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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2월 15일 무술 2번째기사 1583년 명 만력(萬曆) 11년

병조 판서 이이가 관리의 잦은 교체, 양병, 재용, 전마, 수세 등에 대해 상소하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었다.

"우리 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과 밖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이렇게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하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 경원(慶源)의 적으로 말하면 1∼2년만에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 병위(兵威)를 한번 떨쳐 그들의 소굴을 소탕해 버리지 않는다면 육진(六鎭)은 평온을 누릴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둘러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길러 후일의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때그때 미봉책만 쓰려 든다면 어찌 한 모퉁이에 있는 적만이 걱정거리이겠습니까. 아마 뜻밖의 환란이 말할 수 없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은 원래 부유(腐儒)로서 외람되이 병관(兵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며 생각한 나머지 감히 한 가지 계책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강만을 아뢰고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면대(面對)하여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그 조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세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네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입니다.

현능을 임용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체가 있는 것이니 임금이 위에서 조종하면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현자(賢者)가 위(位)에 있고 능자(能者)가 직(職)에 있으면서 제각기 성의와 재주를 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관직을 제수할 때면 의당 사람을 고르고는 있지만 아침에 임명하고 저녁에 딴 곳으로 옮겨버려 자리가 따스해질 겨를이 없으므로, 비록 그가 임무를 다하고 싶더라도 다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공(周公)·소공(召公)·이윤(伊尹)·부열(傅說)과 같은 어짐과 재주가 있을지라도 오늘 사도(司徒)를 맡겼다가 내일은 사구(司寇)를 맡긴다면 치적은 이루지 못하고 분주히 수고롭기만 할 뿐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만큼 어질지도, 재주가 있지도 않은 자이겠습니까.

지금 관리가 자주 바뀌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정병(呈病)이고, 둘째는 피혐(避嫌)입니다. 정병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뭇 신하에게 하교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실(實)을 힘쓰고 형식적인 습속을 따르지 말 것이며, 실제로 병이 아니면 정사(呈辭)를 못하도록 하고, 간혹 병을 핑계대는 자가 있으면 드러나는 대로 규치(糾治)하며, 반드시 열흘 동안 병을 앓아야지만 비로소 정사를 허락하고, 첫 번째 정사를 한 후 열흘이 지난 후에야 재차 정사하게 하고, 두 번째 정사 후 또다시 열흘이 된 후라야지만 비로소 삼차 정사를 허락할 것이며, 만약 같은 관아에서 한 관원이 정사를 하였으면 다른 관원은 함께 정사를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병이 있어 부득이 함께 정사를 해야 할 때는 반드시 그 관아 전체가 회의를 하여 입계(入啓)한 연후에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병하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혐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무릇 대간(臺諫)에 있어 합당치 않은 인물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혐 때문에 체차(遞差)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대간이 비록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았고 사헌부(司憲府)를 추고할 경우에는 사간원(司諫院)에다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요순(堯舜)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면 대관(大官)들은 추고를 당하고도 행공(行公)을 하는데 그들에 대하여는 별로 염치에 관계되지 않는 것처럼 넘기면서도 유독 대간에 있어서만은 반드시 성현(聖賢)이 되기를 요구하여 털끝만한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체차를 하고야 맙니다. 임금의 이목이 되고 있는 그들이 자주 바뀌면 공론이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되니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체통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파가 자연 다른 관(官)에까지 파급되어 역시 자주 체차가 있게 되니, 모든 치적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사(古事)를 상고하여 대간이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는다는 규정을 부활하여야만 피혐의 폐단이 바로잡아지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자주 바뀌어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나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그 자리를 오래 맡겨놓는 것이나 치적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대소 관원에 있어 일반 규정에만 얽매이지 말고 널리 현재(賢才)를 찾아모아 적재 적소에 임명하도록 힘쓰고, 대관을 제수할 때는 반드시 대신들의 뜻을 물어서 가려 임명하실 것이며, 일단 인재를 얻어 믿고 맡겼으면 뜬 말로 인한 동요가 없어야만 현자에게 맡기고 능자를 부리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養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夫差)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사방이 곤궁한데 당장 대적(大敵)이라도 나타난다면, 비록 제갈양(諸葛亮)이 앉아 계략을 짜고 한신(韓信)·백기(白起)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발하려 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삼지 않겠습니까. 이는 모든 색군사(色軍士)의 임무가 괴롭고 수월함이 고르지 않아 수월한 자는 그런대로 견디지만 괴로운 자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데 일단 도망을 가면 그 일족(一族)이 책임을 지게 되어 연쇄적으로 화(禍)가 번져 가서 심한 경우엔 마을 전체가 몽땅 비는 사례까지 있게 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현능(賢能)한 자를 각별히 선택하여 국(局)을 설치하여 군적(軍籍)을 관장하게 하고 괴롭고 수월한 자를 서로 교대시켜 그 역(役)을 균등하게 하며, 군사가 도망간 지 3년이 지나면 한정(閑丁)을 다시 모집하여 그 자리를 메우는 등, 반드시 모든 색군사가 다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족이 책임을 지는 폐단을 없앤다면 군민(軍民)의 힘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밖의 휴양(休養)·생식(生息) 등에 관한 규정은 국(局)을 설치한 뒤 그 일을 맡은 자가 강구하면 되는 것이며, 훈련 방법에 있어서는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

