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에 《근사록》을 강하고 기대승이 송의 양시, 단종의 일 등을 소개하다
상이 문정전으로 석강에 나아갔다. 《근사록(近思錄)》의 ‘양중립(楊中立)이 묻기를, 서명(西銘)은 체(體)를 말하고 용(用)은 말하지 않았다’에서부터 ‘폄우(砭愚)를 동명(東銘)이라 하였다’까지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작(游酢)은 서명을 읽고 곧 의심이 확 풀리어 마음에 거슬리지 않아서 ‘이것이 중용(中庸)의 이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견(知見)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중립은 몰랐으니, 이로 본다면 양시(楊時)가 유작만 못하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나은가?"
하니,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전현(前賢)의 학문의 지위를 후학이 의논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유작은 의심이 확 풀리어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요, 양시는 의문을 가지고 물었으니 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작과 양시은 모두 정문(程門)의 고제인데 지위로 말하면 구산(龜山)005) 이 높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두 사람이 비록 정(程)·주(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역시 범연한 사람은 아니다. 한때 벼슬한 일이 있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소신이 널리 보지 못하여 알지는 못하나, 다만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 대략 나와 있습니다. 유작은 찰원(察院)이었습니다. 양시는 휘종(徽宗) 말년, 채경(蔡京)이 국정을 잡아 변이 아침 저녁으로 발생하던 때의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으로 장학(張鱟)이란 이가 채경의 집에 손님으로 있으면서 그 아들을 위하여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하루는 장학이 그 제자에게 ‘너희들은 달아나는 것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선생께서 평소 제자에게 걸음걸이를 가르쳐 주시어 모두 법도에 따르고 있는데, 어찌 달아나는 것을 배웠느냐고 하십니까.’ 하니, 장학이 ‘너의 아버지가 천하를 극도로 파괴하였다.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달아나는 것을 배워야 화란(禍亂)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제자는 크게 놀라 채경에게 말하니, 채경이 소인이나 이해(利害)를 알므로 장학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장학이 ‘지금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천하의 대현(大賢)을 기용하면 가능성은 있다.’ 하였습니다. 채경이 그게 누구냐고 물으니, 장학이 구산(龜山)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구산을 불러 들여 관직에 임명하니 이때 나이 70이었습니다. 당시 왕안석(王安石)에 대한 시비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어 있었는데, 구산이 간의 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왕안석을 배향(配享)의 반열에서 제거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때 왕안석을 배우던 자들은 도리어 구산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아니 되어 금(金)이 송(宋)을 쳐서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북수(北狩)하게 되자 구산도 조정에서 떠났습니다. 호안국(胡安國)이 구산의 묘지(墓誌)를 지으며 ‘당시 그 건의를 받아들여 썼었더라면 결단코 그 반은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후학이 어찌 구산의 발끝이나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정·주에는 미치지 못하나 지위는 높습니다. 현자가 조정에 있으면 비록 그 패망이 극도에 달하였다 하더라도 그 힘이 없지 아니합니다. 채경의 사람됨이 극히 간사하나 이해를 잘 알므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끌어들여 임용한 것입니다. 당시 구산을 비방한 자들이 채경에게 넘어갔다 하여 그르다고 하지만, 구산은 곧 대현으로 사심(私心)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당시 도(道)를 행하였으면 치국 평천하할 수 있었겠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당시 그 건의를 받아들여 썼더라면 결코 그 반은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어지러운 것들을 잘 다스려서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였을 것이며, 평상시에 임용되어 뜻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면 그 덕화(德化)가 비록 삼대(三代) 때와 같을지는 알 수 없어도 범상한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송조(宋朝)의 재상들은 거의 모두 학문을 몰랐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범중엄 (范仲俺) 같은 이도 있었는데 겨우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갔으며 이항(李沆)은 비록 현상(賢相)이라고 하나 역시 도학(道學)을 몰랐습니다. 구산 같은 이가 평상시에 임용되었더라면 비록 평천하인들 무엇이 어려웠겠습니까."
