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신하들을 인견하고 대가의 이어에 대해 논의하다
이날 저녁에 또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윤두수(尹斗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왜적의 형세가 이미 위급하여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불안합니다. 내전의 행차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이 도로를 약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전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자, 곽이 아뢰기를,
"내전께서는 필시 운산(雲山)에 도착하셨을 것이니 적로(賊路)와 조금 멀어졌을 것입니다."
하고, 흥원이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운산으로 가시면 내전과 서로 만나실 것입니다."
하였다. 곽이 아뢰기를,
"지금 여기에 들어온 대신(大臣)들이 밖에 있을 적에 모두들 만약 강계로 가려면 운산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밤새도록 가면 운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은 모두 나를 인도하여 강계로 가려는 것인가?"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어떤 계책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는 일로 말하곤 하였다."
하였다. 상이 명을 내려 성대업(成大業)을 불러들이도록 한 다음에 이르기를,
"그에게 도로의 원근을 자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대업이 원신(遠臣)이기 때문에 직접 하문하지 않았다. 】 대업이 아뢰기를,
"덕천(德川)·운산(雲山) 지경부터는 샛길이 있고, 개천(价川)에서 함흥(咸興)까지는 그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강계는 서쪽으로는 의주로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적유령이 있는데, 길이 좀 넓어서 적을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따로 매우 험준한 한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이런 지역은 도적도 지나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겨우 잔도(棧道)로 통행하는데 북쪽으로는 산융(山戎)과 통하고 서쪽으로는 의주(義州)와 연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계로 갈 수 없으니 장차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만약에 왜적의 소식이 없다면 함흥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정주(定州)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모두 대답하기를,
"이틀 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하루 안에는 도달하기 어렵겠다."
하고, 상이 이어 요동(遼東)으로 들어갈 일에 대하여 말하자. 흥원이 아뢰기를,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철 및 흥원이 아뢰기를,
"주서(注書) 2명과 【임취정(任就正)·박정현(朴鼎賢). 】 한림(翰林) 2명이 【조존세(趙存世)·김선여(金善餘). 】 안주(安州)에서부터 뒤떨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곽에게 하문하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자, 곽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에 ‘전일에 왜적과 통신한 일이 있었으므로 명조가 지금은 비록 포용해주고 있지만 꼭 받아줄지의 여부는 기필할 수 없다. 만약 적병이 뒤쫓아오면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도 그럴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은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때 비변사의 당상 이산보(李山甫)·이항복·이성중(李誠中)·한준(韓準)·심충겸(沈忠謙) 등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들이 곧바로 들어가 진대(進對)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소신이 비변사 당상이기 때문에 청대하였습니다. 내일 행차를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각각 생각한 바를 진술하고 싶습니다."
하고, 준이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정주로 가시더라도 세자는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에 왜적이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자, 충겸이 아뢰기를,
"가다가 왜적이 있으면 마땅히 물러나 함관(咸關)에서 보전하고 이것도 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물러나 보전한다면 나라의 신민들이 촉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부득이 창업할 때처럼 비바람을 무릅쓴 뒤에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양궁(兩宮)이 한 곳으로 함께 가시면 사람들이 기대를 부칠 곳이 없게 됩니다."
하고, 준이 아뢰기를,
"세자는 북도로 가고 대가는 의주로 가신다면 명조에게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할 것으로 여겨 돌보아 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도 시종 양궁이 나누어 주찰(駐札)하는 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명조에서도 반드시 포용하여 받아들일 것이고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죽겠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세자가 북도로 가면 혹 성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철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드러나자 인심이 해이되었는데, 하물며 참으로 요동으로 들어가는 경우이겠습니까. 일이 궁박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의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많으면 좋지 않은 것이다. 지금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가는 곳에는 왜적도 갈 수 있으므로 본국에 있으면 발붙일 땅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에는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들어갔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면 내전과 비빈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 가려서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자 항복 등이 아뢰기를,
"부득이하면 지극히 간소하게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자 빈도 북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일을 오늘 확정하는 것이 좋겠으니 동궁을 불러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자가 함흥에다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성중(誠中)이 아뢰기를,
"신은 당초 의논할 적에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불가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성중이 아뢰기를,
"들어가지 못할 성싶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는가?"