재용을 풍족하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족병(足兵)은 족식(足食)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1백만 군대가 하루아침에 흩어지게 되는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가 저축은 1년도 지탱 못할 빈약한 것이니, 참으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위아래가 이러한 걱정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재정을 늘릴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니, 큰 적이라도 나타나 남쪽이나 북쪽에서 돌진하여 온다면 무엇으로 군량(軍糧)을 할 것입니까. 국가의 저축이 날로 줄어드는 원인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수입은 적은데 지출이 많은 것이고, 둘째 수세(收稅)를 맥도(貉道)로 하는 것004) 이며, 세째 제사(祭祀)가 번독(煩黷)한 것입니다. 수입은 적고 지출이 많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은 많았는데 씀씀이는 넓지 않았으므로 1년이면 반드시 남는 것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가 거듭된 끝에 홍부(紅腐)005) 현상까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년 세입으로 그해 1년의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는 데다 권설(權設)006) 은 날로 불어나고 용관(冗官)007) 은 너무도 많아서 해마다 숙저(宿儲)로 경비를 메워 왔으므로 2백 년이나 된 이 나라에 단 1년의 비축도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입을 헤아려 세출을 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관(官)과 무익한 지출을 일체 혁파하며, 전수(典守)의 관 역시 규획을 엄하고 분명히 하여 도난을 당하지 않게 하여야만 비로소 바닥이 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수세를 맥도로 한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10분의 1의 조세를 받았으나 공용(公用)이 모자라지 않았고 백성들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조종조에서 9등급으로 수세를 하였던 바 그 법이 세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관리는 게을러지고 백성들은 완악하여져서 번번이 급재(給災)008) 를 해주는 것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지금은 하지하(下之下)를 상지상(上之上)으로 삼더라도 급재하지 않은 전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국용(國用)이 어찌 바닥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세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어진 수령(守令)이라도 감히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생(民生)은 날로 곤경에 빠지고 요역(徭役)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해결해 주지 않고서 오직 급재를 하지 않는 것만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한다면 적자(赤子)들이 더욱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전역(田役)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加稅)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끝내 공사간에 풍족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제사가 번독하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의 성제(聖帝)·명왕(明王)이 누가 대효(大孝)가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제사에 있어서는 번독하지 않은 것을 귀히 여겼으므로 종묘(宗廟)에는 월제(月祭)만을 지냈고 원묘(原廟)는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이후로 원묘를 두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이미 고제(古制)가 아닌 데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잘못 전래되어 지금은 일제(日祭)를 지내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너무나 번독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종묘와 각릉(各陵)에는 삭망제(朔望祭)를 행하고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는 삼시제(三時祭)를 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물론 조종(祖宗)을 추원(追遠)하는 성효(誠孝)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시절 성왕들의 제도에 비한다면 번란(煩亂)하다는 경계를 피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사는 정성과 정결함이 중요한 것인데, 문소·연은 두 전(殿)에는 하루 세 번 제사를 올리므로 주관하는 자가 권태를 느끼고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음식도 정하게 잘 익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릇도 깨끗이 씻지 않아 정성도 없고 정결하지도 못하니 신(神)도 틀림없이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효도가 어디 거기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제사도 양감(量減)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나라 전체에 저장된 곡식이 없어 한 해 흉년든 정도가 아닌데 어찌 변통(變通)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종묘에만은 종전대로 삭망제를 올리고, 각능에는 네 명일(名日)에만 제를 올리고 문소전·연은전에는 하루 한 차례만 행하고 나머지 두 때는 폐지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을 재계하고 찬수를 정결히 하여 정성을 다한다면 제왕의 효도에 있어 조금도 손색될 것이 없고 오히려 빛이 날 것이며, 제수(祭需) 비용도 3분의 1은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종의 영령께서도 대업을 넓히고 기지를 개척하시는 성상의 성효에 감동하여 향기로운 제사에 더욱 흠향하실 것입니다.

