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렬 인명 대왕 대비가 수렴 청정에서 물러나다
성렬 인명 대왕 대비(聖烈仁明大王大妃)가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수렴(垂簾)하고 대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성상이 수렴 밖에 나아가니, 삼공(三公)과 시신(侍臣)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대왕 대비가 대신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나는 본래 불민(不敏)한 사람이다. 일찍이 서책(書冊)을 보니, 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大王)091) 이 연이어 승하하였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하였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하여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였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092) 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주상의 춘추가 장성하고 학문이 고명하여져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사(政事)를 재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귀정하고 다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니, 대신들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성상을 잘 보도(輔導)하여 태평스런 정치에 이르도록 힘쓴다면 매우 다행하겠다. 부덕한 나로서는 비록 폐습을 바로잡아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 하였으나, 잘못되는 일이 많아 끝내 그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인심에 반드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생각하여 보건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부덕한 나 때문이니 지금 귀정하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이 계획은 실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 뜻을 대신들에게 직접 말하고자 접견한 것이다."
하니, 상이 탑(榻)에서 내려와 사양하였다. 자전(慈殿)이 분부하기를,
"주상이 탑에서 내려와 있으니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여기에 있을 수 있겠소. 빨리 탑으로 오르도록 하시오."
하였다. 상이 대비의 명을 받들어 다시 탑으로 오르고, 이어 엎드려서 사양하기를,
"소자는 성품이 본디 불민하고 또한 학식이 없사오니, 주야로 자전께서 보도하여 주심을 바라는 뜻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자전께서 뜻밖에도 승정원으로 하여금 성종조(成宗朝)의 고사(故事)를 써 올리게 하시고, 뒤이어 대신을 접견하여 귀정하고자 하시니 명을 받으매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자가 모든 기무를 어떻게 감히 홀로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였다. 자전이 답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섭정을 한 것은 주상의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때문이었소. 지금은 주상의 나이가 장성하고 학문이 진보하여 모든 일을 홀로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지치(至治)를 도모하여 생민들을 복되게 해야 할 것이오. 나는 결코 다시는 섭정하지 않을 것이오."
하니, 상이 다시 사양하기를,
"부덕한 소자가 백성 위에 있지만 자품이 노둔하고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였으니, 기무를 어떻게 홀로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자전께서는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이와 같이 서둘지 마소서."
하였다. 자전이 답하기를,
"나는 근심과 고민으로 정신이 혼란하므로 국정에 오랫동안 참여하여 사책(史策)을 더럽히는 것은 안 될 일이오. 주상이 어렸을 때에는 그만두기 어려운 바가 있었지마는, 지금은 결코 함께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니 주상은 생각하여 주시오."
하였다. 상이 다시 사양하기를,
"하교하심이 비록 간절하시나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자전이 답하기를,
"정희 왕후(貞熹王后)093) 는 8년 만에 귀정하였는데, 나는 지금 9년이나 되었으니 너무 늦은 것이오."
하였다. 심연원(沈連源)이 아뢰기를,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으셨으나 자전의 보살핌을 힘입어 오늘에 이르러 춘추가 왕성하고 학문이 고명해졌으니, 국가에 어찌 이와 같은 막대한 경사가 있겠습니까. 내전(內殿)께서 귀정하기를 결정하시니, 이는 바로 국가와 생민의 복입니다. 내전께서 모든 기무의 번다함을 모두 주상께 돌리시고 편안히 정신을 기르신다면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니, 자전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혼매하여 국사를 보살필 수 없으며 또한 흉년이 들어 생민이 유리(流離)하고 있으니, 내가 섭정한지 9년 동안에 한가지 일도 볼 만한 것이 없다. 나는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하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하면서도 지금까지 머뭇거리며 귀정하지 않은 까닭은, 오직 주상께서 학문에 전념하여 고명한 경지에 나아가기를 바라서였다. 지금은 주상의 연령이 왕성하고 학문이 성취되어 큰일을 맡길 수 있는데, 내가 어찌 계속해서 정사에 간여하겠는가."
하였다. 상이 재배하며 굳이 사양하고 대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대신들도 귀정하심이 불가하다는 뜻을 자전께 아뢰라."