하자, 성중이 아뢰기를,
"북도가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安南國)이 멸망당하고 스스로 중국에 입조(入朝)하니 명조에게 병사를 동원하여 안남으로 보내 안남을 회복시킨 적이 있었다. 나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자는 북도로 가고 영상이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양궁이 나누어 이주하면 호종하는 관원으로서 북도로 가는 사람이 불가불 많아야 합니다."
하자, 준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미행(微行)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호종할 사람은 자원(自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근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려워하지 말고 각각 말을 해보라. 북도로 가는 것도 종묘 사직의 중대한 일이니 불가불 많이 보내야 한다. 호판(戶判)은 【준(準)이다. 】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종묘 사직에 죄를 졌으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라를 떠나 지성으로써 사대(事大)하면, 명조가 반드시 포용하여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요 거절까지는 않을 것이다. 경들은 병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들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꼭 요동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형세가 어려우면 강계로 가더라도 해로울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군신(群臣)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충겸이 아뢰기를,
"나인(內人)은 몇 명이나 분산하여 보낼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만한 수령에게 맡기면 그 친척이나 다름없이 받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와 함께 북도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요동으로 가는데는 내전 및 두세 명의 비빈은 부득이 대동하고 가야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중국으로 들어가면 구원병을 청하여 혹 우리 나라를 회복시킬 수가 있을 성싶다."
하자,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허락하여 주지 아니하면 그 걱정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城)과 해자는 깊고 견고한가?"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깊고 견고하며 5리마다 연대(煙臺)032) 가 하나씩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덕형이 지난번 왜중(倭中)에서 돌아와 요동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왜적을 어렵게 여긴 것일 것이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덕형의 소견은 처음부터 그러해서 상께서는 요동으로 피하고 세자는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인견을 끝내고 나왔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8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왕실-행행(行幸)
- [註 032]연대(煙臺) : 봉화대(烽火臺).
