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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4권, 명종 1년 7월 28일 임오 1번째기사 1546년 명 가정(嘉靖) 25년

조강에서 주세붕 등과 사물잠에 대하여 논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주세붕(周世鵬)이 아뢰기를,

"이천(伊川)이 지은 사물잠(四勿箴)은 다 예(禮)를 주로 하였고, 주자(朱子)는 ‘예란 하나의 천리(天理)를 그려낸 것으로 높일 데에 높이고 공경할 데에 공경하여, 온갖 사물(事物)에 따라 다 천리에 부합되게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은 다 예로써 천리에 부합되게 한 때문에 인욕(人欲)이 행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의 한몸이 먼저 천리를 밝혀 예에 부합된다면 천하가 다투어 사모하고 현자(賢者)가 즐거이 행하고 우자(愚者)가 두려워 복종하여, 온 천하가 다 천리에 들게 됩니다. 이것이 제왕(帝王)이 천리를 중하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대저 학술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심학(心學)이요, 둘째는 훈고학(訓詁學)이요, 세째는 사장학(詞章學)입니다. 이 세 가지가 후세에 겸행(兼行)되어 오는 사이에 훈고와 사장만이 주가 되고 심학은 희미하여 행하여지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는 천리가 밝지 못한 때문입니다. 후세의 제왕이 옛날의 성현(聖賢)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힘쓰기 때문입니다.

상께서는 여기에 침잠 완색(沈潛玩索)하시는 한편, 매일 경연 대신(經筵大臣)과 더불어 강론하시어 사방의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하고, 지경연사 정옥형은 아뢰기를,

"시(視)·청(聽)·언(言)·동(動) 네 가지는 사람마다 없을 수 없는 것으로, 다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그 마음부터 먼저 다스린 뒤에야 천리가 밝아지고 인욕이 제거되어 예 아닌 시·청·언·동이 절로 없어질 것이니, 항상 마음을 잡아서 예에 주장할 뿐 다른 길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르고 삿된 마음이 저절로 안에서 싹트게 됩니다."

하고, 참찬관 김익수(金益壽)가 아뢰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경지는 안자(顔子)와 같은 배움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옛날의 학술은 독서(讀書)만이 아니라 먼저 그 마음부터 다스려 사물(四勿)의 공부를 다한 때문에 그 성과가 마침내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까지 이르렀으니, 예의 운용이 어찌 크지 않다 하겠습니까.

안연(顔淵)이 비록 필부(匹夫)였으나 궁(窮)할 적에는 혼자 몸을 닦고 달(達)할 적에는 천하를 제도(濟度)할 도가 이미 그 마음속에 갖춰져 있었으니, 배우는 이는 먼저 그 몸부터 닦은 뒤에 천하를 제도하는 것이 성현의 극치의 공부입니다. 제 몸만 닦을 뿐 천하를 제도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데 이 세상의 배우는 이들이 이를 한 차례의 이야기거리로만 여기고 모든 사업에 잘 운용하지 못하는 것은, 이학(理學)에 밝지 못한 때문입니다.

대저 이학이란 사람마다 능할 수 없는 것이므로 좋아하는 자도 있고 싫어하는 자도 있는데, 좋아하고 싫어함이 서로 어그러지면 끝내 모든 사업에 운용되지 못하고 맙니다. 임금이 아무리 이를 좋아하여 행하려 하여도 아랫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저지시키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기간은 항상 적고 혼란한 기간은 항상 많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있어도 아래에 반드시 고(皐)·기(夔)·직(稷)·설(契)과 같은 신하가 있은 뒤에야 그 도가 행하여집니다. 그 임금만 있고 그 신하가 없다면 지금 같은 세상에서 옛날의 치적(治績)을 회복하려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주세붕이 아뢰기를,

"이 말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왕(帝王)의 심학(心學)은 지금 세상에서 행할 수 없다.’는 말은 매우 불가한 의논입니다."