하고 신응시(辛應時)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어진 재상이라 일컬어 오는 이로 당(唐)나라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요숭(姚崇)·송경(宋暻)이 있었고, 송(宋)나라에는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구양수(歐陽脩)가 있었는데, 그들의 기질(氣質)과 사업(事業)은 범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시대를 구제(救濟)한 재상이나, 유자(儒者)의 학문은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학문한 사람이면 의리(義理)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니, 그 정치의 덕화(德化)가 어찌 한 시대를 구제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다만 예로부터 유자는 당시의 임금에게 임용되지 못하였습니다. 한(漢)나라 때에는 동중서(董仲舒) 같은 이가 있었으나 무제(武帝)가 임용하지 못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정(程)·주(朱)와 같은 여러 현인이 배출되었고 인종(仁宗)·효종(孝宗) 역시 범상치 않은 임금이었으나 의리로 임금을 보좌하고 치화를 이루려 하였으므로 임금과 불합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유자로서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 이른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은 유자였으나 정·주에 비기어 본다면 어찌 거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도 역시 장구하게 일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학문한 사람으로 재상을 시킨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 클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고금이 다르지 아니하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지금의 아룀은 지당한 말입니다. 대개 유자는 도리(道理)에 우원(迂遠)하지 않는데도 임용되지 못합니다. 다만 사람과 구차스레 합하려 아니하므로 그 진출(進出)이 어렵습니다. 또 바른 길로 임금을 보좌하려 하므로 선(善)을 좋아하는 임금의 경우에는 비록 좋아할 것 같으나, 자기 의사를 굽혀 임금을 따르려 아니하므로 임용되지 못합니다. 또 당시 사람이 모두 선한 것만은 아니고 간혹 꺼리는 사람도 있으므로, 또한 세상에 용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인주(人主)가 좋아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당시 사람과 서로 어긋나므로 이에 도덕을 가슴속에 품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인주된 이가 그가 현자임을 알고 전적으로 임용한다면 현자의 도가 어찌 후세에 쓰이지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임금이 성실하게 임용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옛사람 같은 이는 비록 대대로 있는 것은 아니나, 시인(時人)들이 아끼어 임용하면 세상은 자연 치평(治平)이 될 것이요, 그 도(道)도 행해질 것입니다. 유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병폐를 마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신응시가 아뢰기를,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구차스레 합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말이 행해지지 않는데 녹을 먹을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쉽게 물러나고 진출하기는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현자를 임용하려 하면 반드시 사(邪)와 정(正)을 분별해야만, 현자가 임용됨을 즐거워합니다. 사와 정이 병진(竝進)하여 혼용되면 장애가 많으므로, 예로부터 현자는 모두 임용되지 못한 것입니다. 임금은 이 폐단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임금이 임용하려 해도 사정이 어쩔 수 없어 임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송 효종은 주자(朱子)를 임용하려고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에 제수하였으나 주자는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고, 절동 제형(浙東提刑)이 되어서는 주자도 의욕을 가지고 그 직무를 다하려고 힘썼습니다. 태주(台州)를 맡고 있던 당중우(唐仲友)에게 부정이 있자 주차(奏箚)하여 탄핵하였는데, 그 당시 정승이었던 왕회(王淮)는 중우와 인친(姻親)이었으므로 이를 숨기고 아뢰지 않았습니다. 주자는 탄핵에 더욱 힘써 봉장(封章)을 여섯 번이나 올렸습니다. 그 때 중우는 이미 강서 제형(江西提刑)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왕회는 할 수 없이 중우의 강서 제형을 박탈하여 주자에게 주었으나 주자는 이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후 병부 낭중(兵部郞中)이 되었는데, 시랑(侍郞) 임율(林栗)이 주자와 서명(西銘)·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다가 의견이 맞지 아니하자 상소(上疏)하여 논박하였습니다. 당시 위의 뜻은 한창 주자에게 향하고 있었으나 재상이 꺼리므로 양쪽을 다 아끼는 방책(方策)을 썼습니다. 효종이 주자를 임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인이 이간하므로 마침내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후세 인주도 현자를 임용하려면 이러한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이것이 효종의 부족한 점입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주자는 효종이 만사(挽辭)에서 ‘군신(君臣)간의 의가 잘 맞을 것 같았는데, 도리어 참소의 상한 바 되었으니 슬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응시가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가 서로 계합(契合)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송 인종은 진정 범상한 임금이 아님에도 한기·범중엄·부필·구양수를 임용하지 못하고 여이간(呂夷簡)을 재상으로 삼았던 날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바르지 못한 사람은 매달리고 영합(迎合)하여 물러가려 아니하지만, 군자는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 몸을 돌려 곧 물러납니다. 그러므로 소인은 항상 임용되나 군자는 항상 임용되지 못합니다. 근일의 일로 말하더라도 중묘(中廟)가 조광조(趙光祖)를 지성으로 대하였으나 마침내 소인의 이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보전할 수 없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마땅히 생각할 일입니다."
