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준경이 상소하여, 후사를 세울 것 등을 청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상소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는 정침(精祲)이 서로 옮겨가고 길흉(吉凶)이 서로 감응되는 것인데, 이는 하늘과 사람이 형체는 비록 다르지만 음양(陰陽)의 이(理)와 오행(五行)의 기(氣)가 날줄과 씨줄로 뒤얽혀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된 것으로, 이른바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미묘하게 합해서 응결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이 가지고 있는 이 이를 사람이 받아 성(性)으로 삼고, 하늘이 가지고 있는 이 기를 사람이 품수하여 형체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늘의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고 사람의 도(道)는 모두 하늘에 근원을 두는 것인데, 사람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 국한되어 그렇게 되게 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하늘과 사람을 분리하여 하늘은 사람에게 관여하지 않고 사람은 하늘에 간여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리하여 거리낌없이 나쁜 일을 하고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하다가 결국 재괴(災怪)를 이루게 되면, 일기(一氣)의 하늘도 따라서 변동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하늘의 일기이고 임금은 또 만물의 우두머리로 나서 만백성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그 이와 기는 더욱 천지(天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유통(流通)하고 감응하는 묘함이 동정(動靜)의 사이에도 모두 작용합니다. 《시경(詩經)》에 ‘하늘은 밝아 너의 출입에 함께 하시고, 하늘은 환하여 너의 유연(游衍)을 안 빠뜨린다.’ 하였고, 또 ‘하느님이 너를 돌보시니 너는 두 마음을 갖지 말라.’ 하였습니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하늘이 굽어살피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 삼가고 두려워하였으며 가슴 졸이며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언제나 발라서 자연히 불선(不善)의 실마리나 그릇되고 사특한 것이 싹트거나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덕이 하늘과 일치되면 마음도 태허(太虛)와 같아지고 청명(淸明)이 자기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 같아져 사물(事物)이 다가오면 반드시 선악 사정(善惡邪正)을 꿰뚫어 보게 되어 형체를 숨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세로 오면서 학문이 괴리되어 외경(畏敬)하는 도(道)를 모르고 날로 해이해져 방종한 곳으로 나가므로 설사 뜻을 가진 임금이 있더라도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고 뜻을 잘 제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기한 금수(禽獸)나 기이한 화초(花草)에 눈을 움직이게 되고 아첨하는 감미로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맛 있고 기름진 음식에 턱을 움직이게 되고 짙고 고운 향기에 코를 끌리게 됩니다. 즐길 만한 놀이와 싫지 않은 말들이 잡다하게 앞에 펼쳐짐에 따라 뜻도 옮아가 마음이 비로소 바름을 잃게 되면 비록 정일(精一)함으로 지키려 하여도 본심을 이미 잃었기 때문에 사특한 것을 바른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쁜 것이라고도 하여 충(忠)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특함이 늘 바름을 이기게 됩니다. 저 푸르고 푸르러 변하지 않는 하늘이 밝게 위에 임해 있다가 사람이 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굽어보고 어찌 경동(驚動)하여 상(象)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후세에 상풍(祥風)과 화기(和氣)가 드물게 나타나고 요얼(妖孽)과 변괴(變怪)가 잇따라 닥치게 된 이유입니다.
얼마 전부터 변이(變異)가 겹쳐 나타나고 겨울이 이미 깊었는데도 천둥과 번개가 치고 성문(星文)이 자주 변하며 천고(天鼓)가 맑은 하늘에 울렸습니다. 비상하고 절박한 재이가 수순(數旬) 사이에 아울러 생기니, 신은 감히 사람의 일에 감응되어 그러한 것인지, 사응(事應)이 장차 싹트려고 그러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전 겨울에 천둥이 치는 변이로 해서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렸었는데, 신이 그에 대해 비답하신 것을 보니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인심을 화평하게 하고 일을 조처하는 데 중(中)을 얻게 하는 것뿐이다.’ 하셨고, 또 ‘인심이 화하면 천지의 기운도 화해진다.’고 했습니다. 신이 보건대, 성학(聖學)의 조예가 이미 고명한 경지에 다다라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대한 큰 뜻을 돌이키는 것이 무엇이 어렵고 재변을 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중을 이루면 치우치고 기우는 잘못이 없을 것이고, 이렇게 해서 화(和)를 이루면 만물이 제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크구나, 화평하고 중을 얻게 하라는 분부여! 이것은 대화(大和)를 변함없이 계속되게 하고 태평(太平)을 유지시키게 하는 밝은 훈계이십니다. 생각하건대 화(和)라는 한 글자는 일은 같아도 이치는 다르고 자취는 같아도 실상은 차이가 납니다. 진실로 아래 있는 사람들이 중화의 분부에만 탐완(耽玩)되어 중화의 실상을 체득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영합하여 찬동하며 순종하는 것을 화라고 하고 묵묵히 시비하지 않은 채 시세만 관망하는 것을 중(中)이라 여겨, 드디어 투미한 것이 풍습을 이루어 인심이 마침내 중을 잃고 국세(國勢)가 마침내 떨치지 못하는 데 이르게 되면 그 유폐(流弊)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은 일찍이 화평의 의를 인하여 추연(推衍)하여 보았습니다.
