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17권, 선조 16년 8월 5일 갑인 2/4 기사 / 1583년 명 만력(萬曆) 11년
왕자 사부 하락이 이이의 군정이 정당한 일이었으며 삼사가 지나쳤다고 상소하다
국역
왕자 사부(王子師傅) 하낙(河洛)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일개 산야(山野)의 사람으로 오은(誤恩)을 입고서 몇 해를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격일로 사석(師席)에 나가는데, 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두문 불출할 줄만 알고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조정의 이해(利害)와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고 말하지도 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삼사(三司)가 있는 힘을 다해 입을 모아 전 판서(判書) 이이(李珥)를 공격하였으므로 이이가 몸을 끌고 물러가 호연(浩然)히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이는 바로 이이로서는 다행한 일이요 조정으로서는 크게 불행한 일입니다.
이이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신으로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일찍이 친구들의 서로 전하는 말을 통하여 듣건대, 그의 사람됨이 성현(聖賢)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뜻을 돈독히 하고 실천을 힘쓰며 몸가짐과 마음 검속에 있어 오직 고인(古人)을 사모하다가 급기야 세상에 등용되어 성상이 마음을 기울이고 소민들이 크게 기대하게 되자, 그는 몸을 나라에 바칠 생각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위로는 곤직(袞職)을 돕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든 시설(施設)에 있어 폐단을 없애기에만 힘써 시속과 저촉되는 것도 불고하였고,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구습(舊習)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마침 북방 변경의 급한 상황을 당하여 하관의 장[夏官長]042) 이 된 몸으로 군마(軍馬) 조발과 양향(糧餉) 운반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요컨대 변방을 튼튼히 하여 적병(狄兵)을 제어하는 일로서 이는 이이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고 또 성상의 지우(知遇)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비록 소루(疏漏)와 과오(過誤)를 범한 일이 혹 있기도 하였겠지만 그의 본심이야 어찌 고의적으로 전도(顚倒)와 변란(變亂)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언관(言官)들은 번갈아 상소하여 논핵(論劾)하되 처음에는 그의 실책만을 조금 거론하다가 끝에 가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중한 말들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의 차자와 간원(諫院)의 사장(辭章)에서는 간흉(奸兇)한 형상과 궤휼(詭譎)의 태도를 수많은 말로 횡설 수설 못하는 소리가 없었는데, 그 말들이 모두 분질(憤疾)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아, 삼사(三司)란 임금의 귀요 눈이며, 공론(公論)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맡은 바 책임이 얼마나 큰 곳입니까. 그러나 감히 없는 사실을 캐내어 서로 야합하여 남에게 대악(大惡)을 가하려 하고 있다면 그들 소견이 그릇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것 가운데 다투다가 사람을 죽였다느니, 뇌물로 1백 석을 받았다느니 한 것들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 것들로서 더욱 용서할 수 없는 문제들인데, 이이에게 과연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분명히 바로잡아 왕법(王法)을 보여야 할 것이지 보통으로 보아 불문에 부칠 수는 절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장로(長老)에게 말할 때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과 정직한 얼굴로 조금도 속임없이 사실만을 고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시비(是非)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도록 하여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사이에 어떻게 사실도 없고 근거도 없는 부사(浮辭)를 가지고 애써 시청(視聽)을 현혹시키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인심이 불울(拂鬱)하여 여항간에는 논의가 빗발치고 있으며 시론(時論)을 무서워하는 부형(父兄)들이 간혹 자기 자제(子弟)들을 경계시키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 본연의 마음은 똑같기 때문에 시비에 대해서 스스로 금하지 못하여 터져나오는 사례가 흔히 있으며, 심지어 군인(軍人)·무부(武夫)들까지도 하늘을 불러 자기들의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고 싶어하고 있으니, 아아, 이른바 삼사(三司)의 공론 외엔 반드시 또 하나의 다른 공론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아, 이이는 이 시대의 도와 주는 이들이 적은 혼자의 몸으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공적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니 그 뜻은 충성스러운 것이었으나 계책이 소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으로 말하면, 산림의 은일(隱逸)로서 세속의 영욕을 벗어나 도(道)로써 스스로 즐기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털끝만큼도 외물(外物)을 그리워하는 생각은 없고 일생동안 전정(專精)하게 자신을 지킬 마음만 있어, 안으로 실덕(實德)이 쌓여 명성(名聲)이 밖에까지 들림으로써 결국 구중(九重)의 윤음(綸音)을 받고 삼빙(三聘)에 의하여 나왔으니 그의 출처(出處)를 보고 세상의 오륭(汚隆)을 점칠 만한 자입니다. 일찍이 이이와는 도의(道義)로 사귀어 천인(天人)의 학문과 의리(義利)의 구별에 관해 서로 강마(講劘) 절차(切磋)하면서 그 뜻을 끝까지 캐고 그 요점을 알아내는 사이로서 비록 동심 동덕(同心同德)이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지난번 성혼이 성 안에 있을 때 삼사(三司)가 이이를 논핵하기 위하여 옷소매 속에 탄핵문을 넣고 다니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하였는데 이때 성혼의 마음에 만약 이이가 그르다고 생각되었다면 비록 서로 두터운 사정(私情)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거짓으로 소사(疏辭)를 꾸며 발을 끌고 궐정(闕庭)에 들어와 그의 죄악을 덮어줌으로써 전하의 총명(聰明)을 속이겠습니까. 산인(山人)의 마음씀이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이치가 없다는 것은 삼척 동자라도 알 것입니다. 언자(言者)들이 갑(甲)에게서 화난 것을 을(乙)에게로 옮겨 심지어는 ‘붕비(朋比)를 체결하고 밤낮으로 경영하여 성청(聖聽)을 현혹시킴으로써 사림을 망타(網打)하려 한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아아, 산인에 대한 대우치고는 너무 박절하지 않습니까.