하고, 응시(應時)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조정(朝廷)이 간혹 불화하는 것은 반드시 의논이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부합하지 못하거나 조정이 동조하여 서로 협조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옛날 범진(范鎭)의 말에 ‘중의(衆意)를 모아 이목(耳目)으로 삼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임용하여 복심(腹心)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중의를 모아 임금과 재상이 협심하여 쓸 수 있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군자는 반드시 합하려고 아니하므로, 그 의논도 꼭 같지 않습니다. 절충하여 시행하는 것은 임금과 재상에게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유념해야 할 일입니다."
하고, 기대승이 아뢰기를,
"사람이 재지(才智)는 비록 일컬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지기란 어렵습니다. 논의하다가 서로 감정이 격해서 미워하고 마침내는 등을 돌리기까지 하면 그 해가 없지 않습니다. 대개 시비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조화시켜서 양쪽을 모두 보존하려 하면 이는 빙탄(氷炭)을 조화시키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주(人主)는 반드시 시비를 변별한 뒤에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혼동하여 분별하지 못한다면 마침내 큰 해가 있을 것입니다. 함께 수용(收用)하여 같이 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면 더욱 잘못입니다. 반드시 거경(居敬)하고 궁리(窮理)하는 공효를 다하여 심덕(心德)이 밝아진 뒤에야 능히 변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의 치란(治亂)·현사(賢邪)·소장(消長)의 이치는 하루 사이에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자, 기대승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이란 각각 자기 소견대로 말하는 것이므로 동의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있게 마련이니, 그 중간에 나아가 분변하여 쓴다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의논이 바르지 못하여 의리에 해가 있다면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문소전(文昭殿)의 일에 있어서도 조정이 지난 정월부터 여러 가지로 의논하였으나 그 타당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정신(廷臣)들이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감히 거론하지 못하는 것은 미진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제(殿制)를 증수(增修)할 수 없게 되자 이에 구차스런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대신(大臣)의 의논은, 인묘(仁廟)를 그대로 연은전(延恩殿)에 모시는 것이 무방하다 하여 성묘(成廟) 초년의 문종 체천 의궤(文宗遞遷儀軌)를 근거로 하여 말했으니, 아무 뜻없이 말하였다고 하나 실은 의리에 해로워, 인정(人情)이 분울해 하였습니다. 곧 그 의논을 고치도록 명하여 지금은 이미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매번 아뢰는 것이 미안한 것 같으나 그 사이에 그릇된 말이 많으므로 아뢰지 않을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대신이 이른바 ‘세종(世宗)의 5실(室)을 초과하지 말라는 전교는 곧 사친(四親)을 가리켜 한 말씀이다.’라고 한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창립한 본 뜻은 그 권변을 말함이 아니고 그 정상적인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거기에 ‘2소(昭)와 2목(穆) 및 태조(太祖)로 하여 후세 봉사(奉祀)에 5실을 초과하지 말라. 후세 자손에 이르러 각각 그 묘(廟)를 세우게 되면 그 번거로움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모두 그 정상적인 것을 말하였을 뿐, 후세의 난처한 변례 같은 것을 당시에는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사 걱정했다 하더라도 그 정상적인 일만을 말하지 어찌 그 변례를 말하였겠습니까. 그후 문종·세조는 형제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권변으로 통하게 하여 후세의 법이 되게 했어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체를 몰랐을 뿐 아니라 이의(異意)도 있었으므로 갑자기 문종을 천묘하였으니, 의리에 해로움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 때 재상은 후세에 죄를 지은 것이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 때의 의논을 끌어들여 말함은 매우 미안스런 일이므로 이 점을 군신들이 다투는 것입니다. 조야(朝野)가 항의하고 영상도 상차(上箚)하였으므로 따른다고 전교하셨는데, 영상의 차자는 그 말에 오류가 많습니다. 이른바 ‘대략 사친(四親) 및 인묘(仁廟)를 경천(經遷)한 사실을 취하여’라고 한 말은 모두 매우 부당한 말입니다. 왕통을 이은 임금을 이미 부묘(祔廟)하였으면 어찌 경천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무엇인지를 모르고 이와 같이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필시 미처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소신의 아룀은 대신을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요, 그 시비를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문종의 체천(遞遷)에 관하여 주상께서 필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니, 이는 신자(臣子)가 차마 말할 일이 아니나 위에서는 마땅히 아셔야 할 일입니다. 문종이 승하하시고 노산군(魯山君)이 왕통을 이어 왕위에 오르자 세조에게 정난(靖難)의 공이 있었고, 수상(首相)이 되어 어린 임금을 보좌하면서 주공(周公)으로 자처하셨습니다. 노산군이 세조에게 공신 교서(功臣敎書)를 내리면서 ‘나는 성왕(成王)이 주공을 대우하던 예로 숙부를 대우하겠으니 숙부도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던 마음으로 나를 보좌하라.’ 하였습니다. 노산군은 주공처럼 하기를 세조에게 희망하였고, 세조도 주공처럼 할 것으로 자임(自任)하였으나 뜻하지 않게도 천명(天命)과 인심이 세조에게 돌아가므로 을해년에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무정보감(武定寶鑑)》만 보더라도 세조의 수선(受禪) 및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 죄받은 사실이 소상하게 실려 있었다."
