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원외를 접견하고 관의 설치, 중국군의 주둔 등을 논의하다
상이 백상루에 가서 유 원외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우리 나라를 위해 멀리까지 와서 수고합니다. 기전(畿甸) 근처가 이미 분탕되고 패잔한 나머지 소홀히 대한 일이 있을 것이니 더욱 미안합니다."
하니, 원외가 말하기를,
"거주민이 흩어지고 잔폐가 극심하니,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참담하여 눈물이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백성들도 방성 통곡하였습니다. 내가 유홍(兪泓)을 만나서 충분히 분부 조치하였으나 판탕된 나머지 손댈 곳이 없을까 걱정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만일 황은이 아니었으면 이나마 어찌 보존했겠습니까. 백분지일이나마 보존하는 것은 황은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원외가 말하기를,
"귀국의 일은 수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내가 송야(宋爺)190) 와 더불어 말을 해보니 그도 근심하는 모습을 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적이 아직도 부산에 머물러 있는데 그 간사한 음모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부산을 떼어 주고 계패를 세웠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하니, 원외가 말하기를,
"귀국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니 부산은 실제로 귀국의 남단에 위치한 요지일 뿐더러 대마도의 적세가 바다를 건너서 거주할 수는 없으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믿지 않습니다. 내가 운남(雲南)에 있었으므로 이 왜적의 정상을 익히 압니다. 왜적은 항상 이와 같은 말을 조작하여 사람들을 의혹시켰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왜노의 간사한 정상을 대인이 통촉하니 감사합니다. 경략 대인에게도 이런 뜻을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양산·부산·동래 등지에 왜적들이 쫙 깔렸으니 그 간악한 음모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지붕을 올리고 밭을 갈면서 오래 머무를 계책을 꾸미고 있으니 중국 군사가 진격하지 않으면 조선(祖先)의 수치를 씻을 길이 없을까 싶습니다. 밤낮으로 통탄하면서 오직 황은과 대인의 힘만 믿을 뿐입니다."
하였다. 원외가 말하기를,
"귀국이 왕경을 지키려면 먼저 조령을 수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중에서 만일 걸출한 자가 있어서 조령이 요해지임을 알고 먼저 이 영을 점거하여 중국 군사를 방어하면 제지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속히 유능한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요해지를 골라 관(關)을 설치하고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경략 대인도 관을 설치해야 한다는 말을 하나 우리 나라는 수어(守禦)할 계책을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데도 기로(岐路)가 매우 많아 수비가 어려우니 대인이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자, 원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조령은 대로(大路)라고 하니 당연히 대총병(大摠兵)을 이에 주둔시켜 진압해야 할 것이고, 또 진천(鎭川)과 목천(木川) 등의 소로에도 편장(偏將)을 파견하여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조령은 본디 천험의 요새지인데 신 총병(申摠兵)191) 이 이곳을 지키지 않고 물러나 충주(忠州)의 원야(原野)에서 맞붙어 싸웠으니 이는 매우 큰 실책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보니 연해의 각참(各站)은 양맥(兩麥)192) 을 수확하여 백성들이 의뢰할 수 있었지만 왕경(王京)은 잔패가 너무 심하고 기근도 심하여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수 없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들은 천조의 조총과 장창이 두렵다고 한다 하니 귀국도 배워야 합니다. 전일 개성에서 왜적이 귀국의 인민을 포로로 하여 총통(銃筒)을 조작하였다고 하니, 귀국도 이 묘술을 배우면 반드시 잘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귀환하면 귀국은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이니 속히 훈련하고 연습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도 각각 5천의 병력으로 영외에 주둔하면서 방어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부산은 조령과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아 만일 적이 다시 날뛰면 회복한 영토도 잃게 될까 싶습니다."
하고, 이어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전사(前史)를 보아도 부산은 조령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적이 거의 철수하였으니 반드시 다시는 감히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다례가 끝나자 원외가 말하기를,
"내가 왕경을 보니 풍경도 아름답지만 풍수(風水)도 좋으니 문인 재자(才子)가 여기에서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다만 동쪽 변방이 너무 허하니 묘당(廟堂)을 세워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또 내가 보기에는 한강이 형세는 비록 절승하나 상류인 양근(楊根) 등처는 모두 물이 얕아서 도보로도 건널 수 있으니 수비하기가 매우 어렵고, 임진강·대동강도 상류가 모두 얕은 여울인데, 귀국은 어떻게 지키려 합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누추한 이 나라에 왕림하였으니 실로 천재 일우의 다행입니다. 오늘날 방수책을 어찌해야 좋을는지는 오직 대인의 가르침에 따를 뿐입니다."
하자, 원외가 말하기를,
"천천히 별지에 조목조목 나열하여 올리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급히 왕경으로 돌아가시어 모름지기 대군이 철수하기 전에 가옥을 수리하고 인민을 안정시키십시오."
하였다. 상은 말하기를,
"대인이 보는 바로는 평양과 경성 중 어느 곳이 우세하다고 생각합니까?"
