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실록16권, 명종 9년 6월 3일 임신 2/2 기사 /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사헌부에서 부민고소법의 개정에 대해 아뢰다
국역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기강이 크게 무너져 공론(公論)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수령들은 아랫사람을 침학(侵虐)하고 마음먹은 대로 자행하여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억울하게 죽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날로 심해져 이미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피살된 사람이 감히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부민 고소(部民告訴)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대전》의 형전(刑典) 소원조(訴冤條)를 상고해 보니 지금 쓰이고 있는 뜻과는 크게 다릅니다. 소원조에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과 법에 의하지 않고 멋대로 사람을 죽인 것 외에, 이전(吏典)·복예(僕隷)091) 가 그의 관원(官員)을 고발한 자와 품관(品官)092) ·이민(吏民)이 그의 관찰사(觀察使)나 수령을 고발하는 자는 모두 그 고발을 받아주지 않고 장 일백 도삼년(徒三年)에 처하고, 남몰래 타인을 사주하여 고발장을 내게 한 자도 죄는 이와 같다. 그리고 자기소원자(自己訴冤者)는 아울러 청리(聽理)하고 무고자(誣告者)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관리·관찰사·수령의 잘못은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면 이전·복예·품관·이민이 본디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만약 법을 어기고 고발하면 죄가 도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만약 종사에 관계되거나 불법으로 살인하면 스스로 고발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이다. 법을 이와 같이 세워 놓았기 때문에 간사한 백성이 조금이라도 혐의와 원한이 있으면 해치려는 계책을 품고 어지럽게 고소를 하니 수령은 그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고 도리어 간사한 백성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속록(後續錄)》에서는 도삼년(徒三年)이 가볍다 하여 다시 그 법을 중하게 해서 전가 사변(全家徙邊)으로 결정하였는데 이것 또한 폐단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세워진 후에 수령은 이 법을 빙자하여 비록 살인을 고발한 일이라도 ‘부민 고소(部民告訴)’라고 이름을 붙여 그 옥사를 조작하니 백에 하나도 면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은 전가 사변의 죄를 겁내어 자기에게 억울함이 있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고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수령이 더욱 방자하게 탐학하고 양민이 날마다 구렁에 뒹굴게 되는 까닭입니다. 전에 금천(衿川)에 사는 백성이 관에서 내는 쌀을 받지 못해 굶어 죽게 되었는데도 본관(本官)에서 제급(題給)해 주지 않아 본부(本府)에 호소하여 먹을 것을 얻었는데 그뒤 본부에 호소한 사람이 도리어 부민 고소의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백성들의 원통함 중에 무엇이 굶어 죽는 것보다 더하기에 끝내 중죄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고 보면 자기소원자(自己訴冤者) 조차 부민 고소의 율(律)을 적용받게 된다는 것을 이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부민 고소의 법과 자기 소원의 일은 《대전》에 매우 분명하게 두 가지 조항으로 나뉘어 있는데도 이를 뒤섞어 사용하고 있으니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앞서 상께서 부민 고소의 법에 대해 하문하셨는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조종조로부터 실시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이 인심이 완악할 때 이 법을 폐지하고 관원과 관찰사·수령을 고소하는 기풍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자기소원자는 청리하고 무고자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는 법만을 폐지해서는 안 되니 팔도(八道)에 효유(曉諭)하여 신명(申明)해서 거행하게 한다면 원통함을 품고 있는 백성들이 모두 신원(伸冤)을 받을 수 있고 무고하는 사람도 징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및 《속록》의 법을 자세히 밝혀 국가에 관계된 것과 불법으로 살인한 것 외의 부민 고소자는 전가 사변시키고 자기소원자는 청리하고 무고자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0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호구-이동(移動)
- [註 091] 복예(僕隷) : 경사(京司)의 서리(書吏)·고직(庫直)·서원(書員) 등을 이전(吏典)이라 하고, 사령(使令)·구종(驅從) 등을 복예(僕隷)라 한다. 지방에서는 아전(衙典)·장교(將校)를 이전이라 하고, 관노(官奴)·사령(使令)을 복예라고 한다.
- [註 092] 품관(品官) : 품계(品階)가 있는 관원. 여기서는 정관(正官)이 아니라 각 고을에 둔 향청(鄕廳)의 좌수(座首)·별감(別監) 등 유향 품관(留鄕品官)을 뜻한다.