진실로 무상의 성인으로 중화(中和)·합덕(合德)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중을 스스로 이루어 스스로 화를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로잡고 북돋움이 있어 백 배의 노력을 들여 한 생각의 어긋남도 반드시 두려워하여 힘써 고치고 한 생각의 악(惡)도 반드시 버리기를 힘써 용기 있게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다스림이 이미 엄격하더라도 오히려 모자라는 것으로 여겨 스승을 찾아 시정(是正)하고 벗을 찾아 도움을 구하여 선한 것을 보고 본받고 허물을 들어 고쳐서 덕을 이룬 뒤에야 그 화가 지극해져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萬物)이 길러지기를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오행(五行)으로 말하면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공용이 각각 알맞게 운용되어야 하는데 공용이 치우치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사물을 해치기에 이르기도 하지만, 때를 맞추어 서로 돕게 하면 사시(四時)가 제대로 운행되고 세공(歲功)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미(五味)로 말하면 산(酸)·함(醎)·감(甘)·고(苦)·신(辛)의 물건은 각각 그 맛을 달리하므로 각각 한 가지 맛만 쓴다면 반드시 몹시 맵고 아려서 입에 맞지 않지만 단 것에는 반드시 매운 것을 넣고 쓴 것에는 신 것을 넣어 힘써 서로 적절히 조합하여 대갱(大羹)의 화(和)를 이루면 상극(相克)하면서 상성(相成)하고 상해(相害)하면서 상동(相同)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의 사물이 모두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조정에는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우(知愚)·현불초(賢不肖)가 다같이 모여 있으므로 유(類)로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간사한 것들이 붕당을 이루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행사하며 시비를 헷갈리게 합니다. 꼬리치며 아첨하는 자들이 있으면 반드시 배격하여 단호히 끊어 버리고 힘껏 제거하여 다스림으로써 맑고 깨끗하게 종래의 적폐를 완전히 쓸어낸 다음에야 중도를 세울 수 있고 화평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사함을 들추어내고 좀먹는 것을 깎아내며 뿌리를 파 버리고 가지를 쳐서 임금의 미혹되었던 마음을 열고 임금의 총명을 계도하기 위해 다투어 논변(論辨)할 때는, 상정(常情)으로 보면 자못 화평의 뜻이 없고 너무 지나쳐 중도를 잃은 것 같이도 여겨집니다. 그러나 공공(共工)과 환도(驩兜)가 팔원(八元)207) 사이에 함께 끼여 있고 불초(不肖)가 사현(四賢)에 섞여 있으면서208) , 임금의 결단을 현혹시키고 어진이를 시기하며 재능 있는 이를 해쳤으니, 이들을 멀리 추방하거나 형벌로 제거하는 단안을 내리지 않았다면 요정(堯廷)과 송조(宋朝)도 끝내 화평한 날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금의 덕도 유추(類推)해 보면 역시 그러합니다. 만일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성인이 아니라면 비록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하루 사이에 번거로운 만기(萬機)를 돌봄에 있어 어찌 모두 중도에 합치되어 모두 화를 발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중화라는 것이 또 어찌 타고난 자질에 맡겨 스스로 되어가는 대로 두어도 단걸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좌우에 보필(輔弼)하는 고굉(股肱)209) 과 이목(耳目)210) 이 있어 전후에서 간언을 진달하여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주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줌으로써 공부가 극진한 데 도달한 뒤에야 덕화(德化)가 밝게 빛나 태화(太和)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바로잡아 주기 위해 간언을 진달할 즈음 잘못을 바로잡고 잃은 것을 구제하고 그릇된 것을 잘라내고 굽은 것을 바루는 과정에서 맞물리지 않고 어긋나 마음에 거슬리고 생각에 어긋나 시고 짠 것이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둥글고 모난 것이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질이 아름다운 임금은 오래도록 쌓은 학문의 힘으로 오행(五行)과 오미(五味)가 서로 조화될 수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일으키는 맛 있는 음식이 약석(藥石)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 그 극심한 것을 줄이고 병에 맞추어 다스려 맵고 아린 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합쳐 좋은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하여 이로써 자신의 덕을 돕게 한다면 덕이 날로 더욱 닦이고 허물은 날로 더욱 고쳐져 모든 신하들이 다함께 우러르고 만백성이 함께 추대하게 되므로 화기가 사표(四表)에 흘러 넘치고 아름다운 칭송이 만대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몸에 비유하건대 혈기(血氣)가 막혀 악성 종기가 속에서 곪으면 반드시 약을 쓰고 침을 놓아 막힌 것을 더 통하게 한 다음에야 혈맥이 유통되고 화기가 통창하게 되어 몸이 다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침을 놓고 약을 쓸 때의 살갗을 깎는 고통과 입에 쓴 괴로움은 실로 참을 수가 없지만, 한번의 통증을 참지 못하면 평생의 화(禍)가 되는 것이니, 어찌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혈기가 강장(强壯)한 사람은 병에 걸리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아 보양(保養)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을 숨기고 의원을 물리치는 데 병이 누적되면 얼마 못가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쓰러집니다. 이것이 후세의 임금들이 스스로 태평하다고 믿어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여 남모르는 가운데 심장이 녹아내려 마침내 난망(亂亡)에 이르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날 성왕(聖王)들은 허물 듣기를 힘써 절직함을 꺼리지 않았으므로 날카로운 말이나 난망에 대한 얘기를 날마다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나라를 보존하고 다스림을 이루어 중(中)을 세우고 화(和)를 이루려는 계획에서였던 것입니다.
이른바 중이라는 것은 지선(至善)이 있는 곳으로, 충(忠)은 다하는 데 이르고 효(孝)는 극진한 데 이르며 죄는 범법에 알맞고 형(刑)은 죄에 합당하게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기준이 없이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양쪽의 상황을 헤아려 어중간하게 절충하여 일시적인 미봉이나 힘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화라는 것은 바로 절도에 맞게 조처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선을 진달하고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때는 공경을 극진히 하고 존망(存亡)이 위급할 적에는 충순(忠順)을 극진히 하며 옳은 것을 시행하여 일이 모두 마땅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어찌 듣기 좋은 아첨하는 말과 화열(和悅)한 안색으로 눈앞의 안락이나 편히 여기면서 남의 선망이나 얻으려는 것이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말이 강개하거나 행동이 고상하면 반드시 부중(不中)·불화(不和)라고 합니다. 대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아는 자질도 없고 고명한 학문도 없는데 만일 스스로 강개하고 고상한 가운데에서 힘써 배양(培養)하여 요약하지 않고 중(中)으로 하여금 먼저 스스로 옹용(雍容)하도록 하여 그 염우(廉隅)를 깎아버리고 시호(時好)에 영합함으로써 세상에서 이른바 중화라는 것을 구하려 든다면, 줏대가 없이 휩쓸리게 되어 마침내 소인(小人)이 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공문(孔門)의 3천 제자와 70명의 현인(賢人)이 천하의 영재(英材)가 아닌 사람이 없었는데 끝내 광견(狂狷)한 사람을 얻으려 했던 것은, 대개 마르재어 중으로 나가게 하여 지선의 경지로 귀착시키게 하려는 것뿐이었으니, 한걸음에 곧바로 중화의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백시(伯始)211) 의 중용(中庸), 노씨(老氏)212) 의 화광(和光)213) 과 동일하게 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근일 상의 분부에 ‘인심(人心)이 화하면 천심(天心)도 화하여 한해와 충해나 풍해와 수해로 탄식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하셨는데, 신은 늙고 아둔한 자질로 잘못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마음을 화합하여 나랏일에 진력하도록 하지 못하고 성의(盛意)에 부합되게 명지(明旨)를 봉행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다시 어진이를 구하시도록 하였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즉시 몸을 이끌고 물러가야 하건만 오히려 입을 열어 우러러 주달하고 있으니 진실로 채납(採納)할 것은 없습니다만, 보잘것없는 정성에 끝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어서 감히 누누이 진달하는 것입니다.