한(漢)의 고조(高祖)가 선비를 하찮게 보아 만매(慢罵)하였으나 상산(商山)의 사로(四老)에 대하여는 예하(禮下)043) 하여 그들에게 조호(調護)의 책임을 지우려고까지 하였고, 광무(光武)도 암혈(岩穴)의 선비를 물색 끝에 양구(羊裘) 입은 조수(釣叟)044) 를 만나서는 즉시 와내(臥內)에 들게 하여 그의 배를 어루만져 주었을 만큼 모두 부드럽고 겸허한 예로 임학(林壑)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대우하였고 털끝만큼도 경모(輕侮)하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만세(萬歲)의 계통을 창업하기도 하였고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원(元)의 조굉위(趙宏偉) 같은 사람도 예융(裔戎)의 곤수(閫帥)로서 오히려 금화(金華)의 처사(處士) 허겸(許謙)을 초빙하여 자기 낭료(郞僚)들로 하여금 긍식(矜式)하게 할 줄을 알았고, 명(明)나라 왕진(王振)은 혼매한 조정의 권당(權黨)이었지만, 감히 당시의 명현(名賢) 설선(薛瑄)을 등용하여 그에 의지하여 유지하려고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속마음으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오히려 그들 이름을 사모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당한 이 성명(聖明)의 시대에 이같이 마음을 경악하게 하고 눈을 해괴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성혼을 일러 ‘몸은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서찰이 도하(都下)에 줄을 잇고, 조정 정령(政令)과 인물 진퇴(進退)에 있어 모르는 것이 없으며, 나오고 물러가는 것 역시 군부(君父)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친한 자의 절간(折簡)에 의해서 움직인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성혼은 특별히 산림(山林)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했으며 공명(功名)을 좋아하고 당원(黨援)을 세우는 그야말로 하나의 더럽고도 무상한 사람인 것이며, 직을 사하고 조용히 물러가 견묘(畎畝)에서 스스로 즐기던 그의 전후의 일들도 오직 하나의 간진(干進)을 위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했던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성혼 같은 현자(賢者)로서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으로서는 의혹스럽습니다. 이렇게 되니 인심들이 더욱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을 돌리고 해체(解體)된 상태로 모두 동해(東海) 물가에나 가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상(領相) 박순(朴淳)에 관하여는 그의 사람됨을 신으로서는 더욱 모릅니다. 다만 그는 청신 아결(淸愼雅潔)045) 하고 애인 하사(愛人下士)046) 한다고 들었을 뿐인데 그가 과연 이상의 여덟 글자를 그대로 지킨다면 비록 그를 일러 어진 재상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탑전(榻前)에서의 말이 어찌 소견없이 한 말일 것이며 또 무슨 구무(構誣)·함해(陷害)의 마음이 있어서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죄목 10가지를 하나 하나 세어 극구 저배(詆排)한 것이 윤원형과 이기(李芑)의 간교함과 다름이 없으니, 아아, 성명의 세상에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박순·이이·성혼 3인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붕당을 세우고 세력을 다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인심을 압복(壓服)시킬 말이 못됩니다. 탄장(彈章)047) 이 빗발치듯 하는데 저들이 어찌 구차히 붙어 있으려 하겠습니까. 오늘은 이이가 가고 내일은 박순이 떠나고, 또 내일은 성혼이 떠나고 하여 2∼3일 사이에 조정의 노성(老成)한 사람은 초야로 떠나고 산인(山人)은 도성을 떠난다면, 서로 이어 떠나는 그들이야 한 수레에 몸을 싣고 사이좋게 가겠지만, 기상은 수참(愁慘)하여 보이는 물건마다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성상은 고립(孤立)되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지난날 언관(言官)이 말했던 ‘일망타진으로 나라를 비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 한심할 일이 아닙니까.