하니, 대승(大升)이 아뢰기를,
"대개는 《보감》 가운데 실려 있으나 소문을 기록한 것도 있고, 또 당시 사람이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에서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니 한번쯤 모든 사실에 대해 진술해 주면 좋겠다."
하니, 대승(大升)이 아뢰기를,
"병자년에 성삼문의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그 의도는 상왕을 복위(復位)하려는 것이었으나, 세조는 난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일이 발각된 후에 상왕이 그 일에 참여해 알았다 하여 상왕을 영월(寧越)로 옮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궐내에 있었는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경복궁에 있었다 하나 영월로 옮겨가 있었고, 그 때 정인지(鄭麟趾)가 영의정이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처치(處置)하기를 청하니, 세조는 물정(物情)에 구애되어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영월에서 사약(賜藥)하였으니 그 공사(公事)가 지금도 금부(禁府)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영월 사람이 그 일을 기록하여 간직해둔 것이 있었는데 김취문(金就文)이 관찰사로 있을 때 또한 그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난에 상왕이 그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변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라 이것으로 죄목(罪目)을 삼았다고 합니다. 처치하기를 청함은 전사(前史)에 없었던 일인데 감히 하였습니다. 정인지는 비록 한때 명상(名相)이라 일컬어졌었으나 지금은 모두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지금 그 때의 의논을 인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론(公論)이 격발한 것입니다."
하였다. 신응시가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후세에서 인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정미년006) 에 이기(李芑)는 인종을 ‘미성지군(未成之君)’이라 하였으니, 이 자는 실로 인종에게 역심(逆心)이 있던 자입니다. 그러나 인묘(仁廟)를 부묘할 때에는 차마 이를 인용하여 증거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인용하였더라면 인묘도 영원히 문소전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그때 의정(議定)하였을 것입니다. 명종이 성명(聖明)하시므로 ‘후일 부묘하여야 한다.’고 전교하셨고, 이기와 윤원형(尹元衡)도 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고, 기대승이 아뢰기를,
"이기와 윤원형의 행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성묘(成廟) 초년에는 문소전의 실수(室數)가 차지 않았는데도 감히 문종을 체천하였습니다. 그 때 성묘가 군신(群臣)을 인견하고 하문하였는데, 군신들이 말을 수식(修飾)하여 대답한 사실이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이 이와 같은데도 감히 인용하여 위로 천청(天廳)을 흐리게 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조종조의 일도 좋은 것은 마땅히 만세토록 고침이 없어야 하나, 미진한 일은 고친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태조가 정몽주(鄭夢周)를 죽였으나 태종은 포장(褒章)하여 증직(贈職)하였고, 태조가 전조(前朝)의 왕씨를 모두 죽였으나 문종은 숭의전(崇義殿)을 세우셨고, 세조는 소능(昭陵)007) 을 내다 버렸으나 중종은 다시 복구했습니다."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상교(上敎)가 내렸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내다 버렸다 함은 무엇을 내다 버렸다는 말인가?"
