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9월 26일 계묘 2번째기사 1573년 명 만력(萬曆) 1년

헌부가 공판 피해는 백성 목숨, 창름 고갈, 염치의 도에 관계된다며 파기를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공판(公辦)에 관한 일은, 그 폐해를 논한다면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인데 고루한 소견에 견제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옹원(司饔院)·예빈시(禮賓寺)·풍저창(豊儲倉)이 궐내(闕內)·궐외(闕外)에서 공궤하는 식례(式例)와 횡간(橫看)132)《대전(大典)》133) 의 본의를 살펴보니, 사옹원 옹인(饔人)의 일은 궐내의 공궤를 맡는 것이고 예빈시의 직무는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에 대한 공궤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밖에 크게는 육조(六曹)부터 작게는 소각사(小各司)의 당상(堂上)과 참상(參上)·참하(參下)에게 지공(支供)하는 미태(米太)·염장(鹽醬)·어염(魚鹽) 따위는 나누어 주는 데 정수가 있고 차등이 있으나 본아문(本衙門)이 익혀 장만하여 공궤한다는 글이 따로 없으니, 법을 세운 당초에는 필시 중국에서 월봉(月俸)으로 주는 것을 본떠서 각각 스스로 공궤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공판의 창설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백성을 해롭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폐해가 백성의 목숨에 미치는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음식을 전복(典僕)에게 장만하도록 책임지우는데 주인이 항상 먹는 음식물을 바치는 이외에 유연(遊宴)에 드는 것과 영전(迎餞)에 드는 것을 제멋대로 외람되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전복이 파산하여 떠돌게 되고 사주인(私主人)이 멋대로 탐학을 부리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창름(倉廩)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관사(官司)는 직무가 긴급하고 헐한 것이 고르지 않아 좌기(坐起)134) 가 드물고 잦은 것에도 차이가 있는데 횡간은 한가지로 차별이 없으니, 얼마 안 되는 창름이 비게 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혹 더하거나 줄이는 등 어찌 알맞게 하는 규례가 없겠습니까. 전곡(錢穀)의 일을 고직(庫直)·서원(書員)에게 장만하도록 요구하므로 관원으로서도 훔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금지하지를 못합니다.

세째, 염치의 도가 없어진 것입니다. 본부(本府)가 금속(禁贖)135) 을 징수하는 것과 간원이 표피(豹皮)나 화악(花萼)같은 것의 쟁송을 판결하는 일이 더없이 해괴합니다. 심지어 태복(太僕)136) 이 마료(馬料)를 나누어 먹고 전생서(典牲署)와 사축서(司畜署)가 축름(畜廩)을 훔치는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짐승과 먹이를 다투는 것입니다.

네째, 궁궐이 엄하지 않은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가(私家)의 연회는 폐단을 끼치는 것을 통렬히 고쳤으나 각사가 베푸는 영전은 여전하며, 소를 잡는 것은 금령(禁令)이 있으나 사대부가 서로 마주하여 마음대로 먹으면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함부로 매매하는 데에는 해당되는 죄가 있으나 각사가 저자에서 약탈하는 것이 마치 당(唐)나라 때의 궁시(宮市)137) 와 같아서 상민(商民)이 직임을 잃게 되고 물가가 뛰어 오르게 됩니다. 공판을 없앤다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어찌 넓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조(吏曹)가 생각을 국가에 두지 않고 사람들의 청탁에 따라 구차하게 빈 벼슬자리에 채울 것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인하여 그 사례(事例)를 거론한 다음 파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고 공판에 관한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재정-공물(貢物) / 사법-탄핵(彈劾)

  • [註 132]
    횡간(橫看) : 보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줄줄이 내려 붙여 적지 않고 요즈음의 일람표처럼 항목에 따라 줄을 긋고 가로 벌여 적은 세출 예산표.
  • [註 133]
    《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약칭.
  • [註 134]
    좌기(坐起) : 당상관의 출사.
  • [註 135]
    금속(禁贖) : 금령(禁令)을 어긴 자가 법에 따라 형벌을 면하기 위해 내는 금품.
  • [註 136]
    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의 별칭.
  • [註 137]
    궁시(宮市) : 궁 안에 개설하는 시장. 당 덕종(唐德宗) 때에 환관(宦官)을 궁시사(宮市使)로 삼아 물건을 강제로 사들였다. 《당서(唐書)》 권4 중종기(中宗紀).

○府啓: "公辦一事, 論其害, 則在所必革, 而掣肘於固陋之見。 臣等取見司饔院、禮賓寺、豊儲倉闕內外供饋式例橫看及大典本意, 則司饔院饔人之役, 掌闕內供饋也。 禮賓寺之爲司, 主賓客宴享供饋也。 外此而大而六曹, 至小各司堂上及參上參下之供, 若米太鹽醬魚鹽之屬, 其俵發有數有差, 而別無本衙門熟辦供餉文字, 則當立法初, 必倣 中朝月俸之給, 使各自爲供, 而公辦之設, 不知起於何時, 毒生民、毁風俗, 一至於此也。 一曰害及民命: 各司飮食, 責辦典僕者, 貢物主人嘗食之外, 遊宴之具, 迎餞之設, 無不恣意濫行, 典僕之破産流離, 私主人之刀澄虐取, 勢使然也。 二曰倉廩虛竭: 大小之司, 職務之緊歇不均, 坐起之踈數有異, 橫看則一樣而無別, 稍廩之歸虛者必多。 其或加或減, 豈無適中之規乎? 錢穀之事, 責辦於庫直、書員, 故爲官員者, 坐視偸竊, 不能禁止。 三曰廉恥道喪:本府之徵禁, 贖諫院貿豹皮信花萼, 最其可駭, 而甚至太僕之分馬料, 典牲司畜之竊畜廩, 原其本, 則與禽獸爭食。 四曰宮闕不嚴:大小家宴私會, 痛革貽弊, 而各司迎餞之設猶舊也。 屠牛有其禁也, 士大夫相對而恣食, 無恥濫市, 有其罪也, 而各司之標奪市肆, 有若之宮市, 使商民失業, 物價騰踊。 若除公辦, 則可以無蠹國病民, 而其利豈不博且大乎? 又論, 吏曹意不在國家, 惟以應人干請, 苟塡窠闕爲念, 因數其事, 請罷。" 上命惟考公辦事, 當議大臣處之。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7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재정-공물(貢物)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