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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25일 신사 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유영길·김수를 인견하고 적병의 숫자, 영·호남의 전투 상황 등을 묻다

동지중추부사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호남 한 도(道)는 모름지기 급급히 경리(經理)해야 하는데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충청도의 기생(妓生)이 있는 고을에서 날마다 술에 취해 기무(機務)를 잊고 있는데도 주세(主勢)가 고단하고 약하여 논계(論啓)한 사람이 없습니다.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는 재국(才國)이 회복을 담당할 만한 사람이 못되고, 그 마음이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지 못하여 매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무실(無實)로 돌아가고 천시(天時)를 잃어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이 있게 하였습니다. 신은 민박(悶迫)한 정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와서 아룁니다."

하니, 상이 유영길을 인견하였다. 그때 판윤 김수(金睟)경상도 감사로서 체직되어 와 입조(入朝)하였는데 상이 함께 입대하라 하였다.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不德)하여 경으로 하여금 근고(勤苦)하게 하였다."

하니, 김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은 아뢸 말씀이 없고 오직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병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신의 추측으로는 20여만 명이 될 것 같습니다. 본도의 민심이 처음과는 아주 달라져서 적을 잡고자 하며, 지난날 적에게 붙었던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호(兩湖)의 병력으로 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호남의 군사가 정강(精强)한 듯하나 일찍이 금산(金山)에서 패배한 후로는 겁을 먹어 용인(龍仁)에서도 패배했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주(全州)는 성을 지키는 군사가 매우 많지만 만약 적이 먼저 산읍(山邑)을 공격하면 전주 역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에는 웅거할 만한 험한 곳이 없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무주(茂朱)아지발도(阿只拔都)도 들어오지 못했던 험한 곳이 있습니다만, 인심이 흩어지면 금성 탕지(金城湯池)라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적들이 살육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도 비로소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민심을 돌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 적의 정황은 어떠한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사로잡은 왜적 소평태(小平太)가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탐학무상(貪虐無狀)하여 화보(貨寶)만 좋아한다. 조선을 차지하려 해도 아직까지 점거하지 못했는데 어찌 대명(大明)을 범하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진(朴晉)은 잘 싸우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스스로 싸운 적은 없고 권응수(權應銖)를 시켜 가서 싸우게 했는데 위성(威聲)이 이르는 곳에는 적이 모두 도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의병들은 각기 그들 읍만 지킬 뿐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영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령(統領)이 있어 혹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요해처를 지키기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남군(南軍)은 알 수 없지만 북군(北軍)은 믿을 게 못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궁마(弓馬)의 재주가 능하니 우리 나라 군사로 선봉(先鋒)을 삼고, 중국 군사로 성세(聲勢)를 돕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천일(金千鎰)을 불러 해서(海西)의 적을 치게 하는 것이 어떤가? 쉬운 데부터 먼저 공격하는 것이 또한 병법이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지금은 해로에 얼음덩이가 떠돌아 대군이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江華)를 거쳐 호서·호남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호남 사람들 모두가 승여(乘輿)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험고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만약 견고한 성을 찾아 사수(死守)할 계획이라면 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유성룡(柳成龍)은 ‘적이 만약 이 해가 가기 전에 물러가지 않으면 양호 지방 역시 보장하기가 어렵다. 모든 해도(海島)의 넓은 곳에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고, 노약자는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장정은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 그러다 불행한 일이 있으면 배를 타고 잠시 피했다가 서쪽 중국으로 향하기를 기다려 그 뒤를 쳐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182) 이 일찍이 그런 계책을 말했는데, 비변사에서 방계(防啓)하였고, 나 역시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였었다."

하였다. 유영길이 아뢰기를,

"인심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다음, 항해(航海)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 먼저 동요하게 되면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풍원 부원군은 적의 형세가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유성룡이 말하기를 ‘싸워도 죽고 싸우지 않아도 죽는다. 차라리 한번 싸워 사생을 결단해야 한다.’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인홍(鄭仁弘)은 친히 진에 나가 용병(用兵)하고 있지 않던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비록 스스로 싸우지는 못하지만 나라를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면(金沔)은 기강(紀綱)이 있어 정인홍보다 조금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곽재우(郭再祐)는 지모(智謀)가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신이 그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그 사람됨이 보통은 아닙니다. 어려서 무예를 닦고 《장감(將鑑)》을 읽어서 문자를 터득해 일찍이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의병을 남보다 제일 먼저 일으켜 4월 20일 사이에 기병(起兵)하였는데 처음 기병할 때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만 신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을 사로잡으면 참괵(斬馘)하지 않고 심장을 구워 먹습니다. 의령(宜寧)·삼가(三嘉)가 온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발(鄭撥)송상현(宋象賢)은 과연 죽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정발송상현이 혹자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 없습니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 심지어는 송상현이 적장(賊將)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위를 당했을 때 홍윤관(洪允寬)이 성밖으로 나가기를 권했으나 상현은 말하기를 ‘지금 성을 빠져 나가더라도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는 남문(南門)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니 적이 들어와 죽이고, 바로 그의 목을 대마도로 전송(傳送)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선비로서 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상주(尙州)의 정국성(鄭國成), 선산(善山)김도(金燾)정경세(鄭經世)의 동생이 모두 적에게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낙(河洛) 역시 죽었다고 한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부자가 다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유영길에게 이르기를,

"계사(啓辭)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유영길이 아뢰기를,

"겨울이 이미 지난 해가 점차 길어지고 있으니, 군신(群臣) 모두 마땅히 힘을 다해 조치해야 할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망극하여 감히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7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인사(人事)

  • [註 182]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 유성룡의 봉호.