대체로 언관이란 말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는 것이어서 언제나 임금을 요(堯)·순(舜)으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기 이전에 규찰하게 되고, 또 신하들도 직(稷)·설(契)같이 만들고자 하여 과실이 있기 이전에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잘못 등용하는 일이 없고 아래서는 실효(實効)를 나타내어야 비로소 함께 치평(治平)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 공정한 마음과 곧은 도(道)로써 나라에 몸바쳐 가정도 잊을 만큼 성실하고 굳굳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언관들도 다 그러한 책임이 있고 모두에게 그러한 충성이 있을 것인데 왜 자기 직책에 맞게 우리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우리 재상을 직·설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는 혹 한둘 과감한 사람이 없지 않아 말과 행동에 있어 전도(顚倒)와 실중(失中)을 면치 못하고, 때를 씻어가며 하자를 찾으려 하고 허물 없는 곳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아아, 말을 했을 때 남이 신복(信服)하게 하려면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상한 위인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오래도록 욕되게 하고 있으나, 내가 가진 실행(實行)이 없으니 어떻게 남에게 실행이 있도록 할 것이며, 내가 가진 실학(實學)이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남에게 실학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린 왕자를 잘 보양(輔養)하지도 못하였고 의혹을 풀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임해군(臨海君)은 사책(史冊)을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강령(綱領)조차 알게 하지 못하였고, 광해군(光海君)도 《소학(小學)》을 이미 마쳤지만 아직 기본(基本)을 배양하지 못하고 다만 말단적인 강설(講說)만 하였지 실득(實得)의 공부가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봉록(俸祿)을 허비하여 태창(太倉)을 축내었으니 신의 죄 하나이며, 그 지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분에 넘치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여 망령되이 시비(時非)를 논함으로써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그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대신의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크게 어겼으니 신의 죄 둘입니다. 몸에 두 가지 죄를 범하였고 행실에 하나도 장점이 없으니 떠나는 것이 도리입니다만, 아직까지 애써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은 다만 왕자(王子)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입니다. 왕자도 서로 저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하물며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위태로운 상황을 목격하자 충담(忠膽)이 저절로 커져서 입을 다물려고 해도 다물 수가 없었고 혀를 가두어 두려고 해도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나가면 화가 따르리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눈물을 거두고 꿇어앉아서 이 우충(愚衷)을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께서 유의하여 살펴주신다면 종사(宗社)와 조정에 매우 다행한 일이며 사류(士類)에게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소사(疏辭)를 보고 그대의 뜻을 충분히 알았다."
하였다.
- [註 042] 하관의 장[夏官長] : 병조 판서를 말함.
- [註 043] 예하(禮下) :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예우함.
- [註 044] 조수(釣叟) : 엄광(嚴光)을 말함.
- [註 045] 청신 아결(淸愼雅潔) : 청백하고 신중하며 마음이 고상하고 깨끗함.
- [註 046] 애인 하사(愛人下士) :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예우함.
- [註 047] 탄장(彈章) : 탄핵하는 글.
원문
○王子師傅河洛上疏曰:
伏以, 臣以一介山野, 蒙被誤恩, 數年都下, 間日師席, 自公而退, 唯知杜門, 不喜交遊, 凡朝廷利害, 人物賢否, 耳無所聞, 口亦不談者久矣。 今者竊聞, 三司同辭, 駁擊前判書李珥, 不遺餘力, 珥乃引身而退, 浩然而歸, 此乃珥之幸而實朝廷之大不幸也。 夫珥之爲人, 臣固不知其爲何如人也。 然而嘗聞之友朋相傳之語, 其爲人也, 好讀聖賢之書, 篤志力行, 持身檢心, 動慕古人, 及其見用於時也, 聖上傾心, 小民加手, 渠乃匪躬徇國, 盡其心而竭其力, 思有以上裨袞職, 而下濟蒼生, 凡百施設, 惟務祛弊, 而不顧忤俗, 訖康民勞, 而不循舊習。 適當北鄙之急, 身爲夏官之長, 調發軍馬, 轉運糧餉, 不得不幷擧於一時, 要以固邊圉而制狄兵者, 是珥之所以欲行其所學, 而報知遇於聖明者也。 其間雖或不免有疎漏過誤之擧, 而原其本心, 則豈故爲顚倒變亂, 以之誤國而病民也哉? 乃者言官, 交章論劾, 始以微擧其失, 終乃漸擧其辭, 日以益重, 至於玉堂之箚, 諫院之辭, 極其奸兇之狀, 盡其詭譎之態, 千言萬語, 橫說竪說, 蓋莫非憤疾之辭。 嗚呼! 三司者, 人君之耳目公論, 其爲任顧不大哉。 而乃敢探摭抯合, 欲加大惡於人, 其所見不亦謬乎? 其中爭訟殺人, 百石受賄等事, 所關至重, 尤不可以容貸, 珥果有之, 則當明正其罪, 以示王法, 不可視以尋常而不問也。 今夫閭巷之人, 言於長老, 必當平心正色, 不欺不誆, 告之以實, 使之曉然, 知是非之所在, 況於君臣父子之間, 安得以無實不根之浮辭, 務以熒惑其視聽哉? 人心拂鬱, 巷議橫馳, 父兄之畏時論者, 間或戒其子弟, 而同然之心, 不能自已, 發而不自禁者, 比比有之。 至於軍人武夫, 亦欲叫號九天, 而訴其情, 嗚呼! 所謂三司公論之下, 難保其必無別生一公論也。 噫! 珥之於時也, 獨立寡助, 欲以成內修外攘之功, 其志則忠矣, 而其計則疎矣。 且成渾以山林隱逸, 高蹈遠引, 懷道自樂者也。 無一毫榮慕外物之念, 有百年專精自守之心, 實德內積, 名聲外聞, 終渙九重之綸, 不免三聘之起, 蓋卜出處而爲世汚隆者也。 早與珥爲道義交, 天人之學, 義利之辨, 相與講劘切磋, 極其趣而會其要, 雖謂之同心同德可也。 頃者渾之在城, 三司論珥, 彈文在袖, 日漸加重, 渾之心, 若以珥爲非, 則雖有相厚之私情, 而豈敢誣飾疏辭, 跛曳闕庭, 以陰覆其罪惡, 而欺罔殿下之聰明哉? 山人之用心, 果如是哉? 雖三尺童子, 決知其無是理也。 言者怒甲而移乙, 至加以: "締結朋比, 晝夜經營, 熒惑聖聽, 欲以網打士林。" 之語。 嗚呼! 待山人, 不其薄耶? 漢之高祖輕士慢罵, 而及其商顔四老, 則禮下, 至煩以調護之責, 光武物色巖穴, 得見羊裘釣叟, 則卽臥內撫其腹, 皆以柔巽謙柔之禮, 施之於林壑退藏之人, 未嘗有一毫輕侮之意。 是以開萬世之統, 致中興之功。 至如元之趙宏偉, 以裔戎閫帥, 猶知延致金華處士許謙, 使其郞僚, 有所矜式, 皇明 王振, 以昏朝權黨, 乃敢引用當世名賢孽瑄, 欲以憑藉維持, 彼二人者, 雖不能中心好之, 而猶知慕其名也。 奈何以堂堂聖明之時, 有此驚心駭目之事乎? 至於謂: "渾托身山野, 而書札絡繹於都下, 朝廷政令, 人物進退, 莫不與知, 而其去就, 亦不在君父, 而在於所親之折簡。" 然則渾特假借山林, 欺世盜名, 利功名, 樹黨援, 一麤鄙無狀之人也, 其前後辭職恬退, 自樂於畎畝者, 只是做得成一箇干進之捿徑爾, 夫謂渾之賢而有是事哉? 臣竊惑焉。 至此而人心愈不勝其憤鬱, 離心解體, 皆欲蹈東海之濱也。 且領相朴淳之爲人, 臣尤不敢知也。 第聞其淸愼雅潔, 愛人下士, 果能保此八字, 則雖謂之賢相, 未爲不可也。 頃者榻前之辭, 豈無所見, 而曷嘗有構誣陷害之心乎? 今乃歷數十罪, 極口詆排, 無異元衡ㆍ李芑之奸, 嗚呼! 在聖明之世, 尙忍言哉! 至於以淳、珥、渾三人相爲表裏, 植黨固勢, 則尤非所以壓服人心者也。 彈章之下, 彼豈敢苟容哉? 今日珥去, 明日淳去, 又明日渾去, 二三日之間, 家髦遜荒, 山人去國, 相繼而逝, 惠好同車, 氣像愁慘, 觸物生悲, 聖上孤立, 無敢言者。 前日言官之辭曰: "網打空人之國" 者, 無乃是耶? 豈不寒心哉! 大抵言官之職, 以言爲責, 常欲堯、舜其君, 故不待有過而糾之, 又欲稷、契其臣, 故不竢致失而責之。 是以上無過擧, 下(無)有實效, 乃能共濟治平之域。 此乃公心直道, 徇國忘家, 斷斷不二者之所爲也。 今之言官, 皆有是責, 皆有是忠, 夫豈不欲稱其職, 而使吾君爲堯、舜, 使吾相爲稷、契哉? 然而其間不無一二果敢之人, 其言辭擧動, 或不免顚倒失中, 洗垢而覓瘢, 求過於無過。 嗚呼! 言出而人信服之者, 恐不如此也。 臣以愚昧無狀, 久叨非據之地, 無在我之實行, (可)〔何〕 以責人之行, 無在我之實學, (可)〔何〕 以勸人之學, 蒙未養而惑未開。 臨海君之史冊垂畢, 而未會其綱領, 光海君之小學已終, 而未培其基本, 徒事講說之末, 而未效實得之功, 費俸祿而耗太倉, 臣之罪一也。 出位犯分言, 所不言妄論時非, 抵觸忌諱, 大違: "居是邦不非之訓。" 臣之罪二也。 身犯二罪, 行無一長, 其義可以去矣, 猶且黽勉强顔而不知止者, 徒以不欲負王子也。 王子猶不欲相負, 況負殿下乎? 目擊時危, 忠膽自大, 口欲緘而不得緘, 舌欲囚而不得囚。 自不知言出而禍隨, 爲之收淚, 而跪陳其愚衷焉。 伏惟聖明, 留神而省察之, 則宗社幸甚, 朝廷幸甚, 士類幸甚。
答曰: "今觀疏辭, 具悉爾意。"
선조실록17권, 선조 16년 8월 5일 갑인 2/4 기사 / 1583년 명 만력(萬曆) 11년
왕자 사부 하락이 이이의 군정이 정당한 일이었으며 삼사가 지나쳤다고 상소하다
국역
왕자 사부(王子師傅) 하낙(河洛)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일개 산야(山野)의 사람으로 오은(誤恩)을 입고서 몇 해를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격일로 사석(師席)에 나가는데, 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두문 불출할 줄만 알고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조정의 이해(利害)와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고 말하지도 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삼사(三司)가 있는 힘을 다해 입을 모아 전 판서(判書) 이이(李珥)를 공격하였으므로 이이가 몸을 끌고 물러가 호연(浩然)히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이는 바로 이이로서는 다행한 일이요 조정으로서는 크게 불행한 일입니다.