하였다.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주상의 자품이 탁월하시어 즉위하신 처음에 능히 여러 간흉을 분변하여 죄를 주시니, 비록 한 소제(漢昭帝)094) 의 명철함이라도 이에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옛날 역사를 보건대 태후가 섭정하는 것은 한갓 정사에 간여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보위에 오른 임금이 나이가 어리면 형편상 기무를 전적으로 맡길 수 없으며, 또한 반드시 학문에 전념한 후에라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섭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시니 비록 은 고종(殷高宗)의 시민(時敏)과 주 성왕(周成王)의 즙희(揖熙)095) 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자전께서는 성상이 모든 기무를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귀정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 굳이 사양하시기를 마지 않으시니 성상의 망극하신 마음에야 비록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으시겠으나, 또한 자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오래도록 모든 기무를 수고롭게 처리하심은 매우 미안합니다. 성상께서는 부득이 자전의 결단을 따르시어야 합니다.
또 오늘날은 일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임금이 처음으로 정치에 나아가게 되면 여러 신하들이 경계하였는데, 그 절요(切要)는 경(敬)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고편(召誥篇)096) 에서는 경을 말한 곳이 7∼8군데에 이르렀으며,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고한 말과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올린 말 및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한 내용들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성상께서는 이것으로 날마다 살피소서.
또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아름다운 말과 선정이 많이 기재되어 있으니, 때때로 상고하고 열람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성종께서는 즉위하신 지 얼마 안 되어 항상 진강(進講)할 때마다 책을 대하여 논란하셨다 합니다. 지금 성상께서도 마땅히 이것을 본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옛 성왕의 훈계를 배워야 소득이 있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 옛것을 본받지 않고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신 부열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주상께서는 공경하여 옛 훈계를 본받으소서."
하니, 자전이 이르기를,
"대소 신료들은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성상을 보필 인도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중묘조(中廟朝)의 나이 젊은 사람들이 나랏일을 그르치어 화를 만들어 내어서 조정의 사람들이 많이 상하였는데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킨다.】 주상이 즉위한 뒤에도 흉악한 사람이 몰래 대간(臺諫)을 시켜서 【윤임(尹任)을 가리킨다.】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여, 잠깐 사이에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었다. 나는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징치(懲治)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간적을 분명히 알지 못하여 그 의혹됨이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유감(柳堪)은 ‘《무정보감(武定寶鑑)》을 간행하여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까지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볼 수 있는데,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한 일이다. 이 때문에 인물이 많이 상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는가. 군자와 소인을 일찍 분변하여 진퇴시켰더라면 국가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사람이 ‘앞 수레의 전복을 경계로 삼으라.’ 하였으니, 지난날의 일을 경계삼아 충성을 다하여 성상을 보필하고 인도해야 할 것이다."
하니 윤개(尹漑)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으셨는데, 마침 흉한 운수를 만나셨으니, 만일 자전의 보호하고 교도해 주시는 힘이 아니었더라면, 국가와 종사가 어떻게 보전되어 오늘이 있게 되었겠습니까. 부인으로서 국정에 간여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신 자전의 분부는 바로 선인 황후(宣仁皇后)097) 가 말한 ‘모후(母后)로서 임금의 일을 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고 한 뜻과 꼭 맞습니다. 예로부터 위태로운 때를 당하면 모후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임하여 함께 정사를 처리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간여한 것이겠습니까. 만일 임금이 당당한데도 황후로서 권세를 멋대로 하거나, 장성한 임금이 지위에 있는데도 모후로서 세력을 뺏는 경우를 두고 간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학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러 기무를 결단 하실 수 있으므로, 자전께서는 이에 오랫동안 섭정하심을 편치 않게 생각하시고 귀정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번 일은 인심에 바로 부합되는 것으로 신들은 명을 받고는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상께서 탑(榻)에서 내려와 간곡히 사양하시어 마치 감당하지 못할 듯이 하심을 보니, 신들이 어찌 자전께 여쭈어 성상의 뜻을 힘써 따르게 할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이 같은 큰 일은 이미 자전의 마음속에 결정되어 비록 여쭌다 하더라도 반드시 윤허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감히 여쭙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자전께서는 분부하시기를 ‘재변이 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종조와 전대에 비록 섭정하지 않던 때라도 어찌 재변이 없었겠습니까. 재변이 있더라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면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으나 재변이 없더라도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한다면 도리어 혼란과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의 일을 가지고 비유하여 말한다면, 하늘이 임금에 대하는 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이 만일 착하여 가르칠만하면 아버지는 아들의 조그만 잘못에도 노여워하고 책망하지마는, 아들이 만일 착하지 못하여 가르칠 수 없으면, 버려둔 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노여워하고 책망하는 것은 아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곧 가르치어 착한 곳으로 들어가게 하고자 해서이며, 버려둔 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 아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르침을 베풀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연히 정리만을 손상할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지금 재변이 계속되는 것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하늘의 마음은 인애(仁愛)롭다.’고 하였으니, 임금이 만일 재변을 인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면, 어찌 해가 있겠습니까.