임금의 위엄은 만균(萬鈞)일 뿐이 아니니, 신하로서 그 누가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감히 거스르는 말을 아뢰어 역린(逆鱗)의 화214) 를 범하려 하겠습니까. 강경(强梗)하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품고 있는 생각을 다 아뢰는 사람은, 필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생각하는 자일 것입니다. 사태나 관망하면서 두려워 피하며 녹이나 타 먹고 몸이나 보존하려 할 뿐 안위나 치란 같은 것은 도외시한 채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비척(肥瘠)215) 을 보듯 무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위언(危言)이나 당론(黨論)을 하여 성의(盛意)를 거스름으로써 죄를 취하려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손순(遜順)한 말은 바로 신하 스스로 편하려는 길일 뿐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에 죽는 신하를 얻고 싶으면 임금의 면전에서 바른말로 과감히 쟁론하는 자 가운데서 구하라.’ 하였습니다. 대개 평상시에도 오히려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무서워하여 오히려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혼란할 때에 임하여 구차하게 모면하려는 절조가 없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조정에서 곧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임금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관계하지 않고 간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령(辭令)에 자못 거슬림을 나타내는 하교가 계시었으므로 사람들은 의심해 두려워하고 선비들은 생기가 저상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투어 구차하게 모면하려는 꾀나 생각할 뿐 다시 강의(强毅)한 기풍이 없습니다. 신의 우매하고 노쇠한 견해로는 태평한 기상(氣象)이 아닌 듯하여 삼가 민망해 하고 있습니다. 설령 과감히 간하는 말이 있더라도 또한 성명(聖明)께서 굽어살피시리라 여겨 아룁니다. 예로부터 혼란한 세상에 어찌 위언을 하는 선비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기뻐하실 일이요 꺼리실 일이 아닙니다. 옛사람은 또 ‘위언은 나라에 원기(元氣)가 된다.’고 했습니다. 대개 화평한 세상은 해이한 데 이르기 쉬우므로 반드시 위언으로 경박한 것을 바로잡고 나태한 것을 경계시킨 뒤에야 원기가 장성(壯盛)해져 화평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인데, 마치 사람이 큰 종기를 앓고 있으면 약을 써서 조리하고 침으로 터뜨린 뒤에야 영위(榮衛)216) 가 소통되고 원기가 화평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시경》에 ‘타산(他山)의 돌로……옥(玉)을 다듬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거친 돌로 부드러운 옥을 다듬으려면 갈리고 씻겨 손상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나 거친 돌이 아니면 부드러운 빛깔의 옥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르고 다듬는다는 말이 비록 강려(剛戾)한 것 같아도 실로 세상을 다스리는 약석(藥石)이 되어 화평이 발휘되는 것이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이 이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성감(聖鑑)께서는, 신하가 진언(進言)할 즈음 위를 거스르거나 간범하는 말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념(聖念)을 너그럽게 가지시어 이해하고 천천히 생각하기를 ‘저 광망(狂妄)스러운 자의 말이 내 앞에서도 꺼리지 않는데 어찌 나의 뇌정 같은 위엄을 두려워 않고 목숨을 아끼지 않아서이겠는가. 그럼에도 범모(犯冒)하니 이것은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하소서. 정자(程子)가 이른바 ‘속히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시비를 살펴보면 한때 괘씸했던 생각이 저절로 얼음 녹듯 할 것이다.’ 한 것이니, 중(中)을 얻어 화순(和順)하게 한다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심(聖心)이 화(和)하게 되면 인심이 보고 감응하여 화하게 될 것이니 저 일리(一理)인 하늘 또한 어찌 따라서 화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혹 한두 사람의 강퍅한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있다 해도 단지 자신의 허물만 스스로 재촉할 뿐이지 어찌 청명(淸明)한 다스림에 장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스스로 더욱 덕(德)을 공경하시어 황극(皇極)을 세워 백성에게 복을 내리기에 힘쓰셔야 합니다. 원하건대 평온한 마음으로 살피시고 온화한 기색으로 들으시어 천지(天地)와 강해(江海)처럼 모든 것을 너그러이 포용하신다면, 온갖 선(善)이 폭주하여 성덕이 더욱 넓어질 것은 물론 장차 마음도 화하고 기운도 화하고 사람도 화하여 천지의 화가 응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조정이 화평하여 태평한 정치가 이것을 따라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나의 기(氣)가 순해지면 천지의 기도 순해진다.’고 한 것은, 제왕(帝王)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한 도리가 되므로, 깊이 성궁(聖躬)에 바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가 순해진 뒤에야 유원(幽遠)한 이치를 살필 수 있어서 하늘에 응답하는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구언(求言)하시는 성지(聖旨)가 근심스럽고 간곡하시었고 자책하심이 간측(懇惻)하셨습니다. 신은 태형(台衡)217) 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화(聖化)를 돕고 천심(天心)을 섭리하지 못하여 성상에게 근심을 끼쳐드렸습니다. 