하니, 기대승이 아뢰기를,
"이는 신자로서 차마 계달할 수 없는 말입니다만 그 재궁(梓宮)을 내다 버린 듯 싶습니다. 당시 사람이 비밀히 봉안(奉安)하였는데 그후에 다시 복구한 것입니다. 전일의 미진한 일을 조종조에게서 모두 고쳤습니다. 소능을 복원하고 또 노산(魯山)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때 신상(申鏛)이 제관(祭官)이었습니다. 이러한 뜻을 위에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다시는 거론하지 말아야 신자의 마음이 편합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일도 오늘날에 예(例)를 인용할 수 없습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은 스스로 처리하고 모든 일을 다 줄이었다고 하였는데 대개가 《무정보감》에 실려 있으니 상께서도 필시 아실 것입니다. 태종이 좌명(佐命)할 때 태조께서 놀라서 함흥(咸興)으로 귀향하시니, 나라에 주인이 없어 공정 대왕이 권도(權道)로 임금이 되었다가 곧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셨습니다. 이 일도 신자로서는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 동진(東晉)의 명제(明帝)는 총명한 임금이었습니다. 선조(先祖)의 일을 왕도(王導)에게 물었는데 왕도가 낱낱이 진술하자 명제는 놀란 얼굴을 상(床)으로 가리웠다고 합니다. 조종(祖宗)의 일을 후대에서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신응시 (申應時)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조종조에 어찌 그런 변이 없겠습니까. 중묘께서 소능을 복위하신 것은 실로 조종보다 빛나는 일입니다. 명나라 정통(正統)008) 때에도 건문(建文)의 신하를 소급해 사면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인종(仁宗)은 곧 태종(太宗)의 아들이었으나, 건문의 신하를 모두 개석(開釋)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묘를 문소전에 같이 부묘(祔廟)한 일은 곧 인심과 천리의 지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어도 서로 같아진 것입니다. 옛날 송조(宋朝)에서 희조(僖祖)를 출위(出位)시키려 할 때, 주자(朱子)는 조여우(趙汝愚)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괴롭고 마음이 아프게 하니 죽느니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지난번 이 일을 만나서는 【인묘(仁廟)를 문소전에 부묘하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 실로 죽는 것만 못하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개정을 명하셨으니, 허물이 없는 데로 복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천(經遷)이란 말은 극히 의리에 해가 되는 것임을 위에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신응시가 아뢰기를,
"인심이 이와 같으므로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전교하신 것은 아마도 위에서 조종조의 고사(古事)는 준행(遵行)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관중(館中)에서 상차(上箚)한 것인 듯합니다."
하자, 기대승이 아뢰기를,