이이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신으로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일찍이 친구들의 서로 전하는 말을 통하여 듣건대, 그의 사람됨이 성현(聖賢)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뜻을 돈독히 하고 실천을 힘쓰며 몸가짐과 마음 검속에 있어 오직 고인(古人)을 사모하다가 급기야 세상에 등용되어 성상이 마음을 기울이고 소민들이 크게 기대하게 되자, 그는 몸을 나라에 바칠 생각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위로는 곤직(袞職)을 돕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든 시설(施設)에 있어 폐단을 없애기에만 힘써 시속과 저촉되는 것도 불고하였고,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구습(舊習)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마침 북방 변경의 급한 상황을 당하여 하관의 장[夏官長]042) 이 된 몸으로 군마(軍馬) 조발과 양향(糧餉) 운반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요컨대 변방을 튼튼히 하여 적병(狄兵)을 제어하는 일로서 이는 이이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고 또 성상의 지우(知遇)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비록 소루(疏漏)와 과오(過誤)를 범한 일이 혹 있기도 하였겠지만 그의 본심이야 어찌 고의적으로 전도(顚倒)와 변란(變亂)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언관(言官)들은 번갈아 상소하여 논핵(論劾)하되 처음에는 그의 실책만을 조금 거론하다가 끝에 가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중한 말들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의 차자와 간원(諫院)의 사장(辭章)에서는 간흉(奸兇)한 형상과 궤휼(詭譎)의 태도를 수많은 말로 횡설 수설 못하는 소리가 없었는데, 그 말들이 모두 분질(憤疾)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아, 삼사(三司)란 임금의 귀요 눈이며, 공론(公論)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맡은 바 책임이 얼마나 큰 곳입니까. 그러나 감히 없는 사실을 캐내어 서로 야합하여 남에게 대악(大惡)을 가하려 하고 있다면 그들 소견이 그릇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것 가운데 다투다가 사람을 죽였다느니, 뇌물로 1백 석을 받았다느니 한 것들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 것들로서 더욱 용서할 수 없는 문제들인데, 이이에게 과연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분명히 바로잡아 왕법(王法)을 보여야 할 것이지 보통으로 보아 불문에 부칠 수는 절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장로(長老)에게 말할 때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과 정직한 얼굴로 조금도 속임없이 사실만을 고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시비(是非)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도록 하여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사이에 어떻게 사실도 없고 근거도 없는 부사(浮辭)를 가지고 애써 시청(視聽)을 현혹시키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인심이 불울(拂鬱)하여 여항간에는 논의가 빗발치고 있으며 시론(時論)을 무서워하는 부형(父兄)들이 간혹 자기 자제(子弟)들을 경계시키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 본연의 마음은 똑같기 때문에 시비에 대해서 스스로 금하지 못하여 터져나오는 사례가 흔히 있으며, 심지어 군인(軍人)·무부(武夫)들까지도 하늘을 불러 자기들의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고 싶어하고 있으니, 아아, 이른바 삼사(三司)의 공론 외엔 반드시 또 하나의 다른 공론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아, 이이는 이 시대의 도와 주는 이들이 적은 혼자의 몸으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공적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니 그 뜻은 충성스러운 것이었으나 계책이 소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으로 말하면, 산림의 은일(隱逸)로서 세속의 영욕을 벗어나 도(道)로써 스스로 즐기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털끝만큼도 외물(外物)을 그리워하는 생각은 없고 일생동안 전정(專精)하게 자신을 지킬 마음만 있어, 안으로 실덕(實德)이 쌓여 명성(名聲)이 밖에까지 들림으로써 결국 구중(九重)의 윤음(綸音)을 받고 삼빙(三聘)에 의하여 나왔으니 그의 출처(出處)를 보고 세상의 오륭(汚隆)을 점칠 만한 자입니다. 일찍이 이이와는 도의(道義)로 사귀어 천인(天人)의 학문과 의리(義利)의 구별에 관해 서로 강마(講劘) 절차(切磋)하면서 그 뜻을 끝까지 캐고 그 요점을 알아내는 사이로서 비록 동심 동덕(同心同德)이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지난번 성혼이 성 안에 있을 때 삼사(三司)가 이이를 논핵하기 위하여 옷소매 속에 탄핵문을 넣고 다니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하였는데 이때 성혼의 마음에 만약 이이가 그르다고 생각되었다면 비록 서로 두터운 사정(私情)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거짓으로 소사(疏辭)를 꾸며 발을 끌고 궐정(闕庭)에 들어와 그의 죄악을 덮어줌으로써 전하의 총명(聰明)을 속이겠습니까. 산인(山人)의 마음씀이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이치가 없다는 것은 삼척 동자라도 알 것입니다. 언자(言者)들이 갑(甲)에게서 화난 것을 을(乙)에게로 옮겨 심지어는 ‘붕비(朋比)를 체결하고 밤낮으로 경영하여 성청(聖聽)을 현혹시킴으로써 사림을 망타(網打)하려 한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아아, 산인에 대한 대우치고는 너무 박절하지 않습니까.