금년의 일로써 보건대, 지난해 가을부터 금년 4월까지 크게 가물었으며, 또 대단한 재앙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상께서 근심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래에 있는 자들도 끝내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는지 몰라서 더욱 망극해 하였으며, 초봄에는 백성들이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기도 전에 모두 굶어 죽게 될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건대, 보리와 밀 등의 올곡식이 간간이 수확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어찌 성상께서 근심하신 효험이 아니겠습니까.
모후가 섭정함은 전한(前漢)·후한(後漢) 때부터 있었는데, 송조(宋朝)의 일을 가지고 보면, 인종(仁宗)이 13세에 즉위하자 황태후 유씨(劉氏)는 인종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생각하여 보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태후가 붕어(崩御)하게 되자, 인종이 24세에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인 황후(宣仁皇后)는 철종(哲宗)의 조모인데, 철종이 13세에 즉위하자, 선인 황후가 청정(聽政)을 하였습니다. 그후 선인 황후가 붕어하자, 철종이 18세의 나이로 비로소 직접 정치를 하였는데, 모든 군자들을 다 축출하며 이미 죽은 자들도 아울러 죄주었습니다. 철종의 기질이 이와 같기 때문에 성덕(聖德)이 있는 선인 황후도 섭정하기를 이처럼 오랫동안 한 것입니다. 후세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인 황후가 오랫동안 정권을 가용(假用)한 것 같으나, 그 뜻은 반드시 철종의 기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철종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귀정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자전의 성교(聖敎)는 바로 국가의 큰일입니다. 여러 차례 ‘마음을 다하여 보필 인도하여 태평시대를 이루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으시나, 신들은 제대로 보필할 수 있는 자질이 못되니 기대하신 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대신의 말이 지당하다. 재변이 생기는 것은 바로 하늘의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여 경계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다. 임금이 마땅히 권위와 기강을 바로잡아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불민한 내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재변은 비록 무슨 일 때문에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용(中庸)》에 ‘나의 기(氣)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게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인심이 어그러져 천리를 순종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윗사람은 천리를 따르지 않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도리어 윗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어, 인심이 날로 나빠지고 백성이 날로 곤궁해짐으로써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많아져 재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오랫동안 고질화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금년의 가뭄은 전고에 없던 일이다. 백성이 굶주리어 곤궁하게 되고 국고(國庫)가 탕진되어 장차 못쓸 나라가 되게 되었으니, 그 근심스러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심연원이 다시 아뢰기를,
"주상께서 신들로 하여금 ‘자전께 귀정하시지 말라는 뜻으로 아뢰라.’고 하셨는데, 주상의 뜻은 온갖 번다한 기무 때문에 학문에 전력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신 것이니, 이는 매우 훌륭한 뜻입니다. 그러나 다만 자전께서 이미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어 능히 홀로 판단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귀정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사군(嗣君)이 나이 어려 모후가 섭정함은 부득이해서이니, 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는가. 지금 주상이 나이가 장성하고 학문이 성취되어 모든 기무를 맡을 수 있으니, 내가 주상에게 귀정하고 물러나 천수(天壽)를 마침이 순리이다."
