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이 첨지중추부사의 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전문
첨지중추부사 이황(李滉)이 부소(赴召)하지 않았다. 이황은 청렴하게 고절(苦節)을 닦으면서 영화와 이득을 바라지 않았다. 중종조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가 간신 【김안로(金安老).】 에게 배척되었었고, 간신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비록 청현(淸顯)의 자리가 잇달아 내려졌으나 늘 물러가려는 뜻이 있었다. 상이 즉위한 초기에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었고, 임자년에는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특별히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어 선비들의 풍습을 쇄신하려고 마음 먹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했다. 그 뒤에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가니 상이 음식물을 내렸다. 또 첨지중추부사로 불렀는데 병으로 사양하며 전문(箋文)을 올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분에 맞게 농촌(農村)으로 돌아간 것이 어찌 곤궁을 지키는 지사(志士)를 본떠서이겠습니까? 황송하게도 내리신 음식물이 하늘에서 내린 듯한 것을 외람되이 받게 되었으니, 물가를 가듯 조심스럽고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초야(草野)의 미천한 몸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입니다. 젊어서는 시문(時文)에 익숙하지도 못하면서 요행으로 과거(科擧)에 올랐고 나이 들어서는 더욱 세상의 쓰임에 맞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반열(班列)에 끼어 헛된 이름은 두성(斗星)과 기성(箕星) 같으나 부족한 힘은 산악(山岳)을 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명(身命)이 잔약한데다 일찍부터 고질(痼疾)이 있어 날이 갈수록 심해져 정신이 피곤하고 기운이 나른합니다. 이미 힘껏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하면서 어찌 죄를 지며 영화를 탐내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인의 경계하신 뜻을 경외하고 남들의 비웃음을 부끄러워하며 벼슬을 내어놓고 집에서 지내려고 하였는데 이런 사정(私情)이 위에까지 통하기가 쉽지 않아서 성조(聖朝)는 매양 용납하는 아량을 보이셨습니다. 지나간 중종(中宗) 말년에도 일찍이 한번 떠나왔었는데 곧 도로 부르셨고 상께서 다스린 지 미기(未紀)035) 인데 두 차례나 돌아갔었으나 곧 도로 올라왔습니다. 벼슬은 더 높아지고 책임은 매우 무거워져서 두 차례나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없었고 한 차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감당하지 못했었습니다. 신은 고질병이 들어 몸은 더욱 나른해지고 신의 나이는 저물어가며 고목(古木) 같은 형체는 무너져가고 있으니, 다시는 성은에 보답할 기회가 없어 외람되게 벼슬만 차지하고 있는 부끄러움이 더욱 깊어지기만 합니다. 생각하건대 지금은 모든 관원이 치사(致仕)하는 사례가 없으므로 울타리를 들이받은 양처럼 처신이 어렵고, 소신(小臣)이 돌아갈 명분(名分)을 찾기 힘드니 마치 보금자리를 떠난 사슴처럼 불안했습니다. 비록 부득이하여 물러나와 있으면서도 바야흐로 견책을 초래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어찌 임금의 귀에 말이 주달(奏達)되고 다시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외람되게 아뢰어 성상께서 보잘것없는 신을 진념(軫念)하시어 파리한 저에게 봄 기운 같은 혜택을 펴시어, 진기한 음식물을 내려 거친 밥에 지친 몸을 구제해 주고 녹을 받게 만들어 서울에서 치료하게 해주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명이 초가집에 내리니 온 마을에 빛이 났고, 불행히도 묵은 병으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마는 온 가족이 배가 부르도록 만족하게 먹었습니다. 몇 해를 시위 소찬만 하던 끝에 오늘과 같은 턱없는 하사(下賜)가 내리고 보니, 계고(稽古)한 노력036) 도 없이 받는 것이라 획만(畫墁)037) 과 똑같은 기롱이 있을 것입니다. 사무치는 부끄러움이 한없으나 무슨 수로 책임을 메울 길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이는 대개 주상 전하께서 천지처럼 큰 도량으로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깊은 인(仁)을 펴시는 때를 만났기에, 공로가 없는데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어 분수에 넘치게 장려하신 것입니다. 훌륭한 신하들이 있는데도 신 같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면서 위무와 격려를 아울러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찮은 이 몸에게 특별한 은덕을 입게 하셨으니 신이 감히 골수에 깊이 새기지 않겠습니까. 늙은 몸을 추슬러 시골에서 조섭하면서 성은을 생각하며 몸을 신칙하겠습니다. 어찌 감히 몸을 닦고 도를 지킨다고 하면서 임금의 광채에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간절한 소원은 작은 성의나마 바치면서 길이 대궐을 향하고 싶은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66면
- 【분류】인물(人物) / 인사(人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35]미기(未紀) : 기(紀)가 못되었다는 말. 기는 곧 12년을 뜻하는 것인데, 이 때가 명종 10년이므로, 12년도 못되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임.
