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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15권, 명종 8년 10월 9일 임오 2번째기사 1553년 명 가정(嘉靖) 32년

간원이 서얼 자손에게 허통하는 법을 거둘 것을 주청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서얼방금법(庶孽防禁法)은 사람을 씀에 있어서도 방해가 되고 중국의 제도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일을 중국과 모두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단지 적서(嫡庶)를 다 쓸 뿐만 아니라 노주(奴主) 사이에도 정해진 분수가 없어서 문무(文武)에 능하면 천한 노예라도 벼슬을 할 수 있고, 문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관인의 자식이라도 천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기자(箕子)가 들어온 이후로 노주의 구분이 엄하였는데도 간혹 강상(綱常)의 변이 있었는데, 지금 노주 사이에 정해진 분수가 없는 중국의 법을 흉내내면서 어지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적서의 구분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 나라와 같지 않아 아내가 반드시 모두 명가의 딸은 아니고 첩이 반드시 아내보다 비천하지는 않으며, 선후나 후박(厚薄)으로 적첩을 구분합니다. 방금(防禁)을 하지 않아도 폐단이 없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땅덩이가 작고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어지럽게 되므로 적서를 구분하고 노비를 세전(世傳)하는 법을 역대로 행하였으되 오랫동안 아무런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양법(良法)이라 할 만한데, 지금 한두 사람의 호소로 인하여 허물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성교(聖敎)를 보건대 ‘양첩의 소생은 손자에, 천첩의 소생은 증손에 이르러 모두 허통한다.’고 하였는데, 신들은 진실로 성상께서 참작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법으로 말하면 선왕의 법이니, 후왕과 후민이 지키되 오히려 더 굳게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되고 먼저 협소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서 사견(私見)으로 변경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을 쓰는 길을 넓히기 위하여 한 번 본래의 법을 변경한다면, 당하 종실(堂下宗室)144) 중에서도 문무에 능한 자가 또한 많으니, 이미 서얼에게 허통하여 응시하게 한다면 종실에게도 응시를 허락하자는 의논이 연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일거에 선왕의 법을 허물어뜨리면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일을 행하려 하십니까.

친정(親政)하신 초기부터 천재 지변이 속출하여 논밭은 황폐해져 잡초가 무성하며, 길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여 위망의 근심이 절박합니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인심의 화순뿐이며, 믿을 수 있는 것은 조종의 양법뿐입니다. 지금 만약 인심을 어기어 그 명분을 어지럽히고 조종을 어겨 성법을 무너뜨린다면, 원한을 풀어주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을 격분케 할 것이고, 인재를 얻고자 하나 도리어 참란(僭亂)만 고무시킬 뿐이니, 어찌 선왕의 뜻과 일을 계승하는 의도에 합치되겠습니까. 서얼 자손에게 허통한다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선왕의 법을 따르고서 일을 그르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조종조에서도 일시적으로 변통한 일이 많았고, 지금 서얼 자손에게 허통하자는 논의도 폭넓게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상하와 적서를 문란시키는 폐단이 있을지는 자세히 알수 없다. 나는 다만 인재를 중히 여기고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법을 세운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후에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간원·홍문관·사헌부는 일체이다. 만일 왕의 정치에 잘못이 있으면 3사(三司)가 반드시 모두 일어나 다투어 간한다. 지금 서얼에게 허통한다는 일을 놓고 홍문관과 간원에서는 차자를 올려 불가함을 극론하였는데 헌부에서만 간하지 않았다. 이것은 헌부의 관원 중에 찬성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종의 옛법을 경솔하게 변경하여 미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방해하고 능멸하는 습속을 열어놓았으므로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대사헌 윤춘년은 곧 윤원형의 재종제이다. 원형이 정처(正妻)를 축출하고 천첩에게 유혹되어 많은 자녀를 낳았으므로, 앞장서서 서얼 허통의 논의를 제창하며 아첨하는 무리들을 충동질하였다. 그러자 춘년 등이 또 이 논의를 받아들여 서로 순치(脣齒)가 되어 국법의 변란에 대해서는 아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간원이 올린 계사(啓辭)를 억지말을 끌어낸다고 논박하였다. 또 손자와 증손자에 대하여도 분명한 승전을 받들도록 청하여 간원 관원들의 입을 막아 다시 아뢰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인심이 더욱 분개하였으나 그의 예봉을 겁내어 감히 시비하는 자가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