"그 때 하도 답답하였기 때문에 경연에 입시하여 말이 광망(狂妄)한 줄도 모르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일이 이미 결정되었고, 시일도 오래 되었으므로 말이 이에 이른 것이나 이와 같이 계달하는 것도 광망한 일입니다. 다만 천안(天顔)을 지척에서 모시고 회포를 아뢰지 않는 것도 미안스런 일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그간의 시비를 성념(聖念)으로 마땅히 분명하게 아셔야만 합니다. 대신도 딴 뜻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논의가 서로 격하여지면 걱정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조정이 화평(和平)해지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0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05]구산(龜山) : 양시의 호임.
- [註 006]
정미년 : 1547 명종 2년.- [註 007]
소능(昭陵) : 문종(文宗)의 왕비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구 능호(舊陵號). 세조(世祖)가 찬위하고 단종(端宗)을 살해한 뒤, 세조의 꿈에 현덕 왕후의 혼령이 나타나 ‘죄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네 자식도 죽이겠다.’ 했는데, 깨자마자 세자(世子)의 운명 소식이 전해졌다. 크게 화가 난 세조가 그 능을 파헤쳐 버리라고 명하여 능은 폐허가 되었다. 어떤 승려가 바닷가에 떠 있는 왕후의 관곽을 발견하고 풀숲에 묻어 두었다. 중종(中宗) 7년에 소세양(蘇世讓)이 소능을 추복(追復)하자고 아뢰어, 많은 논란 끝에 왕이 결정을 내려, 동 8년에 문종의 현릉(顯陵) 곁으로 이장하였는데 이후로는 문종과 같이 현릉이라 일컬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문종조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소릉폐본(昭陵廢復).- [註 008]
정통(正統) : 영종(英宗)의 연호.○上御夕講于文政殿, 進講《近思錄》, 自楊中立問曰《西銘》, 言體, 而不言用, 止砭愚曰東銘。 上曰: "游酢得西銘讀之, 卽渙然不逆於心, 曰: ‘此《中庸》之理也。’ 可謂知見, 而楊中立則不知, 以此觀之, 楊時不如游酢矣。 二人孰優? 奇大升曰: "前賢學問地位, 後學不可議論, 亦不得知也。 游酢渙然不逆於心, 此必有所覺悟而然。 楊時有疑而問之, 斯亦不易矣。 游、楊皆程門高第, 而以地位言之, 則龜山高矣。" 上曰: "此二人, 雖未及於程、朱, 亦不偶然者也。 一時有立朝之事乎?" 大升曰: "小臣不能博覽, 不得知之。 但於《伊洛淵源》, 大槪有之。 游酢爲察院矣, 楊時當徽宗末年, 蔡京執國命, 變生朝夕, 而時人有張觷者, 客於蔡京家, 爲其子敎學。 一日觷言於弟子曰: ‘汝等學走乎?’ 對曰: ‘先生平日敎弟子行步, 皆遵法度, 何以謂之學走乎?’ 曰: ‘爾父破毁天下極矣, 大亂將起, 必學走, 然後 可以免禍。’ 弟子大驚, 乃言於蔡京。 京雖小人, 亦知利害, 故問計張觷。 觷曰: ‘今無所爲。 但起天下大賢, 則猶可爲也。’ 京問: ‘誰也?’ 觷以龜山對。 於是召龜山拜官, 時年七十矣。 當時王安石之是非不定, 至於從祀孔子。 龜山爲諫議大夫, 請去安石配享之列, 一時學安石者, 反以龜山爲非。 未幾, 金伐宋, 而徽、欽北狩, 龜山亦去朝矣。 胡安國作龜山墓誌, 以爲: ‘當時若能聽用, 決須救得一半。’ 云。 後學何以望龜山之涯(俟)〔涘〕 乎? 大槪, 雖未及於程、朱, 而地位亦高矣。 夫賢人在朝, 則雖敗亡之極, 而不無其力矣。 蔡京之爲人, 極其姦邪, 而能識利害, 故意其有所爲, 而引以爲用。 一時詆龜山者, 以見引於蔡京非之。 龜山乃大賢之人也。 非有私心而然矣。 何敢容議於其間哉?" 上曰: "此人一時行道, 則可以治國平天下乎?" 大升曰: "當時若能聽用, 決須得救一半云。 可以撥亂而反之正矣。 若見用於平時, 得志爲治, 則其化雖不知同於三代, 亦豈偶然哉? 宋朝宰相, 例皆不知學問, 其間有若范仲淹者, 而纔拜參知政事, 不久還去。 