- [註 036]
계고(稽古)한 노력 : 옛일을 고찰하여 연구하는 노력. 곧 글에 관한 일에 노력한 대가로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 것임. 《후한서(後漢書)》 환영전(桓榮傳)에 "환영이 태자 소부(太子少傅)가 되었을 적에 수레와 말을 내리자 ‘오늘의 하사는 계고한 노력 때문이다.’ 했다." 하였고, 《고사성어(古事成語)》 문사(文事)에 "글에 관한 일로 돈을 얻게 되는 것을 계고한 노력이라 한다."고 했다.- [註 037]
획만(畫墁) : 흙손질하여 단장해 놓은 담장에 잘못 그어 흠을 내고 마는 것. 곧 남이 해놓은 일에 해만 끼치게 되는 것을 이른 말.○僉知中樞府事李滉不赴召。 滉爲人, 淸修苦節, 不求榮利。 在中廟朝, 始登仕路, 爲奸臣 【金安老。】 所擠。 奸臣誅死之後, 雖歷敭淸顯, 而常有退去之志。 上之卽位之初, 以豐基郡守, 棄官歸田里, 歲壬子, 被召還朝, 特授成均館大司成, 以作新士習爲心, 而卒不得施。 後除僉知, 遂謝病歸, 上賜以食物。 又以僉知召之, 辭疾上箋。 【箋文云: "投分歸農, 奚取於不忘在壑; 辱命賜物, 濫承於有隕自 天。 踧踖循涯, 感激無已。 伏念臣, 草茅賤蹤, 樗櫟散材。 少未習於時文, 幸竊科第; 晩益闊於世用, 猶忝班行。 虛名有同於斗筲, 瑣力恒負於山岳。 矧軀命之殘陋, 夙沈痼之嬰纏。 歲增月尤, 神疲氣惙。 旣不能陳力而就列, 又焉可負罪而貪榮? 畏古義而羞人嗤, 納天祿而蘄家食。 私情未易以上徹, 聖朝每示於兼包。 肆在中廟之末年, 嘗一去而旋召; 逮夫當宁之未紀, 亦再歸而輒還。 以至命秩加陞, 責任殊重。 再敎胄而何補? 一參兵而靡堪。 而臣病入膏肓, 身彌萎薾。 犬馬之年齒訖暮, 土木之形骸垂頹。 更無報效之期, 益深叨冒之愧。 顧今庶官無致仕之例, 似羊觸藩; 寔於小臣難乞身之名, 如鹿辭囿。 縱非得已於退伏, 方懼自速於譴誅。 豈意黈纊之達聰, 復誤左右之猥啓? 軫天心於跂喙, 流春澤於瘁枯。 鍚以粲珍, 俾濟困於求藥; 敍之祿秩, 令就醫於京師。 命下蓬蒿, 光賁閭巷。 積痾奈縻於奔走, 全家頓受其飽厭。 以幾年素餐之餘, 加今日枉賚之及。 匪稽古而蒙力, 與畫墁而同譏。 第極慙銘, 曷由稱塞? 玆蓋伏遇主上殿下, 乾坤大度化育深仁。 罔功勞而靡愛笑嚬, 奬予寧僭; 有絲麻而無棄菅蒯, 摩厲竝行。 故令微踪, 獲霑茂渥; 臣敢不緘封骨髓, 收拾桑楡? 屛丘樊而保頣, 仰恩造而警勑。 豈敢擬修身而守道, 以近天光? 惟切願食芹而獻誠, 永拱宸極。】
- 【태백산사고본】 12책 18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66면
- 【분류】인물(人物) / 인사(人事)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