하니, 원외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평양이 지형은 매우 좋으나 변란이 항상 동래에서 야기되니 이곳에 물러 앉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경성을 제외하고는 거처할 만한 곳이 다시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이곳으로 물러나 앉으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형세가 어떠한가를 물어 보았을 뿐입니다."
하니, 원외가 말하기를,
"내가 이 《동국통감》을 보니 귀국은 예로부터 서북쪽만 수비하고 동남쪽은 수비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원외가 상의 앞으로 나아가 악수하며 말하기를,
"멀리까지 오셔서 위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머금고 치사하니 상도 또한 눈물을 머금고 치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3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출판-서책(書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註 190]
○上幸百祥褸, 接見劉員外。 上曰: "大人爲小邦遠勞, 畿甸近處, 已經焚蕩。 殘敗之餘, 且有違慢之事, 尤爲未安。" 員外曰: "居民流散, 殘敗已極, 傷心慘目, 不覺淚下。 俺下淚, 民亦放聲而哭。 俺見兪泓, 十分分付措置, 而板蕩之餘, 恐無着手之地。" 上曰: "若非皇恩, 此亦何存? 存十一於千百, 莫非皇恩。" 員外曰: "貴國之事, 極難收拾。 俺與宋爺言及, 亦爲嚬蹙。" 上曰: "倭賊尙留釜山, 奸謀(回)〔叵〕 測。 至以割與釜山, 樹立界牌爲言。" 員外曰: "觀貴國《輿地勝覽》, 釜山實貴國南邊要鎭。 對馬島賊, 勢不得越海而居住, 豈有是理? 俺亦不信。 俺在雲南, 慣知此賊情狀。 此賊每作如此說話, 以惑人聽。" 上曰: "倭奴奸狀, 大人洞燭, 多謝。 經略大人前, 亦傳此意是望。 梁山、釜山、東萊等處, 兇徒遍滿, 奸謀叵測。 至於蓋屋、耕田, 爲久住計而, 天兵不進, 恐不得雪祖先羞, 日夜痛憫。 惟恃皇恩曁大人宣力耳。" 員外曰: "貴國欲守王京, 則不可不先守鳥嶺。 賊中如有傑出者, 知其爲要害, 而先據是嶺, 防遏天兵, 則制之極難。 須速遣幹能宰臣, 相彼險要, 設關以防。" 上曰: "經略大人, 亦以設關爲言, 而小邦未知守禦之策。 且他處岐路甚多, 防守爲難。 惟大人敎之。" 員外曰: "我聞鳥嶺是大路, 宜置大摠兵於此以鎭之。 又於鎭川、木川小路等處, 遣偏將以防之。 鳥嶺自是天險, 而申摠兵不守此險, 退而搏戰於原野, 失策甚矣。" 又曰: "俺見沿海各站, 兩麥(收獲)〔收穫〕 , 民有所賴, 王京則殘敗已極, 飢饉亦甚, 慘不忍見。" 又曰: "倭賊言天朝鳥銃、長鎗, 爲可畏云, 貴國亦可學也。 前日開城 倭賊, 擄貴國人民, 造作銃筒云。 貴國亦知此妙而學之, 則必能矣。 俺等出去, 則貴國無所賴, 速令訓習爲佳。" 又曰: "劉綎、吳惟忠, 亦各五千, 留防嶺外。" 又曰: "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邇來士民, 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 今天朝使貴國爲金甌, 貴國知否?" 上曰: "釜山ㆍ鳥嶺, 相距無幾。 賊若更肆, 恐失已復之地矣。" 仍出示《東國通鑑》曰: "觀此前史, 釜山ㆍ鳥嶺, 相距甚邇。 然此賊幾盡退遁, 必不敢復肆矣。" 茶禮畢, 員外曰: "我見王京, 風景佳勝, 風水亦好, 文人才子, 多出於此, 而但東邊極虛, 宜立廟堂以鎭之。 我見漢江, 形勢雖勝, 上流楊根等處皆淺灘, 可步涉, 守之甚難。 臨津、大同上流, 亦皆淺灘。 不知貴國何以守之耶?" 上曰: "大人臨陋邦, 實千載之幸。 今日防守, 何策爲得? 唯大人所敎耳。" 員外曰: "徐當用別紙, 條列以上。" 又曰: "急還王京, 須及大軍未撤之前, 修蓋房屋, 安(揷)〔輯〕 人民。" 上曰: "大人所見, 平壤ㆍ京城, 形勢孰勝?" 員外曰: "我見平壤, 地勢極好, 而變亂恒出於東萊, 不宜退坐于此。 京城外, 更無可居之地矣。" 上曰: "非欲退坐于此, 只問形勢之如何。" 員外曰: "俺見此《東國通鑑》, 貴國自古, 只備西北, 不備東南, 未知厥由。" 員外就上前握手曰: "遠臨勞慰多謝。" (舍)〔含〕 淚致謝, 上亦(舍)〔含〕 淚致謝。
- 【태백산사고본】 21책 3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출판-서책(書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