○辛巳/同知中樞府事柳永吉啓曰: "湖南一道, 須急急經理, 而體察使鄭澈, 自忠淸有妓之官, 留連酗酒, 迷忘機務, 而主勢孤弱, 無人論啓。 左相尹斗壽, 材局非擔當恢復之人, 其心不得至公無私, 逐日所處, 皆歸於無實, 將失天時, 事有不急言者。 臣不勝悶迫之情, 敢此來啓。" 上引見柳永吉時判尹金睟, 以慶尙監司, 遞來入朝, 上竝令入對。 上謂曰: "以予不德, 使卿勤苦。" 涕泣曰: "臣無所達, 欲死而已。" 上曰: "賊兵幾何?" 曰: "以臣意料之, 可二十餘萬矣。 本道民心, 頗異於初, 皆欲擒賊, 而曩日附賊者, 亦皆見戮矣。" 上曰: "兩湖兵力, 可以抗賊乎? 湖南之兵, 雖稍似精强, 而曾於金山敗衂之後, 遂生恇怯, 仍致龍仁之敗, 不足恃也。 全州守城之軍甚多, 幸若使賊先攻山邑, 則亦難保矣。" 上曰: "湖南無據險之處耶?" 曰: "茂朱有險阨處, 阿只拔都所不能入, 而人心散, 則金湯無益也。 賊甚喜殺戮, 故愚民始生厭苦之心。 若不嗜殺人, 則民心不可回矣。" 上曰: "大抵賊情如何?" 曰: "生擒 小平太言: ‘關白貪虐無狀, 只愛貨寶。 得朝鮮而尙不雄據, 豈肯犯大明。’ 云云矣。" 上曰: "朴晋善戰乎?" 曰: "未嘗自戰, 使權應銖往擊, 威聲所及, 賊皆遁走矣。" 上曰: "嶺南義兵, 各守其邑而已乎?" 曰: "嶺南則不然。 有統領, 或與賊戰, 或把截要害矣。" 上曰: "天兵可以敵賊乎?" 曰: "臣嘗奉使上國, 南軍則不可知, 而北軍不足恃也。 我國善弓馬之才, 以我軍爲先鋒, 而以天兵爲聲勢可也。" 上曰: "召金千鎰來, 擊海西之賊如何? 先其易者, 亦兵法也。" 曰: "目今海路流澌, 大軍恐難涉海也。" 上曰: "由江華往湖西、湖南, 則如何?" 曰: "湖南之人, 皆望乘輿。 而臣意則以爲不固。 若得堅城, 爲死守之計則可矣。 不然則危矣。 柳成龍言: ‘賊若於歲前不退, 則兩湖亦難保全。 海島寬曠之處, 耕田種穀, 老弱耕於其中, 壯者戰於陸地。 不幸則航海暫避, 竢其西向上國, 而尾擊可也。’ 云矣。" 上曰: "豐原曾獻此策, 而備邊司防啓, 予亦不覺其有深意矣。" 永吉曰: "人心無可爲之勢, 然後乃爲航海之計。 若先爲動搖, 則難以收拾矣。" 上曰: "豐原言賊勢如何?" 曰: "成龍曰, ‘戰亦死, 不戰亦死。 寧欲一戰, 決死生。’ 群情亦如是矣。" 上曰: "鄭仁弘, 豈親自臨陣用兵耶?" 曰: "雖不能自戰, 而欲爲國效死。 金沔則有紀綱, 頗勝於仁弘也。" 上曰: "郭再祐有智耶? 有勇耶?" 曰: "臣未嘗見其人, 而大抵其爲人, 不平平也。 少業武, 讀《將鑑》, 而解綴文。 嘗魁庭試, 擧義最先於人, 四月二十日間起兵, 初起時, 人頗疑之, 而臣則不疑也。 擒賊則不爲斬馘, 灸其心而食之。 宜寧三嘉之全城, 再祐之功也。" 上曰: "鄭撥宋象賢, 果死耶?" 曰: "鄭撥宋象賢, 或言不死, 而死無疑矣。 訛言至謂象賢爲賊將, 而甚不然。 當其被圍時, 洪允寬勸使出城, 則象賢言: ‘今雖出城, 將安適乎?’ 拱手坐南門, 賊入而殺之, 卽傳首送對馬島云矣。" 上曰: "本道士人, 無被害者耶?" 曰: "尙州 鄭國成, 善山 金燾鄭經世之弟, 皆死於賊刃矣。" 上曰: "河洛亦死云矣。" 曰: "父子俱死矣。" 上謂永吉曰: "啓辭之意, 何謂耶?" 永吉曰: "冬月已過, 晷刻漸長, 群臣所當盡力措置, 而不能然, 故罔極敢啓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7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