이야말로 임금이 걱정하면 신하는 욕을 당해야 하는 때로 물리침[斥退]을 달게 받고 폄출(貶黜)하는 견책을 받아야 할 것인데, 14조의 절박한 상의 분부를 읽어보니 병의 근원에 절중(切中)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신은 감격하여 탄식하며 눈물이 괴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14개의 조목은 모두 지금 없을 수 없는 병통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그 나머지 병통은 차례로 다스릴 수가 있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해가 중천에 빛나면 군음(群陰)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으니, 이는 우리 성상의 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삼가 하늘이 견책(譴責)을 보인 것은 이유가 오로지 먼데 있지는 않을 것이니, 성상께서는 종사(宗社)의 일에 더욱 진념(軫念)하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거의 20여 년이 지났으나 저군(儲君)218) 께서 중도에 돌아가시고 춘궁(春宮)이 오래 비어 있습니다. 온 나라 신민(臣民)이 휴상(休祥)을 바랐는데 도리어 망극한 변을 당하였고 과질(瓜瓞)의 경사219) 가 지연된 채 어느덧 4∼5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도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종사(宗社)의 막중함에 대해 마땅히 미리 염려하심이 있어야 하고 신민의 기대도 매일 곳이 있어야 합니다. 전하 역시 일찍 은애(恩愛)를 맺어 마음이 향하고 쏠릴 데가 있게 한 뒤라야 중망(衆望)이 매일 데가 있게 되어 더욱 굳게 유지됨은 물론 국가에는 태산 같은 안정이 있게 되고 백성들은 의혹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명하신 전하께서 무엇을 꺼려 오래도록 이 거조(擧措)를 아끼십니까? 어떤 사람은 ‘주상의 춘추가 매우 젊으시니 다가올 경상(慶祥)이 매우 성대할 것이고 저위(儲闈)가 잠시 비었다고는 하나 3∼4년이 지연되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의구(疑懼)하여 너무 성급한 이런 계획을 내는가?’ 하는데, 이것이 그럴 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도 오히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므로 일은 미리 정하면 곤란하지 않게 되고 방법은 미리 정하면 군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중인(中人)들은 십금(十金)의 재산만 있어도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서둘러 후계자를 구할 계책을 세우는데, 하물며 제왕의 보기(寶器)에 대해 미리 대비하지 않고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제왕들은 춘추가 30이 되기도 전에 오히려 후계를 세울 생각을 가졌었으니, 어찌 한창 나이에 끝내 종사(螽斯)의 경사220) 가 없을까봐 이런 급급한 계획을 했었겠습니까? 진실로 종사의 부탁은 잠시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천하의 인망(人望)은 잠시도 매일 데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가법(家法)이 바르기로는 송(宋)나라만한 적이 없는데 인종(仁宗)과 고종(高宗) 두 임금은 천하의 마음을 따랐으니, 참으로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합니다. 당시의 언자(言者)가 ‘종영(宗英)에서 가려 뽑아 그에 대한 예질(禮秩)을 특이하게 하여 내외로 하여금 성심(聖心)이 소속된 데가 있음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도 저 두 임금은 거슬리게 여기지 않고 마침내 대계(大計)를 결정하였었으니, 어찌 현명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아닙니까. 바라건대 멀리 두 임금의 마음을 본받으시어 미리 대비해야 하는 기미를 깊이 통촉하시어 일국의 기대가 매일 데가 있게 하신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 사이에서 의의(擬議)할 수 없는 것이요 반드시 성심대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종친 중의 어진이를 선취(選取)하여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되 서둘러 명호(名號)를 내리실 것은 없고 다만 가까이에서 모시게 하여 조석(朝夕)으로 옆에 있으면서 법도를 익히게 하여 정의(情意)가 서로 통하게 되면 친분이 점점 돈독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마음이 소속된 데가 있음을 알아서 인심이 믿어 의심이 없게 되고 국세(國勢)도 힘입어 공고하게 될 것인데, 고단(孤單)하신 것을 걱정하실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전하의 성스러움과 한창인 춘추로 천신(天神)이 묵묵히 도우신다면 많은 아들을 두는 경사도 결코 끝내 아끼지는 않을 것이니, 후일 성사(聖嗣)가 태어나 대업(大業)이 돌아갈 데가 있게 되면 이른바 뽑혀 들어온 사람은 스스로 마땅히 평민으로 물러나 신하의 직분을 삼가 지키게 하면, 어찌 사리에 완곡하고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가까이에서 모신 은혜로 직질(職秩)을 약간 더하여 우대하기를 송나라의 누인량(婁寅亮)의 의논과 같이 하신다면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지난 갑진·을사년 사이에 중묘(中廟)께서는 권근(倦勤)하시고 동궁(東宮) 【인종(仁宗).】 께서는 후사가 없으셨으므로 인정이 위구(危懼)했고 의논이 흉흉하였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중묘의 적통(嫡統)이셨고 인묘(仁廟)의 개제(介弟)이셨으므로 통서를 전함에 있어 의심할 것이 없었는데도 불령(不逞)한 무리들은 오히려 의심을 냈었습니다. 신은 그때 전하를 받들어 태제(太弟)로 봉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라는 논의를 했었는데 한두 대신(大臣)도 신의 말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은 직위가 낮고 미미하여 간절한 충성을 상달할 길이 없어 계획을 때맞추어 결정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 세대(世代)가 변천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가 다시 평안해졌습니다. 선악을 분변하여 부정(不靖)한 것들을 다스려 제거하였지만 국맥(國脈)의 손상 또한 많았었습니다. 그때 일찍 신의 의논처럼 하였었다면 어찌 후일에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는 믿을 만한 적통과 개제도 없으시므로 인심이 위구하는 것이 또 지난날보다 심하니, 더욱 성의(聖意)를 일찍 결단하시어 진정시키소서. 그렇지 않으면 뒷날의 걱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다른 것을 인용할 겨를도 없습니다. 