번병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이 복심(腹心)이라면 사방은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지만 복심이 믿는 데가 있어 안정을 누릴 것인데, 지금 사방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잔폐(殘弊)되어 있는 데다 감사(監司)까지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도주(道主)가 어느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가령 포악한 적이 불의에 나타나 사납게 쳐들어온다면 감사가 비록 창졸간에 절제(節制)를 하려고 해도 백성들이 서로 믿지를 않아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잔한 작은 고을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민력(民力)이 신장되도록 하고 감사를 골라 임명하되 오래 맡겨 은위(恩威)가 도 전체에 미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신복(信服)하도록 만든다면, 평상시에는 휴양(休養)이 될 것이고 유사시에는 적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니 울타리가 튼튼해지고 나면 국가는 반석같이 안정이 될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의 권한이 너무 커질까 의심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감사로 임명되면 모두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데 오래 있는 자는 10여 년씩 있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권한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양계(兩界)를 맡아 가면 그 재임 기간이 24개월에 불과하고 다른 도도 이와 비슷한데, 그 2년 동안에 어떻게 한 도(道)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만 제대로 고른다면 권한이 커지는 것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전마(戰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나라 안에는 전마가 몹시 귀하여 혹시 군대(軍隊)를 조발(調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보졸(步卒) 밖에는 쓸 수 없으니, 말탄 저들과 보졸인 우리가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지금 섬에 있는 말도 문서에만 있고 실지의 수는 적어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가령 고실(故失)009) 이 없다손 치더라도 섬에 흩어져 있어서 야수(野獸)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유사시에는 쓸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외(京外)의 무사(武士)들 중 기사(騎射)에 능한 자들을 골라 재주를 시험하여 그중의 우등자를 뽑은 다음 그들을 목장(牧場)으로 보내 본도의 도사(都事) 또는 본읍의 감목관(監牧官)과 함께 감목(監牧)을 하게 하면서 그 무사들로 하여금 목장에서 전용(戰用)에 적합한 장마(壯馬)를 스스로 고르게 하되 입격(入格)한 성적 순위로 나누어 준 다음 말의 털빛과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등의 척촌수(尺寸數)를 기록한 적(籍)을 세 부 작성, 1부는 병조(兵曹)로 올리고, 1부는 사복시(司僕寺)로 보내고, 1부는 본관(本官)에다 비치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타는 말은 자신이 잘 먹이게 하여 매년 말(末)에 서울은 사복시에서, 외지는 본읍에서 각각 그 비척(肥瘠)을 