  • [註 144]
    당하 종실(堂下宗室) : 창선 대부(彰善大夫) 이하의 종친(宗親)을 말함.

○諫院啓曰: "我國家庶孽防禁之法, 有妨用人之路, 與中原之制不同。 然我國之事, 不可盡同於中原也。 中原則非但嫡庶之竝用, 奴主亦無定分, 能文能武, 則賤隷得爲官人, 不習文武, 則官人之子, 亦爲賤人。 我國則不然, 自封以後, 奴主之分, 如是其嚴, 而間有綱常之變, 則今欲效嚬於中原奴主無定之法, 而欲其無亂得乎? 嫡庶之分, 朝則與我國不同, 其爲妻者, 未必皆名家也, 爲妾者, 未必卑於其妻也。 或因先後, 或因厚薄, 而爲之名號, 則其不爲防禁而無弊者, 蓋有以也。 我國則壤地褊小, 無禮義則上下亂, 故嫡庶之有分, 奴婢之世傳, 歷世旣久, 行之無弊。 雖謂之良法可也, 而今用一二人之訴, 毁之可乎? 伏覩聖敎有曰: ‘良妾子至其孫, 賤妾子至曾孫, 許通。’ 臣等固知聖衷斟酌所在也。’ 第以法者, 先王之法也, 後王後民, 所當持守, 猶恐其不固, 而不可先有狹小之心, 用其私見, 紛更於其間也。 今爲此用人之路, 一撓此法, 則堂下宗室之中, 能文能武者, 亦多有之, 旣通庶孽而許赴, 則許赴宗室之論, 必踵而起矣。 一擧而毁先王大法, 將無所不至。 今之時何等時, 而乃欲爲此擧也? 新服景命之初, 天災、時變疊見層出, 田卒汚萊, 道殣相望, 危亡之患, 切於剝床, 而其間所恃者, 人心之和順而已, 所賴者, 祖宗之良法而已。 今若拂於人心而紊其名分, 違於祖宗而毁其成憲, 則欲解其冤, 而只激衆憤, 欲得人才, 而反皷僭亂。 豈合於繼志述事之道乎? 請還收庶孽子孫許通之命。" 答曰: "未有遵先王之法而過者, 予非不知之, 然祖宗朝, 一時變通之事, 亦多有之。 今者許通庶孽子孫, 廣議酌定。 以此(紫)〔紊〕 上下亂嫡庶之弊, 未詳知也。 予但重人才慮冤枉, 已立法矣。 不允。" 後累啓, 不允。

【史臣曰: "諫院、弘文館、司憲府爲一體, 而王政之闕失, 三司必起而爭之。 今者庶孽之許通, 玉堂、諫院上箚, 極論其不可, 而憲府獨不啓。 憲府之員, 或可或不可, 而可之者勝故也。 輕變祖宗舊章, 以啓賤妨貴、下凌上之習, 下至草茅, 無不傷嘆。 大司憲尹春年, 乃元衡之再從弟也。 元衡放黜正妻, 昵惑賤妾, 多産子女, 首唱許通之議, 諷諭諂附之人。 春年等又從而迎合之, 結爲唇齒, 變亂國法, 非徒不啓, 反論其諫院啓辭, 爲鑑空。 又固請其孫與曾孫, 分明捧承傳, 箝制諫院之官, 使不得更啓。 自是以後, 人心益憤, 畏觸其鋒, 莫敢是非矣。"】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1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가족-가족(家族) / 신분(身分) / 인사(人事)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