바로 을축년221) 가을과 겨울에 상후(上候)가 편치 않으셨을 때 길가는 사람들 중 우부 우부(愚夫愚婦)까지도 모두 통서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도 두려워하여 부득이한 계획을 생각해 내어 내지(內旨)를 품하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지금도 그날의 난처했던 일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쭈뼛해지고 등에 땀이 납니다. 그래서 전일의 의논을 감히 다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태평할 때 성려(聖慮)를 미리 조처하시면 성사(聖嗣)가 탄강하시는 동안 인심이 매이는 데가 있게 되고 군정(群情)이 편안하여 한두 해는 안정될 것이니, 어찌 계책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덕택은 사람들의 골수에까지 사무쳐 사랑하여 추대함이 이미 깊지만, 통서를 가지고 걱정하는 것은 모두 전하를 위한 계책인 것이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정하지 아니하면 또한 뒷날의 경사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에 아뢴 대로 성단(聖斷)을 내리시어 일찍 채택하시어 시행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태평한 때이라 백벽(白璧)에 지적할 만한 하자가 없습니다. 다만 간곡하신 14조의 덕음(德音)에 대해 말할 만한 것과 구제해야 할 방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 신이 유독 이 한 가지 일만을 들어 성상께 아뢰어 마지않는 것은 온갖 일 가운데 오직 이것이 가장 큰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의 나이는 올해 70이고 지위는 상공(上公)이 되었으나 자손(子孫)도 없고 눈과 귀까지 어두워 만년의 남은 생애에 다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비상한 변이를 보니 두려움이 절박하고 또 구언하시는 상의 분부에 숨김없는 말을 듣기를 바라시는 데 감격하여, 감히 중대한 말을 아뢰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하려 합니다. 삼가 상천(上天)이 밝게 강림해 있음을 생각하시고 끝없는 종사(宗社)의 부탁을 마음에 새겨서 겸허한 마음으로 이치를 관찰하고 고금의 일을 익히 찾아 보시어 지극히 공변된 도리로 귀착되기를 구하시고 다시 당 선종(唐宣宗)이 태자 책봉을 꺼리던 일의 잘못을 거울삼으소서. 그리고 신의 어리석은 말을 분수에 넘친 것으로 보지 마시고 성념(省念)을 조금이라도 드리우시어 천견(天譴)에 답하시고 묘사(廟社)를 위로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신은 나이도 많고 마음도 거칠어져 글이 말을 이루지 못하고 말이 성심을 드러내지 못하니, 어떻게 성청(聖聽)을 깨우치고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구구한 정성은 다만 성덕을 미봉하여 영원히 종팽(宗祊)을 공고히 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하니, 【을축년 가을 상이 편치 않자……(원문 1자 불명)……궁(宮)에서 오직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균(鈞)’이라고만 써서 내렸을 뿐 명호(名號)가 없었는데, 병이 나아 몸이 다시 편안해지자 균을 대하는 것이 여러 왕손들과 다름이 없었다. 신하들이 다 그에 대해 아뢰고자 했으나 감히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윤개(尹漑)가 죽을 임시에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이민각(李民覺)·김첨경(金添慶)이 계속하여 발의했었고 옥당(玉堂)도 차론(箚論)하려 하였으나 의논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었다. 이에 이르러 준경(浚慶)이 극력 아뢰었으므로 조야가 기대어 중히 여겼다.】 답하기를,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었는데 재앙을 만나 구언(求言)을 하는 때에 경은 약석(藥石) 같은 말을 진달하였으므로 나는 수상(首相)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나의 천견(淺見)에는 인심과 세도에 강유(剛柔)가 치우치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저부(儲副)가 오래 비어 있는데 내가 종사를 위하여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불민하여 어느 종실이 가까이 모시게 하기에 적합한지를 요량하지 못하겠다. 예로부터 임금이 어찌 모두 미리 익히고 법도를 살폈겠는가. 이같이 중난한 일을 감히 논하여 마지않는다면, 나는 인정이 안정되지 않아 도리어 다른 마음이 생길까 걱정된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준경의 이 논의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병길(丙吉)222) 은 선제(宣帝)에게 공이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었다. 당시 태제(太弟)로 봉하자고 논의했던 사람이 준경 혼자뿐이 아니었는데, 준경이 도리어 장황하게 아뢰어 임금에게 미쁘게 보이려 한 것은 어째서인가? 상은 중묘(中廟)의 적자요 인묘(仁廟)의 영제(令弟)로 유교(遺敎)를 받들어 후사로 세운 것인데 종사가 무엇이 위태로왔다고 이기(李芑) 등이 공을 탐하다가 화를 당한 말을 준경이 따라서 답습하는가? 학술도 없고 공리(功利)나 사모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언사는 비록 간절했으나 군자는 공으로써 허물을 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준경이 상소를 올려 저궁을 세우라고 논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준경의 이 상소는 실로 사직의 복이요 조정의 기대이었는데, 상은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 또 따라서 거절하는 말을 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자안(自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누가 나라를 위하여 입을 열려 하겠는가. 식자들은 안타까와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2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207]팔원(八元) : 옛날 재덕(才德)이 있던 선비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에 "고신씨(高辛氏)에게 재자(才子) 8인이 있었는데 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백호(伯虎)·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貍)이다." 하였다.