살펴 상과 벌을 내리고, 만약 말이 죽었을 경우에는 관에 고하여 검시(檢屍)를 받고, 그것이 지급받은 후 5년 이내에 죽은 것이면 값을 따져 징수하고 만약 5년이 넘어서 죽었으면 값을 징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변(事變)이 닥쳤을 때는 적(籍)을 살펴 그것들을 전마(戰馬)로 수용하며 그 사람이 만약 종군(從軍)을 한다면 그 말은 자신이 타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섬의 말들이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탈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마(唐馬)·호마(胡馬)도 널리 무역하여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면 무업(武業)에 종사하는 자는 말이 없을까를 걱정하지 않게 되고 국가는 국가대로 유사시에 대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화를 밝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傳)에도 있듯이 ‘옛부터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孟子)도 이르기를 ‘어진 자로서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운 자로서 자기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는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설사 식량이 충분하고 군대가 족하더라도 인의(仁義)가 없다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풍속이 박악(薄惡)하고 의리(義理)가 모두 없어진 것은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지만, 역시 교화(敎化)가 제대로 안 되어 강유(綱維)를 진작시킬 수 없는 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오기(吳起)는 일개 웅걸한 장군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말에도 ‘도(道)로 편안하게 하여 주고, 의(義)로 다스리며, 예(禮)로 움직이고, 인(仁)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이니, 이상의 네 덕[四德]을 잘 닦으면 흥하고 폐하면 쇠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禮)로 가르치고 의(義)로 격려하여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을 알면 크게는 전쟁을 치를 수 있고 작게는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기도 오히려 이러한 말을 남겼는데, 하물며 지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어찌 교화(敎化)가 급선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 우선 주자(胄子)부터 가르치기 시작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의 관(官)부터 적임자를 골라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고, 외방 군읍(郡邑)의 교관(敎官)들도 비록 다 적임자를 골라 둘 수는 없을지라도 역시 별도의 계책을 세워 유풍(儒風)을 일으킴으로써 점점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이 스며들게 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포기해 버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85면
  • 【분류】