하였다. 윤개가 다시 아뢰기를,
"정희 왕후(貞熹王后)께서도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귀정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익명서(匿名書)가 있었는데, 정희 왕후가 형옥(刑獄)과 정사에 있어서 외척으로 인하여 공정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에 귀정하였다.】 오늘의 일은 털끝만한 혐의도 없는데, 자전께서 스스로 귀정하기로 결단을 내리셨으니, 순리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 또한 성지(聖旨)를 받들어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 주상께서 신들로 하여금 귀정하시지 말라는 뜻을 간곡히 계달하라고 명하셨지만 감히 우러러 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심연원이 아뢰기를,
"국가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대비께서 여러 간악한 무리를 분변해서 계책을 결정하여 제거하시었으니, 성모(聖母)의 공덕은 한때에 그칠 뿐만 아니라 길이 후세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조종(祖宗)의 보우하심을 힘입어 다시 종사를 편안하게 한 것이지, 어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매우 한심하다. 예로부터 난적(亂賊)이 작당을 하다가 그 당시에 탄로난 자들은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뿌리가 깊고 견고하여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웠었다. 그런데도 능히 제거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보우하여 주셨기 때문이지, 내가 조치한 바는 아니다."
하였다 윤개가 아뢰기를,
"당시 온 조정이 모두 그들에게 속았습니다. 윤임(尹任)으로 말하면 무식한 일개 무부(武夫)로서 선조(先祖)로부터 죄를 얻어 【당시에 윤임과 김안로(金安老)가 국모(國母)를 폐하고자 도모했다는 말이 있었다.】 자신을 보존할 계획을 도모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으로 말하면, 모두 명망이 있는 선비였는데도 벼슬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얻은 다음에는 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여 윤임과 같이 도모하기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다가 옥사가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실정과 자취를 알았으니, 어찌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당시 서로 결탁하여 내응한 일은, 생각하면 망극해서 이루 말할 수 없으나, 이미 다 제거하여 버렸으니, 다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진이 아뢰기를,
"만일 태평스러운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임금과 신하가 똑같이 훌륭한 덕을 가지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아서,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하면 따라준 뒤에야 태평스러운 정치를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여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밝게 살피시니 신과 같은 자를 물리치고 덕이 있는자를 선발하여 재상자리에 있게 한다면 좋은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현재 대신들이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나는 조정의 신하들 중에 경들보다 더 나은 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이세명(李世銘)의 상소에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뜻을 얻어 멋대로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하였으며, 또 ‘전에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衮)과 홍경주(洪景舟)의 모함을 받아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당초에 나이 젊은 선비들의 한 일이 비록 좋기는 하였으나, 과격한 점이 있어 노성(老成)한 사람을 모두 축출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나랏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하는 바가 이와 같고서야 나라의 정사가 잘될 수 있겠는가. 이는 당시에 어쩔 수 없이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는데, 인종조(仁宗朝)에서도 남곤과 홍경주를 나쁘다고 하였으니, 이 점 또한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다." 【조광조 등은 충성을 다하여 당시의 폐단을 만분의 일이나마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남곤·홍경주는 모두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서 근거 없는 사실을 꾸며내어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만들어 해쳤다. 그러므로 인종때에 태학생(太學生)과 시종(侍從)·대간(臺諫)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 등의 무고함과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의 간악함을 진술하였다.】
하니, 상진이 아뢰기를,
"지금 귀정(歸政)하는 일을 가지고 신들을 찾으셨는데 신들은 주상께서 탑에서 내려와 간곡히 사양하심을 보니, 못내 감격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비께서는 수렴 청정을 거두신 뒤에 비록 정사를 성상께 맡기시더라도, 내전(內殿)으로부터 경계하시는 일은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침을 과연 대비의 하교와 같이 한다면, 조정이 안정되어서 국가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다만 군자는 소인을 소인이라 배척하고 소인은 군자를 소인이라 배척하는데,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감(聖鑑)이 밝게 아신 다음에야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자전의 분부와 대신의 아룀을 듣고 보니 몹시 망극하다. 나는 진실로 불민하니, 어떻게 홀로 결단할 수 있겠는가. 대신들도 자전께 귀정하시지 말라는 뜻으로 아뢰어라."