- [註 208]
불초(不肖)가 사현(四賢)에 섞여 있으면서 : 이는 ‘사현일불초(四賢一不肖)’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사현은 범중엄(范仲淹)·윤수(尹洙)·여정(余靖)·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키고, 불초는 고약눌(高若訥)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권320 채양전(蔡襄傳).- [註 209]
고굉(股肱) : 대신(大臣).- [註 210]
이목(耳目) : 언관(言官).- [註 211]
백시(伯始) : 호광(胡光)의 자(字).- [註 212]
노씨(老氏) : 노자(老子).- [註 213]
화광(和光) : 화광동진(和光同塵).- [註 214]
역린(逆鱗)의 화 :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서 당하는 화. 역린은 용의 목 밑에 역으로 달린 비늘인데 이를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이래서 임금의 비위를 거스른다는 뜻으로 전용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註 215]
비척(肥瘠) : 살찜과 깡마름.- [註 216]
영위(榮衛) : 혈기(血氣).- [註 217]
태형(台衡) : 정승을 가리킴.- [註 218]
저군(儲君) : 순회 세자(順懷世子).- [註 219]
과질(瓜瓞)의 경사 :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를 말함. 외 덩굴이 작은 데에서 크게 멀리 뻗어나가는 것을 비유하여 주실(周室)이 점차 흥성해진 과정을 읊은 시(詩)에서 따온 말.《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綿).- [註 220]
종사(螽斯)의 경사 :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를 말함. 자손이 메뚜기처럼 번성하여 화목하게 사는 것을 묘사한 시에서 따온 말.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 [註 221]
을축년 : 1565 명종 20년.- [註 222]
병길(丙吉) :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 재상. 무제(武帝) 재위 중 옥리(獄吏)로 있을 적에 선제가 위 태자(衛太子)의 일로 옥에 갇힌 것을 동정하여 보양(補養)한 공으로 선제가 즉위한 뒤 박양후(博陽侯)로 봉했다. 병길은 끝까지 그 공을 자신이 말하지 않았었다. 《한서(漢書)》 권74 위상 병길전(魏相丙吉傳).○領議政李浚慶上疏曰
天人之際, 精祲有以相盪, 吉凶有以相感。 蓋其天之與人, 形體雖殊, 陰陽之理, 五行之氣, 經緯綜錯, 爲天爲人。 所謂無極之眞、二五之精, 妙合而凝者也。 天有是理, 人受而爲性; 天有是氣, 人稟而爲形。 是故天之理, 不異於人, 人之道皆原於天。 人局形氣之私, 不知所以然之理, 妄分彼我, 見謂蒼蒼者, 不與於人, 蠢蠢者, 無干於天。 於是放僻奢侈, 弄成災怪, 一氣之天, 不得不隨之, 而變動焉。 人固天之一氣, 而爲人君者, 又首出庶物, 爲萬姓主。 其理與氣, 尤與天地相關, 流通感應之妙, 遍於動靜之頃。 《詩》曰: "昊天曰旦, 及爾游衍。 昊天曰明, 及爾出王。" 又曰: "上帝臨汝, 無貳爾心。" 古昔聖王, 知天之無乎不在, 戒謹恐懼, 兢業持守, 故其心常正。 不善之瑞、非僻之干, 無自而萌焉。 德與天一, 心如太虛; 淸明在躬, 志氣如神; 物來必照, 善惡邪正, 不能遁形。 末世學乖, 不知畏敬之道, 日就弛放之地。 假有有志之君, 心不克守, 志不能御, 珍禽奇獸、妖花異草, 而目爲之動; 諛言媚辭, 而耳爲之傾; 厚味珍膏, 而口爲之朶; 穠薰香艶, 而鼻爲之引。 可喜之玩, 不厭之言, 雜然前陳, 志隨以趨, 而心始失正。 雖欲精一以守之, 本心旣失, 故邪者或以爲正, 美者或以爲惡, 忠不見輸, 而邪常勝正。 彼蒼蒼不變之天鑑臨, 在上俯見, 人不若(德)〔聽〕 , 安得不至於驚動而垂象乎? 此後世祥風和氣之罕見, 而妖孽變怪之荐至也。 自頃以來, 變異疊現, 冬月已深而雷震電光, 星文屢變, 而天鼓晴鳴, 非常之災、切迫之異, 竝發於數旬之內。 臣不敢知, 人事感召而然歟? 事應將萌而然歟? 頃日冬雷之變, 玉堂上箚, 臣伏見其批答有曰: "上下交和, 人心和平, 處事得中而已。" 又曰: "人心和, 則天地之氣必和。" 臣有以見聖學之造詣 已極乎高明。 其於天人之理, 洞見其大意。 以如此之學, 持不貳之心, 何難乎回天? 何憂乎弭變? 以之致中, 則無偏倚之失; 以之致和, 則萬物得宜。 大哉! 和平得中之敎! 此保合大和, 維持太平之顯謨乎! 第念, 和之一字, 有事同而理異, 有迹同而實差。 誠恐在下之人, 耽玩中和之敎, 而不體中和之實, 以苟同偸合, 順從而爲和; 以循默模稜, 無非而爲中, 遂成頹靡偸惰之習, 人心終至於失中, 國勢終至於不振。 其流之弊, 有可不勝言者。 臣嘗因和平之義, 推衍其說曰: "苟非上聖中和合德之人, 安能自致其中, 自發於和也? 