하니, 김익수는 아뢰기를,

"심학을 지금 세상에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위아래가 모두 심학을 힘써서 각기 그 학(學)을 다한다면 옛것을 회복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는 말입니다."

하고, 특진관 조사수(趙士秀)는 나직이 아뢰기를,

"이 말은 과연 어폐가 있습니다."

하고는, 한참 뒤에 이어 아뢰기를,

"인욕을 누르고 예(禮)를 따르면 온 천하가 다 인(仁)에 돌아오게 되고,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서는 더욱 더 좋아하게 될 터인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주세붕이 아뢰기를,

"고려 중엽 이전에는 도학(道學)이 밝지 못한 때문에 인심이 밝지 못하여 향방을 알지 못하고 예제(禮祭)가 밝지 못하였습니다. 그 수치스러운 일이 역사에 계속 기재되어 오다가, 정주학(程朱學)이 나온 지 2백 50년 사이에 고려 말엽이 비록 혼란스러웠으나 이를 힘입어 부지하였고, 우리 왕조에 이르러 천리와 인심이 정정 당당한 것은 오로지 학술이 밝아진 때문입니다.

예와 지금의 이치는 하나이며, 학술 또한 피차(彼此)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위에 있는 사람의 소행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난 기묘 연간에는 사람마다 《소학(小學)》을 읽었으나 끝내 그대로 행하지 못한 것은, 벼슬을 꾀하는 무리들이 《소학》을 핑계로 어지럽고 간궤함을 일삼아 선왕(先王)의 옛 치도(治道)를 회복하려는 마음을 끝내 펴지 못하도록 한 소치이니, 지금까지 큰 유감입니다. 【기묘 연간 사람들이 어찌 다 벼슬만을 꾀하는 무리였겠는가. 그러나 당시의 의논이 다 그러하였으니 어느 누가 그 호오(好惡)와 시비(是非)를 밝힌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다 학술을 작록(爵祿)을 도모하는 도구로 삼고 있었으므로 선왕께서 하고자 하는 뜻을 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뒤 20년 사이에 사람들이 다 《소학》을 알지 못하여 인정(人情)과 습속(習俗)이 다 투박해져 갔습니다. 선왕께서 이를 개탄하고 염려하시어 중외(中外)의 유사(儒士)에게 《소학》을 읽히려 하였으나 역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외지(外地)에 있을 때 들은 것입니다."

하니, 김익수가 아뢰기를,

"《소학》의 아름다움을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 항간에서는 《소학》에 대한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며 더러는 비난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 같은 습속을 변화시킨다면 치화(治化)를 거둘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치화가 끝내 밝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전번 경연에서 팔도(八道)에 학장(學長)을 택정(擇定)하여 동몽(童蒙)들을 가르치도록 하자고 계청하였으나 모두가 심상하게 보아 봉행할 뜻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선조(先朝)에는 혹 광간(狂簡)한 인사(人士)라도 있어서 여기에 유의했다 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니, 매우 개탄할 일입니다."

하고, 조사수가 아뢰기를,

"《소학》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성현의 의리의 학(學)입니다. 인심과 천리는 예와 이제가 하나이므로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주세붕은 아뢰기를,

"배우는 이는 털끝만큼의 사욕도 잠시의 간단(間斷)도 없은 뒤에야 참된 힘이 오랫동안 쌓여 악(惡)이 없는 순수한 선(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같은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지만, 만약 행하기 어렵다 하여 그 향방조차 모른다면 한 가닥의 천리(天理)가 끝내 밝혀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특진관 김인손(金麟孫)은 아뢰기를,

"성인의 도는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일용 사물(日用事物)의 사이에 있을 뿐이므로 일과 경우에 따라 그것이 예(禮)인지 아닌지를 살펴서 예에 맞으면 행하고 맞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조용히 도(道)에 맞아 마침내 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공부의 극치가 이에서 더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이를 체념해야 합니다."

