵金雲奇彦仁金闡等推問, 則昭然可知。 不書臣字, 則彼賊使用臣字, 不問彼此, 略無嫌焉, 常時縉紳之間, 莫不怪笑。 在擄之人, 乃用此字於不用僞狀之中, 使賊知我國文書格式, 則不無意外難從之患, 故前後僞狀, 皆不書臣字。 此番僞狀, 則依俙想得, 非但不書臣字, 一行皆削爵, 而書爵不書姓字; 息名, 亦異於常時恒用之畫。 若以本文上送, 則雖三尺童子, 一見可知其僞爲, 而乃謄書其狀, 先以疑似難明之言, 斷其不可遙度之情, 驟達於神人共憤之極, 當此之時, 孰有舒究其情僞, 分卞其是非哉? 天心震怒, 人言之紛紛, 勢所宜然。 李盡忠受去僞狀之時,兩王子及等, 在南大門外矣, 身則在長興庫洞。 其書關白殿下者, 未知其由, 到今思之, 《海東記》, 日本國王, 一名關白云, 至於通信使文書內, 亦有多稱關白殿下, 故我國之人, 皆以爲國王關白, 乃是一人, 而有二名。 及臣被擄之後, 聞諸賊稱號關白爲司馬。 如平行長淸正等凡賊將, 亦皆稱司馬。 所謂司馬, 如我國令監之稱。 於是, 始知關白之爲臣, 則一行萬無妄稱之理。 自中書示文字間, 則僭稱關白殿下, 故令我亦依他書之, 此亦非我尊稱之也。 但依其自中所稱而已。 此等無乃爲《海東記》及通信使文書所謂, 而忘却之中, 乃有此失耶? 其曲折, 臣別處於門內, 故未知其事。 大抵以爲天將之來和, 非眞和也; 必僞許其和, 圖脫王子之後, 始爲擧事。 其和畢竟是出於詭僞, 故其僞狀書之者, 信筆着名者, 出於無心。 此時, 李盡忠同在其處, 不知賊有威迫恐脅之事, 兩王子及輩, 皆恇刼失措, 莫知所爲。 若推問李盡忠, 則可知其曲折矣。 身先出事, 則秀吉許還兩王子以下, 故沈遊擊欲一時偕還, 懇請于平行長, 行長言: 「關白, 雖令放送, 時未有的當之書。 待日本回來天使, 可同往也。」 遊擊責以失信背約, 寧殺我身, 行長猶不肯許。 遊擊曰: 「兩王子, 雖待回來天使放送, 夫人以下及老病者先送。」 云云。 行長曰: 「夫人先往, 則彼此必生憂戀之病。 老病之人, 可先放也。」 遊擊之竝及臣者, 非爲臣也, 夫人雖出, 若無陪行官, 則勢又狼狽, 故竝請之, 而獨許臣先出。 又有賤息, 陪侍王子。 若見放送, 而仍爲留在, 則是以賊中爲可安之地, 豈近人情乎? 況王子出來之日, 亦爲不遠者乎? 以此遊擊, 率與出來者, 乃王子將出之兆也。 臣若欲棄王子先出, 則在安邊時, 府使崔錪, 乘賊將陪王子入往咸興之際, 送人馬要令超出。 當此之時, 其出甚易, 而旣受保護之命, 棄金軀先出, 極爲未安於心, 拒而還送。 若問崔錪, 則可知虛實矣。 大抵陪王子陷在賊中, 豈無圖出之術, 遇賊徒難從之請, 豈無善處之策乎? 昔者蘇武之在凶奴也, 其屬及(常武)〔常惠〕 詭言: 「天子射上林, 得雁, 足有繫帛書, 言在大澤中。」 (常武)〔常惠〕 之詭言, 上侵天子, 乃不以此獲罪於當世, 反以忠節垂名於靑史。 一行之人, 雖以脫王子爲急, 權行詭道之僞狀, 其情不過保護之愚計。 至於割地之事, 亦是應變之微謀, 而好底事皆隱而不揚, 詭底事, 欲結以大罪。 如此則前後陷賊保護之人, 皆駢首就死, 豈不冤痛哉? 大抵王子出來, 則一行之人, 是非、情僞, 朝廷自當洞知。 非臣所獨當之事, 而以其先出之故, 誤蒙重罪, 尤極曖昧。 臣兩朝舊臣, 休戚是同, 至於托婚王家, 恩分極重, 區區徇國之忠, 固非凡臣之比。 死生危迫之際, 若欲全身, 而喪其平日所守, 則更何面目, 直詣行在, 欲見君父於三京蕩敗, 二陵慘變之後乎? 人而如此, 禽獸且不食其餘。 有罪、無罪, 天日照臨, 其時各人及僞狀本文, 皆取考憑問, 如有一毫之不實, 雖伏重典, 實所甘心, 相考分揀’ 云。 黃廷彧不爲承服, 刑推得情何如。" 答曰: "刑推不足惜, 然不忍殺之。 遠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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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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