其必矯揉培養, 百倍其功, 一念之差, 必兢惕而勉改, 一念之惡, 必力去而勇克, 自治旣嚴, 猶以爲不足, 尋師而是正焉, 取友而求助焉, 觀善聞過, 以成其德, 然後極其和, 而天地之位育可冀焉。 以五行言之, 則金木水火土之用, 各適其宜, 而偏其功, 則或至於殺人害物; 合時而相助, 則四時行焉, 歲功成焉。 以五味言之, 酸醎甘苦辛之物, 各異其味, 而各用一味, 則必獰惡辛辣, 不堪於口, 而甘者必受其辛, 苦者如致其酸, 務相調劑, 以成大羹之和, 有以相克而相成, 有以相同而相害, 天下之物, 莫不皆然。 至於爲國, 亦豈有異於此哉? 朝廷之上, 非一人之聚, 知愚賢不肖, 輳集駢臻。 其間不能不以類相別, 其有朋姦立黨, 誣上行私, 眩亂是非, 諛順阿比之姦, 必排擊而痛絶之, 務去而力治之, 滌腸洗胃, 推廓淸明, 然後中道可立, 而和平可改也。 當其發姦剔蠧, 排根落枝, 開君之惑、啓君之聰。 爭難論辨之時, 以常情見之, 殊乏和平之意, 有似過越而不中。 然共兜間於八元; 不肖混於五賢, 熒惑主聽, 妬賢害能, 不致流放脫距之斷, 則堯廷、宋朝, 終不見和平之日矣。 至於君德, 推類亦然。 若非生知之聖, 則雖有天質之美, 萬幾之繁, 一日之頃, 豈能盡合於中, 盡發於和乎? 其所謂中和者, 又豈任其生質, 聽其自爲, 一蹴而可到乎? 必有左右輔弼, 股肱耳目, 前後於獻納, 匡其不及, 而補其闕遺, 工夫盡到, 然後德化光明, 太和坱圠。 方其匡輔獻替之際, 誤者正之, 失者救之; 非者切之, 枉者矯之, 磨戞聱牙, 逆於心而拂於慮, 酸醎不入, 圓方不合者多矣。 彼質美之君, 學力之積, 知五行五味之相濟, 悟美疹藥石之不如, 略其太甚, 而攻其對病, 容其辛辣, 合幷爲善, 以輔己德, 德日益修, 過日益改, 群工咸仰, 萬姓歸戴, 和氣洋溢乎四表, 美譽永流於萬世。 又以一身爲譬, 則血氣壅遏, 癰疽內結, 必加藥石針砭, 行滯導壅, 然後血脈流通, 和氣宣暢, 形身平復矣。 方其施砭攻藥之時, 剝膚苦口之痛, 實不可耐。 然一痛之不忍, 而爲終身之禍, 豈不大有逕廷乎? 又有血氣强壯之人, 不畏疾病之侵, 不解保養之方, 諱疾却醫, 積累旡多, 一敗不支。 此何異後世人主, 自恃昇平, 惡聞讜言, 膏首潛鑠於冥冥之中, 終至於亂亡, 而不悟也哉? 古昔聖王, 孜孜於聞過, 不憚其切直危捏之言, 亂亡之談, 日聞於耳者, 蓋欲保其存, 而有其治, 建中致和之計也。 所謂中者, 乃至善之所在, 忠至於盡, 孝至於乂, 罪適其犯, 刑當其罪之謂也。 非乍沈乍浮, 半上落下, 度其兩端, 而折摺其中央, 務爲苟且之謂也。 所爲和者, 乃處置中節之謂也。 責難陳善, 則盡其恭敬, 危急存亡, 而盡其忠順, 施當其可, 而事盡其宜之謂也。 豈好言侫辭, 和顔悅色, 苟安目前, 取人憐美之謂哉? 今世之人, 言苟慷慨, 行苟高亢, 則必謂之不中不和。 夫人質非生知, 學非高明, 若不自慷慨, 高元中培擁, 着力約之, 使中先自雍容, 削其廉隅, 迎合時好, 以求世之所謂中和者, 則其不至於委靡墊沒, 終爲小人之歸者鮮矣。 孔門之徒, 三千之弟, 七十之賢, 無非天下之英材, 而終欲得其狂狷者, 蓋欲裁而就中, 使歸於至善之地耳。 未有一超直詣, 能至中和之域者也。 豈與伯始之中庸, 老氏之和光, 同日語哉? 臣伏聞, 近日上敎, 有人心和則天心和, 庶無旱蝗風水之歎。 臣以老耄驚劣之才, 謬當調燮之地, 不能和衷, 而協恭臣工, 無以稱盛意奉明旨, 以貽聖上側席之憂, 罪當萬死。 奏卽奉身而退, 猶且開喙而言, 仰塵紸纊, 固無可採錄者。 但犬馬之誠, 終不能自已, 敢縷縷陳瀆焉。 人主之威, 非特萬鈞, 人臣孰不自愛其身, 而敢進觸忤之言, 以犯逆鱗之禍哉? 其不避强梗之嫌, 而盡其所懷者, 此必心存憂國, 思欲納忠於冕旒者也。 其觀望畏避, 懷祿保身, 置安危治亂於度外, 如越人視秦人之肥瘠者, 肯爲危言讜論, 以逆盛意, 以取罪戾乎? 以此觀之, 遜順之言, 乃人臣自安之理, 非國家之福也。 故古人有言曰: "欲得伏節死義之臣, 當於面折廷爭中求之。" 蓋平居尙畏雷霆之威, 猶不能盡其所懷, 況可望其臨亂無苟免之節乎? 方今朝廷, 直聲未有所聞, 犯顔未有所見, 然於辭令之間, 頗形違拂之敎, 人懷疑懼, 士多色沮, 爭思苟免之計, 無復剛毅之風。 以臣愚昧老耄之見, 殆非太平氣象, 臣竊憫焉。 假有犯顔之言, 亦是聖明有以俯諒, 而發耳。 自古昏亂之世, 豈有危言之士哉? 此可爲喜而不可爲憚者也。 古人又曰: "危言在國爲元氣。" 蓋和平之世, 易至於解弛, 必有危言, 欲矯輕警惰, 然後元氣壯盛, 而和平可保。 如人方病大腫, 投藥以調之, 施針以決之, 然後榮衛疏通, 而元氣和平也。 《詩》曰: "他山之石, 可以攻玉。" 以石之麄厲, 攻玉之溫潤, 磨盪傷損必多矣。 然非石之麄厲, 無以成玉之溫潤。 然則切磋之言, 雖似剛戾, 實爲治世之藥石。 和平之發輝, 災變之作, 恐未由此也。 伏願, 聖鑑於人臣進言之際, 雖有違忤觸犯之言, 必且寬綽其聖念, 解釋而徐思曰: "彼之狂妄, 其辭直前不忌者, 豈不畏我雷霆, 愛其性命, 猶且犯冒? 是必憂君而發耳, 憂國而言耳, 豈有他乎? 程子所謂, 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則一時違忤之念, 自爾渙然氷釋。 所謂得中而和順者, 端在於此。 聖心和豫, 則人心觀感而和解。 彼一理之天, 亦豈不從, 而平且和乎? 雖或一二公卿大夫, 果有剛愎之人, 只以自速其辜耳, 安能爲梗於淸明之治乎? 惟在益自敬德, 務建皇極, 錫福於民而已。 伏願, 平心而察之, 和氣而聽之, 天地而涵容, 江海而納汚, 萬善輻輳, 聖德益廣, 將見心和氣和人和, 而天地之和應之。 朝廷平和, 太平之治, 皆從此出。 