한(漢)의 고조(高祖)가 선비를 하찮게 보아 만매(慢罵)하였으나 상산(商山)의 사로(四老)에 대하여는 예하(禮下)043) 하여 그들에게 조호(調護)의 책임을 지우려고까지 하였고, 광무(光武)도 암혈(岩穴)의 선비를 물색 끝에 양구(羊裘) 입은 조수(釣叟)044) 를 만나서는 즉시 와내(臥內)에 들게 하여 그의 배를 어루만져 주었을 만큼 모두 부드럽고 겸허한 예로 임학(林壑)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대우하였고 털끝만큼도 경모(輕侮)하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만세(萬歲)의 계통을 창업하기도 하였고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원(元)의 조굉위(趙宏偉) 같은 사람도 예융(裔戎)의 곤수(閫帥)로서 오히려 금화(金華)의 처사(處士) 허겸(許謙)을 초빙하여 자기 낭료(郞僚)들로 하여금 긍식(矜式)하게 할 줄을 알았고, 명(明)나라 왕진(王振)은 혼매한 조정의 권당(權黨)이었지만, 감히 당시의 명현(名賢) 설선(薛瑄)을 등용하여 그에 의지하여 유지하려고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속마음으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오히려 그들 이름을 사모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당한 이 성명(聖明)의 시대에 이같이 마음을 경악하게 하고 눈을 해괴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성혼을 일러 ‘몸은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서찰이 도하(都下)에 줄을 잇고, 조정 정령(政令)과 인물 진퇴(進退)에 있어 모르는 것이 없으며, 나오고 물러가는 것 역시 군부(君父)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친한 자의 절간(折簡)에 의해서 움직인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성혼은 특별히 산림(山林)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했으며 공명(功名)을 좋아하고 당원(黨援)을 세우는 그야말로 하나의 더럽고도 무상한 사람인 것이며, 직을 사하고 조용히 물러가 견묘(畎畝)에서 스스로 즐기던 그의 전후의 일들도 오직 하나의 간진(干進)을 위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했던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성혼 같은 현자(賢者)로서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으로서는 의혹스럽습니다. 이렇게 되니 인심들이 더욱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을 돌리고 해체(解體)된 상태로 모두 동해(東海) 물가에나 가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상(領相) 박순(朴淳)에 관하여는 그의 사람됨을 신으로서는 더욱 모릅니다. 다만 그는 청신 아결(淸愼雅潔)045) 하고 애인 하사(愛人下士)046) 한다고 들었을 뿐인데 그가 과연 이상의 여덟 글자를 그대로 지킨다면 비록 그를 일러 어진 재상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탑전(榻前)에서의 말이 어찌 소견없이 한 말일 것이며 또 무슨 구무(構誣)·함해(陷害)의 마음이 있어서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죄목 10가지를 하나 하나 세어 극구 저배(詆排)한 것이 윤원형과 이기(李芑)의 간교함과 다름이 없으니, 아아, 성명의 세상에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박순·이이·성혼 3인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붕당을 세우고 세력을 다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인심을 압복(壓服)시킬 말이 못됩니다. 탄장(彈章)047) 이 빗발치듯 하는데 저들이 어찌 구차히 붙어 있으려 하겠습니까. 오늘은 이이가 가고 내일은 박순이 떠나고, 또 내일은 성혼이 떠나고 하여 2∼3일 사이에 조정의 노성(老成)한 사람은 초야로 떠나고 산인(山人)은 도성을 떠난다면, 서로 이어 떠나는 그들이야 한 수레에 몸을 싣고 사이좋게 가겠지만, 기상은 수참(愁慘)하여 보이는 물건마다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성상은 고립(孤立)되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지난날 언관(言官)이 말했던 ‘일망타진으로 나라를 비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 한심할 일이 아닙니까.
