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수복 후에 여러 장수가 경성으로 모인 일과 행주 산성의 대첩에 대한 기록
처음에 평양이 회복되자 여러 장수들이 많이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중국군이 개성부에 진주하자 우리 나라 장수들은 차례로 전진시켜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그의 군사 4천 명을 반으로 갈라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 언덕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정병 2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으로부터 고양군(高陽郡) 행주(幸州)의 성산(城山)으로 옮겨 진을 쳤다. 12일 새벽에 척후(斥候)가 계속해서 보고하기를 ‘적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각각 홍기(紅旗)와 백기를 들고 홍제원(弘濟院)으로부터 행주를 향해 오고 있다.’ 하였다. 권율이 즉시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는 영을 내리고 대(臺)에 올라 바라보니 5리쯤 떨어진 들판에 적의 무리가 가득했다. 선봉 1백여 기가 점점 접근해 오더니 조금 있자 1만여 기병이 들을 뒤덮고 와서 일시에 포위하고 바로 돌격해 왔다. 우리 군사들은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및 진천뢰(震天雷)·지신포(紙神砲)·대중발화(大中發火) 등 각종 화기를 연달아 쏘았는데도 물러가지 않고,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진격했다. 묘시(卯時)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도록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물러갔는데 적의 죽은 자는 수십 명이었고 부상한 자도 백여 명이 되었다. 적이 마른 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 성을 불태우면 성중에서는 물을 부어 이것을 껐다. 처음에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서북쪽에 있는 자성(子城)의 한 쪽을 지키게 했는데 이때에 승군이 조금 물러나자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몰려 들어오니 군중이 흉흉하였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독전하자 여러 장수들이 죽기로써 힘껏 싸우니 적은 포위를 풀었다. 적의 시체를 네 곳에 모으고 마른 풀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는데 시체 타는 냄새가 10리까지 뻗쳤다. 아군이 남은 시체를 거두었는데 참획한 것이 1백 30여 급이었다.
당시 중국군이 왕래하며 순찰하다가 이 전쟁이 있은 것을 알았다. 이튿날 사대수(査大受)는 자기의 편장(褊將)을 보내어 접전 때의 상황을 물었고 예물을 보내어 치하하였다. 그 뒤 3월에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왜놈들이 조선 왕국을 함몰시키니 삼도(三都)와 모든 군현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졌으며, 의병을 불러모아 대란을 평정하고 국토을 지키어 회복을 꾀한 한 사람의 영웅 걸사도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술이나 마시며 시나 짓고 기생이나 끼고 산에 노닐어 치란(治亂)을 모르는 체하며 나라의 존망은 관심 밖에 붙이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런 말까지 있으니 왕국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오직 전라도 관찰사 권율만은 외로운 성을 굳게 지키면서 많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 여러 차례 기계(奇計)를 써서 가끔 대적을 물리쳤고 근일에는 또 모래 자루를 곡식인 것처럼 만들어 왜적을 유인, 이들을 죽였으니 이는 실로 왕국의 위기시의 충신이며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이다. 본부에서는 심히 가상하게 여겨 장차 별도로 구제(具題)를 행하려 한다. 지금 홍단견(紅段絹) 4단(端), 백은(白銀) 50냥을 본관에서 상으로 주어 충성과 용기를 권장한다. 왕은 벼슬을 더하여 본국의 막료와 재신을 고무하라.’는 말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46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初, 平壤旣復, 諸將多聚京城。 天兵進住開城府, 我國諸將, 以次進陣, 共爲猗角之勢。 全羅道巡察使權慄, 中分其兵四千, 令節度使宣居怡領之, 陣於陽川江岸, 自領精兵二千三百, 自水原 禿城, 移陣於高陽之幸州 城山。 十二日黎明, 候更報: ‘賊分左右翼, 各持紅白旂, 自弘濟院, 向幸州而來。’ 慄卽令軍中無動, 登臺而望, 則相距五里原上, 賊徒彌滿。 先鋒百餘騎, 看看漸逼, 俄而有萬餘騎, 蔽野而來, 一時圍抱, 直進衝突。 我軍射矢投石, 連放大小勝字銃筒, 及震天雷、紙神砲、大中發火等, 各藥火器, 猶不却, 賊分運迭進。 自卯至酉, 凡三進三退, 賊死者數十, 傷者百餘。 賊束芻縱火, 因風焚城中, 以水灌滅。 初, 令僧軍專守西北子城一面, 至是僧軍小退, 賊大呼闌入, 軍中洶洶。 慄挺劍督戰, 諸將殊死力戰, 賊乃解圍。 因聚賊尸於四處, 積芻焚之, 臭聞十里。 我軍, 收拾餘尸, 斬獲一百三十餘級。 時, 天兵往來巡哨, 知有是戰。 翌日, 査大受遣其(編將)〔褊將〕 , 來問接戰時事, 送禮爲賀。 其後三月, 經略宋應昌移咨本國, 有云: ‘自倭奴摧陷朝鮮王國, 三都諸郡縣, 悉皆望風奔潰, 曾無一英雄傑士、倡義士排大亂, 守封彊以圖恢復者。 且聞有縱酒賦詩, 挾妓遊山, 置理亂於不知, 付存亡於不較。 興言及此, 王國可謂無人。 獨全羅道觀察使權慄振守孤城, 招集衆庶, 屢出奇謀, 時抗大敵, 近復囊沙爲糧, 誘倭來槍而怯殺之, 此正王國板蕩忠臣, 中興名將。 本府深爲嘉尙, 將另行具題。 今將紅段絹四端, 白銀五十兩, 奬賞本官, 以爲忠勇之勸。 王其加其爵祿, 以風動本國僚宰。"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46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