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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0일 기사 6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선전관 민종신 등을 인견하고 징병 상황, 적의 형세 등을 묻다

상이 선전관 민종신(閔宗信), 승지 노직(盧稷), 주서(注書) 박정현(朴鼎賢), 가주서(假注書) 한우신(韓禹臣), 검열 김선여(金善餘)·김의원(金義元)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종신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들은 것을 다 말하라. 징병(徵兵)은 어떻게 하였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신은 23일 밤에 나주(羅州)에 도착했는데 감사는 본주(本州)에 있었습니다. 신은 묘시(卯時)014) 에 어명을 전한 다음 군사 1천 명을 신립(申砬)에게 주고 군사 6백 명을 거느리고 29일에 경상 순찰사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순찰사가 ‘이일(李鎰)은 이미 패하고 마침 이지시(李之詩)가 와 있었으므로 그 군사를 지시에게 주어 올라오는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지시의 군사도 패배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군(我軍) 중에 계속 오는 자가 있었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천안(天安)에 이르니 병사 신익(申翌)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방어사 이옥(李沃)이세호(李世灝) 등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신이 익(翌) 등에게 ‘성상께서 이미 거둥하셨는데 어찌하여 경성으로 가지 않는가?’ 하였더니 이옥(李沃)의 말이 ‘그 말이 옳다. 군사를 인솔하고 전진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은 또 길에서 심대(沈岱)를 만나서 역시 같은 말을 하였더니 심대 역시 밤을 무릅쓰고 달려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 병사를 급급히 발송해야겠다. 대군이 일제히 나가지는 못하지만 정병 약간 명을 보낸다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용사(勇士) 1백 명이면 족합니다. 창군(槍軍)은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적세가 어떠한가?’ 하고 물으니, 종신이 아뢰기를,

"애당초 접전한 곳은 김해(金海)·상주(尙州)·밀양(密陽)·충주(忠州)뿐이었는데 이각(李珏)유숭인(柳崇仁)박진(朴晉)을 도와 주었다면 절대로 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박진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고 물으니, 종신이 아뢰기를,

"박진김수(金睟)를 따라 지금 거창(居昌)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신립은 어찌하여 패했는가?’ 하고 물으니, 종신이 아뢰기를,

"새재[烏嶺]를 미처 지키지 못하고 있다가 적이 새재를 넘어 와 밤중에 돌격해 왔으므로 패배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부산포(釜山浦)의 일로(一路)에는 머물러 있는 적병이 없는가?"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1백여 명만이 있다고 합니다. 김해(金海)는 네 번째 싸움에서 비로소 무너졌는데 이유검(李惟儉)이 먼저 성을 빠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검은 도순찰사가 이미 참형시켰다고 하고 서예원(徐禮元)은 간 곳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평의지(平義智)는 왔다던가?’ 하고 물으니, 종신이 아뢰기를,

"현소(玄蘇)평의지가 다 왔다고 합니다. 또 적의 방(榜)을 보니 ‘군현(郡縣)의 백성들은 남자는 보리를 거두어 들이고 여인은 길쌈을 하면서 제각기 가업을 돌보라. 군사들이 법을 범하면 극형에 처하겠다. 천정(天正) 2년 시중(侍中) 평의지(平義智)’라고 서명했다 합니다. 또 ‘우리는 너희 나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치려고 하는데 너희 나라가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와서 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 병사들은 왜 속히 보내지 않는가?"

하니, 김의원(金義元)이 아뢰기를,

"한응인(韓應寅)은 오늘 재송(栽松)에 도착했고 이천(李薦)중화(中和)에 도착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전관은 누구인가?"

하니,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민종신(閔宗信)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5품직을 제수하여 군사를 인솔하고 한응인을 따르게 하라."

하고, 곧 이어 종신(宗信)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공을 세우면 중상(重賞)을 내리겠다."

하니, 종신이 아뢰기를,

"소신도 부모도 안 계신 독신입니다. 어찌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8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임면(任免)

  • [註 014]
    묘시(卯時) : 오전 5시∼7시 사이.

○上引見宣傳官閔宗信, 承旨盧稷, 注書朴鼎賢, 假注書韓禹臣, 檢閱金善餘金義元等。 上謂宗信曰: "爾所聞, 皆言之。 徵兵則何以爲之?" 宗信曰: "臣二十三日, 夜到羅州, 監司在本州。 臣卯時宣命, 以一千軍兵, 授申砬, 臣率六百人, 二十九日往慶尙巡察使所在處。 則巡察使言: ‘李鎰已敗, 而李之詩適來。 故以其軍授之詩, 使遏上來之賊, 而其軍見敗矣。’" 上曰: "我軍有繼來者乎?" 宗信曰: "元均下海, 攻破賊船三十餘艘云。 臣到天安, 兵使申翌率萬兵, 防禦使李沃李世灝等, 亦在其地。 臣謂等曰: ‘自上已移蹕, 何不赴京城乎?’ 李沃曰: ‘此言是矣。 當率兵前進云。’ 臣路逢沈岱, 亦言其由, 則沈岱亦冒夜馳往矣。" 上曰: "此處之兵, 當汲汲發送。 大軍雖未及齊進, 若遣精兵若干, 則可以掎角。" 宗信曰: "勇士一百名足矣。 槍軍則不可用也。" 上曰: "賊勢何如?" 宗信曰: "當初接戰處, 只金海尙州密陽忠州而已。 李珏柳崇仁若助朴晋, 則必不至見敗矣。" 上曰: "朴晋何在? 宗信曰: "朴晋金睟, 在居昌。" 上曰: "申砬何以見敗?" 宗信曰: "鳥嶺未及把守, 而賊已踰入, 夜間突入, 故致敗云。" 上曰: "釜山浦一路, 無留賊乎?" 宗信曰: "只有百餘云。 金海四戰始陷, 李惟儉先出城故也。 惟儉, 則都巡察使巳斬之, 徐禮元, 不知去處云。" 上曰: "平義智來乎?" 宗信曰: "玄蘇平義智皆來云。 見賊榜文, 則: ‘郡縣黎民, 男收麥, 女織組, 各管家業。 軍士犯法者, 則極罰焉。 天正二年, 侍中平義智署押。’ 云。 且云: ‘我非惡爾國, 欲伐中原, 而爾國不從, 故來伐之。’" 上曰: "此處之兵, 何不速遣?" 金義元曰: "韓應寅, 今日到裁松, 李薦中和。" 上曰: "宣傳官之名爲誰?" 盧稷曰: "閔宗信。" 上曰: "五品職除授, 使領軍, 隨韓應寅。" 因謂宗信曰: "爾若立功, 當有重賞。" 宗信曰: "小臣獨身無親, 豈惜𨈬命?"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89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