대체로 언관이란 말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는 것이어서 언제나 임금을 요(堯)·순(舜)으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기 이전에 규찰하게 되고, 또 신하들도 직(稷)·설(契)같이 만들고자 하여 과실이 있기 이전에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잘못 등용하는 일이 없고 아래서는 실효(實効)를 나타내어야 비로소 함께 치평(治平)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 공정한 마음과 곧은 도(道)로써 나라에 몸바쳐 가정도 잊을 만큼 성실하고 굳굳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언관들도 다 그러한 책임이 있고 모두에게 그러한 충성이 있을 것인데 왜 자기 직책에 맞게 우리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우리 재상을 직·설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는 혹 한둘 과감한 사람이 없지 않아 말과 행동에 있어 전도(顚倒)와 실중(失中)을 면치 못하고, 때를 씻어가며 하자를 찾으려 하고 허물 없는 곳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아아, 말을 했을 때 남이 신복(信服)하게 하려면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상한 위인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오래도록 욕되게 하고 있으나, 내가 가진 실행(實行)이 없으니 어떻게 남에게 실행이 있도록 할 것이며, 내가 가진 실학(實學)이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남에게 실학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린 왕자를 잘 보양(輔養)하지도 못하였고 의혹을 풀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임해군(臨海君)은 사책(史冊)을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강령(綱領)조차 알게 하지 못하였고, 광해군(光海君)도 《소학(小學)》을 이미 마쳤지만 아직 기본(基本)을 배양하지 못하고 다만 말단적인 강설(講說)만 하였지 실득(實得)의 공부가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봉록(俸祿)을 허비하여 태창(太倉)을 축내었으니 신의 죄 하나이며, 그 지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분에 넘치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여 망령되이 시비(時非)를 논함으로써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그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대신의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크게 어겼으니 신의 죄 둘입니다. 몸에 두 가지 죄를 범하였고 행실에 하나도 장점이 없으니 떠나는 것이 도리입니다만, 아직까지 애써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은 다만 왕자(王子)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입니다. 왕자도 서로 저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하물며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위태로운 상황을 목격하자 충담(忠膽)이 저절로 커져서 입을 다물려고 해도 다물 수가 없었고 혀를 가두어 두려고 해도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나가면 화가 따르리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눈물을 거두고 꿇어앉아서 이 우충(愚衷)을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께서 유의하여 살펴주신다면 종사(宗社)와 조정에 매우 다행한 일이며 사류(士類)에게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소사(疏辭)를 보고 그대의 뜻을 충분히 알았다."
하였다.
- [註 042] 하관의 장[夏官長] : 병조 판서를 말함.
- [註 043] 예하(禮下) :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예우함.
- [註 044] 조수(釣叟) : 엄광(嚴光)을 말함.
- [註 045] 청신 아결(淸愼雅潔) : 청백하고 신중하며 마음이 고상하고 깨끗함.