하고, 조사수는 아뢰기를,

"사람이 배우는 데 있어 살피고 생각하는 일이 가장 큰 공부이므로 마음을 잡아 성찰(省察)한 뒤에야 예 아닌 시·청·언·동을 알 수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성자(聖者)도 생각지 않으면 광자(狂者)가 되고 광자도 생각하면 성자가 된다.’ 하였으니, 생각[念]이라는 글자는 공부에 가장 크게 관계가 됩니다."

하고, 주세붕은 아뢰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안자(顔子)가 ‘순임금은 누구며 나는 누구이냐. 노력하면 마찬가지이다.’ 하였으니, 스스로 기약한 바가 이러했기 때문에 마침내 백세(百世)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요순(堯舜)의 공부도 살피고 생각한 데 있었으니, 마음을 안자와 같이 세운다면 반드시 요순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언론을 마치고 차례대로 사정문(思政門) 밖에 나왔을 때 조사수가 웃으면서 김익수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말이 옳기는 옳았소."

하였다. 제관(諸官)이 나간 뒤에 김익수가 기사관(記事官) 등에게 묻기를,

"나의 말이 어떠하였기에 좌우(左右)가 다 그르다 했는가?"

하니, 이문형(李文馨)이 대답하기를,

"임금에게 진언(進言)할 적에는 으레 요순의 도를 오늘에도 다시 행할 수 있다고 해야하는 것이요 시대가 달라서 행하기 어렵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좌우가 그렇게 말한 것이오."

하고, 최언수(崔彦粹)는 대답하기를,

"오늘의 말씀이 비록 권진(勸進)하는 언사(言辭)에는 부합되지 않으나 습속의 병폐를 잘 지적하였소."

하였다. 김익수가 말하기를,

"누가 혹 《소학》에 대해 발언하면 아래 있는 자가 마치 왜노(倭奴)나 융적(戎狄)처럼 저지하고 있으니, 위에서 어떻게 《소학》의 아름다움을 알아서 행할 수 있겠는가? 상에게 이 같은 폐단을 알리기 위하여 감히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내 어찌 권진하는 언사(言辭)를 모르겠는가?"