○是夕, 又引見諸臣。 興源曰: "見尹斗壽狀啓, 賊勢已急, 留此亦未安。 內殿之行, 何以爲之? 雲山郡守成大業, 稍知道路, 故使之留在矣。" 上曰: "內殿今在何處?" 𥕏曰: "內殿必來於雲山, 賊路稍遠。" 興源曰: "大駕往雲山, 則與內殿相値矣。" 𥕏曰: "今入此大臣, 在外時, 皆曰若向江界, 則雲山爲好。 今日達夜行之, 則可及到矣。" 上曰: "諸臣之意, 大槪欲引予至江界耶?" 澈曰: "不知何策爲長, 故如此也。" 上曰: "當初早赴遼則好矣, 而謀議不一, 以致如此。 予自初每言, 賊在前現形, 而從後難渡之之事矣。" 上命招成大業入, 上曰: "道路遠近, 仔細問之。" 【以大業遠臣, 故不爲直問。】 大業曰: "自德川、雲山地境, 有間路, 价川之於咸興, 其間甚近。" 因言: "江界西有義州之路, 東有狄踰之嶺, 嶺路稍闊, 難以禦賊, 別有一處極險。" 澈曰: "如此之地, 乃盜賊難過之地。 絶壁千丈, 僅通棧路, 而北通山戎, 西連義州。" 上曰: "然則江界不可去, 將往何處。" 興源曰: "若無賊消息, 則咸興可也。" 上曰: "此去定州幾許?" 皆對曰: "二日程。" 上曰: "然則一日之內, 難以得達。" 上因言入遼之事, 興源曰: "遼東人心極險。" 上曰: "然則何不言可往之地? 予死於天子之國可也, 不可死於賊手。" 上問: "留世子於此而去, 可乎?" 澈曰: "若賊勢逼迫, 則東宮亦安得留此乎?" 澈及興源曰: "注書二人, 【任就正、朴鼎賢】 翰林二人, 【趙存世、金善餘】 自安州落後矣。" 上問𥕏曰: "赴遼何如?" 𥕏曰: "人言: ‘前有通信之事, 天朝今雖包容, 其必受與否, 未可必也。 若賊兵躡後, 則必不受之’ 云。 此論亦然矣。" 又曰: "兵曹(判曹)〔判書〕 李恒福, 則欲爲入遼矣。" 時備邊司堂上李山甫、李恒福、李誠中、韓準、沈忠謙等請對, 上不許。 諸臣等, 直入進對。 忠謙曰: "小臣爲備邊司堂上, 故請對。 明日之行, 不知何以定之? 臣等欲各陳其所懷。" 準曰: "主上雖往定州, 世子則往于咸鏡道可也。" 上曰: "咸鏡道有賊鋒, 奈何?" 忠謙曰: "若往而有賊, 則當退保咸關, 此又不得, 則退保他處, 庶幾一國臣民, 有所屬望矣。" 恒福曰: "不得已櫛風沐雨, 如創業時, 然後可矣。 兩宮若同往一處, 則人望無所屬矣。" 準曰: "世子往北道, 大駕往義州, 則中朝必以請兵有所眷顧矣。" 恒福曰: "小臣之意, 終始以兩宮分駐爲可。 天朝亦必容而受之, 無拒之之理。" 上曰: "與其死於賊手, 無寧死於父母之國。" 忠謙曰: "世子赴北, 則或有成功之理。" 澈曰: "入遼之意出, 而人心解體, 況眞入遼乎? 事至窮迫, 故此論出矣。" 上曰: "議論多則不好。 今百爾思之, 予之所往, 賊亦能往, 在本國, 則無容足之地矣。" 興源曰: "小臣之意, 入遼不可。 若入而不許, 則奈何?" 上曰: "雖然, 予必渡鴨綠江矣。" 忠謙曰: "入遼則內殿妃嬪, 將何以處之?" 上曰: "皆不可棄, 從簡帶去可矣。" 恒福等曰: "不得已, 至簡帶去可也。 世子嬪, 亦送于北道可也。 凡事定於今日可也, 乞召東宮, 同議處之。" 上曰: "廟社, 何以爲之? 世子奉安于咸興何如?" 誠中曰: "臣則初議以入遼不可。 故今亦以爲不可也。" 上曰: "何謂也?" 誠中曰: "恐不得入也。" 上曰: "然則當往何處?" 誠中曰: "北道可也。" 上曰: "赴遼, 非但避亂。 安南國嘗亡其國, 自爲入朝, 天朝發兵送之, 安南得以復國。 予亦慮其如此, 故欲入也。 世子則赴北, 領相隨往可也。" 恒福曰: "兩宮分駐, 從官赴北者, 不可不多也。" 準曰: "不然。 如微行可也。" 上曰: "從予之人, 自願可也。" 恒福曰: "(筯力)〔筋力〕 亦有所不及者矣。" 上曰: "勿以爲難, 而各言之。 赴北亦宗社重事, 不可不多送。 戶判 【準也。】 赴北可也。 予則得罪於宗社, 不必隨。 予以去我國, 事大以至誠, 天朝必容而受之, 不至拒絶矣。 卿等似皆有病, 皆赴北可也。 不必入遼。 勢難則往江界何妨?" 於是, 群臣皆涕泣。 忠謙曰: "內人不知幾人散遣乎? 若寄置於可信守令, 則當奉之無異其親矣。" 上曰: "同世子送于北道何如? 赴遼則內殿及數三妃嬪, 不得已帶行。" 上曰: "入中國則請兵求救, 容有恢復之理。" 興源曰: "中國若不見許, 則其患不少矣。" 上曰: "城池深固乎?" 興源曰: "深固, 每五里一烟臺也。" 上曰: "李德馨頃自倭中還, 言其不可不避於遼。 蓋難之也。" 忠謙曰: "德馨所見, 自初爲然, 自上避遼, 世子赴北可也云矣。" 遂罷黜。
- 【태백산사고본】 13책 2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8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왕실-행행(行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