원문
○憲府啓曰: "近來紀綱大壞, 公論不行, 故守令等侵虐下人, 恣行胸臆, 少不如意, 多至枉殺。 日以日甚, 已不可救, 而被殺之人, 不敢告者, 以其有部民告訴之法也。 然臣等考《大典》 《刑典》訴冤條, 大與今之所用之意不同矣。 訴冤條曰: ‘關係宗社及非法枉殺人外, 吏典、僕隷, 告其官員者, 品官吏民, 告其觀察使守令者, 竝勿受杖一百, 徒三年; 陰嗾他人發狀者, 罪亦如之; 其自已訴冤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 云。 以此見之, 凡官員、觀察使、守令之失, 非自已事, 則爲吏典、僕隷、品官、吏民者, 固不得告之。 若違法告之, 則罪至於徙, 若關係宗社、非法殺人, 則許其自告矣。 立法如此, 而奸細之民, 少有嫌怨, 輒懷中毒之計, 紛紜告訴, 守令不得安其位, 反見制於奸民, 故《後續錄》, 以徒三年爲輕, 更重其法, 定之以全家徙邊, 亦救弊之不得已者也。 及立此法之後, 守令憑藉此法, 雖告殺人之事, 亦名之曰部民告訴, 鍜鍊其獄, 百無一免, 故愚民等怯於全家徙邊之罪, 雖有自己冤抑, 寧死而不得告。 此守令之所以益肆貪暴, 而良民之所以日就溝壑者也。 前者衿川之民, 不得受出官糶, 將至餓死, 而本官不爲題給, 來訴於本府而得食, 其後訴于本府之人, 反被部民告訴之罪。 夫民之冤, 孰有重於餓死者, 而竟被重罪乎? 然則自已訴冤者, 亦被部民告訴之律, 於此亦可知矣。 大抵部民告訴之法, 與自己訴冤之事, 《大典》內分爲二條, 極爲分明, 而混而用之, 至爲未便。 前者自上下問部民告訴之法。 其恤民之意, 可謂至矣。 然此法自祖宗朝行之已久。 況當人心頑惡之時, 不可廢此法, 以開告訴之風。 但自己訴冤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之法, 不可廢也。 曉諭八道, 申明擧行, 則民之抱冤者, 皆得申理, 誣告之人, 亦可懲戒矣。 請申明《大典》及《續錄》之法, 非關係國家非法殺人外, 部民訴告者, 全家徙邊, 自己冤訴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 答曰: "如啓。"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0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호구-이동(移動)
명종 9년 (1554) 6월 3일
명종실록16권, 명종 9년 6월 3일 임신 2/2 기사 /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사헌부에서 부민고소법의 개정에 대해 아뢰다
국역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기강이 크게 무너져 공론(公論)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수령들은 아랫사람을 침학(侵虐)하고 마음먹은 대로 자행하여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억울하게 죽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날로 심해져 이미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피살된 사람이 감히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부민 고소(部民告訴)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대전》의 형전(刑典) 소원조(訴冤條)를 상고해 보니 지금 쓰이고 있는 뜻과는 크게 다릅니다. 소원조에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과 법에 의하지 않고 멋대로 사람을 죽인 것 외에, 이전(吏典)·복예(僕隷)091) 가 그의 관원(官員)을 고발한 자와 품관(品官)092) ·이민(吏民)이 그의 관찰사(觀察使)나 수령을 고발하는 자는 모두 그 고발을 받아주지 않고 장 일백 도삼년(徒三年)에 처하고, 남몰래 타인을 사주하여 고발장을 내게 한 자도 죄는 이와 같다. 그리고 자기소원자(自己訴冤者)는 아울러 청리(聽理)하고 무고자(誣告者)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관리·관찰사·수령의 잘못은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면 이전·복예·품관·이민이 본디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만약 법을 어기고 고발하면 죄가 도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만약 종사에 관계되거나 불법으로 살인하면 스스로 고발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이다. 법을 이와 같이 세워 놓았기 때문에 간사한 백성이 조금이라도 혐의와 원한이 있으면 해치려는 계책을 품고 어지럽게 고소를 하니 수령은 그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고 도리어 간사한 백성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속록(後續錄)》에서는 도삼년(徒三年)이 가볍다 하여 다시 그 법을 중하게 해서 전가 사변(全家徙邊)으로 결정하였는데 이것 또한 폐단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세워진 후에 수령은 이 법을 빙자하여 비록 살인을 고발한 일이라도 ‘부민 고소(部民告訴)’라고 이름을 붙여 그 옥사를 조작하니 백에 하나도 면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은 전가 사변의 죄를 겁내어 자기에게 억울함이 있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고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수령이 더욱 방자하게 탐학하고 양민이 날마다 구렁에 뒹굴게 되는 까닭입니다. 