하니 윤개가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하건대, 오늘의 조치는 역사에 빛날 뿐만 아니라 실로 만세의 경사입니다. 만일 귀정하시지 말라는 뜻으로 굳이 아뢴다면, 이는 안과 밖이 각각 다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제왕의 효(孝)는 일반인의 효와 같지 않은데, 어찌 항상 겸양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자전의 뜻을 잘 받들어 따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자전이 분부하기를,
"그 말이 옳다. 모든 일을 진심으로 받들어야 하며,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심연원과 윤개가 함께 아뢰기를,
"성상의 뜻은 비록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자전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분부가 간절하시니, 성상께서는 자전의 뜻을 받들어 따르소서. 순응하여 어기지 않으심이 큰 효입니다."
하고, 윤개가 다시 아뢰기를,
"자전의 분부는 모두 격언(格言)이니, 사책(史策)에 기록하여 후세에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전교하신 뜻을 내외에 널리 효유하여 직접 분부를 듣지 못한 자들도 모두 알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정희 왕후는 과연 하교를 하였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다만 주상께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시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을 뿐이니, 어찌 선포할 만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역사-고사(故事)
- [註 091]두 대왕(大王) : 중종(中宗)과 인종(仁宗).
- [註 092]
귀정(歸政) : 수렴 청정을 거두고 왕에게 정무를 돌림.- [註 093]
정희 왕후(貞熹王后) : 조선 세조(世祖)의 비(妃)로 성은 윤씨이며 본관은 파평(坡平). 예종(睿宗)이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 청정을 했으며, 이듬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7년 동안 계속 섭정하였다.- [註 094]
한 소제(漢昭帝) : 무제(武帝)의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연왕 유단(燕王劉旦)·상관 걸(上官桀) 등이 대장군 곽광(霍光)을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키려고 하여 곽광을 모함하였으나, 소제는 도리어 "대장군은 충신이다. 다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형벌을 가하겠다." 하였는데, 당시 소제의 나이는 14세였다. 좌우가 모두 그의 뛰어난 총명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7 소제기(昭帝紀).- [註 095]