李沆雖曰賢相, 而亦不知道學。 若龜山者, 見用於平日, 則雖治何難哉?" 辛應時啓曰: "自古稱賢相者, 唐有房、杜、姚、宋, 宋有韓、范、富、歐, 其氣貲事業, 誠不偶然。 然此持救時之相, 而不知儒者之學矣。 若學問之人, 則以義理爲國, 其治化豈止於救時而已哉? 但自古, 儒者必不見用於時君。 漢則有如董仲舒, 而武帝不能用; 宋則有如程、朱諸賢輩出, 而仁宗、孝宗亦不偶然之君也。 然而欲以義理輔君致治, 故與之不合。 自古, 儒者終至於宰相地位者, 無一人矣。 司馬光乃儒者也, 而視諸程、朱, 則豈不有間哉? 然其設施亦不久矣。 若以學問之人作相, 則有補於國家大矣。 古今無異, 所當體念矣。" 大升曰: "今所啓至當。 大抵儒者道理, 非迂闊, 而不見用也。 但不欲苟合於人, 故其進難矣。 且欲以正道補君, 故若好善之君, 則雖似好之, 然未嘗屈意, 而從君, 故不得見用。 且一時之人, 不能盡善, 而或有忌憚, 故亦不見容於世也。 上則人主不好, 下與時人相戾, 於是懷抱道德而退去。 爲人主者, 若知其賢, 而任之專, 則賢者之道, 豈可不用於後世乎? 惟在人君用之以誠而已。 如古人者, 雖不代代有之, 然一時之人, 亦愛惜用之, 則時世自至於治平, 而其道亦行矣。 儒者不能得志之病, 所當知之矣。" 應時曰: "不得其志者, 以其不欲苟合故也。 其言不行, 則自以爲言不行, 而不可食祿, 故易退而難進矣。 大槪, 人君欲用賢者, 則必得辨邪正, 然後賢者樂爲之用。 若竝進混用, 則多有所礙, 故自古賢者, 皆不得以爲用矣。 人君洞知此弊可也。" 大升曰: "人君雖欲用之, 而或勢不得已不用者有之。 昔宋之孝宗欲用朱子, 乃拜知南康軍事, 朱子辭不就。 及爲浙東提刑, 朱子亦欲有爲, 而務盡其職。 知台州, 唐仲友有贓汚之狀, 奏箚劾之。 其時王淮爲相, 乃仲友之姻親也, 匿不以聞。 朱子論之益力, 封章六上。 其時仲友已除江西提刑而未行。 維不得已奪仲友江西提刑, 以授朱子。 朱子辭不拜。 厥後爲兵部郞中, 而侍郞林栗與朱子論《西銘》、《太極圖》, 而意不合, 上疏論之。 當時上意, 方嚮朱子, 宰相忌之, 遂爲兩寵之策。 孝宗非不欲用朱子, 而讒邪間之, 終致如此。 後世人主欲用賢者, 則恐有此弊, 所當深察也。" 鄭琢曰: "此孝宗之所以不足處也。" 大升曰: "朱子作孝宗挽辭曰: ‘似有鹽梅契, 還嗟貝錦傷。’ 云云矣。" 應時曰: "君臣契合, 自古爲難。 宋 仁宗誠不偶然之君, 而亦不能常用韓、范、富、歐, 而呂夷簡爲相之日居多矣。" 大升曰: "不正之人攀援迎合, 不欲退去, 君子如有不合, 奉身輒退, 故小人常見用, 而君子常不得爲用矣。 以近日之事言之, 中廟待趙光祖至誠, 而終未免讒邪之間, 君臣之間, 不得保全, 安有如此事乎? 所當體念矣。" 應時曰: "自古朝廷往往不和者, 必因議論不同而然也。 或君臣不得契合, 朝廷不能同寅協恭, 皆由於此。 昔范鎭有言曰: ‘集群議爲耳目, 任老成爲腹心。’ 若能集群議, 而君相協心用之, 則豈不好哉? 君子不必合, 故其議不必同, 所以折中用之者, 只在於君相而已, 所當留念矣。" 大升曰: "夫人才智, 雖或可稱, 而平心爲難。 或因論議相激而疾之, 終至乖隔, 則未嘗不有其害矣。 蓋是非不能無也, 如欲調和, 而使之兩存, 則是無異於欲和氷炭也。 豈不難哉? 人主必須辨別是非, 然後可以爲治。 若使混而不分, 則終有大害矣。 俱收竝蓄, 旣已甚難, 而以非爲是, 以征爲非, 則尤爲誤矣。 必盡居敬窮理之功, 而心德旣明, 然後乃能辨別矣。 夫朝廷治亂、賢邪消長之理, 一日之間所以分也。 最當惕念矣。" 講訖, 大升進啓曰: "朝廷議論, 各以所見爲之, 故不無異同。 能就異同之中, 而分辨用之, 則好矣。 若議論不正, 有害於義理, 則不可不辨也。 頃者文昭殿事, 朝廷自正月, 多般議之, 而不得其當。 夫廷臣非不知祖宗朝故事, 而不敢擧論者, 以其有未盡處故也。 及其殿制不得憎修, 於是苟且之論乃起。 大臣之議以爲: ‘仁廟仍在延恩殿無妨。’ 云。 遂據成廟初年《文宗遞遷儀軌》而言之, 雖出於無情, 實害於義理。 人情憤鬱, 旋卽命改其議, 而今旣有定, 如是每達似爲未安。 但其間多有謬誤之言, 不可不陳, 敢啓。 大臣所謂世宗毋過五室之敎, 乃指四親云者, 亦是矣。 然世宗創立本意, 不言其變, 而言其常也。 其曰二昭二穆及太祖, 後世奉祀, 毋過五室, 及後世子孫, 各立其廟, 不勝其繁云者, 皆言其常而已。 後世難處之變, 則在當時不必計慮矣。 假使慮之, 只道其常, 何必言其變哉? 厥後文宗、世宗兄弟而立, 所當變而通之, 以爲後世之法, 而當時人, 非徒不知事體, 亦有異意, 故遽遷文宗, 其有害於義理極矣。 