    교통-마정(馬政)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윤리(倫理)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진상(進上)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04]
    수세(收稅)를 맥도(貉道)로 하는 것 : 소득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받는 것으로, 세금을 적게 받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오랑캐는 국가의 체모가 갖추어지지 않아 재용(財用)이 많지 않으므로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받아도 되지만 국가의 체모를 갖춘 국가로서는 요순이 정한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받아야 된다고 하였음.
  • [註 005]
    홍부(紅腐) : 오래 된 곡식의 색깔이 변함.
  • [註 006]
    권설(權設) : 임시로 설치한 관이나 관작.
  • [註 007]
    용관(冗官) :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벼슬이나 벼슬아치.
  • [註 008]
    급재(給災) : 재해를 입은 논밭의 전세를 면제함.
  • [註 009]
    고실(故失) : 죽거나 잃어버림.

○兵曹判書李珥啓曰: "我朝昇平已久, 恬嬉日甚, 內外空虛, 兵食俱乏, 小醜犯邊, 擧國驚動, 倘有大寇侵軼, 則雖智者無以爲計。 古語有之,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今之國事, 無一可恃, 敵至必敗。 言念及此, 心寒膽破。 況今慶源之寇, 非一二年可定。 若不一振兵威, 蕩覆巢穴, 則六鎭終無寧靖之期。 今不汲汲圖治蓄力, 以爲後計, 而因循牽補, 則豈(持)〔特〕 一隅之賊爲可虞哉? 竊恐意外之患, 有不可勝言。 臣本腐儒, 濫忝兵官, 夙夜焦思, 敢獻一得。 而只陳梗槪, 其間曲折, 則必須面對細達矣。 其目則一曰任賢能, 二曰養軍民, 三曰足財用, 四曰固藩屛, 五曰備戰馬, 六曰明敎化。 所謂任賢能者, 爲國有要, 君措於上, 不勞而治者, 由賢者在位, 能者在職, 各效其誠與才故也。 今之授官, 固皆擇人, 而朝拜暮遷, 席不暇暖, 雖欲察任, 其道無由。 雖以之賢且才, 若今日授司徒, 明日除司寇, 則必不能成績, 只奔走勞苦而已。 況非賢才乎? 今玆數易, 有二道焉, 一曰呈病, 二曰避嫌。 欲矯呈病之弊, 則下敎群臣, 務實而不徇俗, 非實病則不呈辭, 間有托疾者, 隨現糾治, 必病滿一旬, 然後始呈辭, 初度滿一旬, 然後再呈, 再度滿一旬, 然後始許三呈。 若一司一員呈辭, 則他員不得竝呈。 如有疾病, 不得已竝呈, 則必一司僉議入啓, 然後始呈。 如是則可矯呈病之弊。 欲矯避嫌之弊, 則凡臺諫除人物不合者外, 宜不以避嫌遞差。 祖宗朝臺諫雖被推不遞, 司憲府推考, 則下司諫院云。 人非, 豈能每事盡善? 今之大官被推行公者, 別無傷於廉恥, 而獨於臺諫, 必責以聖賢, 毫髮鎦銖之失, 必至於遞耳。 司數易, 公論靡定, 固非爲國之體。 而因此遷移他官, 亦至數遞, 庶績之敗, 職此之由。 臣意請考古事, (後)〔復〕 臺諫被推不遞之規, 然後可矯避嫌之弊矣。 但數易而失其任, 與久任而非其人, 同歸於不治。 自今大小之官, 不拘常規, 廣收賢才, 務在人器相當, 而若大官之際, 必詢問大臣而擇差, 苟得其人而信任之, 則毋使浮言動搖, 然後庶有任賢使能之實矣。 所謂養軍民者。 養兵, 以養民爲本, 不養民而能養兵者, 自古及今, 未之聞也。 夫差之兵, 無敵於天下, 而卒僨其國, 由不養民故也。 今之民力已竭, 四方蹙(之)〔蹙〕 , 目今有大敵, 則雖使諸葛坐謀, 領衆, 亦無如之何矣。 何者? 無兵可調, 無粟可食, 雖智豈能(如)〔爲〕 無麪之不托乎? (比)〔此〕 由諸色軍士苦歇不均, 歇者稍保, 而苦者必逃, 逃則侵責一族, 展轉蔓禍, 甚至於一村皆空故也。 臣意別擇賢能設局, 委以軍籍, 推移苦歇, (或)〔式〕 均其役, 而軍士逃亡過三年者, 更括閑丁, 以充其代, 必使諸色軍士皆得支保, 而無侵徵一族之患, 則可紓軍民之力。 其他休養生息之規, 則設局之後, 任事者可以講究矣, 至於訓鍊之術, 則亦待養民, 然後可議也。 所謂足財用者。 足兵, 以足食爲本。 百萬之兵, 一朝可散者, 由無食故也。 今之國儲, 不支一年, 眞所謂國非其國者也。 上下昭見此患, 而只諉之無可奈何, 不思生財之道。 儻有大賊, 自南自北衝突而入, 則以何物爲軍糧乎? 國儲之日縮, 有三焉。 一曰入寡出多, 二曰貉道收稅, 三曰祭祀煩黷。 入寡出多云者, 祖宗朝稅入者多, 而費用不廣, 故一年必有贏餘, 如是積年, 至於紅腐, 勢固然矣。 