所謂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 吾之氣順則, 天地之氣亦順者。 在帝王尤爲切近之道, 深有望於聖躬也。 心中氣順, 然後可以察幽遠之理, 而爲應天之實。 臣伏見求言之旨, 憂懼深切, 責躬懇惻。 臣在台衡之地, 不能匡贊聖化, 燮和天心, 以動上憂。 此正主憂臣辱之秋, 甘從斥退, 以膺黜貶之譴, 而伏讀十四條迫切之敎, 無非切中病源, 臣感激切歎, 不覺涕之橫集也。 十四之目, 皆當今所不能無之病, 然君心一正, 則其餘病痛, 次第可治。 比猶麗日中天, 群陰自消, 斯不爲吾聖上之累也。 竊謂皇天之示譴, 不專在於遠外, 而聖上所軫念, 尤當在於宗社。 殿下臨御, 殆過二紀于玆, 而儲君中殂, 春宮久虛, 擧國臣民, 佇望休祥, 而反遭罔極之變, 遲延瓜瓞之慶, 迄至於四五歲之久。 未知, 聖念亦曾及此否耶? 宗社之重, 宜有預慮; 臣民之望, 宜有所係, 而殿下亦宜早結恩愛, 使有嚮往歸慕之地, 然後衆望有係, 而維持益固, 國有泰山之安, 民無二聽之惑。 以殿下明聖, 何憚而久靳於此擧耶? 或者以爲: "主上春秋甚富, 方來之祥, 振振不已, 而儲闈暫曠, 只延四三年而近, 何遽疑懼, 而生此太早之計也?" 是則然矣, 雖凡細微之事, 猶且不豫不立。 敬事前定, 則不困; 道前定, 則不窮。 中人有十金之産, 而無分付之人, 猶且矍矍然爲托後之計, 何況帝王寶器, 其可不備預, 而輕忽之哉? 古昔帝王, 春秋未至於三十, 而猶有繼嗣之念。 豈以方盛之年, 終無螽斯之慶, 而爲此急急之計耶? 誠以宗社之寄, 不可須臾無依; 天下人望, 不可須臾無係耳。 三代以後, 家法之正, 無如宋朝, 仁、高二帝, 公天下之心, 眞可爲後世法。 當時言者, 請遴選宗英, 異其禮秩, 俾內外知聖心之有所屬焉。 而彼二帝者, 不以爲忤, 卒定大計, 豈不爲明且聖乎? 伏願遠效二帝之心, 深察備預之幾, 以係一國之望, 豈不幸哉? 然此事, 在下不可擬議於其間, 其必簡在聖心。 選取親賢, 入諸宮中, 不須遽加名號, 只宜昵侍近密, 朝夕左右, 服習觀法, 情意相通, 而親附漸篤。 如此則一國之人, 皆知殿下之心, 應有所屬。 人心恃而無疑, 國勢賴以壯固, 何患乎孤單之足慮乎? 以殿下之聖, 春秋方富, 天神默祐, 則百男之慶, 決不終慳。 他日聖嗣篤生, 大業有歸, 則所謂選入之人, 自當退就私服, 恪守臣職, 豈不惋曲於事, 而穩合於理乎? 如以密侍之恩, 稍加職秩, 待以優數, 如宋朝 婁寅亮之議, 亦何所妨? 往在甲辰乙巳之間, 中廟倦勤, 東宮無嗣, 人情危懼, 議論洶洶, 以殿下中廟嫡統, 仁廟介弟, 傳緖無疑, 而不逞之徒猶且生異。 臣於此時, 曾有奉殿下封太弟, 以定人心之議。 一二大臣, 亦以臣言爲是, 而當其時, 臣位卑秩微, 眷眷之忠, 無路上達, 計不時定, 因循遲回之際, 世代變遷, 宗社幾危而復安。 分辨淑慝, 除治不靖, 國脈之傷, 亦已多矣。 向若早如臣議, 豈有後日之難乎? 今殿下無嫡統介弟之恃, 人心之危懼, 又有甚於曩日。 尤宜早斷聖意, 以殫壓之, 不然, 異日之慮, 何可勝言? 臣不暇他引, 當乙丑秋冬, 上候方在違豫, 而行道之人, 愚夫愚婦, 皆以統緖爲憂, 至有泣下者。 朝廷側足而立, 生出不得已之計, 至稟內旨。 至今追思, 當日難處之事, 不覺毛髮之竦、汗背之浹, 故更申前議, 敢此區區。 及今平時, 預處聖慮, 則聖嗣降誕之間, 人心有係, 群情帖然, 以定一二年之安, 豈非算乎? 殿下德澤, 浹人骨髓, 愛戴已深。 凡以統緖爲憂者, 皆爲殿下計耳。 非有他意也。 時靡有定, 亦豈有希福於後日者哉? 惟荷聖斷, 如前所陳, 早賜採擇而施否耳。 方今太平之時, 無白璧瑕玷之可指, 德音十四之懇眷, 非無可言之事、可救之策, 而臣獨擧此一事 , 上瀆不已者, 悠悠萬事, 唯此爲大故耳。 臣年今七十, 位爲上公, 身無子孫, 眼盲耳聾, 白首餘生, 更無可凱之望。 誠見變異不常, 怕怖斯迫, 又感求言之敎, 冀聞不諱之言, 敢攄危悰, 仰塞聖需。 伏惟, 念上天鑑臨之有赫, 體宗社無彊之攸托, 虛懷觀理, 玩索古今, 以求至公之歸。 更鑑唐 宣疑忌靳子之陋, 毋以狂瞽之言, 視爲犯越, 而少垂省念, 以答天譴, 以慰廟社, 不勝幸甚。 臣年老心荒, 文不能以成語, 語不能以露誠, 何足以開悟聖聽, 慰解宸心乎? 區區之誠, 只在於彌縫聖德, 永固宗祊而已。 【乙丑秋, 上不豫, 中宮惟書下德興君第三子鈞, 而未有名號。 及其復平, 其待鈞, 亦無異於諸王孫。 群臣咸欲言之, 而莫敢先發。 尹漑臨卒, 嘗言之。 李民覺、金添慶繼發之。 玉堂嘗欲箚論, 而以議不合止。 至是浚慶力言之, 朝野倚重焉。】
答曰: "予以否德, 叨主臣民, 遇災求言之時, 卿進藥石之言, 予嘉首相愛君憂國之誠也。 但予之淺計, 人心與世道剛柔宜不偏, 而儲副久虛, 予爲宗社, 豈不深慮? 然予不敏, 未能料某宗, 可合昵侍, 而自古人君, 豈盡預習而觀法乎? 如此重難之事, 敢論不已, 則予恐人情不定, 反生異心也。"
【史臣曰: "浚慶之爲此論, 何其非也! 丙吉有功於宣帝, 而終身不言。 當時爲封太弟之議者, 非獨浚慶, 而浚慶反爲之張皇, 以媚于上何哉? 上以中廟嫡子、仁廟分弟, 受遺敎嗣立, 宗社何危? 而浚慶踵爲此李芑等貪功起禍之語, 無學術、慕功利, 槪可見矣。 言辭雖切, 君子不可以功掩過也。"】
【史臣曰: "浚慶上疏, 論建儲, 上不納。 浚慶是疏, 實社稷之福, 朝野之望, 而上不納, 又從而爲之辭, 使大臣不得自安, 誰爲國開口哉? 識者惜之。"】
- 【태백산사고본】 20책 33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12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