은 고종(殷高宗)의 시민(時敏)과 주 성왕(周成王)의 즙희(揖熙) : 시민(時敏)은 때때로 학문에 힘쓴다는 뜻으로 고종의 명재상인 부열(傅說)의 말인데,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 "학문은 뜻을 겸손히 하여야 한다. 항상 학문에 힘쓰면 학문의 진전이 저절로 오게 된다.[惟學遜志務詩敏厥修乃來]"고 하였다. 즙희는 학문을 계속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 이 말은 원래 성왕(成王)의 재상인 주공(周公)이 문왕(文王)의 공경심을 칭송한 내용으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경건하신 문왕이여 ! 아 ! 계속하고 밝게 하여 공경한다.[穆穆文王於緝熙敬止]"는 것에서 나왔는데, 여기에서는 이것을 선왕의 학문으로 원용한 것이다.- [註 096]
소고편(召誥篇) : 《서경》의 편명.- [註 097]
선인 황후(宣仁皇后) : 송 영종(宋英宗)의 황후로 성은 고씨(高氏). 철종(哲宗)이 즉위한 다음 태황태후(太皇太后)로 높이어 섭정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 등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후 철종은 친정(親政)한 뒤에 다시 간신인 장돈(章惇) 등을 등용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송사(宋史)》 권242 후비전(后妃傳).○丙辰/聖烈仁明大王大妃御宣政殿垂簾, 引見大臣。 上御簾外。 三公及侍臣等入侍, 大妃命大臣就前, 傳曰: "予本不敏, 嘗見書史, 以婦人干預國政, 事甚不美。 我國不幸, 兩大王相繼賓天, 主上沖年嗣位, 不可委以國政, 故雖不獲已居攝, 而未安之心, 未嘗一日忘于懷也。 又況災異連綿, 衆變俱發, 莫此時若也。 常恐由予否德, 日夜憂慮。 二三年來, 每欲歸政, 而主上以學問未就, 萬機不能獨斷固辭, 故遲留到今。 今則主上春秋長成, 學問高明, 軍國庶事, 可以裁決, 故自今歸政, 當不復預聽。 大臣等盡心國事, 輔導聖躬, 務臻太平之治, 不勝幸甚。 予之否德, 雖欲矯其弊習, 使民蒙惠, 事多錯誤, 卒無其效, 物情必不能協。 百計思之, 災異之出, 實予之故, 今之歸政已脕矣。 此計誠不卒然, 故欲親言予意于大臣而引見耳。" 上下榻辭避。 慈殿敎曰: "主上下榻, 則予豈安心在此? 宜速上榻。" 上承命還上榻, 仍俯伏辭謝曰: "性本不敏, 且無學識, 夙夜望慈殿輔導之意, 焉有紀極? 不意使政院, 書啓成宗朝故事, 仍引見大臣, 欲爲歸政, 聞命惶恐, 罔知所措。 萬機何敢獨斷? 歸政之命, 請還收之。" 慈殿答曰: "予至今居攝者, 以主上學問未就故也。 今則主上年盛學進, 凡事非不能獨裁。 勿爲辭避, 宜圖至治, 以福生民。 予決不可復攝。" 上更辭曰: "否德在民上, 資鈍學未就, 機務豈能獨斷? 伏願爲宗社大計, 勿遽若是。" 慈殿答曰: "予以憂愁之逼, 精神昏耗。 其於國政, 不宜久預, 以汚史策。 如主上幼少之時, 則在所難已, 今則決不可同聽政。 惟主上思之。" 上更辭曰: "上敎雖切, 反覆思之, 未知其然。" 慈殿答曰: "貞熹王后, 八年而歸政, 予則九年, 亦已過矣。" 沈連源曰: "主上沖年嗣位, 而賴慈殿之保護, 式至于今日, 春秋鼎盛, 學問高明, 國家安有如此莫大之慶? 今斷自內殿, 欲爲歸政, 乃國家生民之福也。 萬機之煩, 皆歸 主上, 頣養精神, 尤美事也。" 慈殿答曰: "今予昏昧, 不察國事, 年又凶荒, 生民流離, 居攝九年, 無未事可觀。 日夜憂慮, 莫知所爲, 而至今遲留, 尙一歸政者, 秪欲主上, 專於學問, 期就光明。 