今者一年之入, 不能支一年之出, 而權設日滋, 冗官太多, 每以宿儲供經費, 二百年積累之國, 無一年之蓄, 誠可痛心。 臣意量入爲出, 盡革不急之官, 無益之費, 而典守之官, 嚴明規畫, 不被偸竊, 然後庶不至罄竭矣。 貉道收稅云者, 古者什一而稅, 公用不乏而民亦無怨。 祖宗朝以九等收稅, 設法非不詳密, 而行之旣久, 吏怠民頑, 每以給災爲要譽之資, 今則以下之下爲上之上, 而一國之田, 不給災者無幾, 國用安得以不匱哉? 勢至於此, 雖守令之賢者, 不敢不給災者, 以民生日困, 徭役多端。 若不解倒懸, 而只以不給災爲不負國, 則赤子尤不能支, 仁人君子, 豈能忍之乎? 爲今之計, 莫如改定貢案, 使田役減其十分之七八, 然後可量宜加稅, 以裕國用也。 不然, 則公私終無足用之時矣。 祭祀煩黷云者, 古之聖帝明王, 孰非大孝, 而祭祀以不黷爲貴, 宗廟不過月祭, 而無原廟。 自以下始設原廟, 已非古制, 輾轉承訛, 至於日祭, 則其黷陋矣。 國家於宗廟、各陵行朔望祭, 於文昭延恩殿行三時祭, 此固出於祖宗追遠之誠孝, 而比於唐虞三代聖王之制, 則難避煩亂之戒矣。 祭祀主於誠潔, 而文昭延恩兩殿, 日上三祭, 故主者心怠, 狃於尋常, 饌物器皿, 熟設不精, 洗拭不淨。 不誠不潔, 神必不顧, 帝王之孝豈在於此? 古者年凶, 則量減祀典, 況今擧國無儲, 非止年凶而已, 豈無變通之道乎? 臣意, 惟宗廟依前祭以朔望, 而各陵則只祭以四名日, 文昭延恩殿則只行一祭, 而廢二時之祀。 夫如是而齋心潔饌, 極其誠虔, 則於帝王之孝, 小無所損, 反爲有光, 祭需之費, 可減三之一焉。 祖宗之靈, 於聖上恢業拓基之誠孝, 有所感動, 而益享苾芬之祀矣。 所謂固藩屛者。 京師是腹心, 而四方是藩屛也。 藩屛完固, 然後腹心有所恃而安, 今之四方群邑, 無不殘弊, 而監司數易, 民不知道主之爲何人, 設使暴寇, 出於不意, 風馳電擊, 則監司雖欲倉卒節制, 民不相信, 令不(孛)〔素〕 行, 安能有所爲乎? 此必敗之道也。 臣意, 請合殘弊小邑爲一, 以紓民力, 選擇監司而久任之使, 以恩威著於一道, 而民素信服, 則平時可以休養, 緩急可以禦侮, 藩屛旣固, 則國家有盤石之勢矣。 或以監司之權太重爲疑, 此則不然。 中朝之任監司, 莫不率眷, 而久任者或十餘年, 未聞以此虞其權重也。 況今兩界之任, 不過二十四朔, 他道不過倣此而已, 二年之間, 寧有自制一道, 不從朝命者乎? 旣擇其人, 則權重之患, 非所慮也。 所謂備戰馬者。 今之國中, 戰馬最貴, 倘有調發軍馬之事, 則只用步卒而已, 彼騎我步, 何以相敵? 今之島馬, 有籍而無其實, 歲損月耗, 假使不至故失, 散處諸島, 無異野獸, 緩急無以爲用。 臣意京外武士善騎射者, 試其才取其優等者, 使往牧場, 本道都事及本邑監牧官同監, 使武士就場中, 自擇壯馬之可合戰用者, 以入格之次分給, 而錄其禾毛色, 大小高低尺寸之數, 爲三籍。 一上于兵曹, 一送于司僕寺, 一留于本官。 使之善飼自騎, 每年終, 京則司僕寺, 外則本邑, 察其肥瘠, 以行賞罰, 若馬斃, 則告官檢馬屍, 若死於五年之內, 則量徵其價, 若死於五年之外, 則不徵其價。 臨事變, 則按籍收取, 以爲戰馬, 若其人從軍, 則許令自騎。 如是, 則島馬不積於無用, 而臨戰有馬矣。 至於廣貿唐馬ㆍ胡馬, 亦以此法, 分授武士, 則業武者不患無馬, 而國有緩急之資矣。 所謂明敎化者。 傳有之: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孟子》曰: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假使足食足兵, 苟無仁義, 則寧有維持之勢乎? 今之風俗薄惡、義理都喪者, 固出於飢寒切身, 不顧廉恥, 而亦由敎化不明, 無以振起綱維故也。 吳起一將之雄耳, 其言尙曰: ‘綏之以道, 理之以義, 動之以禮, 撫之以仁, 此四德者, 修之則興, 廢之則衰。’ 又曰: ‘凡制國治軍, 必敎之以禮, 勵之以義, 使有恥也。 夫人有恥, 在大足以戰, 在小足以守矣。’ 吳起猶有此說, 況今聖王爲國, 豈不念敎化之爲先務哉? 蚩蚩之氓, 一朝不可遽敎, 當自敎冑子始。 臣意太學及四學之官, 先擇其人, 使敎士子, 而外方郡邑之敎官, 雖不能盡得其人, 亦宜別爲規畫, 以興起儒風, 漸及於氓俗, 不宜置之無可奈何之地而已也。"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85면
  • 【분류】
    교통-마정(馬政)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윤리(倫理)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재정-진상(進上) /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