전에 금천(衿川)에 사는 백성이 관에서 내는 쌀을 받지 못해 굶어 죽게 되었는데도 본관(本官)에서 제급(題給)해 주지 않아 본부(本府)에 호소하여 먹을 것을 얻었는데 그뒤 본부에 호소한 사람이 도리어 부민 고소의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백성들의 원통함 중에 무엇이 굶어 죽는 것보다 더하기에 끝내 중죄를 받아야 합니까? 그러고 보면 자기소원자(自己訴冤者) 조차 부민 고소의 율(律)을 적용받게 된다는 것을 이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부민 고소의 법과 자기 소원의 일은 《대전》에 매우 분명하게 두 가지 조항으로 나뉘어 있는데도 이를 뒤섞어 사용하고 있으니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앞서 상께서 부민 고소의 법에 대해 하문하셨는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조종조로부터 실시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이 인심이 완악할 때 이 법을 폐지하고 관원과 관찰사·수령을 고소하는 기풍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자기소원자는 청리하고 무고자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는 법만을 폐지해서는 안 되니 팔도(八道)에 효유(曉諭)하여 신명(申明)해서 거행하게 한다면 원통함을 품고 있는 백성들이 모두 신원(伸冤)을 받을 수 있고 무고하는 사람도 징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및 《속록》의 법을 자세히 밝혀 국가에 관계된 것과 불법으로 살인한 것 외의 부민 고소자는 전가 사변시키고 자기소원자는 청리하고 무고자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0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호구-이동(移動)
- [註 091] 복예(僕隷) : 경사(京司)의 서리(書吏)·고직(庫直)·서원(書員) 등을 이전(吏典)이라 하고, 사령(使令)·구종(驅從) 등을 복예(僕隷)라 한다. 지방에서는 아전(衙典)·장교(將校)를 이전이라 하고, 관노(官奴)·사령(使令)을 복예라고 한다.
- [註 092] 품관(品官) : 품계(品階)가 있는 관원. 여기서는 정관(正官)이 아니라 각 고을에 둔 향청(鄕廳)의 좌수(座首)·별감(別監) 등 유향 품관(留鄕品官)을 뜻한다.
원문
○憲府啓曰: "近來紀綱大壞, 公論不行, 故守令等侵虐下人, 恣行胸臆, 少不如意, 多至枉殺。 日以日甚, 已不可救, 而被殺之人, 不敢告者, 以其有部民告訴之法也。 然臣等考《大典》 《刑典》訴冤條, 大與今之所用之意不同矣。 訴冤條曰: ‘關係宗社及非法枉殺人外, 吏典、僕隷, 告其官員者, 品官吏民, 告其觀察使守令者, 竝勿受杖一百, 徒三年; 陰嗾他人發狀者, 罪亦如之; 其自已訴冤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 云。 以此見之, 凡官員、觀察使、守令之失, 非自已事, 則爲吏典、僕隷、品官、吏民者, 固不得告之。 若違法告之, 則罪至於徙, 若關係宗社、非法殺人, 則許其自告矣。 立法如此, 而奸細之民, 少有嫌怨, 輒懷中毒之計, 紛紜告訴, 守令不得安其位, 反見制於奸民, 故《後續錄》, 以徒三年爲輕, 更重其法, 定之以全家徙邊, 亦救弊之不得已者也。 及立此法之後, 守令憑藉此法, 雖告殺人之事, 亦名之曰部民告訴, 鍜鍊其獄, 百無一免, 故愚民等怯於全家徙邊之罪, 雖有自己冤抑, 寧死而不得告。 此守令之所以益肆貪暴, 而良民之所以日就溝壑者也。 前者衿川之民, 不得受出官糶, 將至餓死, 而本官不爲題給, 來訴於本府而得食, 其後訴于本府之人, 反被部民告訴之罪。 夫民之冤, 孰有重於餓死者, 而竟被重罪乎? 然則自已訴冤者, 亦被部民告訴之律, 於此亦可知矣。 大抵部民告訴之法, 與自己訴冤之事, 《大典》內分爲二條, 極爲分明, 而混而用之, 至爲未便。 前者自上下問部民告訴之法。 其恤民之意, 可謂至矣。 然此法自祖宗朝行之已久。 況當人心頑惡之時, 不可廢此法, 以開告訴之風。 但自己訴冤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之法, 不可廢也。 曉諭八道, 申明擧行, 則民之抱冤者, 皆得申理, 誣告之人, 亦可懲戒矣。 請申明《大典》及《續錄》之法, 非關係國家非法殺人外, 部民訴告者, 全家徙邊, 自己冤訴者, 竝聽理, 誣告者, 杖一百流三千里。" 答曰: "如啓。"
- 【태백산사고본】 11책 16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03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사법-행형(行刑) / 호구-이동(移動)
원본
명종 9년 (1554)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