하고는, 안색을 바꾸고 일어섰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3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壬午/上御朝講。 侍講官周世鵬曰: "伊川作四箴, 而皆主於禮, 朱子曰: ‘禮者, 畫出一箇天理, 可尊則尊, 可敬則敬, 事事物物, 皆隨處合理者也。’ 二帝、三王, 皆以禮而合於天理, 故人欲不行。 人主一身, 先明天理, 以合於禮, 則天下爭慕之, 賢者樂而行之, 愚者畏而從之, 天下皆入於天理。 此帝王所以重天理者也。 夫學術有三, 一曰心學, 二曰訓詁之學, 三曰詞章之學。 是三者, 兼行於後世, 訓詁詞章, 獨爲之主, 而心學則微暗而不行者久矣, 是天理不明而然也。 後之帝王, 不及古昔聖賢者, 亦由於舍本而務末也。 願上沈潛玩索, 日與經幄大臣, 硏究探討, 使四方觀瞻取則焉。" 知經筵事丁玉亨曰: "視聽言動, 皆人所不能無者, 而皆出於心。 必先治其心, 而後天理明私欲去, 而自有非禮勿視聽言動矣, 常須操存此心, 主於禮而無他適可也, 不然則非僻之心, 自萌於中矣。" 參贊官金益壽曰: "非禮勿視聽者, 以顔子之學, 可及於此。 故孔子以是言之, 古之學術, 非但讀書而已, 必須先治其心, 以盡四勿之功, 故其效終至於治國平天下矣, 禮之爲用, 豈不大哉? 顔淵雖匹夫, 窮則獨善, 達則兼濟之道, 未嘗不具於其心, 凡學者, 必先獨善其身, 而後終兼濟天下者, 乃聖賢極致之功也。 其獨善而不得兼濟者, 不幸之甚也, 但世之學者, 徒以此爲一場說話, 而不能措諸事業者, 以理學不明故也。 大抵理學, 人人之所不能者也, 故或有好之者, 或有惡之者, 好惡相悖, 竟不能措諸事業。 人君雖欲好而行之, 在下者不好而防之, 故治日常少, 亂日常多。 是以上雖有之君, 下必有之臣, 然後其道可行。 有其君而無其臣, 居今之世, 復古之治, 玆亦難矣。" 言未訖, 世鵬曰: "此言似有弊端。 帝王心學, 不可行於今時者, 甚不可之論也。" 益壽曰: "非謂心學, 不可行於今時也。 上下皆務爲心學, 各盡其學, 則復古何難, 不然則難矣。" 特進官趙士秀微聲曰: "是言果有弊端。" 久之乃曰: "克己復禮, 天下歸仁,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何難之有?" 世鵬曰: "高麗中葉以上, 道學不明, 人心貿貿, 莫知所向, 禮制不明。 可愧之事, 史不絶書, 自之學, 出於二百五十年之間, 高麗末葉雖亂, 而猶有賴此而扶持者, 至于我朝, 天理人心, 井井堂堂者, 莫非以學術之明也。 今古一理, 學術亦無彼此。 惟在上之人, 行之如何耳。 頃於己卯年間, 人皆爲《小學》, 而終不能之者, 以媒爵之徒, 藉於《小學》, 紛紜詭怪, 使先王, 欲復古治之心, 竟不得施, 至今遺恨。 【己卯之人, 豈是媒爵之徒? 而當時之論, 皆如此, 誰能明好惡是非乎?】 世人以學術爲經營爵祿之計, 故先王旣不能行其有爲之志。 其後二十年間, 人皆不知《小學》, 人情俗習, 盡歸於偸薄。 先王慨念於斯, 欲令中外儒士, 讀《小學》而亦不行。 此臣之在外時所聞者也。" 益壽曰: "《小學》之美, 人孰不知? 但今里巷之人, 如聞《小學》之說, 則皆掉頭或非笑。 今如變此習, 則治化可見, 不變則治化終不得明矣。 臣前者啓於經筵, 使八道擇定學長, 以訓童蒙, 然皆以例視, 而無意奉行, 終何益也? 先朝或有狂簡之士, 猶有操心者云, 近觀世人, 則猶未及其人, 深可嘆也。" 士秀曰: "《小學》何罪? 皆聖賢義理之學。 人心天理, 古今如一, 學之則便是。" 世鵬曰: "學者無一毫人欲之私, 又能無小間斷, 然後至於眞積力久, 而純善無惡也。 如此之人, 雖未易得, 若曰行之難矣, 而不知(句)〔向〕 方, 則一端天理, 終不得明也。" 特進官金麟孫曰: "聖人之道, 非高遠難行, 只在於日用事物之間, 隨事觸處, 而便察其非禮與否, 禮則行, 非禮則否。 從容中道, 久而誠矣, 則工夫之極致, 無過於此, 須體念焉。" 士秀曰: "人之於學, 省念爲大, 必操存省察 而後可知視聽爲非禮, 言動爲非禮矣。 《書》曰: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念之一字, 最關於用功。" 世鵬曰: "知之非難, 而行之惟難。 顔淵曰: ‘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其自期如是, 故終爲百世之師。 爲之功, 在於省念, 立心如顔子 則可至於矣。" 言訖, 以次退出思政門外, 士秀笑謂益壽曰: "公之言, 是則是矣。" 諸官出, 益壽顧謂記事官等曰: "吾所言爲何如, 而左右皆非之乎?" 李文馨曰: "進言於君, 而必曰之道可復行於今日, 而不可以爲時異而難行, 故左右如是言之矣。" 崔彦粹曰: "所言雖不合勸進之辭, 亦深中習俗之病也。" 益壽曰: "有人或發《小學》之語, 則在下者防之如倭奴戎狄, 自上何由知《小學》之爲美而可行乎? 欲上知此弊, 故敢啓之耳。 吾亦豈不知勸進之語乎?" 色變而起。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43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