- [註 046] 애인 하사(愛人下士) :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예우함.
- [註 047] 탄장(彈章) : 탄핵하는 글.
원문
○王子師傅河洛上疏曰:
伏以, 臣以一介山野, 蒙被誤恩, 數年都下, 間日師席, 自公而退, 唯知杜門, 不喜交遊, 凡朝廷利害, 人物賢否, 耳無所聞, 口亦不談者久矣。 今者竊聞, 三司同辭, 駁擊前判書李珥, 不遺餘力, 珥乃引身而退, 浩然而歸, 此乃珥之幸而實朝廷之大不幸也。 夫珥之爲人, 臣固不知其爲何如人也。 然而嘗聞之友朋相傳之語, 其爲人也, 好讀聖賢之書, 篤志力行, 持身檢心, 動慕古人, 及其見用於時也, 聖上傾心, 小民加手, 渠乃匪躬徇國, 盡其心而竭其力, 思有以上裨袞職, 而下濟蒼生, 凡百施設, 惟務祛弊, 而不顧忤俗, 訖康民勞, 而不循舊習。 適當北鄙之急, 身爲夏官之長, 調發軍馬, 轉運糧餉, 不得不幷擧於一時, 要以固邊圉而制狄兵者, 是珥之所以欲行其所學, 而報知遇於聖明者也。 其間雖或不免有疎漏過誤之擧, 而原其本心, 則豈故爲顚倒變亂, 以之誤國而病民也哉? 乃者言官, 交章論劾, 始以微擧其失, 終乃漸擧其辭, 日以益重, 至於玉堂之箚, 諫院之辭, 極其奸兇之狀, 盡其詭譎之態, 千言萬語, 橫說竪說, 蓋莫非憤疾之辭。 嗚呼! 三司者, 人君之耳目公論, 其爲任顧不大哉。 而乃敢探摭抯合, 欲加大惡於人, 其所見不亦謬乎? 其中爭訟殺人, 百石受賄等事, 所關至重, 尤不可以容貸, 珥果有之, 則當明正其罪, 以示王法, 不可視以尋常而不問也。 今夫閭巷之人, 言於長老, 必當平心正色, 不欺不誆, 告之以實, 使之曉然, 知是非之所在, 況於君臣父子之間, 安得以無實不根之浮辭, 務以熒惑其視聽哉? 人心拂鬱, 巷議橫馳, 父兄之畏時論者, 間或戒其子弟, 而同然之心, 不能自已, 發而不自禁者, 比比有之。 至於軍人武夫, 亦欲叫號九天, 而訴其情, 嗚呼! 所謂三司公論之下, 難保其必無別生一公論也。 噫! 珥之於時也, 獨立寡助, 欲以成內修外攘之功, 其志則忠矣, 而其計則疎矣。 且成渾以山林隱逸, 高蹈遠引, 懷道自樂者也。 無一毫榮慕外物之念, 有百年專精自守之心, 實德內積, 名聲外聞, 終渙九重之綸, 不免三聘之起, 蓋卜出處而爲世汚隆者也。 早與珥爲道義交, 天人之學, 義利之辨, 相與講劘切磋, 極其趣而會其要, 雖謂之同心同德可也。 頃者渾之在城, 三司論珥, 彈文在袖, 日漸加重, 渾之心, 若以珥爲非, 則雖有相厚之私情, 而豈敢誣飾疏辭, 跛曳闕庭, 以陰覆其罪惡, 而欺罔殿下之聰明哉? 山人之用心, 果如是哉? 雖三尺童子, 決知其無是理也。 言者怒甲而移乙, 至加以: "締結朋比, 晝夜經營, 熒惑聖聽, 欲以網打士林。" 之語。 嗚呼! 待山人, 不其薄耶? 漢之高祖輕士慢罵, 而及其商顔四老, 則禮下, 至煩以調護之責, 光武物色巖穴, 得見羊裘釣叟, 則卽臥內撫其腹, 皆以柔巽謙柔之禮, 施之於林壑退藏之人, 未嘗有一毫輕侮之意。 是以開萬世之統, 致中興之功。 至如元之趙宏偉, 以裔戎閫帥, 猶知延致金華處士許謙, 使其郞僚, 有所矜式, 皇明 王振, 以昏朝權黨, 乃敢引用當世名賢孽瑄, 欲以憑藉維持, 彼二人者, 雖不能中心好之, 而猶知慕其名也。 奈何以堂堂聖明之時, 有此驚心駭目之事乎? 至於謂: "渾托身山野, 而書札絡繹於都下, 朝廷政令, 人物進退, 莫不與知, 而其去就, 亦不在君父, 而在於所親之折簡。" 然則渾特假借山林, 欺世盜名, 利功名, 樹黨援, 一麤鄙無狀之人也, 其前後辭職恬退, 自樂於畎畝者, 只是做得成一箇干進之捿徑爾, 夫謂渾之賢而有是事哉? 臣竊惑焉。 至此而人心愈不勝其憤鬱, 離心解體, 皆欲蹈東海之濱也。 且領相朴淳之爲人, 臣尤不敢知也。 第聞其淸愼雅潔, 愛人下士, 果能保此八字, 則雖謂之賢相, 未爲不可也。 頃者榻前之辭, 豈無所見, 而曷嘗有構誣陷害之心乎? 今乃歷數十罪, 極口詆排, 無異元衡ㆍ李芑之奸, 嗚呼! 在聖明之世, 尙忍言哉! 至於以淳、珥、渾三人相爲表裏, 植黨固勢, 則尤非所以壓服人心者也。 彈章之下, 彼豈敢苟容哉? 今日珥去, 明日淳去, 又明日渾去, 二三日之間, 家髦遜荒, 山人去國, 相繼而逝, 惠好同車, 氣像愁慘, 觸物生悲, 聖上孤立, 無敢言者。 前日言官之辭曰: "網打空人之國" 者, 無乃是耶? 豈不寒心哉! 大抵言官之職, 以言爲責, 常欲堯、舜其君, 故不待有過而糾之, 又欲稷、契其臣, 故不竢致失而責之。 是以上無過擧, 下(無)有實效, 乃能共濟治平之域。 此乃公心直道, 徇國忘家, 斷斷不二者之所爲也。 今之言官, 皆有是責, 皆有是忠, 夫豈不欲稱其職, 而使吾君爲堯、舜, 使吾相爲稷、契哉? 然而其間不無一二果敢之人, 其言辭擧動, 或不免顚倒失中, 洗垢而覓瘢, 求過於無過。 嗚呼! 言出而人信服之者, 恐不如此也。 臣以愚昧無狀, 久叨非據之地, 無在我之實行, (可)〔何〕 以責人之行, 無在我之實學, (可)〔何〕 以勸人之學, 蒙未養而惑未開。 臨海君之史冊垂畢, 而未會其綱領, 光海君之小學已終, 而未培其基本, 徒事講說之末, 而未效實得之功, 費俸祿而耗太倉, 臣之罪一也。 出位犯分言, 所不言妄論時非, 抵觸忌諱, 大違: "居是邦不非之訓。" 臣之罪二也。 身犯二罪, 行無一長, 其義可以去矣, 猶且黽勉强顔而不知止者, 徒以不欲負王子也。 王子猶不欲相負, 況負殿下乎? 目擊時危, 忠膽自大, 口欲緘而不得緘, 舌欲囚而不得囚。 自不知言出而禍隨, 爲之收淚, 而跪陳其愚衷焉。 伏惟聖明, 留神而省察之, 則宗社幸甚, 朝廷幸甚, 士類幸甚。
答曰: "今觀疏辭, 具悉爾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