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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영변 행궁에서 신하를 인견하고 이어할 곳을 논의하다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왜(倭) / 군사(軍事)

○上御寧邊行宮, 引見從臣。 崔興源曰: "自上欲移駐定州, 請姑留于此。" 上曰: "此則予意已定。 世子則當留于此, 諸臣欲不來者, 不來可也。" 鄭澈曰: "世子今留駐此矣, 終向定州乎?" 上曰: "當向龜城 江邊等處。" 曰: "世子留駐則力分, 朝廷恐不成模樣, 人心亦且搖動也。" 上曰: "多留從官于此, 予以輕裝移駐矣。" 曰: "姑待平壤聲息之來, 何如?" 且曰: "諸臣勸留勸避, 各有所見。" 上曰: "事至於此, 復有可往處乎? 第言之, 若有則予當從之。" 興源曰: "賊勢若挫, 則北道可往。" 時嘉山郡守沈信謙, 來在行在, 上命內官問嘉山遠近, 入啓曰: "九十里程, 而有二大江, 自此至義州, 村里盡空, 人烟絶少矣。" 曰: "西北稍完, 我國疆土, 猶未盡陷, 豈無可避之地? 江界人皆言可以防守矣。" 上曰: "下人則無處不可往矣, 予則當避于此。 平壤失守, 則咸鏡道亦不能全矣。" 李𥕏曰: "平壤失守, 則我國無可保之處。" 曰: "臨津則賊爲主, 我爲客, 平壤則我爲主, 而賊爲客矣。" 上曰: "昨日不聽金庭睦之言乎? 賊若作茷, 一時竝進, 則其鋒甚銳, 誰能禦之?" 興源曰: "於我國, 無可避之地。 然方議入, 若一入, 則祖宗宗社, 將何所托乎?" 曰: "以一州一邑, 亦可以有爲矣。" 興源曰: "中原不受, 而賊虜又逼於後, 則奈何? 今者有移駐定州之敎, 人心騷動, 商量處之可也。" 𥕏曰: "遣侍從措備事, 姑爲停止何如?" 上曰: "不可不爲。" 𥕏曰: "到此, 無可爲, 但前日有通信之事, 恐中原不甚信也。" 上曰: "然則遼東不得入乎?" 賊書中, 言分遣其將於八道云, 恐我國地方, 則無可避之處也。"


  • 【태백산사고본】 13책 27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8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