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가 이산해의 정죄를 아뢰고, 한음 도정 현이 전란을 맞아 자책하라는 상소를 올리다
양사가 합계하여 급제 이산해를 율에 의해 정죄(定罪)할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한음도정(漢陰都正) 이현(李俔)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어가(御駕)가 궁궐을 떠나던 날 신은 순릉 향사(順陵香使)로서 대궐문까지 달려갔다가 우연히 본 일입니다.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016)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017)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아, 터전을 닦고 인(仁)을 쌓아올린 우리 선왕(先王)의 공로와 쉬게 하고 먹이고 길러준 전하의 은혜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심지어 파천하던 날 시장에 가듯 떼 지어서 어가의 뒤를 따를 생각은 하지 않고 ‘이제야 갚을 수 있다.’018) 는 말을 드러내놓고 하였으니 이렇듯 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근원을 캐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총애받는 간신이 아첨하여 위로는 전하의 총명을 좀먹고 밖으로는 권세를 휘둘러서 민심은 날이 갈수록 가리워지고 정치는 날이 갈수록 문란해졌는데도 아직까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김공량(金公諒)의 죄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직접 본 신(臣)은 간담이 찢어지고 통곡이 나오며 피를 토할 지경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은 양국충(楊國忠)의 목을 쳐서 마외(馬嵬)의 군사들을 감동시켰고 덕종(德宗)은 애절한 조서를 내린 뒤에야 봉천(奉天)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019)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의 구물(舊物)을 생각하시고 사직이 폐허가 된 것을 통감하시어 즉시 자신을 죄책하는 전교를 내리시고 통렬하게 자책하셔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토목 공사, 제궁(諸宮)의 침탈 행위, 조정의 부정(不靜), 외교상의 실책, 벌(罰)과 상(賞)의 적합하지 못한 시행, 이단의 숭상, 언로(言路)의 두절, 총애받는 궁인이나 신하들의 등쌀, 가득찬 내탕(內帑), 번거롭고 가혹한 부역(賦役) 등 갖은 죄과를 나열한 뒤 문사(文詞)를 강개하게 써서 중외에 선포하시고 잇따라 김공량의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신다면 백성들은 즐거워하면서 임보(林甫)의 고기020) 를 다투어 씹게 될 것이요, 사기가 진작되어 구준(寇準)의 담력에 격동될 것이며, 백성들은 상처를 싸매고 전쟁터로 나갈 것이고 병사들은 진격만 하고 후퇴하지 않을 것은 물론, 백번 패한다고 해도 오히려 백번 싸울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토붕 와해될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오늘의 일은 곧 나의 죄다.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상소에서 진달한 생각이 충성스럽고 간절하니 가상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0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016]‘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 : 소인들이 정치를 하여 그 잘못으로 빚어낸 난리라는 뜻. 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나오는 말인데, 소인들이 안에서 용사(用事)하고 폐첩(嬖妾)이 안에서 임금의 마음을 고혹시켰기 때문에 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풍자하여 지은 시임.
- [註 017]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 :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이 침구해온 나라의 군대를 환영한다는 뜻. 상(商)나라 때 갈백(葛伯)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성탕(成湯)이 이를 쳤는데 이때 성탕이 이르는 곳마다 "우리 임금을 기다렸었는데 이제 오셨으니 이제는 살아났구나." 했는데 여기서 온 말. 《서경(書經)》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 [註 018]
‘이제야 갚을 수 있다.’ : 이제야 학정에 시달린 보복을 할 수 있다는 뜻임. 인정(仁政)을 베풀지 않으면 위급한 때에 백성들이 장상(長上)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 온 말.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註 019]
덕종(德宗)은 애절한 조서를 내린 뒤에야 봉천(奉天)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 당 덕종(唐德宗)의 총신(寵臣)이었던 요영언(姚令言)이 주자(朱沘)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덕종은 서울인 장안(長安)을 버리고 봉천(奉天)으로 파천(播遷)했었다. 이때 덕종이 자신의 실정(失政)을 뉘우치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이성(李晟)이 반란군을 토벌하여 서울을 수복하였음. 《당서(唐書)》 권7.- [註 020]
임보(林甫)의 고기 : 당 현종(唐玄宗) 때에 이임보(李林甫)가 19년 동안 벼슬하면서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병을 전횡한 결과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일으키게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살을 씹어먹어야 난리가 평정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온 말임. 《당서(唐書)》 권226.○兩司合啓, 及第李山海依律定罪事, 上不允。 漢陰都正 俔: "伏以, 臣於車駕出宮之日, 以順陵香使, 馳詣闕門, 見諸將之聚集者, 睨視而赴曰: ‘匪降自天, 職竟由人。’ 軍民之赴難者, 曳兵而赴曰: ‘后來其蘇。 簞食可迎。’ 云。 嗚呼! 我先聖開基積累之仁, 曁殿下休養字撫之恩, 爲如何哉? 而至於去邠之日, 反不思如市之歸, 而乃颺言得反之語, 有如是之甚哉? 原其所自, 爲弊非一。 而嬖倖縱臾, 上以蠹天聰, 外以擅威權, 使民心日蔽, 朝政日紊者, 迄保首領故也。 萬口一談, 皆以爲金公諒爲言。 臣耳聞目見, 腸膽俱摧, 涕泣痛哭, 而繼之以血者也。 玄宗誅楊國忠, 而馬嵬之軍始發。 德宗下哀慟之詔, 而奉天之駕得返。 伏願殿下, 念祖宗之舊物, 痛社稷之丘墟, 卽下罪己之敎, 而痛自刻責。 如土木之侈奢, 諸宮之漁奪, 朝廷之不靜, 待夷之失策, 刑賞之不中, 淫祠之崇信, 言路之杜絶, 嬖倖之多門, 內帑之充牣, 賦役之煩苛, 條列愆尤, 矜其詞而慨其文, 布告中外, 因斬金公諒之首, 揭竽而傳示, 則民情胥悅, 爭啖林甫之肉, 士氣增揚, 斗激寇準之膽, 民思裹瘡, 兵不旋踵, 百敗猶思百戰, 何患土崩之患乎?" 傳曰: "今日之事, 是予之罪。 更有何言? 疏陳所懷, 忠懇可嘉。"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90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