今則主上年齡已壯, 學問已就, 可委以大事, 予豈可尙爲干預乎?" 上再拜固辭, 仍顧大臣曰: "大臣等亦勉啓不可歸政之意也。" 尙震曰: "主上天資卓越, 卽位之初, 能辨群奸而罪之, 雖漢 昭之明, 無以及矣。 嘗見古史, 太后攝政, 非徒樂其干預也, 嗣君幼沖, 則勢不得專委機務, 而且必專於學問, 而後治國之要, 亦由此出, 故不得已居攝也。 今我聖上, 學問高明, 雖高宗之時敏, 成王之緝熙, 蔑以加矣。 今慈殿知其可以獨運萬機, 故決意歸政, 而自上固辭不已。 在上罔極之心, 雖不得不已, 然慈殿春秋亦高, 久勤萬機, 深所未安。 自上依慈殿聽斷, 在所不能已也。 且今日亦事之初。 古者人君卽政, 則群臣規戒之, 切而要者, 莫如敬之一字, 故《召誥》一篇之中, 言敬之處, 至於七八。 若伊尹告太甲之辭, 傅說進高宗之言, 周公戒成王之事, 聖鑑已爲洞燭, 伏願以此日省焉。 且《國朝寶鑑》, 嘉言善政亦多, 宜時時考閱。 嘗聞成宗卽位未久, 每於進講, 臨文論難。 今我主上, 亦當追法。 《書》曰: ‘學于古訓, 乃有獲。 事不師古, 以克永世, 非說攸聞。’ 伏願主上, 敬止以師古訓。" 慈殿曰: "大小臣僚, 宜盡忠輔導, 以致太平。 嘗聞中廟朝年少之輩, 誤國事生禍, 朝廷士林多傷, 【指己卯事。】 而主上卽位之後, 凶人陰嗾臺諫, 【指尹任】 謀危宗社, 反掌之間, 事在不測。 予欲罔治脅從, 而朝廷不能洞知奸賊, 其惑彌甚。 至於柳堪, 亦云: ‘《武定寶鑑》, 印之何用?’ 可見其心之不正, 而執迷不悟。 至爲寒心。 以故人物多傷。 是豈國家之福乎? 君子、小人, 辨之於早, 而進退之, 則國家不如是矣。 古人云: ‘戒前車之覆。’ 宜徵前日之事, 盡忠輔導可也。" 尹漑曰: "主上沖年嗣位, 適値否運, 若非慈殿輔護敎導之力, 則國家、宗社, 豈能榮懷以有今日乎? 以婦人干與國政, 爲不美, 惟此一敎, 正與宣仁皇后所言, ‘母后當陽, 非國家美事’ 之意(沕)〔吻〕 合。 自古當危疑之際, 不得已臨朝同聽, 此豈干之事乎? 若主君堂堂, 而以皇后擅柄, 長君在位, 而以母后奪勢者, 則所謂干與也。 今我 主上, 學問已造高明, 事機可裁決, 故玆以不安於久攝, 決意歸政。 今之擧措, 正合人心。 臣等聞命, 感激罔極。 今見主上下搨懇遜, 有若不堪。 臣等豈不知啓于慈殿, 勉從上意, 而第以如此大事, 已定於聖衷, 雖啓必不蒙允, 故不敢達也。 且敎曰: ‘災變由予所致。’ 是豈然乎? 祖宗朝與前代, 雖非攝政之時, 豈無災變乎? 有災而警懼, 則可以弭之, 無災而怠忽, 則反致亂亡者多矣。 以人事言之, 天之於君, 猶父之於子也。 子若善而可敎, 則爲父者怒之責之; 子若不善而不可敎, 則置而不敎。 其所以怒之責之者, 非憎子也, 乃欲敎之而入於善也; 其置而不敎者, 非愛其子也, 知其不可施敎而恐傷恩也。 今之災變連緜者, 猶父之敎其子也。 故古人云: ‘天心仁愛。’ 人君若能因災變而警懼之, 則豈有害乎? 以今年之事見之, 自前年秋, 至今年四月大旱, 而又有非常之災。 非但聖上憂勤, 在下之人, 未知終有何事, 尤爲罔極。 初春之間, 慮百姓將盡飢死於未秋之前, 以近日見之, 兩麥早穀, 間有可食之。 豈非在上憂勤之效乎? 母后攝政, 自兩漢有之, 而以宋朝事見之, 仁宗十三卽位, 皇太后劉氏視如己出。 及太后崩, 仁宗年二十四親政。 宣仁皇后, 乃哲宗祖母也。 哲宗年十三卽位, 而宣仁聽政。 及宣仁崩, 哲宗年十八, 始爲親政, 盡黜諸君子, 幷與其死者而罪之, 則哲宗之爲君, 可見其氣質如此。 故以宣仁之聖德, 居攝若此其久。 自後世見之, 則似若久假, 而其意則必是知哲宗之氣質, 故欲竢其長成而歸政。 今日聖敎, 乃國家大事。 屢以盡心輔導, 以致太平敎之。 上雖有堯、舜之資, 而臣等非人, 恐不負責望之意也。" 慈殿答曰: "大臣之言至當矣。 災變之出, 乃天心仁愛人君, 而警懼之也。 爲人君者, 所當總攬權綱, 以答天譴, 而予之不敏, 豈能如此乎? 