其時宰相得罪於後世, 不亦大乎? 今乃援引彼議, 而言之, 至極未安。 此群臣之所以爭也。 敎以朝野抗論, 領相亦上箚, 故從之云。 領相箚子, 其言多謬, 所謂約取四親及仁廟經遷云者, 皆極未安。 夫繼統之君, 旣祔於廟, 則安有經遷之理乎? 不知如何, 而如是啓之矣。 然此必未及思之也。 小臣之啓, 非詆毁大臣也。 以其是非不可不達故也。 文宗遞遷事, 主上必不詳知, 此臣子不忍言之事也。 然自上所當知之。 文宗昇遐, 魯山繼立, 世祖有靖難功, 爲首相輔幼主, 以周公自處。 魯山賜世祖功臣敎書曰: ‘予以成王之待周公者待叔父, 叔父亦以周公之輔成王者補予。’ 云。 蓋魯山以周公 世祖, 而世祖亦以周公自任。 不意天命人心, 歸於世祖, 乙亥年魯山禪位於世祖, 而爲上王矣。" 上曰: "古事不能詳知, 但見《武定寶鑑》,則世祖受禪及皇甫仁、金宗瑞、成三問、朴彭年被罪之事, 昭載矣。" 大升曰: "大槪載於《寶鑑》中矣。 然自有所聞, 且有一時人所記矣。" 上曰: "自上不能詳知, 一度悉陳, 爲可。" 大升曰: "丙子年, 成三問之事發覺, 其意欲復上王, 而世祖意其作亂。 及其事發之後, 以上王爲預知其事, 遷上王於寧越矣。" 上曰: "常時則在於闕內耶?" 大升曰: ‘在於景福宮云。 遷在寧越, 而其時鄭麟趾爲領議政, 率百官請爲處置。 世祖拘於物情而許之。 乃遣禁府都事, 賜藥于寧越。 其公事, 今在禁府矣。 當時寧越人有記其事而藏之。 金就文爲觀察使時, 亦見之云。 成三問之亂, 上王預謀, 變關宗社, 口不可言, 以此成罪目云。 夫請爲處置者, 亦前史所無之事, 而敢爲之, 麟趾一時雖稱名相, 而至今人皆以爲不祥矣。 今欲援用其議, 此公論之所以激也。" 應時進啓曰: "此事不可援用於後, 故往在丁未, 李芑以仁宗爲未成之君。 此實有逆心於仁宗者也, 而當仁廟祔廟之時, 猶不忍引以爲證。 如可以引用, 則必使仁廟永不入文昭殿事, 定議於其時矣。 明宗聖明, 故敎以後日當祔, 而李芑、尹元衡亦不得防之矣。" 大升曰: "李芑、尹元衡之所爲, 則不能詳知矣。 但成廟初年, 文昭殿室數未滿, 而乃敢遞出文宗。 其時成廟引見群臣而問之, 群臣飾辭以對, 昭載於《政院日記》, 孰不知之乎? 其事如此, 而敢引以上瀆天聽, 極爲未安。 祖宗朝事, 善者則固當萬世不改, 若未盡之事, 則改之無傷。 太祖殺鄭夢周: 太宗褒贈。 太祖盡殺前朝王氏, 而文宗立崇義殿; 世祖出棄昭陵, 而中宗復立。" 【言未訖, 而上敎下。】 上曰: "所謂出棄者, 出棄何物耶?" 大升曰: "此臣子不忍啓達之言也。 其榟宮, 似若出棄然矣。 當時之人, 潛爲奉安, 而厥後復立。 前日未盡之事, 在祖宗朝, 亦皆改之矣。 旣復昭陵, 又賜祭于魯山。 其時申鏛爲祭官矣。 如此之意, 自上何以知之乎? 不復擧諸言, 然後臣子之心安矣。 至於恭靖之事, 亦不可援例於今日也。 恭靖大王自爲處置, 凡事皆降殺云。 大槪載於《武定寶鑑》, 自上必知之矣。 太宗佐命之時, 太祖驚駭, 遂歸咸鏡道, 國中無主, 恭靖大王權宜爲君, 旋卽傳位於太宗, 此事臣子亦不可言也。 昔東晋 明帝乃聰明之主也。 問先祖之事於王導, 導歷陳之。 明帝驚愕, 以面掩床云。 祖宗之事, 後世何以知之乎?" 應時曰: "自古祖宗朝, 豈無其變乎? 中廟復昭陵, 是誠有光 於祖宗者也。 大明 正統之間, 亦追釋建文之臣矣。" 大升曰: "仁宗乃太宗之子, 而建文之臣, 亦皆開釋矣。" 又啓曰: "仁廟同祔文昭殿者, 此人心天理至極之事也。 是以不謀而同矣。 昔在宋朝, 將出僖祖, 朱子致簡於趙汝愚曰: ‘令人痛心疾首, 不如無生。’ 云。 頃逢此事, 【指仁廟不祔文昭之事也。】 實有不如無生之心矣。 旋卽命改, 可謂復於無過矣。 然經遷之言, 極爲有害於義理, 自上所當洞知矣。" 應時曰: "敎以人心如此, 故不得已從之。’ 云。 慮或自上意, 其祖宗朝古事可以遵行, 故館中上箚矣。" 大升曰: "其時悶鬱之至, 若入侍經席, 則必不知言之狂妄而啓之矣。 今則事旣有定, 而爲日亦久, 故言之至此。 然若是啓達, 亦多狂妄, 但咫尺天顔, 不陳懷抱未安, 故敢啓。 此間是非, 聖念所當洞然知之可也。 大臣亦非有他意而然也。 但論議相激, 不無憂慮。 自今以後, 朝廷和平則, 豈不好哉。"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20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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