今之災變, 雖未知其爲某事而出也, 然《中庸》云: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 今之人心乖戾, 無順理之事。 上不順理, 而下不從。 令少有不愜, 反生害上之心。 人心日非, 百姓日困, 冤枉多, 而災變出矣。 予豈能矯其久痼之弊乎? 今年之旱, 前古所無。 百姓飢困, 國計虛竭, 將爲棄國, 其爲憂慮, 何可量已?" 連源又曰: "主上使臣等, 啓于慈殿, 以 ‘勿爲歸政之意’ 云。 主上之意, 則萬機之煩, 恐不得專力於學問, 是其盛意, 而但自慈殿已知聖學高明, 能爲獨斷, 故決意歸政。 是以臣等不敢開達矣。" 慈殿答曰: "嗣君幼沖, 母后攝政, 出於不得已也。 是豈國家之福? 今主上年長學就, 可當萬機, 歸政于主上, 退終天年, 乃順理也。" 尹漑又曰: "貞熹王后亦因人言而歸政。 【時有匿名書, 指貞熹王后。 刑獄政事之間, 因戚里不公之故也。】 今日之事, 少無絲毫之嫌, 而斷自聖衷, 決然歸政, 非但順理, 事光簡策。 故臣等亦皆將順聖旨而已。 雖主上有命, 使臣等懇達勿歸之意, 而亦不敢仰達也。" 連源曰: "當國家危疑之際, 辨其群奸, 決策剪除, 聖母功德, 非止一時, 永及於後世矣。" 慈殿答曰: "賴祖宗陰佑, 再安宗社。 是予之所能哉? 思念往時之事, 極爲寒心。 自古亂賊成黨, 敗露於一時者, 可以易除矣, 此則其根深固, 治之甚難, 而能至今日者, 乃天之佑也, 非予所措也。" 尹漑曰: "其時擧朝皆被所誑。 若尹任則以一無識武夫, 自先朝得罪, 【時有尹任與金安老, 謀廢國之言。】 而謀爲自全之計, 何事不可忍爲? 如柳灌、柳仁淑, 則皆以有名士流, 患得患失, 至於同謀, 而朝廷全未知之, 及其獄成之後, 始知其情迹。 安有如彼之事乎?" 慈殿答曰: "其時內應之事, 念之罔極, 不可勝言, 而蕩滌掃除, 不復介論耳。" 尙震曰: "如欲見太平之治, 必君臣同德, 情意交孚, 言聽計從而後, 可以爲之。 今聖學高明, 洞察賢否, 如臣者退之, 擇賢而居之, 則可以致治矣。" 慈殿答曰: "大臣盡心國事, 抑未知朝廷有德, 優於卿等者耶? 頃者李世銘疏云: ‘讒侫得志, 毁亂國政。’ 又云: ‘往者趙光祖爲南袞、洪景舟之所害。’ 當初年少之輩, 所爲雖好, 而弊至過激, 盡棄老成, 終至於使上不得有所自爲。 所爲若此, 而順於國政乎? 此不得已矯弊之擧, 而仁宗朝亦以南袞、洪景舟爲非。 此亦當察也。" 【趙光祖等竭忠畢誠, 欲矯時弊之萬一, 而南袞、洪景舟, 俱以誤國小人, 構虛飭誣激, 成不測禍之故, 仁廟朝大學生及侍從、臺諫疏陳光祖輩之無罪, 南袞、沈貞、洪景舟之爲奸。】 尙震曰: "今以歸政之事, 迎訪臣等, 臣等伏見主上下榻懇辭, 臣等不勝感激, 未知所啓。 撤簾之後, 雖委機務於聖躬, 自內箴規之道, 亦不可無也。 且進君子退小人, 果如聖敎, 則朝廷莫不安靜, 而國家治矣。 第念君子以小人爲小人, 小人以君子爲小人, 君子、小人之分, 甚難。 聖鑑洞知, 則可以不惑矣。" 上曰: "今聞慈殿之敎及大臣所啓, 予懷罔極。予誠不敏, 何能獨斷? 勿爲歸政之意, 大臣亦啓之可也。" 尹漑曰: "臣等中心以爲, 今日之擧, 非但事光簡策, 實萬世之慶也。 若以勿爲歸政之意强啓, 則是內外各異矣。 況帝王之孝, 與凡人不同, 豈可每爲退托乎? 此所以將順之意也。" 慈殿敎曰: "彼言是也。 凡事誠以將之, 不可貌爲。" 連源、尹漑同辭以啓曰: "上意雖出於至誠, 然慈旨已決, 下敎丁寧, 願上奉承慈旨。 順而無違, 孝之大者也。" 尹漑又曰: "聖敎皆是格言, 書諸史冊, 昭示後世矣。 然將傳敎之意, 曉諭中外, 使不得親承聖敎者, 亦皆知之可也。" 慈殿答曰: "貞熹王后之事, 則果爲下敎矣。 予之所言, 只欲竚見主上致盛治而已, 有何可布之事乎?"
-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역사-고사(故事)
- [註 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